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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자율, 4.7선거와 주민자치의 블랙박스[이관춘의 마을·자치·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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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자율, 4.7선거와 주민자치의 블랙박스[이관춘의 마을·자치·교육]
  • 이관춘 연세대 객원교수
  • 승인 2021.05.06 17: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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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을 소재로 하는 스토리는 흥미진진하고 짜릿하다. 영화건 소설이건 드라마건, 주인공이 좋은 사람이건 나쁜 인간이건 모두 기묘한 흡인력이 있다. 특히 무고한 주인공이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다가 극적으로 탈출하는 이야기는 시공을 초월하여 독자와 시청자를 사로잡는다. 탈출과 복수극이 뒤섞인 프랑스의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Dumas)의 대하소설 몬테크리스토 백작15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독자들의 넋을 빼앗고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감옥 탈출 영화의 고전은 뭐니 뭐니 해도 빠삐용이다. 우연찮게 보게 된 그 영화에 넋을 잃고 빨려 들어갔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빠삐용의 감흥이 채 가시기도 전에 개봉된 영화, 스티븐 킹의 쇼생크 탈출을 본 사람들은, 아마도 자신이 억울한 누명을 쓴 주인공 앤디 듀프레인이 되어 기를 쓰고 탈출을 시도하는 경험을 했을지도 모른다.

사연이야 어찌됐건 도대체 왜 우리는 억울한 누명을 쓴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그가 감행하는 감옥 탈출에 그토록 열광하는 것일까?

 

왜 영화 빠삐용에 열광하는가?

탈출이나 해방이란 단어의 의미이자 지향하는 목표는 자유이다. 우리가 빠삐용쇼생크 탈출에 손에 땀이 날 정도로 몰입하는 이유는 바로 자유에 대한 갈망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유가 무엇이기에 인간은 그토록 자유를 갈망하는 것일까?

러시아의 문호 도스도예프스키는 자유란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의 본능이라고 단언한다. 줄에 묶어놓은 강아지의 낑낑거리는 모습이나 새장에 갇힌 새의 퍼덕거리는 날개 짓에서 자유를 향한 치열한 몸부림을 본다. 자유는 모든 동물이 생존을 위해 가지고 태어나는 본능이다.

하물며 인간에게 자유란 본질 그 자체이다. 인간 심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한결 같이 인간의 본래적이며 유전적 욕구로서 자유에 대한 열망을 손꼽는다. 식욕이나 성욕처럼 생물학적으로 존재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면서 이를 넘어서는 욕구이다.

자유란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생존을 위한 삶에의 의지를 넘어서는 욕구이다. 니체에 따르면 자유는 생의 의지를 초월하는 인간 본질로서의 권력의지이다. 이들 철학적 분석을 뒷받침하듯 심리학자 매슬로(Maslow)는 자유는 생존과 안전, 인정 욕구를 초월하는 존재의 욕구라고 정의한다. 윌리암 글라써(Glasser) 역시 자유는 인간이 유전적으로 충족시키길 갈망하는 핵심적 욕구라고 강조한다.

자유에 대한 정의가 넘쳐나듯이 자유에 대한 욕구충족은 그 자체로 다의적(多義的)이다. 줄에 묶여 낑낑거리던 강아지가 줄에서 벗어나는 자유가 있고, 천신만고 끝에 탈옥에 성공해 얻게 되는 자유도 있다. 몇 달 전에는 어느 교회 전도사가 코로나에 확진되어 입원중인 병원 격리병상에서 야반도주하여 서울시내 카페들과 원불교 법당을 들락거리다 25시간 만에 경찰에 검거되기도 했다. 이렇게 외적인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은 처절하리만치 강하다. 그러한 몸부림의 결과가 선이냐 악이냐의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자유를 획득했을 때의 충만감은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가 없을 것이다.

자유가 주는 행복은 단지 외적인 속박으로부터의 해방만은 아니다. 내적이면서 적극적인 자유가 주는 충만감 역시 실존적 자유의 본질이다. 타인이 정해놓은 법과 규정에 따르기보다는 내가 그 법을 선택하고 결정할 때 인간은 자존감과 자기 효능감을 체감하게 된다. 따라서 자기선택, 자기결정의 기회를 시민 각자에게 부여하는 메커니즘이 활발할수록 시민 전체의 만족도가 향상되리라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주민자치의 실질적 활성화가 절실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의적(字意的) 의미에서 보듯 자치(自治)스스로 다스리는 것이다. 스스로 다스린다는 것은 자기입법(自己立法)의 행위를 의미한다. 니체가 강조한대로 인간에게서 주권은 자기입법성, 즉 외부에서 부과한 지식과 도덕률을 노예적으로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 스스로가 검증하고 기준을 만들며 그 기준에 따라 주체적으로 사는 것이다. 주민자치는 주민으로서의 내가 나 자신에 관한 것을 스스로 책임지고 처리하는 것이다. 따라서 주민자치란 말에는 각자가 자기입법 혹은 자기주권적 존재라는 실존적 선언이 전제되어 있다. 자기입법에 근거해 주인으로서의 삶을 영위하는 존재, 남이 아닌 스스로에게 복종하고 책임지는 주인으로서의 존재이다. 주민자치에서 자기입법성이 구체화되는 것이 바로 투표이다.

투표하는 주민이 더 행복하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투표의 성격에 따라 자기주권, 자기입법의 체감도와 행복감은 달라진다는 것이다. 4.7 ·보궐선거일에 많은 사람들이 투표에 참가할 것이다. 허나 투표를 했다고 탈옥에 성공한 빠삐용 같은 해방감과 자유를 기대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그저 의무감에서라도 투표를 했다면 평가받을 일이다. 그러나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투표행위의 소중한 실존적 의미는 포착할 수 있다.

일반시민들에게는 일상에서 자신이 주체적으로 이 나라를 운영한다는 느낌을 가질 기회가 없다. 기회가 있다면 선거라는 적법적 메커니즘을 적극적으로 이용할 때뿐이다. 따라서 내가 던진 한 표의 결과도 중요하지만, 결과에 관계없이 더 중요한 의미는 내가 속한 공동체의 운영과 통치에 내가 주체적으로 권력을 행사했다는 실존적 의식이다. 주인으로서 느끼는 자유욕의 충족인 것이다.

실제로 연구에 따르면 주민들은 투표를 할 때 더 행복해진다. 주민들이 자신들의 삶을 주인으로서 통제하고 결정할 때 더 높은 만족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스위스 취리히 대학의 부르노 프라이Frey 교수가 20006134명의 스위스 시민을 조사 분석한 결과이다(국민총행복전환포럼 2020.4.15.).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다.

스위스의 여러 지역 가운데 주민참여회의가 있는 지역 주민들이 삶의 만족도가 더 높았다. 특히 같은 지역 안에서는 마을회의와 주민투표에 참여할 권리가 있는 사람들의 행복감이 더 컸다. 프라이 교수는 직접민주주의의 권리를 폭넓게 지닐수록 삶의 만족도가 높아진다고 결론지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현상이 발견된다. 세계에서 가장 직접민주제가 발달한 스위스의 투표율은 오히려 한국보다 낮다는 점이다. OECD 국가 평균투표율 통계(2000~2009)를 보면, 한국은 56.9%, 스위스는 46.8%10%나 차이가 난다. 투표할수록 행복도가 높아지는데 스위스 국민들은 왜 투표를 안 하는 걸까.

스위스 역사학자인 클로드 롱샴(Longchamp)은 의미 있는 대답을 들려준다(SWI: swissinfo.ch). 그는 스위스의 투표율이 40%대에 불과한데도 스위스 국민의 75%현재 정치제도에 만족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라고 말한다. 이런 다소 모순된 상황에 대한 그의 설명은 이렇다. “스위스에서는 시민들이 주민자치 같은 민주주의에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기회가 있기 때문에 전국적 투표를 통해 굳이 자신의 목소리를 드러낼 필요가 줄어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굳이 국가적 차원의 투표에 참가하지 않아도 정치적 참여의 기회는 많기 때문이다, 특히 자신들의 일상과 직결되는 문제들은 지역 주민투표로 결정할 수 있다.

스위스의 사례는 우리나라의 실질적인 주민자치 활성화의 당위성을 여실히 입증하고 있다. 또한 주민자치회 조항이 실종된 채 최근 국회에서 통과된 지방자치법 전부개정안이 얼마나 철학적 무지와 빈곤함의 소산인지를 질책하고 있다. 주민들의 자기주권적 의지는 자신의 힘이 일상과 직결되는 일에 직접적으로 발휘될 때 역동적으로 빛을 발한다. 직접적인 주민자치 참여의 폭이 클수록 시민은 더 행복해진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스위스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한국과 같이 강력한 권력집중과 정치적 책임의 명확한 귀속이 있는 사회는 높은 투표율로 이어지는 반면, 스위스처럼 권력을 공유(power-sharing)하는 사회 혹은 주민자치가 활성화된 사회에서는 시민들의 만족도가 훨씬 더 높다는 교훈이다.

자율, 자동차 아닌 주민의 이름

투표하는 주민들이 더 행복하다는 연구결과는 주민자치의 실존적 의미와 중요성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인간은 남이 아닌 자신이 스스로 다스리는 것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게 되고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인간 삶에서의 자치의 개념은 자유를 넘어 필연적으로 자율의 의미로 향하게 된다. 자신의 행동을 남이 아닌 자신의 의지에 기초해 세운 규율과 준거에 따라 실행하는 것이다.

자율학습이나 자율출퇴근이란 말처럼 우리의 일상에서 자율이란 개념은 보편화되고 있다. 그렇다 쳐도 자율주행자동차란 이름은 영 아니다. 마치 둥근 삼각형이란 형용모순처럼 생경하기만 하다. 인간의 운전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운전하여 주행하는 자동차가 어디 있겠는가? 인간의 조작 없이도 스스로 운전해서 주행할 수 있다면 그건 더 이상 자동차라고 부를 수 없기 때문이다. 자율은 자동차의 이름이 될 수 없는 인간 고유의 이름이다. 이렇게 본다면 자율의 개념은 필연적으로 임마누엘 칸트(Kant)의 철학으로 돌아가게 된다.

칸트는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이 동물과 다른 차이점은 인간의 이성적 사고능력에 있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인간이 자유롭게 행동하는 능력은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능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능력이 합쳐져 인간은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특별한 존재가 된다. 그렇다고 우리 주변에서 늘 목격하듯이 인간이 언제나 이성적으로 행동하고 자율적으로 선택한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런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율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일반적으로 자율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두 가지 관점에서 외부로부터 강제를 당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내 밖의 외부로부터의 강제와 내 안의 외부로부터의 강제이다. 내 밖의 외부로부터의 강제는 타인이나 자연의 물리적 힘에 의해 강제당하는 것이다. 누군가 내 팔을 잡고 완력을 사용해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움직인다면 나의 움직임은 강제를 당하는 것이다. 자연적 강제도 마찬가지다. 태풍으로 인한 홍수로 잠수교가 범람해 내가 건너갈 수 없다면 나는 자연의 힘에 의해 강제 또는 제지당하고 있는 것이다. 강제는 행동의 자유와 대립되는 개념인 것이다.

여기서 자유의 본질은 행동 자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해 행동의 주체인가 아니면 대상인가에서 자유의 본질을 포착하게 된다. 타인에 의해서든 자연의 힘에 의해서든 강제를 당하는 사람은 행동의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며 그는 자신의 행동이 아니라 타자의 행동을 겪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이리저리 떠밀리는 것이며 움직여지는 것이고 그 움직임을 스스로 만들어내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유는 임마누엘 칸트와 에리히 프롬 및 이사야 벌린(Berlin)의 자유론에서 명시하는 대로 강제를 당하지 않는 소극적 측면과 자신이 행동의 주체가 되는 적극적 측면이 있음을 알게 된다. 적극적 측면이란 내가 나의 주인(I am my own master)’인 상태이다. 내가 행동의 주체가 되어 나의 욕망이나 의지를 실행하는 것이다. 즉 적극적 자유란 자신이 자신에 대해 온전한 주인이 되어 스스로의 본래적 의지를 실현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소극적 자유가 “~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라면 적극적 자유는 “~로의 자유(freedom to)”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칸트가 말하는 자유는 우리 같은 소시민이 생각하는 그런 자유의 의미를 뛰어넘어 엄격하고 까다롭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트의 자유는 각자가 삶의 주인이 되고 주민 스스로가 자치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심오한 철학적 바탕을 제시한다. 칸트에게 자유란 단순히 아무런 방해 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진정한 의미의 자유란 내 안의 이성이 아닌 감정과 자연적 욕망이라는 강제에서 벗어나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따라서 칸트에게 자유의 본질은 자율(自律)의 의미로 환치된다. 칸트의 개념을 빌어 설명하면 자율이란 이성이 있는 인간이 스스로의 자유로운 의지로 하여금 정언명법으로서의 도덕법칙을 입법하고 이에 의무로써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이성과 의지가 서로 다르고 의지가 감성의 명령에 복종하여 따를 경우에는 자율이 아닌 타율이 된다. 자치란 말이 스스로 다스리는 것이라면 칸트의 자율은 여기에 이성을 주체로 명시하여 스스로의 이성에 따라다스리는 것을 의미한다. 스스로 행하거나 자신을 다스려도 이성이 아닌 욕망에 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커피는 자유·자치는 자율

카페에 들러 커피를 아메리카노로 할지 카페라떼로 할지를 결정한다고 치자. 언뜻 보면 선택의 자유를 행사하는 듯하지만 실은 내 기호에 가장 잘 맞는 커피가 무엇인지를 파악해 욕망을 충족하는 행위이다. 그런데 내 기호는 애초에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란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 기호가 선천적이든 습관에 의한 것이든 관계없다. 또한 칸트는 그 기호를 충족하는 행위를 문제 삼는 것도 아니다. 강조하는 점은, 이때 나는 자유롭게 행동한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외부에서 이미 결정된 내용에 따라 행동한 것이란 점이다. 아메리카노 보다 라떼를 마시고 싶다는 욕구는 내가 선택한 게 아니라 이미 갖고 있는 욕구일 뿐이다. 나의 자유는 그 욕구에 복종하는 행위가 된다.

마찬가지로 코로나19에 격리병동에서 도주한 그 교인은 자유롭게 행동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칸트에 의하면 그건 자유가 아니라 쾌락의 추구와 고통의 회피라는 동물적 욕망에 복종하여 행동한 것일 뿐이다. 진정으로 자유롭게 행동한 것이 아니라 오직 감각적 욕구의 노예로 행동한 것이다.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 욕구에 의해 이리저리 떠밀려 움직이는 것이며 그 움직임을 스스로 만들어내지 못한 노예인 것이다.

자율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천성이나 자연적 욕망, 사회적 관습에 따라서가 아니라 내가 나에게 부여한 법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자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대 개념인 타율의 의미와 대조해보면 된다. 예를 들어 아파트에서 공을 떨어뜨린다고 하자. 이때 공의 행위는 자유로운 행위나 혹은 자유의지로 행동하는 게 아니라 중력의 법칙에 의해 지배를 받는 것이다. 공은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이미 결정된 법칙에 따라 타율적으로 행동할 뿐이다.

사람의 행위도 마찬가지다. 이성적 능력을 사용해 자신이 부여한 법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흥미나 바람, 욕구, 기호 같은 가변적이고 우연적인 것들에 지배되어[강제되어] 행동한다면 타율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즉 내 밖에 주어진 결정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중력의 법칙에 지배를 받는 공처럼 나는 자연적 욕구라는 법칙에 지배를 받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자유로운 행동은 인간만이 할 수 있고 공은 할 수 없는 선택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자신이 자신에게 부여한 법칙 그 자체를 선택하는 것이다. 이런 자율적 행동이 가능한 이유는 인간에게 있는 이성적 능력 때문이다.

코로나 격리병동에서 도주하고픈 나만의 감각적인 자유 욕구를 따라 행동하는 것은 중력의 법칙에 지배받는 물건과 다름없는 타율적 행동이다. 이때 그는 추구하는 목적의 주체가 아니라 도구가 되는 것이다. 대신 나의 자유욕구를 타인의 자유침해와 같은 선상에 놓고 이성적으로 저울질한 후 자신의 양심의 법칙에 따라 주체적으로 자신의 행동을 통제할 때 자율적 행동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자유는 필연적으로 도덕[윤리]과의 연관 속에서, 특히 정의와의 관련 속에서 참 된 의미가 살아날 수 있다. 자유로운 행동은 주어진 목적에 걸맞은 최선의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를 선택하는 것이다.

4.7 ·보궐선거에서 많은 사람들은 자유롭게 투표에 참가할 것이다. 그러나 칸트는 특정인에게 투표한 이유가 무엇인지에 따라 내가 참된 의미의 자유인인지 아닌지가 판가름 난다고 말한다. 특정 후보를 선택한 이유가 이성에 의해서인가 아니면 개인적 욕망이나 감각적 거부감에 의한 것인가를 묻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칸트의 자율 이념은 앞으로 시행될, 아니 시행되어야만 하는 주민자치회 운영과 주민자치교육에 중요한 철학적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있다. ‘자치의 주체는 개인의 감정적 호불호가 아닌 이성이라는 점이다. 커피는 자유지만 주민자치는 자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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