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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자치교육, 가르치지 말고 가르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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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자치교육, 가르치지 말고 가르치게 하라
  • 이관춘 연세대 객원교수
  • 승인 2021.07.16 16: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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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춘
연세대학교 객원교수. 평생학습타임즈 논설위원. 전 한국성인교육학회장. 호주 시드니대 철학박사
저서 [거리의 파토스] [호모키비쿠스] [니체, 세월호 성인교육을 논하다] 등

주민자치교육이 중요하다는 데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다. 규모에 크건 작건 지방자치단체들은 다양한 이름의 주민자치교육을 홍보하고 또 시행하고 있다. ‘찾아가는 주민자치학교’ ‘찾아가는 자치교실’ ‘주민자치박람회’ ‘주민자치 온라인교육’ ‘주민자치아카데미’ ‘주민자치 배움터’ ‘터 무늬학교등 지역에 맞는 주민자치교육 개발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모습이다. 한국주민자치중앙회는 중앙회 차원에서 주민자치를 위한 교육과 훈련, 연수 활동을 기획시행하고 있다. 주민자치 관련 학회에서는 주민자치 및 주민자치회 역량강화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실질적인 주민자치의 실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주민자치 함양 및 주민자치회의 역량강화가 급선무라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주민자치교육에 변화가 없다면?

주민자치교육은 성공적인 주민자치활동에 필수조건이다. 주민자치 및 자치회의 개념과 본질, 필요성에 대한 인식을 통해 명확한 자치마인드를 갖추는 교육 없이 실질적 주민자치는 기대할 수 없다. 나아가 주민자치회의를 어떻게 자주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지, 주민자치 정책이나 사업 수행을 통해 지역공동체를 부활시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에 대한 구체적 교육 또한 요구된다. 주민자치역량을 실질적으로 함양시킬 수 있는 교육 콘텐츠 개발도 필요할 것이다.

주민자치활동이 현실적으로 읍면동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주민자치역량을 함양하는 교육 콘텐츠 혹은 교육프로그램 개발은 지역의 특수성과 요구를 반영하여 체계적으로 이뤄져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이미 선정된 주민자치위원들의 역량 강화나 재교육도 중요하지만 주민자치에 관심이 부족한 주민들에 대한 교육 방안 모색 또한 시급한 과제일 것이다.

모든 교육이 그러하듯 주민자치교육은 교육대상자들의 변화를 목표로 한다. 교육의 가소성(可塑性) 혹은 교육가능성에 대한 신념을 전제로 학습자의 변화를 지향하는 것이다. 교육에 대한 정의도 변화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교육학자인 피터스와 정범모를 포함한 많은 학자들은 교육이란 학습을 자극하고 강화하며 변화를 유도하는 활동이라고 조작적으로 정의한다. 이런 활동은 우연적이나 자연적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 행동의 계획적인 변화임을 강조한다. 인간행동이라 함은 주민자치에 대한 주민들의 밖으로 드러나는 외현적 행동은 물론 주민자치에 대한 지식, 사고력, 가치관 등 심리적인 특성을 포함할 것이다. 또한 교육은 계획적이기에 주민자치 교육의 목표와 이론, 교육 프로그램 등이 체계적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문제는 교육에 대한 조작적 정의처럼 학습자의 변화가 그리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교육의 아킬레스건이 바로 여기에 있다. 아무리 부모가 잔소리를 해도 변하지 않는 자식들이 많다. 도덕교육이나 종교교육은 받았지만 비도덕적이며 신앙이 실종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고등학교 교육은 물론 다양한 성인교육에서도 변화가 따르지 않는 교육현상을 늘 경험하게 된다. 변화는 학습을 통한 스스로의 내면화 과정을 통해 가능한 것이기에 아무리 교육을 해도 내면화의 학습이 안 된다면 변화에 대한 기대는 난망인 것이다. 주민자치교육에서도 교육은 열심히 했는데 정작 주민들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 교육의 의미는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주민자치교육의 목표를 효과적이며 효율적으로 달성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교육의 본질이 무엇이며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 고민과 논의가 필요하다.

 

듣기 싫었던 공부를 왜 다시?

몇 해 전 어느 언론사에서 성인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를 본 기억이 난다. “과거 어린 시절에 가장 듣기 싫었던 말은 무엇입니까?” 질문 중에 별 다른 망설임 없이 답할 수 있는 질문이 있다면 바로 이거다. “공부해라!” 가장 많은 사람들(51%)이 이구동성으로 답을 했다. 1위였다. ‘공부해라’ ‘숙제해라같은 말을 듣고 행복했던 사람은 별로 없을 테니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이 설문의 백미는 그 다음 질문이다. “중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간다면 무엇을 가장 하고 싶으십니까?” 1위가 공부하고 싶다”(69%)였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현상이다. 그토록 듣기 싫었던 공부를 다시 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런데 외국의 조사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발견된다. 미국 일리노이즈 대학의 로스(Roese)와 섬머빌(Summervil) 교수가 성인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다. 질문은 다음과 같다.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후회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왜 후회가 되는가?“ 대답 중 1(32%)가 배움이었다. 더 많이 혹은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게 가장 후회가 된다는 것이다. 그 다음 후회가 되는 것들이 경력 쌓기(22%), 사랑(romance 15%), 육아(parentin 10%) 등의 순서였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이렇게도 배움에 갈증을 느끼는 것일까? 게다가 어린 시절 그렇게도 듣기 싫었던 공부를 굳이 다시 하고 싶은 이유는 무엇일까? 왜 미국인들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것의 1순위로 배움을 꼽는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먼저 동서양의 많은 선현들이 왜 인간의 핵심적 본성이 배움이라고 강조하는지 그 이유를 떠올리게 된다.

배움을 갈망하는 인간 본성

지금으로부터 2500여 년 전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불후의 명저 형이상학(Metaphysics)1권 제1장 첫 문장을 다음과 같이 간명하게 시작한다.

 

모든 인간은 본성상 알기를 갈망한다.”

 

인간은 배움의 동물이다. 인간의 삶이 배움이고 배움을 통해 인간은 자기 자신을 창조해 나간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 삶에 있어서 학습은 삶의 수단인 동시에 학습 그 자체가 목적(an end)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굳이 먹고 살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인간은 본성상(by nature)’ 배움 그 자체를 갈망하고 즐기는 존재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식에 대한 열망이 인간본성이라는 사실이 우리가 뭔가를 알 때 느끼는 기쁨(delight)에서 입증된다고 말한다.

고대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공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모두 516구절로 된 논어(論語)의 첫 번째 구절을 다음과 같이 배움()에 대한 희열로 시작한다.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불역열호(不亦說乎)”이다. “배우고 때에 맞게 내 것으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학습[배움]이란 용어가 중국은 물론 동아시아에서 처음 등장하는 부분이 바로 이 구절이다. 유교 경전 중 제일 먼저 가르치는 게 논어란 점을 생각하면 공자는 삶의 핵심이 배움에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학습을 삶의 중심으로 보는 인식은 과거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 예로 조선시대 제사를 지낼 때 쓰던 지방에 적었다는 글귀에는 배움에 대한 옛 사람들의 인식이 배어있다. “현고학생부군신위(顯考學生府君神位)”, "배우는 학생으로 인생을 살다 돌아가셨다는 뜻이다. 춘추시대 중국 사회나 우리나라 조선시대나 모두 입에 풀칠하기도 힘겨운 시대였을 텐데 배움, 학습을 중시하는 풍조를 당시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 지가 궁금하다.

배움에 대한 찬양은 동서양 철학자들 뿐만은 아니다. 생물학에서는 알려고 하는 행위를 인간의 생물학적 유전자로 파악한다. 하버드대 생물학박사이자 과학철학자인 마투라나는 생물학적 관점에서 인지활동에 관한 새로운 이론을 제시한다. 무엇을 알려고 하는 것은 모든 생명체의 생물학적 유전자로서 생물학적 현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산다는 것은 곧 안다는 것이며 삶의 과정은 다름 아닌 앎의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가르치지 말고 가르치게 하자

배움이 인간본성이라면, 주민자치를 포함한 모든 교육의 패러다임은 학습자의 배움의 본래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가르치기보다는 학습자 스스로 배우도록 도와주고 촉진하는 것이 중요하다. 즉 학습의 주도권을 교사나 강사가 아닌 학습자에게 넘기는 것이다. 학습자가 학습의 임파워먼트(empowerment)를 가질 때 배우는 것이 재미있고 신명이 나며 내면화가 이루어진다.

앞의 설문조사에서 어릴 적 공부해라!’ 라는 말이 그토록 듣기 싫었던 이유는 바로 공부의 임파워먼트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남이 시켜서 한 공부이기 때문이다. 성인들이 다시 공부하고 싶다는 이유는 공부 그 자체가 싫었던 것이 아니었다는 반증이다. 굳이 심리학, 교육학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공부건 직장 일이건 가장 힘든 때는 남이 시켜서 할 때이다.

가끔씩 피트니스센터에 들르면 땀을 뻘뻘 흘리며 트레이너의 구령 하에 눈에 익숙한 PT체조를 하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가만히 보니 군대훈련소 조교 시절 내가 훈련병들에게 기합을 주던 그 체조다. 그 때 훈련병들은 그렇게 싫어하고 고통스러워하던 그 체조를, 군대 밖 젊은 남녀들은 수강료를 내면서 기꺼이 그 고통을 배우고 있는 것이다. 공부도 억지로 하면 힘들지만 스스로 하면 신명난다. 학습의 자기주도적 속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아이들도 그런데 하물며 성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주민자치교육에서는 더욱 그렇다. 성인들은 스스로 학습하고자 하는 욕구를 지니고 학습을 수행할 때 비로소 학습의 참 맛을 알게 된다. 그리고 변하게 된다. 교육학의 이 평범한 진리를 알면서도 실천하기는 그리 쉽지 않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가르치는 게 훨씬 쉽기 때문이다. 특히 대학 강의에서는 더욱 그렇다.

필자는 늦게나마 10여 년 전부터 학부생을 대상으로 한 강의에서 교수가 가르치기보다는 학생들 스스로가 가르치게 하는 실험을 해 오고 있다. 결과는 기대를 훌쩍 뛰어넘는다. 매해 학기말에 돌아오는 학생들의 자체평가는 감동이기보다는 과연 교육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성찰하게 만든다. 올 해 역시 예외가 아니다. 학생들의 피드백을 공개하는 이유는 강의에 대한 자화자찬이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강의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찬할 이유가 없다.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학습자들이 스스로 학습하게 했을 때의 그 고무적인 결과를 주민자치교육 전문가들과 공유하려는 의도에서다. 한 학기 성적평가가 끝난 후에 학생들이 무기명으로 한 피드백 몇 가지를 인용해 본다.

한 학기 동안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했다.” “3개월간 토론하고 고뇌했던 여러 질문에 대해 이제 조금은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게 되었고 나의 가치관을 당당하게 피력할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해졌다.” ”내 생애 가장 의미 있고 행복했던 학습의 여정이었다.” 참고로, 내 강의에서는 학습여행이란 말을 쓴다. 학생들의 평가는 이어진다. “나는 여행하는 과정에서 잘못된 선입견을 고치기도 하고 새로운 가치관을 정립하기도 하였다.” “강의 명 그대로 여러 학우분의 소중한 가치를 공유하며 여행하는 내내 함께 성장하는 기쁨을 만끽할 수 있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학기 초의 나에 비해 많이 성숙해졌다.“ “매 수업이 기다려졌고 수업마다 지친 나에게 안식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었다고 자부할 수 있는 여정이었다.” “이제 나는 어떤 식으로 책을 읽고 사유하고 생각을 정리하며 이 세상을 바라봐야 하는지를 배웠다.” “이 강의를 들으며 신기했던 것은 정말로 라는 사람이 변해있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다음의 피드백은 학습의 자활감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확인해준다. “강의 초반에 제출했던 에세이를 돌이켜보면 모두 의 행복, ‘의 관점을 기준으로 둔 세상을 이야기하는데 바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강의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그 시선이 에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향해, 더 나아가 한 사회를 향해 넓어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만약 교수님께서 방향을 알려주시는 게 아니라 정해진 목적지를 강요하셨다면, 읽어야 할 책의 순서가 정반대였다면, 소중한 동료들과의 생산적인 토론이 없었다면 나의 시선과 생각들은 여전히 좁은 상태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학생들의 강의 평가를 읽으면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강의실에서 자만하던 젊은 시절의 나를 돌아보며 회한(悔恨)의 부끄러움에 젖어들게 된다. 어느 학생은 강의 초반의 자신의 생각과 주장이 부끄러웠다고 술회했지만 나는 가르치기만 할 뿐 학생들의 학습의 자활감에 등한시 했던 그 게으름과 무지가 부끄럽다.

주민자치 역량강화 워크숍의 모습
주민자치 역량강화 워크숍의 모습

지나친 교육은 학습을 해친다

고래를 춤추게 하는 것은 칭찬만이 아니다. 학습자는 자신이 학습의 주체가 됨을 느낄 때 신명이 난다. 철학과 더불어 심리학에서 인간이 즐거움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하는 핵심 활동으로 학습을 드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심리학자인 윌리암 글래서는 인간은 유전적으로 갖고 있는 즐거움의 욕구를 추구하기 위해 두 가지 활동을 한다고 말한다. 즉 놀이(playing)와 학습(learning)이다.

놀이는 그렇다 해도, 어린 시절 듣기 싫었던 공부해라의 추억이 있는 성인들은 학습이 즐겁다는 데 선뜻 동의하기 어려울 수 있다. 하긴 지금의 청소년들도 과거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OECD가 발표하는 어린이, 청소년 행복지수에서 매년 최하위를 차지하는 나라가 대한민국이기 때문이다. 물질적 행복지수나 교육 지수는 평균 이상이지만 주관적 행복감에서는 매년 꼴찌를 면치 못하는데 그 핵심적 이유는 교육이 아이들에게서 공부의 즐거움을 빼앗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부모에 의해 억지로 하는 공부, 성적 압박과 학습 부담으로 이어지는 공부는 재미없고 힘든 것으로 느끼게 된다. 한마디로 스스로가 빠져 있으니 공부가 즐거울 리 없다.

청소년들에게 스스로 학습이 기쁨과 성취의 비결이듯 성인들에게 자기주도 학습은 즐거움과 자기 변화의 비결이다. 자기주도 학습을 통해서만이 학습의 자활감을 갖게 된다. 성인들을 대상으로 한 앤드라고지(Andragogy)나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페다고지(Pedagogy)의 구분 없이 모든 교육 행위의 성패는 학습자 개인의 자활감, 즉 임파워먼트에 달려 있다.

학습의 자활감은 자율에서 솟아난다. 공부나 몸짱 만들기나 스스로 할 때 생동감이 살아나고 빛을 발한다. 가르침을 당할 때보다 가르칠 때 신명이 난다. 그러니 교수자가 교수를 줄이고 학습자가 교수를 하도록 하면 된다. 물론 교육의 성격과 대상에 따라 다르다는 전제는 항상 유효하다. 피터 자비스가 강조하듯 초등학교에서도 앤드라고지가 필요하고, 반면에 성인들의 교육에도 페다고지가 효과적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육의 목적달성을 위한 핵심 조건은 학습의 임파워먼트를 학습자에게 주는 것이다.

본래 교육이란 개념에는 가르치고 배우는 행위, 즉 교수(teaching)-학습(learning)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교육은 곧 학교교육이라는 전통적 인식 하에서는 교육하면 으레 가르치는 것만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교육의 목적은 학습자가 스스로 학습하도록 안내하고 촉진하는 데 있다. 학습자가 스스로 학습을 할 때, 성인들이 스스로 학습하고자 하는 욕구를 지니고 자기주도적으로 학습을 수행할 때 비로소 학습의 유전적 욕구가 충족되고 교육을 통한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물론 주민자치교육의 목적과 내용에 따라 교수자의 가르침이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이 경우에도 일방적인 가르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학습자인 주민들의 자기주도성 혹은 학습의 임파워먼트를 갖게 하는 치밀한 교수-학습 계획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나친 흡연만 건강에 해가 되는 것이 아니다. 지나친 교육은 학습의 건강을 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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