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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여름 [마을이 있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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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여름 [마을이 있는 풍경]
  • 박소원 칼럼니스트
  • 승인 2021.05.06 17: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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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이 있는 풍경’은 ‘마을’의 속살을 가만가만 들여다보고 소곤소곤 소통하는 코너입니다. 더 없이 가깝고 밀착돼 있지만 적지 않은 이들에겐 대체로 멀기만 한 마을의 이야기를 때론 지직거리고 둔탁한 확성기로 때론 고성능 마이크의 ASMR로 들려드립니다. 편집자 주

대학교 2학년 여름방학이었다. 유난히 덥고 지루한 여름이었다.

바람 한줄기 없는 한낮 더위를 그나마 차가운 방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버텨보다가 더는 견디기가 어려워 마당에 물이라도 뿌려보자 싶어 일어났다. 마당의 나무와 화초에 물을 주면서 물안개도 맞아보고 나무에 뿌리듯 내 다리에도 흠뻑 뿌려대며 더위를 좀 씻어볼 요량이었다.

마당 수도를 틀고 정원에 물을 뿌리기 시작했는데 옆집 마당에서도 물 뿌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자로 꺾인 골목이라 우리 집과 옆집이 서로 잘 들여 다 보였다. 열린 문안에서 아주머니도 나처럼 마당에 물을 뿌리고 계셨다. 사실, 그 집은 한두 주 전 우리와 같은 날 이사를 왔다. 하고 많은 날 중에 어찌 같은 날 이사를 오나 싶었지만 나는 학기가 끝나지 않아서 밤중에나 기어들어왔으니 서로 이웃으로 마주칠 일은 없었다.

물을 뿌리던 옆집 아주머니와 서로 눈이 마주쳤다.

, 너 일루 와봐!”

가볍게 눈인사를 건넸더니 옆집 아주머니가 나를 부르셨다.

?” 나는 수돗물을 잠그고 질퍽한 슬리퍼 차림으로 그 집 마당에 들어섰다.

너 몇 학년이니?”

“2학년인데요?”

2학년이라는 소리에 반가워하며 당신 딸을 불렀다.

미숙아, 어서 나와 봐! 얘도 2학년이란다.”

낮잠을 자다가 불려 나온 미숙이는 맙소사, 내 중학교 동창이었다. 어떻게 이런 우연이!

같은 중학교를 다니다가 서로 다른 고등학교로 흩어졌고 연락도 끊겼다가 옆집으로 같은 날 이사 오면서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우리는 팔짝팔짝 뛰며 좋아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미숙이네는 딸만 넷이다. 미숙이는 셋째 딸. 만약 내가 고3이었다면 막내 효숙이를 불러서 효숙아, 어서 나와 봐! 얘도 고3이란다.’ 하셨을 거다. 효숙이는 우리가 잘 아는 가창력 좋은 가수다. (이름은 그녀의 프라이버시를 위해 가명을 사용했다.) 그날 이후, 담 하나를 사이에 둔 우리 두 집은 한 집과 다를 바 없었다. 우리 집에서 놀다 같이 자든지 미숙이네서 놀다 같이 자든지 내 집 네 집 없이 넘나들었다.

우리가 살던 집은 지금 아파트로 보면 3-40평쯤 될까? 그보다 더 작았을지도 모르겠다. 어렸을 때 기억은 다 넓게 넓게 기록되는 매직이 작동하는 것 같아 살짝 자신이 없다. 말하자면 우리는 7-80평대 집에 사는 것과 같은 효과를 누렸다는 얘기다. 아침에 내 방에서 일어나 미숙이네 식탁에서 아침을 먹고, 언니들 방에서 놀다가 우리 집에서 점심을 먹고, 미숙이네 마당 벤치에 앉아 놀다가 저녁을 같이 만들어 먹고, 내방에서 노래 부르거나 뒹굴며 수다를 떨고, 잠시 각자 흩어져서 책을 읽다가 책 읽던 자리에서 잠들고…… 뭐 그런 식이다.

멋 내기에 별로 관심이 없었던 미숙과는 달리 위의 두 언니들은 내로라하는 멋쟁이들이었다. 나는 늘 두 언니들 방에서 이것저것 탐닉했다. 언니들도 액세서리며 옷이며 구두, 가방들을 관심 없는 미숙이 아닌 내게 입혀보고 빌려주거나 물려주곤 했다. 여자 형제가 없는 나에게 갑자기 4명의 자매가 생긴 셈이다. 두 언니들은 여러모로 솜씨가 좋아서 일 나가시는 부모님을 대신해 식사준비도 맡아 했었는데 나는 늘 그 두 언니들이 만든 식사의 헤비유저였다. 지금 생각하면 뻔뻔하기 그지없다. 우리 엄마와 미숙 엄마 두 분이 뭔가 식재료들을 주거니 받거니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 집 식탁에 앉아 밥 먹는 일을 괘념치 않았으니까. 물론 우리 집에서 마련한 식사에 그 자매들이 가끔 초대되기도 했지만 내가 그 집 식비를 더 많이 축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효숙, 미숙, 나 우리 세 사람은 모두 노래 부르기를 정말 좋아했다. 요즘처럼 노래방이 있는 것도 아니라 노래를 부르려면 반드시 기타가 있어야 했고 누군가는 기타로 반주를 넣어줘야 했다. 그래서 아마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반주 코드 몇 개쯤은 기타로 짚을 줄 알았다. 당시에는 가사와 기타 코드가 같이 수록돼 있는 노래책이 있었는데 우리는 팝송 책 한 권, 가요 책 한 권을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애지중지하며 첫 페이지부터 끝 페이지까지 모두 섭렵했다. 하루 일과를 마치면 기타 하나 들고 셋이 모여 노래를 불렀다. 늦은 밤, 이웃에까지 노래가 흘러가도 누가 딱히 뭐라고 언성높이지 않은 것은 전적으로 효숙이의 가창력 때문이다. 그렇게 고급 진 목소리로 생음악을 듣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었으니까.

잘 부르지는 못했지만 정말 음악을 좋아했던 미숙은 그저 좋아하는 음악부심으로 집 근처 카페에서 음악 DJ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나는 그녀가 틀어주는 음악을 들으러 카페 죽순이를 했다. 음질 좋은 스피커를 갖춘 음악다방에서 좋은 음악을 듣는 문화가 있었던 터라 그 공간은 일종의 문화 공유장 같은 곳이었다.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우리는 가로수가 끝도 없이 늘어선 태릉선수촌 길을 걷고 또 걸었다.

그 전해에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있었고 세상은 여전히 매우 불안정했으며 우리의 앞날은 끝도 없이 걷고 걸어야 하는 가로수길 같았다. 그녀는 세상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했고 나는 사념적이고 냉소적이어서 늘 그런다고 뭐가 달라질까?’ 했다. 게다가 서로 독서량이 엄청나서 나눌 이야기가 너무 많았다. 그녀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 즈음 더 이상 알고 싶은 것도 없다고 늘 되뇌었다. 우주와 신과 정치와 경제와 예술과 문학과…… 끝도 없이 걸으며 끝도 없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 해 가을, 나는 동생을 잃었다.

세상에서 처음 만나는 죽음. 나도 그와 함께 죽음의 절벽에 서게 되었을 때, 미숙과 그 자매들이 나를 잡았다. 같이 울어주고, 같이 나를 일으켜 세웠다. 무남독녀가 된 나에게 그녀들은 당분간 나의 자매들이 돼주었다.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그 해 여름의 열린 대문, 그곳에서 시작되었다. 열린 대문을 통해 마당에 물을 뿌리는 내가 보인다. 미숙의 엄마는 방에서 뒹굴고 있는 딸들 중 누군가는 나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 명이라도 뒹구는 방에서 불러내어 좀 움직여보라고 나를 불러들이기로 한 것이다. 열린 문 사이로 사람이 보이고 눈을 마주치고 관계가 만들어진다. 관계가 만들어지면 우리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나는 그 해 여름 4명의 자매를 얻었고 원래 내 친구였던 미숙과 나눈 기나긴 대화를 통해 일생을 곱씹는 주제들을 품었다. 우주와 신, 정치와 경제, 예술과 문학, 사랑과 죽음, 죽음과 부활…… 부활절이 있는 4월이다. 나는 그 해 여름을 통해 사실 부활한 것이다. 다시 살아났다.

 

박소원 씨앤씨티에너지 마케팅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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