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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적 공론장 활성화, 주민자치회법 제정이 필요한 이유[기획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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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적 공론장 활성화, 주민자치회법 제정이 필요한 이유[기획특집]
  • 박태순 한국공론포럼 상임대표
  • 승인 2021.02.10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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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자치법 전부개정안이 32년 만에 국회를 통과했다. 그러나 행정안전부가 제출한 원안에 포함됐던 주민자치회 관련 조항이 삭제돼 별도 법률안 제정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한국주민자치중앙회를 중심으로 지난 20대 국회에 발의되었다가 회기만료로 자동폐기된 ‘주민자치회법(안)’이 성안되어 국회 발의를 앞두고 있다. 이에 정치학 행정학 철학 사회학 교육학 등 다양한 분야의 학자와 전문가들이 ‘주민자치회 설립 및 운영에 관한 법률(안)’의 의미와 기대효과를 분석해 기획특집으로 싣는다.
논산시 주민자치회 활동 모습. 논산시 제공

본고에서는 삶의 영역에서 민주주의를 한 단계 더 성숙시키기 위해서는 타율에 의한 공론화가 아니라 주민 자율에 의한 공론장이 필요하며, 공론장의 안정성·지속성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주민자치법 제정이 필요조건임을 밝히고자 한다. 그 근거로 최근 참여민주주의 이름으로 전개되는 행정기관 주도 공론화가 행정기관의 자기 목적 달성을 위한 21세기형 동원 체제로 이용되고 있는 현실을 지적하고, 삶 중심의 자율적 공론장 형성을 위해서는 주민자치 조직의 설립과 운영에서 자율성과 지속성을 담보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 마련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제시한다. 이런 점에서 현재 시민사회에서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주민자치법 제정이 주민자치 실현의 중대한 계기가 될 것임을 강조하고자 한다.

 

1. 공론장의 의미와 현황, 문제점

 

1) 공론, 공론장, 공론화

공론(公論)은 공적 사안에 대해 서로 논의하여 모은 의견을 말한다. 공론(公論)이란 말은 선조들도 많이 사용한 용어인데, 선조들은 하늘의 원기(元氣), 하늘의 뜻’, 또는 백성의 뜻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기도 했다. 공론은 충분한 정보를 제공한 가운데 참여자 간 논의와 토론을 거친 후에 내리는 숙성된 의견, 숙의(熟議)’란 점에서 즉흥적으로 의사를 묻는 여론(與論)’과 대비된다. 공론장(public sphare)은 자발적으로 형성되는 다양한 형태의 논의 공간을 말하는데, 시민토론회, 원탁토론회 등과 같이 구체적 논의 공간을 지칭해서 말할 때 사용된다. 공론화(公論化, publicization)는 이런 공론을 모으는 과정을 말한다. 공론화는 일반적으로 일정한 절차를 통해 선발된 국민(Mini Publics) 또는 시민이, 체계적 논의와 절차를 통해 공적인 과제에 대해 일정한 결정을 내리는 과정을 의미한다.

 

2) 공론화 현황

행정기관은 공론화가 대의제를 보완하고 시민에게 정책 결정에 참여할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주민주권에 한발 다가선 것이며, 학습과 토론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합의 가능성과 정책의 품질을 높일 수 있는 선진화된 민주주의 방식이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런 명분하에 국가차원에서 2017년 총리실 주관으로 신고리 56호기 공론화를 시작으로 국가교육회의 주관 2018대입제도개편 공론화’, 2020년 산업부 주관 사용후핵연료 공론화가 진행되었고, 광역지자체 차원에서는 2018광주 도시철도 공론화’ ‘부산 BRT 공론화’ ‘대전 월평공원 민간특례사업 공론화’ ‘제주 녹지국제병원 개설 관련 공론화등이 있었다. 기초지자체 차원에서도 전북 고창 소각시설 관련 공론화를 비롯하여 다양한 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3) 공론화 실태

그러나 공론화에 참여했던 시민들의 반응은 행정기관의 기대와는 사뭇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처음에는 국민·시민이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하여 체계화된 논의를 거쳐 집단적 의사결정에 도달한다는 것에 신기해하며 의미부여를 하였으나 이런 신기함과 의미부여는 얼마 가지 않았다.

결국, 국민과 주민들은 공론화라는 것이 자신들의 삶의 문제가 아닌, 행정기관의 자기 목적에 의해 추진되는 것이며, 정책 결정에 따른 행정기관의 부담과 책임을 회피하고, 정책 결정의 명분을 확보하기 위한 도구적 목적에서, 국민과 주민을 또 다른 형태의 동원 대상으로 활용하고 있음을 깨달아 가고 있다.

여기에 과정조차 공정하게 진행되지 않고 있어 국민의 실망감은 더 커지고 있다. 행정기관은 공론화를 추진하면서 공정성 유지와 논의 결과 전폭적 수용을 약속하지만 그 약속은 대부분 빈말이 돼버리고 말았다. 공론화 과정 내내 행정기관은 자기 목적 실현을 위해 공론화위원회 구성, 진행 과정에 개입하고 간섭하고 정보를 편파적으로 제공하고 때에 따라서는 기관과 조직을 동원하여 의사결정에 개입한다. 사회 윤리 차원의 문제가 아닌 행정기관에 의한 공론화가 태생적으로 안고 있는 구조적 문제이다.

이뿐 아니라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행정기관은 국민으로부터 정책 결정의 명분 획득만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공론조사와 같은 단순선호투표과정에서 발생하는 지역사회 분열과 갈등과 같은 공론화 후유증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한마디로, 국민은 정부가 필요로 하는 정책 결정의 명분을 제공해주고 국민 자신은 공론화 후유증으로 몸살을 앓게 되는 형국이다. 결국 남는 것은 공론이란 말의 훼손, 참여에 대한 피로감, 행정기관에 대한 배신감, 국민 혹은 주민 간 분열과 갈등이다.

현재 진행되는 공론화가 참여민주주의, 숙의민주주의, 주민주권 실현 등 아무리 좋은 말을 갖다 붙인다 해도 민주적 회의 진행의 일반 원칙인 공정성, 민주성, 투명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숙의민주주의 핵심적 가치라고 할 수 있는 대표성, 숙의성 역시 형식적 수준에 머물고 있다. 이런 실태는 운영상의 미숙함을 넘어 행정기관이 주도하는 공론화가 자기 목적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주민 삶의 문제를 대표할 수 없다는 근원적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서부경남 공공의료 공론화나 전북 소각시설 설치 관련 공론화와 같이 행정기관장이 공정성 유지와 무간섭 원칙을 지킨 것은 오히려 예외적 경우에 해당된다.

공론장이란 본래 삶의 영역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공적 과제를 스스로 발견하고, 대화와 논의를 통해 서로 동의할 수 있는 합리적 해법을 찾아가는 추상적 공간을 의미한다. 이런 면에서 공론장 자체가 자발성에 기초한 것임에도 자발적이란 수식어를 붙인 까닭은 행정기관 혹은 권력기관에 의한 타율적 공론화와 구별하기 위해서다.

 

4) 문제해결 능력 없이 권한만 독점하고 있는 행정기관

삶이 복잡해지고 다원화·다양화되고 삶의 질에 대한 욕구가 커지고 예상을 뛰어넘는 사회적 변화와 불확실성이 증가하면서 풀어야 할 과제도 충돌하는 문제도 많아지고 있다. 문제해결을 기대했던 대의제는 날이 갈수록 한계만 더욱 드러내고, 정부와 시장 역시 정부실패, 시장실패의 모습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결국, 주민 스스로 문제를 발견하고 풀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나마 다행한 것은 시민사회 영역에서 공적 사안과 관련하여 다양한 형태의 자율적 결사가 만들어지고 다양한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주거, 양육, 일자리, 복지, 안전 등 주민 삶에 직접 영향을 끼치는 거의 모든 영역이 국가에 의해 이미 포획된 상황이다. 아무리 작은 마을 일이라 해도 법과 제도라는 테두리 안에서 가능한 것이고, 국가와 공공기관의 협력과 지원 없이는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이런 어려운 환경에서 만들어진 자율적 공론 공간에서 정리되고 결정된 사안이 공적 권위를 획득하지 못하고 사장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논의 의제가 주민 삶에 영향을 끼치는 공적 주제여도, 논의 구조가 주민 대표성을 충분히 확보하고 있어도, 논의 결과가 탁월한 해법을 제시하고 있어도, 행정기관이 승인하지 않는 의제, 조직, 결론은 공적 신뢰성을 획득하지 못한다. 논의 결과의 실현 가능성은 오직 행정기관의 승인 여부에 달려있다. 행정기관만이 공적 과제를 선정하고 논의하고 결정하고 집행할 권한을 갖고 있다.

위임받은 권력기관이 권한은 독점한 채 문제해결은 하지 못하고 문제해결을 위해 스스로 나선 주민의 공적 논의는 내용과 관계없이 사적이라며 무시하고 있는 현실, 딜레마 상황이다.

 

2. 문제해결을 위한 방안

 

1) 공론장 확대와 입법 투쟁의 결합

목적은 주민이 삶의 문제를 자율적으로 결성한 공론장에서 자유롭게 논의하고, 논의 결과에 공신력을 부여하고, 행정기관의 지원과 협력 아래 정책에 반영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자율적 공론장 확대·강화와 주민자치권 확보를 위한 제도화 투쟁이 병행되어야 한다.

자율적 공론장 확대·강화는 하버마스가 제안한 바와 같이 생활세계에서 자발적으로 형성된 시민의 결의를 바탕으로 국가와 공공기관을 향해 소통권력을 형성하여 주민의 의사를 강제하는 방식이다. 자율적 공론장 확대·강화 방안은 사안별로 이해관계가 있는 주민들이 자율적 모임을 조직하고, 체계적 논의를 통해 합리적 결론을 도출하여 논의와 결론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이를 제도적으로 관철하기 위해 제도권에 주민이 형성한 소통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말한다.

이와 함께 주민자치권 확보를 위한 별도의 노력이 필요하다. 주민자치권 확보를 위한 제도화 투쟁은 합법적으로 법적 지위를 확보하는 점진적, 통합적 방식이다. 현재의 주민자치법, 지방분권법만으로는 주민의 실질적 자치 권한을 확보할 수 없다. 이를 보완하고 대체할 제도화 작업, 입법 투쟁이 필요하다. 궁극적으로는 헌법 개정을 통해 자치분권 국가임을 천명하고 국민주권과 함께 주민권·자치권을 확보하기 위한 개헌 운동이 필요하다.

자율적 공론장 확대·강화를 위한 노력과 주민자치권 확보를 위한 제도화 투쟁은, 주민자치에 기반한 공론장 형성이란 공동의 목적 달성을 위한 상호 협력적 노력이 요구된다.

 

2) 이미 준비된 주민 역량의 발현 기회 확보

행정기관이 주민자치권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제시하는 대표적 근거가 자치역량 부족이다. 스스로 다스릴 준비가 부족하므로 행정의 관리와 지도가 불가피하다는 주장이다. 이는 잘못된 관점이자 현실에 대한 왜곡일 뿐이다. 자치역량을 키워가기 위해서는 권한이 주어진 가운데 시행착오와 성찰을 통해 성장시킬 필요가 있다.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역량 운운하는 것은 권한 독점을 지속하기 위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서부경남 공공의료 공론화와 전북 고창 소각시설 관련 공론화를 통해 확인한 바와 같이 주민들은 지극히 제한적인 범위에서라도 자율성이 주어지는 경우 자신들의 삶과 직결된 문제에 대해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학습하고 논의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전문가를 능가하는 수준의 정책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역량, 잠재력을 발현하고 있다. 다만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3. 주민자치회법 제정의 의미

 

주민이 삶의 공간에서 자신들의 문제를 발굴하고 논의하고 결정하여 실현하기 위해서는 주민에게 조직을 결성하고 운영할 수 있는 권한이 안정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주민자치법의 입법 취지와 내용을, 오랫동안 주민자치 운동을 전개해오고 해외 사례와 한국 전통사회에서 자치 연구를 지속해온 한국자치학회가 제안한 주민자치회 설립 및 운영에 관한 법률()’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법률()은 주민들이 주민자치회를 설립하여 공동체를 자발적으로 형성하고 자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법률안의 주요 특징으로 주민이 삶의 문제를 현실적으로 다루기 위해서는 주민자치 단위를 현재 행정단위인 읍면동이 아닌, ·리 수준으로 하향해야 하고 조직 구성에 있어 자율성을 부여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또 규약 제정, 재정 확보를 포함하여 자치조직을 독립적이고 자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어야 하며, 자치회가 주민의 실질적 대표조직이면서 자치단체와 상호 협력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이중 지위와 임무를 부여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필자는 한국자치학회가 제안한 법률()이 주민주권과 주민자치에 필요한 정신과 내용을 잘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법률이 제정된다면, 대한제국에서 제정하였으나 일제 침략으로 단명한 향약규정 및 향회조규의 전통을 계승·발전하는 일이 될 것이고 명실상부하게 국민의 시대에서 주민의 시대로 전환하는 중대한 계기가 될 것으로 예상한다.

주민자치는 행정기관에 빼앗긴 본래 권리를 되찾아오는 것이나, 행정기관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독점해온 권한을 나누는 일이다. 대의제에 길들여온 의회와 정당 입장에서 볼 때도 주민 스스로 자치권을 회복하는 것이 반가운 일은 아닐 것이다. 자발적 공론장을 형성하기 위한 노력만큼 주민주권, 주민자치권 회복을 위한 투쟁 역시 중요하며 주민자치회법 제정 여부는 주민 자신의 손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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