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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빗장을 열어젖힌 마을이 필요하다[마을이 있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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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빗장을 열어젖힌 마을이 필요하다[마을이 있는 풍경]
  • 박소원
  • 승인 2021.03.03 15: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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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이 있는 풍경’은 ‘마을’의 속살을 가만가만 들여다보고 소곤소곤 소통하는 코너입니다. 더 없이 가깝고 밀착돼 있지만 적지 않은 이들에겐 대체로 멀기만 한 마을의 이야기를 때론 지직거리고 둔탁한 확성기로 때론 고성능 마이크의 ASMR로 들려드립니다.(편집자 주)

마을이라는 단어 참 재미있다. 무엇을 지칭하는지를 말하고 있을 뿐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하는지 소명을 말해주고 있는 단어이다. ‘주로 시골에서, 여러 집이 모여 사는 곳또는 이웃에 놀러 다니는 일이라고 사전이 알려준다. 마을이란 여러 집이 모여 사는 곳이다. 외따로 사는 것은 마을이 될 수 없다. 게다가 서로서로에게로 놀러 다녀야 한다. 근접거리에 모여 사는 것만이 아니라 이 집 저 집 놀러 다녀줘야 한다. 그게 마을이다. ‘마실 간다라는 표현은 마을 간다는 표현의 사투리인 것이다. 외따로 떨어진 집이라도 사람들이 마실 갈 수 있는 거리(심리적 거리도 포함된다)에 있다면 마을로 쳐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지난 1월 영하 20도까지 내려가는 한파가 며칠째 계속되고 있었다. 나는 추위에 강한 사람이다. 집도 가능하면 코끝이 시릿할 정도로 살짝 춥게 온도를 낮춰둘 정도다. 햇볕이 잘 드는 강가 아파트에 살 때는 겨우내 한 번도 난방을 하지 않았던 적도 있다. 그랬던 내가 올 1월에는 실내 온도를 한껏 올렸다. 뼛속까지 추운 날이 이어졌다. 그런 어느 날 충격적인 뉴스를 접했다. 세 살짜리 꼬마가 내복 하나만 입은 채 거리를 서성이다 발견되었다. 아이는 거리에 나와 엄마를 찾아 울고 있었다. 차를 타고 지나던 같은 동네 주민이 차에서 내려 아이의 집으로 데려갔지만 집은 잠겨있고 아이는 집의 비밀번호를 알지 못했다. 당연히 집안에는 아무도 없는 상태였다.

경찰이 확인한 바에 의하면 이랬다. 엄마는 혼자서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이다. 일을 나가야 한다. 그런데 아이는 어린이집에 가지 않겠다고 떼를 쓴다. 일을 나가야만 하는 엄마는 아이를 집에 혼자 내버려둔 채 나간다. 아이는 집에 있었으니까 내복만 입은 상태다. 배가 고파진 아이는 무작정 집을 나왔고 비밀번호를 모르니 다시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아이를 발견한 동네 주민은 아이를 편의점으로 데리고 들어갔는데 그 아이는 며칠 전에도 내복 바람으로 이 편의점에 혼자 온 적이 있었다고 한다. 아이는 울며 엄마를 찾았다.

엄마는 아이를 방치한 것이다. 아무리 떼를 써도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냈어야 하고, 어린이집이 아이를 받아주지 않는다면 아이를 맡아줄 친척을 찾아봤어야 하고, 그래도 찾을 수 없었다면 엄마는 일을 나가지 말았어야 한다. 열악한 조건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아이 때문에 일을 나갈 수 없었을 때의 불이익을 알기나 하냐는 비난을 달게 받으며 내가 할 수 있는 답은 그렇게 방치된 아이는 죽음에까지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그렇게 방치된 아이가 죽음에 이른 경우를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그 엄마의 3살 아이는 잘 토닥거려지지 않았고 어린이집은 코로나 대비의 긴급 돌봄을 하지 않았고 이웃과는 일면식도 없었으며 아이를 맡아줄 만한 친척도 가까이 없었다. 다시 말해 그 엄마에겐 마을이 없었다.

마을이라고 소리 내어 읽어본다. 세상의 모든 단어들은 소리를 통해 내용을 전하고 있다고 생각될 때가 많은데 마을이라는 소리는 참 푸근하고 울림이 있다. 호수에 작은 돌멩이 하나 던졌을 때 퍼져나가는 둥근 파문과 같은 형상이다.

마을, 여러 집이 모여 있는 곳. 여러 집이 모여 있기로 따지면 인류 역사상 지금처럼 밀집하게 여러 집이 모여 있었던 적이 있었을까? 예전 같으면 10여 채가 모여 있을 자리에 2~300여채가 넘게 붙어있다. 우리 아파트 한 동을 계산해본 것이 그렇다. 서너 걸음이면 옆집이 있다. , 아래, 옆이 얼마나 밀접한지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까지 듣는다. 종종 걸음이 많아진 3살짜리 아이가 살고 있다면 아랫집은 층간 소음으로 괴로워한다.

그런데 우리는 아파트에 다닥다닥 붙어사는 사람들을 좀처럼 이웃이라 부르기가 어렵다. 아파트 단지를 마을이라고 부르기도 어렵다. 왜냐면 돌멩이 하나에 퍼져나가는 둥근 파장 같은 것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마실 다닐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을은 어떤 조건에서 마을이 되는가?

1960년대, 70년대 심지어 80년대까지도 대문은 늘 열려있었다. 빗장을 열어두었다. 그래서 이웃뿐 아니라 그 마을을 지나고 있던 타지의 낯선 사람들도 불쑥 열린 대문으로 들어왔다. 박물장수(요즘 시대에 아무도 알지 못하는 단어인 듯하지만)가 그랬고 길을 찾는 나그네가 그랬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이 이 집 저 집 친구네를 제집처럼 드나들었고(해가 뉘엿뉘엿해질 때 엄마가 부르는 소리에나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식재료가 조금 많을 땐 옆집 찬거리로 나눠주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의 대문은 어떤가? 문은 훨씬 작아졌지만 더욱 견고해졌다. 이제는 열쇠로 여는 집도 찾아보기 어렵다. 비밀번호로 비밀스럽게 열고 닫는다. 비밀번호가 유출됐을까 염려해 번호를 자주 바꾸기도 한다. 3살 아이를 자기 집으로도 돌아가지 못하게 한 비밀번호는 아이가 기억할만한 것이 아니었다. 사실 기억해야 할 이유도 없는 것이었다.

최근 열독한 일본작가 마쓰이에 마사시의 우아한지 어떤지 모르는은 이혼을 한 남자가 럭셔리 한 아파트를 아내에게 주고 오래된 공원 뒷동네의 아주 낡은 집으로 이사하는 것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유럽풍 고급 가구들로 채워 넣은 아파트에서 남자는 늘 겉돌고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존재였다. , , 아래 한 몸처럼 붙어있는 아파트에서 역설적이게도 그는 섬 같은 외로움을 느끼며 살았다. 낡은 고택으로 이사했을 때 오래 전부터 제집처럼 생각하고 있었을 고양이를 받아들인다. 고양이를 받아들이면서 그도 고양이에게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 집으로 오랜 연인이 드나들게 된다. 그녀는 우연히도 남자의 집 근처에 정착해 살고 있었던 것이다. 드나듦이 시작된 것이다. 늙어 거동이 불편해진 아버지를 모시고 있는 그녀는 아버지에게 갑자기 어려움이 생기면 그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병원을 모시고 가거나 그녀와 번갈아 아버지를 돌보곤 한다. 저녁이면 두 연인은 각자의 집으로 마실 가거나, 함께 마을을 걸으며 서로를 받아들인다. 그녀의 옆집에 큰 불이 났을 때는 앞집 할머니가 그녀의 집으로 뛰어 들어가 그녀의 아버지를 피신시킨다. 앞집 할머니도 그 집을 드나드는 존재인 것이다.

그는 섬과 같은 아파트에서 드디어 마을로 옮겨왔다. 서로의 집으로 마실 다니며 서로를 받아들이는 세계로 옮겨왔다. 문이 열린, 빗장이 열린 마을로.

최근 대전의 소제동 지키기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철도 관사마을이다. 대한민국 철도 역사의 중심인 대전에 100년 된 관사마을이 있다. 이제 몇 채 남지 않았지만 그 마을을 거닐며 100년 전 사람들을 그려본다. 지금 보기엔 어찌나 좁은 골목인지 차도 한 대 지나다닐 수 없지만 그곳을 왁자하게 가득 채웠을 아이들에겐 결코 좁지 않은 골목이었을 것이다. 소제동 관사마을은 일본식으로 지어진 집들이라 참 재미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앞문, 뒷문이 있다. 우리 집 뒷문은 친구 집 앞문과 마주하고 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가방을 팽개치고 뒷문으로 빠져나가 친구네 집으로 쏙 들어간다. 드나듦이 훨씬 용이한 구조다. 소제동의 집과 집을 그렇게 연결해서 젊은 예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열어놓았다. 집과 집이 서로 벨트처럼 연결돼 있는 것이다. 그래서 소제동에서는 늘 문을 유심히 관찰하게 된다. 대부분 철문이고 빗장이 있다. 그러나 아마도 그 빗장이 잠겨있었던 날들이 별로 없었을 것이다. 우리의 어린 시절이 그랬듯이. 큰 문에 빗장이 잠겨있어도 한 사람이 드나드는 작은 문은 늘 열려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아이들을 키웠고 그렇게 이웃과 더불어 살았다.

다시 3살 아이에게로 돌아가자. 아이에게는 비밀번호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의 빗장이 풀린 이웃이 필요했다. 어린이집을 가지 않겠다는 아이를 기꺼이 맡아줄 마을이 필요했다. 마을의 빗장은 누가 여는가? 우리 자신이다. 내가 먼저 열어야 앞집이 열린다.

 

박소원 씨앤씨티에너지 마케팅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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