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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좋은 이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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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좋은 이웃인가요?
  • 윤성은 영화평론가
  • 승인 2020.11.23 10: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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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사람들 그리고 영화 Town in Movie

‘드레스메이커’ ‘서버비콘’

많은 영화의 배경이 ‘마을’이다. 영화 주인공들의 삶의 터전 역시 그들이 사는 마을이고 동네이기 때문이다. 스크린 속 인물들은 배경이 되는 마을, 그리고 이웃들과 때로 갈등하고 협력하며 여러 이야기들을 만들어나간다. 그 이야기의 결말은 해피엔딩이 되기도 하고 비극으로 치닫기도 한다. 앞으로 ‘마을, 사람들 그리고 영화’에서는 마을과 사람들의 케미스트리, 그들 사이의 교감과 성장, 변화를 다른 작품들을 소개한다. 그 속에서 주민자치의 바람직한 방향, 때로 반면교사의 깨달음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편집자 주

* 영화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가 살고 싶은 마을은 어떤 곳인가? 초등학교 글짓기 시간에나 본 듯한 주제지만, 사실 나에게 알 맞는 거주지를 고민하는 성인들도 이런 질문과 무관하지 않다. 그런데 교육, 교통, 편의시설 등을 먼저 따지다 보면 가장 중요한 고려 대상 중 하나를 놓치게 된다. 바로 주변에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아파트나 빌라처럼 공동주거를 많이 하는 한국에서 이 부분은 꽤 심각한 스트레스를 유발하기도 하고 다시 이사를 하게 되는 직간접적 요인이 되기도 한다. 층간소음이나 주차 갈등, 쓰레기 무단 투기 등의 문제는 모두 이웃에 누가 사느냐와 관련이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이웃의 중요성을 안다 해도 그들에 대해 미리 알아보는 데는 한계가 있으니 결국 겪어 보는 수밖에 없다. 

한 사람의 억울함도 풀어주지 못하는 마을이야기 ‘드레스메이커’

그런데 여기 자신에게 큰 상처를 남겼던 마을 사람들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결심한 인물이 있다. 사안도 소음이나 쓰레기 따위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심각하다. ‘드레스메이커’(The Dressmaker, 감독 조셀린 무어하우스, 2015)의 ‘틸리’(케이트 윈슬렛)는 열 살 때 자신에게 살인 누명을 씌웠던 작은 마을, ‘던가타’에 다시 돌아온다. 수십 년이 지났지만 던가타는 별로 변한 것이 없다.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분위기, 오래된 집들, 몇 대째 이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까지 세월의 더께만을 품은 듯한 동네에서 세련된 모습으로 탈바꿈한 틸리는 단연 돋보이는 존재가 된다. 사람들이 자신을 살인범으로 오인한 그 날 일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틸리는 자기가 같은 반이었던 스튜어트를 정말 죽였는지 확인하고자 한다. 아무리 스튜어트가 틸리를 괴롭히고 때리던 폭력적인 아이였다 해도 틸리는 살인을 저지를 만한 독기도, 힘도 없는 소녀였다. 
누명을 벗겠다는 간절함 하나로 돌아온 그녀는 아직도 자신을 두려워하고 손가락질하는 주민들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 디자이너로서의 재능을 이용한다. 모든 것이 뒤처져 있는 시골 여성들에게 틸리가 유럽에서 유행하는 우아한 드레스들을 만들어주자 사람들은 그녀에게 몰려오기 시작한다. 오래 전에 틸리와 마찬가지로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던 거트루드도, 아들이 죽고 정신이 나가 버린 스튜어트의 어머니까지도 틸리의 옷을 입고 다니며 한껏 미모를 뽐낸다. 
1951년의 삭막한 시골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 안에서 아름다운 볼거리는 의상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 초반부 뚝뚝하고 건조하기만 했던 사람들의 표정을 행복하게 변화시키는 것은 그들의 매력을 돋보이게 만든 드레스들이다. 타지에서 온 디자이너 ‘우나’의 눈에 처음 들어온 던가타 여성들은 틸리의 옷을 입고 패션쇼에서처럼 다소 과장된 몸짓으로 움직인다. 보수적이었던 시절, 무미건조한 삶을 살던 시골 여성들에게 예쁜 의상은 자신감을 심어주고 얼굴에 생기가 돌게 만드는 좋은 아이템이었다. 이처럼 어릴 적 왕따였던 틸리가 사람들을 변신시켜준다는 설정은 의미심장하다.
틸리는 그녀의 드레스가 세월도 바꿔놓지 못한 주민들의 어두운 마음까지 환하게 만들어 자신의 결백을 믿어주기를 내심 바란다. 그리고 마침내 의상 도착증이 있는 경찰과 테디, 바니 형제의 도움을 받아 자신이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마을 사람들의 동의를 구하려 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순간에 던가타 주민들은 그들 각자의 사정 때문에 그녀에게서 돌아서 버린다. 바뀐 것은 외양일 뿐, 이들의 내면은 여전히 무관심과 이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드레스메이커’는 한 사람의 억울함도 풀어주지 못하는 마을에 산다는 것이 얼마나 서글픈 일인지 보여준다. 누구라도 피해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거투르드는 짝사랑하던 남자와 결혼하는데 틸리가 큰 기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도와주지 않는다. 사건 당일 자신이 당할까봐 두려워 스튜어트에게 틸리가 어디 있는지 알려주었던 것처럼. 오래 전부터 스튜어트를 편애해 틸리에 대해 거짓 증언을 했던 해리든 선생 또한 악행을 계속한다. 동네에서 가장 가난한 집안의 테디, 바니 형제만이 틸리를 감싸주지만 아무도 그들의 편에 서지 않는다. 특히, 지적 장애가 있는 바니의 외침을 주민들은 끝내 못 들은 척하고 만다. 아이러니 한 것은 과거에 자신이 비겁했음을 인정하는 것은 사회적 최약자인 바니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위선과 편협함 가득한 동네 ‘서버비콘’

배우로 잘 알려져 있는 조지 클루니의 연출작, ‘서버비콘’(Suburbicon, 2017)에도 ‘드레스메이커’와 비슷한 시기에 한 동네를 중심으로 한 인간의 편협함과 위선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영화는 신도시인 서버비콘에 대한 광고로 시작한다. 
“놀라움과 즐거움이 가득한 서버비콘에 잘 오셨습니다. (중략) 12년이란 짧은 시간에 소수 가구에서 대도시의 편의를 갖춘 살아 숨 쉬는 공동체로 성장했지만 소음이나 교통 체증은 없답니다. 현재 약 6만 명이 거주하는 이 곳엔 훌륭한 학교와 소방서, 경찰서, 쇼핑몰, 일류 병원, 마을 합창단도 있죠. 서버비콘의 주민들은 미국 전역에서 왔지만 다른 도시들에 비해 인종 다양성이 낮습니다.” 
인종차별이 노골적이었던 시절, 낙원처럼 묘사되는 이 도시는 인종 다양성이 낮다는 것을 자랑으로 내세운다. 이야기는 이웃에 사는 두 가족의 상황을 교차시키며 진행된다. ‘마이어스’ 라는 흑인 가족의 입주에 대한 주민들의 대응과 ‘가드너’(맷 데이먼)의 집 안에서 벌어지는 살벌한 가족 괴담이 그것이다. 흑인이 한 동네에 사는 것이 싫었던 서버비콘 주민들은 마이어스의 집 주변에 높은 울타리를 치는 것을 시작으로 점점 더 심하게 이들을 압박한다. 한밤중에 마이어스의 집 앞에 모여 찬송가를 부르는 장면은 마치 주술적 의식처럼 보이는데, 주민들이 이들을 귀신이나 마귀처럼 몰아내야 할 대상으로 취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마이어스 부인이 동네 마트에서 장을 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 정도는 양반이다. 주민들의 횡포는 날이 갈수록 악랄해져 대규모 폭력 사태로 치닫는다. 유리창을 깨고, 차를 부수는 사람들에게서는 광기가 엿보인다. 인간의 추악한 본성을 날 것 그대로 전시하는 파괴적 이미지들은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영화가 훨씬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있는 것은 가드너 가족의 이야기다. 가드너의 처제 ‘마가렛’(줄리안 무어)은 조카 ‘닉키’(노아 주프)에게 새로 이사 온 마이어스네 아이와 놀아주라고 하는 등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모양새다. 그러나 겉으로 고상해 보이는 그녀는 형부와 짜고 쌍둥이 언니를 살해한 후 보험금을 타낼 계획을 하고 있다. 언니가 죽은 후 엄마 노릇을 하며 닉키에게 잘해주는 척 하지만 사실 그녀는 가드너와 돈 이외에는 관심이 없다. 다행스럽게도 경찰과 보험회사에서 이들의 범행을 눈치 채게 되고, 살인청부업자인 마피아들과도 불화가 생기면서 가드너와 마가렛은 궁지에 몰린다. 마이어스 가족에게 외부로부터의 폭력이 가해지는 동안, 가드너 가족은 이처럼 내부적 폭력으로 파국에 이르게 된다. 서버비콘 주민들은 흑인 가족을 위험한 존재로 치부하지만 그들은 순수한 피해자인 반면, 겉으로 멀쩡해 보이는 백인 가정에서는 얼마나 추잡하고 끔찍한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지 고발하는 것이다. 
가드너 가족의 이야기는 상당 부분 닉키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불륜 관계에 있었던 아빠와 이모가 엄마를 살해하는 과정을 알게 된 닉키는 슬퍼하거나 분노할 새도 없이 곧 기숙학교로 보내질 운명에 처한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닉키 역시 다른 가족들처럼 마피아에 의해 죽을 뻔하는 사건까지 겪게 된다는 것이다. ‘드레스메이커’의 어린 틸리가 그랬듯 닉키도 인간과 사회의 어두운 면을 너무 일찍 알아버리는 저주를 경험한다. 인간의 이기심, 어른들의 무관심과 편협함 속에 그 나이에 마땅히 누려야 할 것들을 유린당해 버린 소년, 소녀의 상황은 어쩐지 남의 일 같지 않다. 
두 영화의 엔딩은 사뭇 다르다. 틸리는 마을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복수를 하고 마을을 떠난다. 그러나 손에 피를 묻히는 한 통쾌한 복수란 애초에 불가능했던 바, 그녀 마음의 흉터까지 없애줄 수는 없다. 틸리의 표정이 끝까지 씁쓸한 이유다. 한편, 잔인한 하룻밤을 보낸 후 집 밖으로 나온 닉키는 마이어스네 아이와 말없이 캐치볼을 한다. 이들의 공이 울타리를 넘나드는 것처럼 이 마을도 평등하고 자유로운 커뮤니티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인가. 
‘서버비콘’의 마지막 장면에는 분명 희망의 메시지도 엿보인다. 그러나 이미 극단적 폭력을 경험한 아이들의 모습이 가엾어 보이는 것만은 어쩔 수 없다. 우리의 아이들이 더 좋은 이웃을 만나도록, 우리가 먼저 더 좋은 이웃이 되어야 한다는 교훈이 무겁게 다가오는 작품들이다. 

사진=리틀빅픽처스/영화사진진

윤성은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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