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로키움] 사회적 자본과 주민자치-“체계 작동원리인 권력·자본 논리가 생활세계 측정지표로 활용”

발제 / 사회적 자본 개념의 미분화 비판 - 퍼트넘의 사회적 자본 개념을 중심으로 - 사회적 연대와 기능적 사회적 자본 개념 미분화된 채 공존 사랑·돌봄의 가치를 상호이익과 공리주의로의 포섭은 문제

2019-11-12     정기호 기자
‘사회적
이영재

최근 사회적 자본에 대한 논의가 활성화되는 데에는 부르디외(Pierre Bourdieu), 콜먼(James S.Coleman)의 역할이 컸다. 퍼트넘은 이탈리아와 미국의 사회적 자본을 분석하는데 부르디외와 콜먼의 사회적 자본 개념을 활용해 사회적 자본 연구를 확산하는데 기여했다. 퍼트넘에 따르면, 사회적 자본 개념은 개인들 사이의 연계(connections), 그리고 이로부터 발생하는 사회적 네트워크, 호혜성과 신뢰의 규범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특히 사회적 자본은 몇몇 사람들이 ‘시민적 덕성(civic virtue)’이라고 부르던 것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사회적 자본은 시민적 덕성이 호혜적 사회관계의 촘촘한 네트워크 속에 자리 잡고 있을 때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퍼트넘 2016, 19).

2000년 이후 다양한 영역에서 사회적 자본 개념을 활용한 연구들을 살펴보면, 사회적 자본 개념에 내재한 개념적 간극이 양립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회적 자본 연구가 활성화되고 있음에도 이 개념적 미분화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사회적 자본 개념에 내재한 차이는 이익과 효율성에 기초한 사회적 자본 개념과 사회적 규범이나 공공선에 기초한 사회적 자본 개념으로 드러난다.

이익과 효율성에 기반한 사회적 자본 개념의 경우 상대적으로 ‘자본’에 강세를 두고, 희소한 자원에의 접근 또는 활용을 용이하게 만드는 자본의 성격으로 사회적 자본을 구조화 한다. 반면, 사회적 규범이나 공공선을 강조하는 사회적 자본 개념은 ‘사회성’에 강세가 있다. 이 경우 개인적 이익이나 효용의 차원과는 본질적으로 구분되는 정치문화나 시민적 덕성, 사회규범의 차원에서 사회적 자본 개념을 정초한다.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문제 제기
사회적 자본 개념이 사회과학의 제 분야에서 각광을 받게 된 것은 정부의 실패, 시장의 실패에 따른 대안 모색의 강박이 사회적 자본의 긍정적 효과에만 초점을 맞추도록 만든 측면도 있다. 포르테스(Alejandro Portes)가 지적한 바와 같이 사회적 자본에 관한 논의가 비화폐적인 형태의 자본이 가진 긍정적 효과를 보다 넓은 맥락에서 논하도록 유도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Portes 1998, 2).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최근 연구에서 사회적 자본 개념은 양립불가능한 이종적 특성을 애매하게 봉합한 채로 활용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정부의 실패, 시장의 실패에 따른 대안으로 사회적 자본의 잠재성과 역량에 주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와 더불어 미분화된 사회적 자본 개념을 정교하게 개념화하는 데 보다 신중할 필요가 있다.

본 연구에서는 시민사회, 집합행동, 시민 참여, 거버넌스, 지역 발전, 정치문화 등의 연구 영역에서 이미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사회적 자본 개념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하고자 한다. 검토의 요지는 첫째, 사회적 자본은 어떻게 형성되는지, 둘째는 사회적 자본의 상이한 두 경향적 차이의 본질은 무엇인지, 셋째는 사회적 자본의 축적 원리는 무엇인지 여부다.

이런 문제 제기가 필요한 이유는 울콕이 지적한 바와 같이 사회적 자본 개념에 대한 논의가 영국의 계몽주의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지성사적 연원을 바탕으로 하는 오랜 정치철학적 논의의 대상이기 때문이다(Woolcock 1998, 226-227. 참조). 특히 정치학적 맥락에서 국가와 (시민)사회의 연관성을 주요하게 다룬 퍼트넘의 사회적 자본 논의에 주목하는 이유는, 퍼트넘의 사회적 자본 개념이 이익과 효용에 정향돼 있으면서 동시에 호혜성, 신뢰 등과 같이 이익과 효용으로 포용할 수 없는 사회적 자본 개념의 이종적 접합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하의 논의 전개에서는 앞선 세 가지 물음을 기초로 ▲이익에 정향된 사회적 자본 개념에 대한 검토 ▲이타적-도덕적 가치에 정향된 사회적 자본 개념 검토를 통해 사회적 자본 개념 비교 ▲사회적 자본의 형성과 축적의 원리를 퍼트넘의 미분화된 사회적 자본 개념에 내재한 딜레마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 연구를 맺으면서 근본적 문제의식에 대한 간략한 정리를 담고 있다.

■사회적 자본의 이익 정향적 개념화

이익-기능 중심의 개념화
부르디외
프랑스의 후기 마르크스주의자 부르디외는 사회적 자본을 ‘자본’의 차원에서 비판적으로 다루는데, 그에게 사회적 자본은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 불평등이 지속되는 원인 중 하나다. 부르디외에 따르면,경제적(또는 물적) 자본이 가시적 축적을 특징으로 한다면, 이 사회적 자본은 문화자본과 마찬가지로 은폐된 형태로 등장하고, 불평등을 재생산한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주의적 자본 개념에 가깝게 포착될 수 있다. 부르디외는 사회적 자본을 ‘제도화됐건 제도화되지 않았건 상호 면식이 있어 알고 지내는 사이에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관계의 연결망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실제적이고 잠재적인 자원의 총합’으로 정의한다(Pierre Bourdieu 1986, 248).

콜먼 반면, 콜먼은 ‘생산적’이고 특정한 목적을 성취할 수 있는 기능적 차원에 입각해 사회적 자본을 개념화한다. 콜먼의 사회적 자본 개념은 개인의 인적 자본과 달리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한 개인과 공동체 또는 개인과의 관계망을 통해 발현되는 것으로 정의되지만, 그 사회적 자본이 성취하는 목적은 철저히 생산적·기능적 차원에서 규정된다.

콜먼은 사회적 자본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신뢰’를 꼽는데 “강한 신뢰를 갖고 있는 집단은 신뢰가 없는 조직과 비교해 더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다”고 말한다(Coleman 1988, 100-101). 콜먼은 자신의 사회적 자본 개념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신뢰’를 일종의 신용적 구속에 가까운 개념으로 규정함으로써 생산적·기능적 차원으로 제한한다. 즉 신뢰를 자본관계의 맥락에서 파악하기 때문에 콜먼이 주목하는 사회적 자본의 상호성은 부와 신용의 관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콜먼에 따르면, 높은 사회적 지위가 유지되고 있는 농촌마을의 경우 이 마을의 가장 부유한 집안은 그들이 요구할 수 있는 많은 신용장을 갖고 있다(Coleman 1988, 103). 이와 같이 극단적인 ‘주고 받음’의 사회적·규범적 구속을 사회적 자본의 내용으로 이해하는 콜먼은 정치 영역에서의 ‘타협’을 사회적 자본의 의무감으로 파악한다. 콜먼에게 있어 신뢰는 일종의 거래를 위한 도구적 수단이다. 신뢰의 형성 역시 합리적 선택의 관점에 따라 비용과 이익의 문제에 기반해 있다.

이렇듯 콜먼의 사회적 자본 개념은 기능적 측면에 치우쳐 있다. 이런 문제에도 최근 사회적 자본 연구에서 콜먼을 개념적 전거로 자주 활용하는 이유는 재정 자본, 물적 자본, 인적 자본 등과 구분되는 사회구조적 맥락에서 사회적 자본 개념을 규명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콜먼이 제시하는 다른 여타의 자본과 구분되는 사회적 자본의 특성은 사회적 규범을 가능하게 하고, 개인의 사취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물적 자본이나 인적 자본과 달리 사회구조와 그에 속한 구성원들을 중심으로 사회적 자본 개념을 전개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사회구조의 구성원들을 중심으로 한다는 것은 물적 자본이나 인적 자본 등과 같이 개인 차원의 소유를 특정하는 것과 구별되는 것이다. 그러나 콜먼은 이 사회구조와 구성원들의 관계를 이익이라는 단일한 프리즘으로 규정함으로써 사회적 자본 개념을 이익과 효용의 관점에서 규정한다. 홉스의 자연상태를 극복하는 대안으로 종종 사회적 자본이 거론되지만,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상태’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을 콜먼의 사회적 자본 개념에서 찾는다면, 이익과 효용의 네트워크로 인해 ‘네트워크와 네트워크의 투쟁 상태’가 추가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익·효용에 기반한 사회적 자본의 일면성
뉴튼
뉴튼이 적절하게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사회적 자본이란 홉스적 자연상태를 변화시켜 덜 위험하고 더 쾌적한 것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무엇이어야 한다. 이는 자발적으로 집합행동을 촉진시킬 수 있는 협조적이고 안정적인 사회적·정치적 질서의 토대를 형성하고, 또한 시민이 자신의 갈등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게 하는 호의와 이해를 가져온다. 뉴튼은 콜먼의 사회적 개념, 즉 이익에 기반한 사회적 자본과 달리 ‘박애(fraternity)’ 개념의 사회과학적 유추를 통해 사회적 자본을 파악하고자 한다(Kenneth Newton 1997, 576). 박애의 차원에 정박한 사회적 자본 개념은 이익 또는 효용에 기초한 사회적 자본과는 판이하게 다른 사회적 연대 원리의 기반 위에 서있는 것이다.

뉴튼은 효율성을 중심으로 사회적 자본을 개념화하는 것에 비판적이다. 동일한 현상이 다른 기능과 결과를 낳거나 또는 상이한 현상이 동일한 기능과 결과를 낳을 수도 있기 때문에 사회현상을 그 기능이나 결과의 측면에서 정의하는 것은 단언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Newton 1997, 577). 또 사회적 자본이라는 개념규정 속에 결과와 기능을 포함시키는 것은 경험적인 조사의 문제 및 개념 정의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콜먼 개념의 전거와 논리적 모순 미분화된 사회적 자본 개념의 심각성은 정작 콜먼의 사회적 자본과 조응하기 어려운 자원봉사 활동과 관련한 사회적 자본 연구에서도 콜먼의 사회적 자본 개념을 중요한 전거로 활용하고 있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김영옥·권혜수 2011, 103-129). 한국의 시민 참여를 사회적 자본과 결부해 설명하는 연구에서도 콜먼의 ‘이익’에 기반한 사회적 자본 개념을 중요한 개념적 전거로 활용하고 있다(송경재 2013).

엄밀한 개념적 구분에 기초해서 본다면, 자원봉사나 시민 참여를 활성화하는 사회적 연대원리의 기반으로 작동하는 사회적 자본이나 이 활동을 기반으로 축적되는 사회적 자본의 성격을 이익과 효용에 정향된 사회적 자본 개념으로 파악하는 것은 논리적 모순을 야기한다. 자원봉사의 활성화가 이익과 효용의 원리에 따른 것인가? 시민 참여가 이익과 효용에 정향된 활동으로 설명되는 것이 타당한가? 이렇듯 기존에 사회적 자본 개념을 활용한 연구는 ‘시민 참여’ ‘시민적 전통’ ‘상호부조’ 등에 주목하면서도 부지불식간에 이익·효용에 기반한 사회적 자본 개념을 활용해 왔다. 그러나 바론(Baron)과 한난(Hannan)의 지적처럼 사회적 자본을 물적 자본이나 인적 자본과 같은 자본의 속성으로 분류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동안 사회적 자본 개념에는 박애, 인애, 동정심, 사랑 등에 기초한 사회적 연대 개념과 이익과 효용에 기반한 기능적 사회적 자본 개념이 미분화된 채 공존해 왔다.

■이타적-도덕적 가치에 정향된 사회적 자본

이익 정향적 사회적 자본 개념 비판
콜먼과 부르디외의 사회적 자본 개념이 상이한 이론적 전통과 계기에 기초해 있지만, 공교롭게도 이 두 입장은 이익 또는 효용이라는 차원에서 상당한 연관을 갖는다. 퍼트넘의 사회적 자본 개념 역시 상당한 정도로 이익과 효용의 목적에 정향돼 있다. 국내 한 연구는 이 이익과 효용의 목적을 공통분모로 하는 사회적 자본 개념을 ‘자기이해(self-interest)의 단일동기론’으로 규정한 바 있다. 그동안 사회적 자본의 논의는 이익에 기반한 사회적 자본, 즉 ‘자기이해의 단일동기론’으로 포착할 수 없는 도덕적 가치에 정향된 사회적 자본을 애매한 형태로 접합해 왔다.

그러나 이 개념적 차이는 뭉뚱그려 접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구분돼야 하는 것이다. 일찍이 아담 스미스가 “인간이 아무리 이기적이라고 상정될지라도 인간의 본성 속에는 타인들의 운명에 관심을 갖게 하고, 타인들의 행복을 보는 기쁨을 제외하고, 이 타인의 행복으로부터 아무것도 얻지 못하더라도, 이 행복을 그에게 필수적이게 하는 몇몇 원리들이 있다”(Adam Smith 1759, I. I. I. 1.)고 갈파한 것과 같이 자기 이익의 차원에서는 해석할 수 없는 또 다른 인간의 본성적 사회성이 존재한다. 인애는 일방적 의미에서든, 교호적 의미에서든 결코 이기적일 수 없다. 공감, 사랑, 동정심은 이기심으로 분해될 수도, 조립될 수도 없는 것이다(황태연 2015, 418).

도덕적 가치에 정향된 사회적 자본의 대표적 사례가 자원봉사나 나눔 활동이다. 자원봉사나 나눔 활동이야 말로 아담 스미스가 적절히 지적한 바와 같이 자기의 이익과 무관한 즐거움 또는 공감적 만족의 차원에서 설명돼야 한다. 이 즐거움과 공감적 만족은 사전적일 수도 있고 사후적일 수도 있다. 사회적 자본은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을 양산하는데 기여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의 공동선을 지향하는 시민 공동체의성원으로 만드는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사회적 자본의 역할은 ‘사회적 의무감 또는 사회의식 없이 사익과 지대를 추구하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개인을 공동의 이익과 공공선을 지향하는 시민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탈바꿈시킴으로써 사회를 하나로 묶어주는 접착제의 역할’(Newton 1999, 4)에서 제대로 찾아질 수 있는 것이다.

최근 나눔이나 기부, 자원봉사, 시민 참여 등에 미치는 사회적 자본의 영향이나 ‘마을 만들기’ 또는 ‘마을 공동체’와 관련한 사회적 자본의 규범적 연구들에서 주목하는 사회적 자본의 개념과 역할은 이익과 효용에 기반한 사회적 자본과는 구분되는 것이다(김혜연 2011 ; 이승철 2012 ; 송경재 2013 ; 노병찬·주덕 2016).

사회적 자본 개념의 미분화와 호혜성
이익에 정향된 사회적 자본 개념과 도덕적 가치에 정향된 사회적 자본 개념은 양립가능한가? 다수의 사회적 자본 이론가들은 사회적 자본 개념에 내재한 이런 이중적 가치 정향에 대해 어느 정도 감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작 사회적 자본에 대한 논의에서는 여전히 이 두 차이를 미분화된 개념으로 접합한 채 사용하고 있다. 특히 퍼트넘의 경우가 대표적인데, 그는 줄곧 ‘효율성’을 중시하는 콜먼의 사회적 개념과 거의 흡사한 사회적 자본 개념을 사용하면서 효율과 거리가 먼 사회연대 원리를 설명하려고 한다. 퍼트넘의 정의에 따르면, 사회적 자본은 ‘협력적 행위를 촉진시켜 사회적 효율성을 향상시킬 수 있는 사회 조직(신뢰, 규범, 그리고 네트워크 등)의 속성’(Putnam1994, 167)이다. 실제 퍼트넘은 이 효율적 사회적 자본의 개념화를 위한 전거로 생산성과 결부된 콜먼의 사회적 자본 개념을 인용하고 있다.

동시에 퍼트넘은 자발적 협력의 활성화는 호혜성의 규범과 시민적 참여 네트워크의 활성화와 같이 사회적 자본이 충분히 축적된 공동체에서 더 쉽게 달성된다고 말한다. 앞선 효율성에 기초한 사회적 자본 정의에 입각해 본다면, 호혜성의 규범과 시민적 참여의 지향이 효율성에 정향돼 있어야 하는 모순이 발생하는 것이다.

퍼트넘은 호혜성을 단일하게 개념화하지 않고 그 내적 차이를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사무실에서 명절선물을 교환하거나, 국회의원들의 주고받기식 입법과 같은 일종의 거래에 해당하는 즉각적인 등가교환식의 호혜성과 특정한 보상을 바라지 않기 때문에 등가교환 자체가 성립할 수 없는 호혜성이 그것이다. 퍼트넘이 이 둘을 의도적으로 구분하고 있는 것은 이익과 효용에 기초하지 않는 우정과 같은 규범의 특성을 인지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퍼트넘은 전자의 경우를 ‘균형잡힌(balanced 또는 specific)’ 호혜성으로 개념화하고, 후자의 경우를 특정 시기에는 보상을 받지 못하거나 가치가 다를 수 있는 지속적인 교환 관계를 지칭하는 ‘포괄적(generalized 또는 diffuse)’ 호혜성으로 달리 개념화한다(Putnam 1994, 172).

그런데 퍼트넘은 이 포괄적 호혜성의 범주를 이익이나 효용과 구분되는 특성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포괄적 호혜성의 규범을 사회적 자본의 매우 생산적 요소’(Putnam 1994, 172)로 규정함으로써 즉각적인 이익으로 환수되지 않는 호혜성을 균형잡힌 호혜성과 애써 구분한 성과를 다시 무효화시킨다. 그리고 그는 포괄적 호혜성의 생산적 특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부연한다.

“이 규범이 통용되는 공동체에서는 기회주의를 보다 효율적으로 억제할 수 있고, 집단행동의 문제도 해소할 수 있다. 포괄적 호혜성은 개별이익(self-interest)과 연대성의 갈등을 해소”해 준다. 포괄적 호혜성의 ‘효율적’ 규범은 사회적 교환의 밀도 높은 네트워크와 연관돼 있을 가능성이 높다. 어떤 사회든 공식적, 비공식적인 개인 상호 간의 의사소통과 교환관계의 네트워크에 의해 특징 지워진다(Putnam 1994,172).

결국 퍼트넘은 포괄적 호혜성을 생산적·효율적 차원으로 규정함으로써 사회적 자본 개념의 분화를 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 포괄적 호혜성 마저 다시 효율성의 영역으로 가두고 만다. 사랑과 우정, 동정심, 도덕성, 사회성 등 인간의 본성적 공감 작용을 통해 구성되는 포괄적 호혜성이 산출하는 규범은 ‘사회적 거울’(Hume)의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교환의 네트워크를 도덕적, 사회적으로 떠받치는 지지대의 역할을 하는 영역이다. 마음의 습관(Habits of heart)을 만들어내는 사회화의 역할은 대부분 수평적 결사체, 특히 상당히 강렬한 관계를 갖는 비공식적 집단에 의해 수행되는 경향이 강하다(Newton 1997, 581-582). 포괄적 호혜성의 역할은 생산적 요소라기보다는 바로 마음이 습관을 만들어내는 지속적 규범의 축적에서 찾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퍼트넘은 저서 ‘우리 아이들’에서 빈부격차가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어떻게 파괴했는지 집요하게 추적한다. 그는 1950년에 포트클린턴에 살았던 아이들과 오늘날 아이들의 차이를 ‘기회격차’에서 찾고, 우리가 상당시간 동안 공동체적이며 평등주의적이었던 시대의 가정과 공동체, 공공기관의 역할을 간과해 왔다고 고백한다(퍼트넘 2017).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정작 우리 아이들의 기회격차를 파괴한 것은 빈부격차가 아니라, 파괴된 포괄적 호혜성에 책임이 있어 보인다.

실제 퍼트넘이 우리 아이들에서 정교하게 추적, 고발하고 있는 것은 포괄적 호혜성이 파괴된 이후의 심각한 후유증이기 때문이다. 1950년에도 빈부격차가 심했지만, 기회의 평등이 유지됐던 사실을 상기해 본다면, 빈부격차가 원인이 아니라 포괄적 호혜성의 파괴가 비단 우리 아이들만이 아니라 우리들, 그리고 우리 부모들에게도 심각한 후유증을 가져온 문제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포괄적 호혜성은 효율성의 영역으로 제한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고, 사회적 자본의 규범성을 엄호하고, 지지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퍼트넘의 사회적 자본과 딜레마

자발적 협력의 동인 : 상호이익
퍼트넘은 ‘집합행동(Collective Action)의 딜레마’를 해결하려고 시도한 기존의 전통적인 방식, 즉 정부에 의한 해법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 대안을 사회적 자본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퍼트넘이 적절히 지적하고 있듯이 ‘공유지의 비극’ ‘공공재’ ‘집합행동의 논리’ ‘죄수의 딜레마’ 등은 상호신뢰가 부재한 상황에서 개인은 배신하고 ‘무임승차(free rider)’하려는 유인체계를 갖게 된다는 점을 입증하는 논의들이다. 합리적인 개인들 사이에 신뢰가 형성되지 못할 때, 행위자들은 배신의 위협에 직면해 결국 합리적이지 않은 방법을 선택하게 된다.

퍼트넘도 전통적인 홉스의 해결책, 즉 ‘리바이어던’을 통한 제3자의 강제개입 방식이 신뢰 형성의 대안이 아니라는 점에 동의한다. 퍼트넘이 이 ‘제3자 강제개입’을 통한 해결책이 비현실적이라고 보는 이유는 폭력과 강제에 의존하는 정도가 큰 사회는, 그렇지 않고 다른 수단에 의해 신뢰가 유지되는 사회에 비해 덜 효율적이고, 유지비용도 많이 들며, 삶의 질도 떨어지기 때문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불편부당한 강제가 공공재라는 사실에 있다. 제3자에 의한 강제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제3자에 대한 신뢰가 전제돼야 하는데, 어떤 권력도 이 제3자가 ‘배반’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장할 수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 즉 권력자들이 사회 전체의 이익을 희생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권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제3자에 의한 강제가 ‘안정적 균형’, 즉 어떤 행위자도 자신의 행위를 바꿀 유인체계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만들지 못한다(Putnam 1994, 164-165). 퍼트넘은 자발적 협력에서 대안을 찾는다.

“이런 이론(죄수의 딜레마와 같은 게임이론-인용자)은 자발적인 협력의 가능성을 지나치게 낮게 보고 있기 때문에 틀렸다. 우리는 이론이 예측하는 것과는 다른, 현실적으로 오랜 역사에 걸쳐 진행돼 온 협력의 예를 고려해야 한다.”(Putnam 1994, 165) 퍼트넘은 중부 이탈리아 농부들 사이에 형성된 오랜 협력과 개척시기 미국에서의 곳간 건설 과정에서 발생한 자발적인 협력에 주목한다. 중요한 것은 이 자발적 협력의 동인이 무엇인지 여부다. 포괄적 호혜성의 차원에서라면, 이 동인은 이익과는 다른 인간의 사회성을 풍요롭게 하는 어떤 것이어야 할 것이다. 등가교환식의 호혜성이라면, 이 동인은 이익의 차원이 될 것이다. 퍼트넘이 자발적 협력의 동인으로 제시하는 것은 ‘상호이익’이다.

그는 자발적 협력이 사회적 자본에 의해 촉진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사례로 모든 대륙에 존재하는 비공식적 조직인 저축기구의 한 형태인 ‘계’(rotating credit association)를 제시한다. 계 조직은 사회성과 함께 작은 규모의 자본 축적이 결합된 것이 특징이다. 아무리 사교적인 성격의 계라도 사회적 유흥이나 이타심 이상의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협력은 모든 구성원이 공유하는 ‘일반적 윤리나 사회의 유기체적 속성’(강조 인용자)에 기초한 것이 아니다. 참여하는 구성원들이 지니는 상호이익에 기초해 있다(Putnam 1994, 167).

그런데 이 계 조직은 단순한 경제적 제도 이상의 것으로서 촌락의 전체적 유대감을 강화시키는 기제로 기능한다. 이 사회적 유대감은 도덕적 자원의 속성을 말한다. 도덕적 자원은 사용하면 할수록 그 공급이 많아지고, 사용되지 않으면 고갈되는 속성을 지닌 자원이다(Putnam 1994, 169). 도덕적 가치에 정향된 사회적 자본이 일단 형성되고 나면, 그 가치의 확장은 점차 자립적으로 이뤄지는 특성이 있다. 그런데 퍼트넘은 다른 전통적 자본과 같은 맥락 속에서 사회적 자본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인지 도덕자원으로서의 계조직이 갖는 특성에 대해서는 거의 주목하지 않는다.

퍼트넘이 개념화하는 사회적 자본은 정상적인 신용시장(credit markets)에 접근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담보물로 기능한다. 퍼트넘은 신뢰에 기반한 인적 담보 차원에서 사회적 자본을 파악한다. 담보란 쌍방의 계약에서 빚을 갚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그 빚을 대신 할 수 있는 신용으로 받는 것을 말한다. 이는 도덕적 자원에 기초한 신뢰가 아니라, 콜먼이 정의한 자본의 원리에 따른 신용의 의미에 가깝다. 이것이 퍼트넘의 사회적 자본 개념이 갖는 일종의 딜레마다. 퍼트넘이 강조하고 있듯이 신뢰는 사유재의 성격을 갖는 전통적 자본과 달리 규범, 네트워크와 더불어 사회적 자본을 구성하고, 공공재적 특성을 갖는 핵심 개념이다. 사회적 자본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구성요소가 신뢰다.

퍼트넘은 이 신뢰 개념에 입각해 이탈리아에서 사회적 자본의 차이를 드러내려고 시도했다. 나폴리와는 달리 이탈리아의 시민적 지역에서는 이 사회적 신뢰의 존재로 인해 경제적 역동성과 정부의 성과가 유지됐다는 것이다. 협력이 요구되는 분야는 입법부와 행정부 사이, 노동자와 경영자 사이, 정당사이, 정부와 민간집단 사이, 작은 회사 사이 등과 같이 사회 각 부문에 존재한다. 이 협력에 윤활유적 역할을 하는 것이 신뢰다. 공동체 내 신뢰의 수준이 높으면 높을수록 협력의 가능성은 높아진다. 그리고 또한 이 협력은 신뢰를 가져오는 선순환 구조를 이룬다(Putnam 1994, 170-171).

이런 사회적 자본 개념을 통해 퍼트넘이 이탈리아 지역 자치제를 분석해 얻은 결론은 다음과 같다. 적어도 1천년동안 북부와 남부는 집합행동의 딜레마를 해결하는데 매우 상이한 방식으로 접근해 왔다. 북부에서는 사회적 자본 구성요소인 호혜성의 규범과 ‘시민적 참여의 네트워크’가 타워 사회, 상호부조 모임, 협동조합, 노동조합, 심지어는 축구클럽과 문인동우회 등에 내재돼 있었다. 반면, 남부에서는 이런 호혜성의 규범과 시민적 참여 네트워크가 취약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정치적 관계가 수직적으로 구조화돼 있었다. 북부는 수평적 시민적 유대에 기초한 사회적 자본으로 인해 남부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경제 발전과 제도적 성과를 누릴 수 있었다(Putnam 1994, 181-182).

앞선 논의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퍼트넘은 호혜성과 규범에 기초한 사회적 연대성을 사회적 자본의 한 축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상호이익 또는 생산성, 효율성에서 사회적 자본의 형성과 작동의 동기를 찾는다. 수평적 시민 유대가 높고 사회적 자본이 발전한 북부 이탈리아의 성과는 경제 발전과 제도적 성과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수평적인 시민적 유대가 발전한 국가는 항상 이런 성과로 귀결될 수 있어야 하고, 역으로 경제적으로 발전한 국가는 생산적인 사회적 자본을 양산해야 한다는 논리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퍼트넘 자신이 우리 아이들에서 분석하고 있듯이 현대 사회에서는 국가 경제가 성장했는데, 사회적 자본이 파괴된 사례가 더 보편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지 않은가?

사회적 자본의 반사회적 부정성
흔히 사회적 자본에 관한 논의들은 “사회적 자본이 축적된 사회에서는 국가의 개입 없이도 시민사회의 자발적 협력을 통해 공공재의 생산이 가능하게 돼 공동체의 삶이 보다 효율적이고 자유롭고 풍요로워진다”고 말한다(유재원 2000, 24-25). 과연 그런가? 사회적 자본은 항상 선한가? 이 물음은 이익이나 효용에 기초해 사회적 자본을 개념화할 경우 피해갈 수 없는 본질적인 비판이다. IT분야의 벤처사업가가 갖는 사회적 네트워크가 대기업과의 제휴를 유인하는 효과가 높다(최영근 2012)고 할 때, 이 사업가가 갖는 사회적 자본은 분명 이익과 효용에 기초해 있다. 그러나 이 사회적 자본을 선하다고 할 수는 없다. 지역 정서가 유난히 강한 지역 출신이어서 그 지역의 몰표를 받아 선거에서 승리한 경우는 어떤가? 이익과 효용에 기초한 사회적 자본의 개념에 입각해 본다면, 이는 아주 유용한 사회적 자본의 작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도시 갱단, 님비(Nimby)운동, 파워 엘리트들을 넓은 시각에서 보면 반사회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자기들에게 유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네트워크를 이용하는 것은 이익과 효용에 기반한 사회적 자본의 전형적 모습이다. 퍼트넘은 자신의 Making Democracy Work에서 정치경제적 성공을 설명하기 위한 수단(독립변수)으로써 사회적 자본을 설정하고,그 긍정성을 부각시키는 과정에서 이 반사회적 부작용에 대해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 홀로 볼링’에서는 “사회적 자본 역시 다른 모든 형태의 자본과 마찬가지로 악의적이고 반사회적인 의도를 지향할 수 있다”고 인정한다(퍼트넘 2016, 24). 따라서 상부상조, 협조, 신뢰, 제도적 효율성 같은 사회적 자본의 긍정적 효과를 극대화하고 파벌주의, 인종주의, 부패 같은 부정적 결과를 최소화할 수 있는가를 따지는 일이 중요하다고 제안한다(퍼트넘 2016, 25).

퍼트넘은 내부 지향적이며, 네트워크의 배타적 정체성과 단체의 동질성을 강화하는 사회적 자본의 유형을 ‘결속’(bonding) 혹은 배타적 유형으로 구분한다. 같은 인종에게만 자선과 구호사업을 벌이는 단체나 회원에게만 혜택을 주는 유형들이 여기 속한다. 반면, 외부 지향적이며 다양한 사회적 계층을 망라하는 사람들이 모인 네트워크를 ‘연계’(bridging) 혹은 포용적 유형으로 구분한다. 연계형 사회적 자본의 예로는 민권운동, 많은 청년 봉사단체, 초교파적 종교 단체 등을 들 수 있다. 결속형 사회적 자본은 ‘당장 무엇을 손에 넣는데’(getting by) 좋은 반면, 연계형 사회적 자본은 ‘앞으로 나아가는데’(getting ahead) 아주 중요하다. 결속형 사회적 자본은 일종의 사회학적 강력접착제 역할을 하고, 연계형 사회적 자본은 사회학적 윤활유 역할을 한다(퍼트넘 2016, 25-27).

퍼트넘은 이 결속형 사회적 자본이 자기 집단에 대한 강력한 충성심을 창출함으로써 외부에 대해서는 강한 적대감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면서도, 많은 경우 결속형과 연계형 사회적 자본은 모두 엄청나게 긍정적인 사회적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고 말한다(퍼트넘 2016, 27). 사회적 자본 개념에 내재한 반사회적 위험, 즉 테러, 조직적 범죄, 인종 간 적개심, 자원의 불공평한 배분 등의 문제(홍성운 2012,135)를 인지하고, 사회적 자본의 네트워크를 결속형과 연계형으로 구분했지만, 퍼트넘은 다시금 긍정적 사회적 효과에 대한 기대로 이 구분을 봉합한다.

그러나 이 문제는 퍼트넘 자신이 나 홀로 볼링의 결론에서 “진보의 시대의 ‘시민적 혁신’이 모두 진보적이고 유익하지는 않았다. 개혁이 먼저 이뤄진 이 시대로부터 현재 미국의 문제를 치유할 수 있는 영감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은 공동체의 강조가 분열과 배제를 심화시킬 수도 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퍼트넘 2016, 667)고 언급했듯이 여전히 중요한 과제로 남아있다. 사회적 자본은 최소한 폐쇄적 맴버십과 귀속적 정체성에 기초한 파벌적 네크워크의 기능적 확산을 지양할 수 있는 방향으로 정립될 필요가 있다.

■맺으며
퍼트넘은 콜먼과 부르디외가 사회적 자본을 논의하면서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던 정치적 영역과 사회적 자본의 연관에 주목했고, 이를 이탈리아와 미국 사회를 분석하면서 사례로 연구로 풀어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퍼트넘은 사회적 자본에 관한 한 개념의 이론가보다는 적용의 이론가라고 할 수 있다. 퍼트넘은 사회적 자본의 핵심 구성요소로 신뢰, 규범, 네트워크를 제시함으로써 사회적 자본을 실체적 분석 대상으로 만드는데 기여했다. 실제 퍼트넘은 그동안 사회적 자본 영역에서 구체적 지표로 평가되지 않았던 ‘제도적 성취’ ‘시민적 참여의 전통’을 비롯해 몇몇 지표들을 실체화했고, 그 작업은 어느 정도 성공했다. 그러나 계량화를 통한 지표 산출의 강박 때문인지는 몰라도 퍼트넘의 사회적 자본 개념은 상당부분 이익과 효용에 기초한 사회적 자본 개념에 치우쳐 있다.

뉴튼의 경고
퍼트넘의 미분화된 사회적 자본 개념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데 있어 사회적 연결망과 사회적 신뢰를 사회적 자본 연구의 핵심 키워드로 이해하는 뉴튼의 경고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첫째, 규범과 가치의 문제와 사회적 연결망이라는 조직은 개념적으로 분리해서 사용해야 한다. 둘째, 사회적 연결망이 사회적·정치적 삶에 필수적인 신뢰를 만들어 내는가 혹은 반대로 광범위한 신뢰의 존재가 사회적 연결망을 만들어내는가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Newton 1997, 577).
이에 더해 향후 사회적 자본 연구에서는 이익과 효용에 정향된 사회적 자본과 도덕적 가치와 사회성, 공공선에 기초한 사회적 자본의 차이가 보다 본질적으로 규명될 필요가 있다.

국가와 시장이 효율적으로 작동한다는 것이 곧 민주주의의 발전이나 도덕적 규범의 사회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적 자본 개념을 적용해서 “활성화된 시민사회(vigorous civil society)가 있는 곳에는 민주적 정부가 더욱 강화된다는 토크빌의 견해는 옳았다”(Putnam 1994, 182)는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시민사회의 활성화가 어떤 가치를 향하는 것인지 보다 정교하게 규명될 필요가 있다.

개념의 정교화 필요 : 신뢰 축적과 작동원리
퍼트넘은 부르디외나 콜먼과 달리 사회적 자본을 해당 사회의 문화적·조직적 특성으로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이탈리아의 남부와 북부의 차이를 사회적 자본의 차이로 설명한 그는 해당 사회의 전통이 신뢰나 협동과 같은 호혜성에 기반한 가치나 관계를 어느 정도나 뒷받침하고 있는가에 주목했다. 이를 바탕으로 한 사회의 주어진 문화적 전통이 ‘시민적 참여’를 강조하는가, 아니면 ‘비도덕적 가족주의’(amoral familism)에 침윤돼 있는가를 구분해 사회적 자본이란 ‘상호 간 이익을 위한 협력과 협동을 촉진시키는 연결망, 규범, 사회적 신뢰와 같은 사회조직의 특성’(Putnam 1995, 67)이라고 정의했다. 여기에서도 상호 간의 ‘이익’을 중요한 준거로 활용했다. 하버마스의 관점에서 보자면, 체계의 작동원리라고 할 수 있는 권력과 자본의 논리가 생활세계의 측정지표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향후 사회적 자본 개념을 보다 더 개념적으로 정교화하기 위해서는 신뢰의 축적과 작동원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퍼트넘은 신뢰의 원리를 외재적 요소에 근거해 풀어가려고 했다. 물론 포괄적 호혜성의 규범을 언급하고는 있지만, 다시 생산성과 효율성에 복무하는지 여부로 귀결됨으로써 한계를 보였다. 사회적 자본의 영역에서 보자면, 신뢰와 직접적인 연관을 갖는 사회적 연대성은 상호이익(또는 상호성, 호혜성)을 초월해 있는 것이다. 사랑, 우정, 박애, 연민, 돌봄의 가치가 분명 사회적 자본의 주춧돌이라고 한다면, 이를 상호이익과 공리주의로 포섭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대접받기를 바라는 대로 하라’는 도덕적 골든 룰(Golden Rule)은 자기가 남에게 먼저 베풀더라도 나중에 대접받기를 기대하는 공리적 상호주의가 아니라, 나중에 대접을 받든 안 받든 관계없이 남을 먼저 생각하라는 헌신적 사람사랑에 기초한 것이다.

“상호주의적 행위는 세리도 하는 짓이다(마 6장 46절).”(황태연 2015, 1641. 참조)

비록 인간 사이에서 행위를 동기화하는 자기 이익 위주의 거래(commerce)가 사회의 주류를 이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정과 상호부조라는 더욱 관대하고 고귀한 교류(intercourse)의 가치가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내가 사랑하며 각별히 친숙한 사람에게 나의 이득을 전혀 예상하지 않더라도 품들일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 이영재 한양대학교 공공정책대학원 교수는 이 논문이 2016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NRF-2016S1A5B5A07919701)임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