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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여든 살 되면 뭐할까? ‘칠곡 가시나들’과 ‘시인 할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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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여든 살 되면 뭐할까? ‘칠곡 가시나들’과 ‘시인 할매’
  • 윤성은 영화평론가
  • 승인 2020.09.14 16: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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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사람들 그리고 영화]

많은 영화의 배경이 ‘마을’이다. 영화 주인공들의 삶의 터전 역시 그들이 사는 마을이고 동네이기 때문이다. 스크린 속 인물들은 배경이 되는 마을, 그리고 이웃들과 때로 갈등하고 협력하며 여러 이야기들을 만들어나간다. 그 이야기의 결말은 해피엔딩이 되기도 하고 비극으로 치닫기도 한다. 앞으로 ‘마을, 사람들 그리고 영화’에서는 마을과 사람들의 케미스트리, 그들 사이의 교감과 성장, 변화를 다른 작품들을 소개한다. 그 속에서 주민자치의 바람직한 방향, 때로 반면교사의 깨달음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편집자 주]

박금분

 

가마이 보니까 시가 (가만히 보니까 시가)

참 만타 (참 많다)

여기도 시 저기도 시 (여기도 시 저기도 시)

시가 천지삐까리다 (시가 대단히 많다)

 

경상도 사투리, 맞춤법을 무시하고 소리 나는 대로 쓴 시에서 시인의 나이가 느껴진다. 그러나 시의 소재가 널려 있다고 말하는 재치와 만물에 대한 호기심도 숨어있다. 이창동 감독의 ’(2010)에서 시 수업을 들으며 주변을 유심히 관찰하던 미자’(윤정희)의 진지한 눈빛이 떠오르기도 한다.

평균나이 86경상도 할매들의 유쾌한 한글 뽀개기 칠곡 가시나들

한글이 금지됐던 일제강점기를 거쳐 여성들에게 혹독했던 시절에 자라나 배울 기회가 없었던 박금분 할머니는 마을 배움학당에서 뒤늦게 한글을 익히며 시를 쓰기 시작했다. ‘칠곡 가시나들’(연출 김재환, 2018)은 박금분 할머니를 비롯해 경상도 칠곡군에서 만학도가 된 평균나이 86세 할머니들의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유명한 배우도 없고, 드라마틱한 사건도 없지만 할머니들의 일상을 엿보는 소소한 재미와 제각각인 할머니들의 성격이 연신 미소를 짓게 만든다.

극영화로 말하자면 영화 안에 일곱 주인공들이 있는 셈인데 자신이 지은 시를 낭독하는 모습은 하나같이 소녀처럼 수줍다. 교사의 퀴즈에 급하게 생각나는 답을 외치는 천진한 모습도 닮았다. 여기저기 몸에 고장이 날 시기임에도 뭔가를 즐겁게 배우는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기운과 열정이 보는 사람의 마음까지 들뜨게 만든다. ‘지금 이래 하마(지금 이렇게 하면)/ 한 자라도 놀고 조치(한 글자라도 늘고 좋지)/ 원 투 쓰리 포/ 영어도 배우고 한 번/ 해보자’(‘공부’, 유촌댁 안윤선)라는 호기가 영화 전체에 묻어난다.

칠곡 가시나들은 할머니들이 시장에서 장을 보고, ‘과일가게’ ‘생닭’ ‘시장식품’ ‘보리촌 식당등의 간판을 읽어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런 글자를 읽지 못하고 오랜 세월을 사셨으니 얼마나 불편하셨을까. 그저 경험과 눈치로 문맹의 어려움을 해결해왔겠지만 타지에 나갈 엄두도 잘 내지 못했을 것이고 사회적 소외감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자식들의 학업을 위해 소를 키우고 고된 밭일을 하면서 정작 당신들은 이름 세 글자도 쓰지 못하는 채로 80년을 살아온 할머니들의 새로운 인생을 응원하게 하는 다큐멘터리다.

유명 배우도 드라마틱한 사건도 없지만 연신 미소가

영화에서 할머니들 외에 시원시원한 목소리와 입담을 뽐내는 인물이 있다. 주석희씨는 타고난 에너지로 할머니들을 밀고 끌고 당기며 그 동안의 아픔과 불편함을 해소시켜주는 베테랑 교사다. 숙제도 잘 안 해오고, 가르쳐 준 것도 거의 기억하지 못하는 학생들인데도 할머니들을 대하는 석희씨의 눈에는 언제나 사랑이 가득하다. 석희씨는 가정방문을 물론, 할머니들과 함께 소풍도 다니고 칠곡늘배움학교에서 추죄하는 작은 공연도 준비시킨다.

나이 들어 새로운 것들을 배우기 시작한 용기 있는 어르신들이 다양한 공연을 보여주는 가운데 칠곡 가시나들은 열일곱 살로 돌아가 검은 색 치마에 흰 칼라가 달린 교복을 입고 그 시절의 한을 풀듯 무대를 즐기고 내려온다. 취지는 좋다 해도 준비가 필요한 행사이기에 혹 어르신들이 부담을 느끼지 않았을까 하는 염려도 들었지만, 할머니들이 공연 후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면 누구에게나 적당한 자극과 긴장감은 늘 필요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것은 남녀노소 모두를 위한 지역 배움학교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천국에 있는 남편에게 편지를전라도 곡성 시인 할매

한국처럼 문맹률이 낮은 국가도 드문데 어르신이라 해도 글을 모르는 분들이 많을까 의아해 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칠곡 가시나들보다 3주쯤 먼저 개봉한 시인 할매’(감독 이종은, 2018)의 주인공들도 뒤늦게 글을 배우게 된 할머니들이다. 전라도 곡성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 인물들의 인터뷰가 들어간다는 점 등 몇 가지 차이가 있지만 두 작품의 평행이론은 놀라울 정도다.

곡성의 할머니들은 마을 도서관에 모여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다. 그리고 그것들은 지금 모두 작품이 되었다. 이름도 다정한 길작은 도서관관장, 김선자씨는 2009년도에 한글 학습반을 시작했다. 당시 할머니들이 책 정리를 도와주셨는데 책을 거꾸로 꽂아놓는 모습을 보고 글을 모르신다는 걸 눈치 챘다고 한다. ‘시인 할매에는 할머니들이 처음 한글을 배우기 시작한 당시의 모습부터 시집살이, ()집살이’ ‘눈이 사뿐사뿐 오네등의 책 출간, 최근의 일상까지 잘 담겨 있다. 글과 그림을 출판하는 일의 고단함을 아는 사람이라면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이 얼마나 애썼을지 그 노력에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칠곡 가시나들처럼 종종 삽입되는 할머니들의 시에는 가슴이 뭉클해진다. 할머니들이 똑같이 나의 한글이라는 제목으로 쓴 시들에는 다양한 사연들이 구구절절 담겨 있다. 동생들을 키우느라 학교를 안 가서 친구들에게 무시당했던 일, 남편이 군대 갔을 때 편지를 써 보고 싶었는데 받아볼 수만 있다면 천국에 있는 남편에게 편지를 쓰고 싶다는 내용도 있고, 큰 아들의 숙제를 못 봐줘서 애가 탔다는 시도 보인다. 그 때 한글을 알았더라면 겪지 않아도 될 슬픔, 답답함과 안타까움은 정말 다행히도 할머니들에게 과거의 일로 남아 있다.

동네 주민과 할머니 이어주는 소중한 배움

시인 할매는 할머니들의 배움이 지역 사회와 교류하는 모습을 여러 번 보여준다. 작가가 된 할머니들은 도서관 앞에서 그림책 출간회를 하고, 담벼락에 그림을 그리고, 동네 어귀에 시를 전시한다. 이 모든 일들이 동네 주민들과 할머니를 자연스럽게 이어주는 끈이 된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양양금, 박금례 할머니는 곡성중앙초등학교를 방문해 어린 학생들과 작가와의 대화를 나누는 신이다. 시력 대신 인생의 혜안을 가진 할머니들의 글과 말은 자라나는 세대에게 얼마나 큰 영감을 주었을까. 사뭇 진지한 학생들의 표정이 그 시간의 가치를 말해준다.

비슷한 소재와 주제를 담은 두 작품이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져 개봉까지 하게 되는 경우는 사실 흔치 않다. 이전에도 지역별 평생학교를 통해 글을 배우는 이들은 있었지만 칠곡 가시나들시인 할매의 개봉은 근 몇 년간 사회적 약자로서 여성의 삶과 평등이 이슈가 되면서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 영화계의 동향을 반영한다. 누구나 마땅히 배울 권리가 있는 청소년기에 가난과 차별 때문에 그 권리를 박탈당했던 여성들이 인생의 황혼기에야 그것을 찾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두 다큐멘터리 공히 문화의 사각지대에 있는 시골의 할머니들에 주목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볼 수 있다.

비슷한 소재-주제-개봉시기 놀라운 평행이론’...배움의 기쁨-공동체 유대감

한편으로 두 작품은 성별을 떠나 노년의 삶에 관한 작품이기도 하다. 100세 시대를 위한 준비는 경제적인 것만으로 충족되지 않는다. 아마도 건강이 가장 우선일 테지만, 그만큼 중요한 것이 하루하루의 삶을 어떻게 영위할 것인가 하는 부분이다. 두 작품에서 할머니들은 배움의 기쁨과 공동체의 유대감을 만끽하며 살고 있다. 청춘은 지나갔어도, 남편과 자식을 잃었어도, 돈이 없어도 하루가 짧을 만큼 나름의 시간을 알차고 소중하게 사용하며 웰에이징(Well-Aging)을 실현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고령화 시대의 좋은 마을이란 이처럼 노인들이 행복한 마을이다. ‘칠곡 가시나들의 배움학교와 시인 할매의 도서관은 그런 마을을 만들고 있는 심장과도 같다. 비록 지금 중장년층은 한글을 배울 필요는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젊을 때는 아이들을 키우고, 먹고 사느라 바빠서 미뤄왔던 일들을 언젠가 꼭 해보겠노라 마음먹은 것이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그런 꿈을 자연스럽게 이뤄줄 수 있는 마을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각기 다른 꿈을 가진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이 아닐까.

사진=인디플러그 더피플/스톰픽쳐스코리아 와이드릴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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