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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영역’이란 인류의 ‘보물’로 입장하는 첫 관문, 주민자치회[기획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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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영역’이란 인류의 ‘보물’로 입장하는 첫 관문, 주민자치회[기획특집]
  • 김만권 경희대 학술연구교수
  • 승인 2021.02.10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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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자치법 전부개정안이 32년 만에 국회를 통과했다. 그러나 행정안전부가 제출한 원안에 포함됐던 주민자치회 관련 조항이 삭제돼 별도 법률안 제정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한국주민자치중앙회를 중심으로 지난 20대 국회에 발의되었다가 회기만료로 자동폐기된 ‘주민자치회법(안)’이 성안되어 국회 발의를 앞두고 있다. 이에 정치학 행정학 철학 사회학 교육학 등 다양한 분야의 학자와 전문가들이 ‘주민자치회 설립 및 운영에 관한 법률(안)’의 의미와 기대효과를 분석해 기획특집으로 싣는다.

공적영역으로의 입장이라는 유서 없이 남겨진 유산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전체주의의 기원』 『인간의 조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혁명론등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철학자다. 2006년 독일이 이념과 사상의 나라라는 슬로건을 걸고 자국을 대표하는 철학자로 내세웠을 만큼 아렌트의 철학적 영향력은 지대하다. 1961년 아렌트는 과거와 미래 사이라는, 자신의 철학에서 중요한 개념들을 정리한 책을 썼다. 그런데 이 작품을 열어보면 그 시작이 조금은 낯설다. “우리 유산은 유서 없이 우리에게 남겨졌다.” 프랑스의 작가 르네 샤르(René Char)가 남긴 말이다. 아렌트는 왜 이런 모호한 말을 인용하며 이 책을 시작한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하려 한다면 먼저 도대체 어떤 유산이 샤르에게는 유서도 없이 남겨진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

19402차 대전 와중에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때 프랑스의 지식인들은 이에 맞서 레지스탕스로 변신한다. 그런데 이 와중에 그들은 이전에는 몰랐던 큰 기쁨 하나를 발견한다. 바로 공적인 삶에 자유로이 참여하는 즐거움이었다. 1870년부터 시작해 독일에 점령될 때까지 프랑스는 제3공화국 체제였다. 이 제3공화국에선 일반시민들이 공공사에 참여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런데 독일 점령 이후 샤르를 비롯해 레지스탕스 활동을 펼친 프랑스인들은 (아렌트가 묘사하듯) “사전 예고도 없었고 원한 것도 아니었지만. 진공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정치로 휩쓸려 들어갔다.” 이 와중에 공공사에 참여하는 기쁨을 알게 된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일까? 샤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함께 먹는 식사 때마다 자유도 합석하도록 초대를 받는다. 비록 의자는 빈 채로 남아 있지만 자리만큼은 마련돼 있는 것이다.” 그렇다. 레지스탕스 공동체에서 마련되는 식사 자리, 같이 밥을 나누어 먹는 곳에서 누구나에게 공공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실천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된 것이다. 한마디로, 공적영역으로 들어가는 기쁨, 그 영역으로 자유로이 입장할 수 있는 티켓이 누구에게나 주어진 것이다.

그런데 왜 샤르와 동료들은 그 기쁨을 발견했을 때 그렇게 기뻐하면서도 그 기쁨을 유서 없이 남겨진 것이라 표현할 만큼 낯설어했던 것일까?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고대 그리스의 민주적 전통에서 보면 시민의 자격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당시의 민주체제를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이소노미(isonomy)’, 즉 법 앞의 평등 체제 또는 모든 사람이 동등한 정치적 자격을 지니는 체제,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통치하는 체제, 그리하여 마침내 누구도 서로를 지배하지 않는 체제였다. 이 체제의 통치 방식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신의 정의관을 설파하며 들던 유명한 플루트의 예를 통해 고스란히 드러난다. 만약 플루트를 연주할 수 있는 연주자는 여러 명인데 플루트가 제한된 개수 밖에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플루트를 서로 돌려가며 불면된다. 쉽게 말해 누가 권력을 독차지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를 돌려가며 가지면 된다는 것이다. 추첨제도가 바로 이런 발상에 근거를 두고 있다. 누구나 공적영역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기쁨은 지속되지 못했고, 중세를 넘어 20세기에 이를 때까지 우리가 다시 소유할 수 없는 유산이 되어 남겨졌다.

그런데 샤르는 여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아남는다면 이 중요한 시절의 정취와 결별해야만 하고, 이 보물을 소리 없이 거부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라고 쓴다. 또 다시 유서 없이 남겨질 유산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왜 일까? 아렌트에 따르면, 그 보물을 계승하고 중대하게 여기고 숙고하고 기억하는 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혁명론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런 공적영역에 입장하는 기쁨이란 보물을 지속시킬 제도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를 기억하지 못하고 이런 기쁨을 유지시킬 제도를 마련하지 못하게 되는 것일까?

 

공적영역을 평범한 사람과는 공유하지 않겠다는 제도권 엘리트들의 욕망

공적영역으로의 입장이란 큰 기쁨이 유서 없이 남겨진 유산이 되는 데엔 이러저러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유를 에둘러 젊잖게 표현하고 싶진 않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공적영역에 참여하는 기쁨이 유서 없이 남겨진 유산이 되는 그 이유의 중심엔 공적영역을 독점하려는 엘리트들의 권력욕이 있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세계 곳곳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역사를 바꾸는 물길을 열면 그 물길의 수혜를 얻는 자들은 대개의 경우 제도권 엘리트들이었다.

우리의 역사를 봐도 그렇다. 3.1운동을 기점으로 민중들의 꾸준한 노력으로 해방을 이룬 이후 우리 제헌헌법은 제8장에 따로 규정을 두어 지방자치를 할 수 있는 발판을 놓았다. 그러나 이승만의 필요에 따라 이용되던 지방자치는 1958년 주민들이 선출하던 시··면장이 임명직으로 전환되며 좌절된다. 민중들이 다시 들고 일어선 4.19가 지방자치를 다시 부활시켰지만 박정희 군사정부가 또 다시 이를 좌초시킨 바 있다. 그렇다면 왜 이승만과 박정희는 지방자치를 그렇게 주저했던 것일까? 그 이유는 명백하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공적영역을 내준다는 일이 독재에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다. 공공사가 논의되고 의제들이 만들어지는 영역을 독점적으로 차지하지 못하는 순간 독재는 무너지기 마련이다.

민주화 이후 아주 느리게 형식적인 지방자치가 시작되었지만 2016년 촛불 이전까지 진정한 지방자치는 시작되어 않았다는 비판이 주를 이뤘다. 그 이유는 바로 진정한 지방자치라고 볼 수 있는 주민자치가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때까지 정치엘리트들은 지방자치를 중앙정부의 연장으로 생각했을 뿐 아니라 대다수 정치엘리트들이 지방자치를 중앙정치로 진출하기 위한 발판으로 여겼다. 아니 저명한 정치인 중 그 누구도 지방자치에 온전히 헌신한 경우는 없었다. 지방자치는 중앙정치에서 이름을 얻은 이들이 중앙정치에서 더 높게 발돋움하기 위해 지나가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했다.

그래서 2016년 촛불 혁명 이후 진정한 지방자치를 위해 독립적인 주민자치의 실현을 갈망했던 이들의 기대가 컸다. 새로운 정부가 촛불정신을 이어가겠다고 약속했고 촛불정신은 직접민주주의를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정신이 가장 잘 실현될 수 있는 제도가 바로 주민자치이다. 하지만 2020129일 또 다시 그 희망이 좌절됐다. 그나마 지방자치법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주민자치회 근거규정마저 통째로 삭제된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기 때문이다. 그 삭제 근거가 더 논의를 해야 하기 때문이라니 더더욱 어처구니가 없다. 촛불로 권력을 얻은 중앙 정치엘리트들이 공적영역을 평범한 사람들과 온전히 공유할 수 없다는 욕망을, 만약 공적영역으로 들어오고 싶다면 자신들의 통제 하에 들어오라는 의도를 명백하게 드러낸 것이다. 역사를 바꾸는 이들과 그 역사에서 열매를 따 먹는 이들이 서로 다른 현실이 또 다시 반복된 것이다.

 

주민자치회 설립 및 운영에 관한 법률안이 온다

주민자치회 없는 지방자치법개정안이 통과되었다는 소식은 직접민주주의를 갈망하는 많은 이들에게 좌절감을 안겼다. 그 와중에 한국자치학회가 3백여 명의 학자들과 연계해 3년 간 스위스·영국·미국·독일·프랑스, 그리고 우리 역사에 존재했던 주민자체 사례를 연구해 주민자치회 설립 및 운영에 관한 법률안을 만들어 발의 준비에 들어갔다는 소식은 참으로 반갑다. 무엇보다 이 법률안은 그 자체로 주민자치가 더 이상 지방자치의 종속적인 정치체가 아니라 독립적인 자율적 정치체임을 선언한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반갑다.

지금처럼 지방정치가 중앙정치로 가기 위한 정치엘리트들의 발판에 불과하다면 주민자치가 이 영역에 빌붙듯 종속되어 있을 이유는 없다. 이제 주민자치는 제도권 지방정치의 일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민들이 공적영역이란 집을 스스로 짓는 자율적인 정치적 삶의 형식으로 그 자격을 스스로 획득해야 한다. 이 법안은 주민자치가 법률을 통해 자율적 정치체로서 새로운 시작을 알리고 있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이 법률은 주민이 스스로 정치체를 구성할 수 있는 권리능력(주민회), 나아가 스스로 협치 할 수 자치능력(자치회)이 결합된 주민자치회를 제시하고 있다. 이를 위해 주민자치회가 스스로 계획, 실행, 평가할 수 있도록 법인격을 갖추고 재정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놓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이를 통해 주민자치회가 지역주민이 하는 자치의 중심이 되고 지방자치단체와는 협력하고 견제하는 협치의 파트너가 되도록 만들어 놓았다. 특히 주민자치회가 만들어지는 단위를 사실상 마을로 봄으로써 기존의 마을공동체와 연계하여 설립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은 점도 돋보이는 부분이다. 이를 통해 주민자치회가 비정부조직(NGO)이면서 동시에 비영리조직(NPO), 그러면서도 비사적 조직(NFO)이 될 수 있는 법률적 지침을 제공하고 있다.

다만 이런 일이 이루어지려면 주민자치회의 재정적 독립성을 갖출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제13조에서 주민자치회는 회비를 받을 수 있다. 단 회비의 금액은 주민자치회 회원총회에서 2/3이상의 찬성으로 의결하여야 한다. 주민자치회는 기부금·보조금 등을 받을 수 있으며 설립 목적 범위에서 수익사업을 할 수 있다는 규정을 두고 있다. 이와 관련해 꼭 짚어 두고 싶은 부분이 있다. 만약 주민자치회가 자율적 정치체로 그 역할을 다하고 싶다면, 그 독립성이 이해관계가 있는 이들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도록 소액기부만을 받는 형식으로 제한을 두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보조금 역시 지방자치단체가 일정금액을 의무적으로부담하도록 만드는 것이 더 바람직해 보인다. 이런 주민자치회에 대한 의무적 재정지원은 지역주민이라고 하면 누구나 지방자치단체에 지방세를 내고 있다는 데서 나온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정치는 경제의 영향을 받는다. 재정적 독립성이야말로 정치적 독립성을 확보하는데 가장 핵심적 요소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좀 더 엄격하고 자세한 지침이 법률적으로 규정되어야만 한다.

 

멈출 수 없고 멈춰서도 안 되는 공적영역으로 가는 길

2020년 현재, 우리는 코로나19로 인해 팬데믹의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런데 20세기 이후 인류에게 닥친 가장 길고도 큰 팬데믹은 따로 있다. 바로 외로움이다. 외로움의 본질은 나에게 손을 내밀어주는 사람, 내가 손을 내밀 사람이 없다는데서 시작된다. 내가 위험한 처지에 빠졌는데 누구도 나에게 손을 내밀어주지 않을 때, 아무리 찾아도 손을 내밀 데가 없을 때 인간은 잉여로 전락한다. 잉여로 전락한 인간은 도움 받을 곳 하나 없는 자신을 혐오하고 마침내 도움을 주지 않는 타인을 혐오한다.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자본주의 세계에서 이렇게 버려진 수많은 잉여가 생겨난 20세기 초반, 처음으로 인간이 집단적으로 외로워지는 현상이 일어났다고 말한다. 아렌트는 집단적으로 외로워진 무리들을 대중이라 부르는데 이들이 20세기 처음으로 등장한 전체주의로 가는 길에 함께 동조하며 서 있었다. 지금 21세기에는 이렇게 외로워진 사람들이 트럼프주의로 대표되는 포퓰리즘(Populism)’에 합류하고 있다.

손을 내밀어주는 사람이 없는 처지, 손을 내밀 사람이 없는 처지, 아렌트는 이 같은 일이 공적영역이 사라졌기 때문에 일어난다고 말한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팬데믹 이후 외로움은 전 세계적으로 큰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이런 문제를 가장 잘 다루어낼 수 있는 정치공동체가 어느 단위에 있을까? 당연히 마을이 아닐까? 여기서 주민자치가 이뤄지는 그 단위가 마을이라는 점을 떠올려보자. 외로움 속에 파편화되어 가는 사람들이 찾을 수 있고 이들을 찾아갈 수 있는 가장 작은 정치단위, 마을에서 만들어지는 주민자치회는 공적영역으로 들어가는 첫 걸음이다. 그곳에 들어가서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주는 사람을 만나고, 손을 내밀 사람을 만나는 데서 우리가 민주적이라 부르는 정치가 시작된다. 그곳에야 말로 점점 외로워지고 있는 우리가 연대하고 문제를 제도적으로 풀 수 있는 길이 함께 있다. 우리가 주민자치를 위한 노력을 결코 멈출 수 없는 중대한 이유가 여기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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