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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이 수상하다? 그 마을이 수상하다! ‘굴뚝마을의 푸펠’ ‘초콜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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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이 수상하다? 그 마을이 수상하다! ‘굴뚝마을의 푸펠’ ‘초콜릿’
  • 윤성은 영화평론가
  • 승인 2021.07.08 16: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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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사람들 그리고 영화
Town in Movie

많은 영화의 배경이 ‘마을’이다. 영화 주인공들의 삶의 터전 역시 그들이 사는 마을이고 동네이기 때문이다. 스크린 속 인물들은 배경이 되는 마을, 그리고 이웃들과 때로 갈등하고 협력하며 여러 이야기들을 만들어나간다. 그 이야기의 결말은 해피엔딩이 되기도 하고 비극으로 치닫기도 한다. 앞으로 ‘마을, 사람들 그리고 영화’에서는 마을과 사람들의 케미스트리, 그들 사이의 교감과 성장, 변화를 다룬 작품들을 소개한다. 그 속에서 주민자치의 바람직한 방향, 때로 반면교사의 깨달음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편집자 주

* 영화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웃집 토토로’(1988),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 ‘하울의 움직이는 성’(2004) 등 유수의 명작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왔던 스튜디오 지브리(이하 지브리’)는 전세계에서 디즈니사를 대적할 만한 유일한 애니메이션 제작사였다. 2014,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은퇴와 경영난으로 애니메이션 제작부서 폐쇄를 선언하기도 했으나 6월에 다시 지브리 최초의 풀 3D 애니메이션을 선보일 예정이다. ‘너의 이름은’(2016)을 만들었던 신카이 마코토도 팬덤이 강한 애니메이터로 유명하다.

그러나 일본이 애니메이션 강국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특정 스튜디오나 작가들 외에도 오래 전부터 OVA(Original Video Animation) 시장을 기반으로 성장해온 여러 제작사들이 탄탄하게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로 인한 극장가 한파에도 올해 국내에서만 2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소토자키 하루오, 2020)는 그 저력을 보여준 좋은 예다.

OVA나 감독의 유명세 없이 다른 경로를 탄 작품도 있다. 지난 달 개봉한 굴뚝마을의 푸펠’(Poupelle of Chimney Town. 히로타 유스케, 2020)은 베스트셀러 동화를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으로 대중성은 물론 주제 면에서도 조명해 볼 만한 가치가 충분한 작품이다.

 

무지한 마을사람들을 진실에 눈뜨게 한 굴뚝마을의 푸펠

여러 문화가 섞여 있는 가상의 마을이 배경인 굴뚝마을의 푸펠’(이하 굴뚝마을’) 연기로 가득 찬 하늘과 마을의 전경을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정교하기로 정평이 난 신카이 마코토 그림의 이국적 버전처럼 보일 만큼 섬세한 스케치와 형형색색의 이미지들이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데, CGI 전문가인 히로타 유스케 감독의 기술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굴뚝 청소를 하는 루비치는 할로윈 데이에 우연히 쓰레기인간을 만난다. 얼핏 인간처럼 보이지만 몸 전체가 쓰레기로 이루어진 이 정체불명의 존재에게 외톨이인 루비치는 친구가 되어달라고 부탁하면서 푸펠이라는 이름을 붙여 준다.

푸펠은 1년 전 행방불명된 루비치의 아빠 브루노가 주말마다 사람들에게 들려주었던 연극의 주인공이다. 그 이야기 속에서 푸펠은 하늘을 뒤덮은 연기 위에 별이 있다고 믿고 모험을 감행한다. 하늘을 쳐다보는 것도, 심지어 검은 연기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해 하는 것도 금기시 되어 있는 굴뚝마을에서 별에 대해 전파하는 브루노는 이단 취급을 당하다가 어느 날 사라져 버리고 만다. 그러나 루비치는 확인해보지 않은 것을 확신해서는 안 된다는 아빠의 말을 믿고 종종 높은 굴뚝 위에 올라가 별이 있는 풍경을 상상한다.

이 영화는 대부분 루비치의 시점으로 진행되지만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서사의 중심에는 푸펠이 있다. 비밀에 쌓인 푸펠이 이 폐쇄적인 마을에 등장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되고 그가 이단심문관들의 수배를 받게 되면서 사람들은 굴뚝마을의 문제점에 대해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별을 믿는다는 것이 죄목이 되는 폭력적 제도에 대해 서서히 반기를 들기 시작한다.

결정적으로 브루노의 죽음이 이들의 음모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주민들과 이단심문관들은 첨예하게 대립한다. 쓰레기인간 푸펠은 처음에 아이들에게조차 폭행당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위장하며 도망 다녀야 하는 약자였지만 점차 마을 사람들이 무지에서 벗어나 진실에 눈뜨게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는 영화 초반부 내레이션의 예고대로 루비치를 도와 밤마을의 마지막 밤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주체다.

굴뚝마을 사람들에게 푸펠은 축복이자 은인일 수밖에 없다. 허풍쟁이 혹은 바보로 오인되고 핍박당했던 브루노가 사실은 가장 용기 있고 현명한 사람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후반부에 두 캐릭터가 하나로 겹쳐지는 것은 자연스런 귀결이라 할 수 있다.

 

마을 사람들 변화시킨 마성의 이방인과 초콜릿

라세 할스트롬 감독의 2000년작, ‘초콜릿에서도 수상해 보이는 이방인들이 등장한다. 거센 겨울 북풍과 함께 등장한 비안느’(줄리엣 비노쉬) 모녀는 조용히 사는 것을 미덕으로 아는 작은 시골 마을에 파란을 일으킨다. 성당과 교리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보수적인 마을에서 사순절에 가게를 연 비안느는 금세 급진 좌파’, ‘무신론자로 낙인찍히고 푸펠과 마찬가지로 가까이 해서는 안 될 존재로 인식된다. 마을의 모든 것을 관장하고 통제하는 레노시장이 성당에도 나오지 않는 이 당돌한 미혼모에 대해 나쁜 소문을 퍼뜨린 것이다. 육체의 즐거움은 모두 죄로 치부하는 그에게는 젊은 신부님이 좋아하는 미국 노래도, 비안느가 만드는 초콜릿도 절제의 대상일 뿐이다.

그러나 여러 도시를 전전하며 집시처럼 살아온 비안느는 시장의 험담과 주민들의 수근거림 앞에서 푸펠보다 훨씬 적극적이고 거칠게 행동한다. 그러나 시장을 찾아가 소리를 지르고 그 아버지의 동상을 발로 걷어차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것은 그녀의 초콜릿이다. 비안느의 초콜릿을 한 번 맛본 사람들은 사랑에 다시 눈을 뜨고 잘못을 뉘우치며 타인에게 마음을 여는 등 변화를 경험한다. 사람들의 긴장을 풀어주고 마음을 들뜨게 하는 카카오의 효능과 비안느의 엄마로부터 전해 내려온 초콜릿 테라피가 이 마을에서도 통한 것이다.

정성껏 만든 유기농 요리로 지치고 병든 사람들을 치유하는 이야기는 문화콘텐츠의 단골 소재지만 대체 불가능한 초콜릿의 달콤함을 아는 관객들에게 이 영화는 보다 직관적으로 다가온다. ‘아만드의 일흔 번째 생일날, 손님들이 비안느의 초콜릿 요리를 음미하며 황홀해하는 표정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아는 것이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을 변화시킨 것이 초콜릿 뿐만은 아니다. 비안느는 레노 시장의 눈치를 보면서도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의 넋두리를 들어주고 위로하면서 신뢰를 쌓아나간다. 주민들이 모두 모여 미사를 드리는 첫 장면에서 거의 비슷비슷해 보였던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고민거리를 안고 비안느 앞에 선다. 손님들 개개인에게 어울리는 초콜릿을 추천해주듯 비안느는 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실질적인 해결사 역할을 한다. 일례로 그녀는 딸이 손주를 만나지 못하게 한다며 힘들어 하는 아만드에게 자신의 가게에서 손주와 자연스레 친해질 기회를 마련해준다. 이 장면은 성당에서 신부가 한 중년 남성의 고해성사를 듣는 장면으로 이어지는데 노인이 느끼는 반려견에 대한 사랑도, 한 여인에 대한 사랑도 이해하지 못하고 정죄하기에만 급급한 신부와 공감능력 백배의 비안느가 대비되면서 영화는 이 마을에 정말 필요한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살기 좋은 마을 만드는 힘은 주민 스스로의 깨달음과 협동

비안느는 푸펠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대가 없이 찾아온 이 마을의 축복이자 은혜다. 비안느의 초콜릿 가게는 병든 노인과 힘없는 어린아이들, 폭력 남성으로부터 도망친 여성 등 사회적 약자들의 아지트가 된다. 감독은 가게 안은 넓고 아늑해 보이도록 촬영하고, 가게 안에서 밖을 보여줄 때는 작은 문 사이로만 시야를 제한시켜 두 공간을 대비시킨다.

왜 비안느가 처음부터 대접받지 못하고 편견과 따돌림에 시달려야 했는가는 궁극적으로 푸펠의 경우와 유사하다. 나름의 유토피아를 꿈꾸었던 굴뚝마을 설립자와 그 추종자들이 철저한 통제를 통해서만 마을을 유지해나갈 수 있다고 믿었던 것처럼 레노 또한 선악의 경계를 명확히 함으로써 인간의 욕구를 억누르고 죄책감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 질서와 권력을 유지하는데 효과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종교는 영화에서 사람들에게 평안을 주는 대신 권력의 도구로 전락해 버린 상태다.

레노는 강물을 타고 이 마을까지 흘러들어온 방랑자들을 비안느와 마찬가지로 주민들에게 악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로 배척하고 몰아내려 한다. 처음에 대다수의 주민들은 이처럼 빈약한 명분 앞에서조차 반발하지 못할 만큼 마을을 바꿀 힘도 의지도 없지만 점차 배타심을 버리고 비안느의 편에 선다. 굴뚝마을에서처럼 마을을 누구나 살기 좋은 곳으로 변화시킨 힘은 위정자의 교체나 결심이 아니라 주민들 스스로의 깨달음과 협동이다.

20년이라는 시간차를 두고 개봉한 굴뚝마을의 푸펠초콜릿은 장르도 국적도 다르지만 공히 주장한다. 주민들의 행복이 고려되지 않은 규범과 전통은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고. 아마도 개선해야 할 것이 많을 거라고. 다양한 문화와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그 사실을 일깨워주는 축복이 될 수 있다고.

 

사진=리틀빅픽쳐스/시네마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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