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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자치는 ‘개밥의 도토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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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자치는 ‘개밥의 도토리’가 아니다
  • 전상직 한국자치학회 회장·본지 발행인
  • 승인 2013.08.01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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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상직 한국자치학회 회장·본지 발행인.
전상직 한국자치학회 회장·본지 발행인.

지금의 ‘주민자치위원회’는 행정의 말단인 읍면동에 자치권이 전혀 없는 말 그대로 ‘위원회’로 존치시키면서 주민이 아닌 읍면동장이 구성하고, 마을의 일이 아닌 읍면동장의 일을 하고 있다. 주민이 구성하지 않은 ‘주민자치위원회’는 주민과 격리돼 주민으로부터 ‘도토리’가 되고 있으며, ‘주민자치’는 공무원으로부터 도토리 취급을 당하고 있다. 어쩌다가 주민자치위원회와 주민자치가 도토리가 돼버렸는가! 생각할수록 더러는 분하고, 더러는 서글프고, 더러는 비참하게 느껴진다.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움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주민자치중앙회’가 결연하게 나서서 도토리신세가 돼버린 주민자치를 구출해 제자리에 바로 위치시키려는 노력에 진심으로 경의를 표한다. 자치는 절대로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다. 자유가 존재를 온전하게 걸고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자치는 생활을 온전하게 걸어서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주민이 합심하도록 하고, 주민이 함께하도록 만드는 어렵고도 역사적인 일을 정부가 주도하지 않고, 주민 스스로 솔선해 나서는 용기에 찬사와 격려를 보낸다. 한국주민자치중앙회의 착한 동기가 착실한 과정을 거쳐서 아름답게 꽃으로 피고, 튼실하게 열매 맺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중앙정부를 향해서는 자치-분권을 목청껏 외치는 단체장들이 주민이 자치-분권을 요구하면 곧바로 입을 다물고 냉담해진다. 단체장이 하는 것은 ‘자치’지만 주민이 하는 것이 자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주민자치 없이 공무원끼리 자치를 한다면 중앙에서 하던, 지방에서 하던, 잘 만든 규정과 정직하고 성실한 공무원만 있으면 되지, 굳이 ‘선출직 단체장’ 같은 자치제도는 필요 없다.

 

행정과 자치는 전혀 다르다

선출직 단체장은 국가의 위임 사무를 처리하는 것만이 아니라, 지역의 주민을 지역의 주인으로 만들고, 지역의 역량이 지역의 발전을 위해 발휘되도록 동기를 부여하고, 효과적인 틀거리를 구축하는, 말하자면 주민자치를 할 때 더 큰 의미가 있다.

그러나 조례제정에 관한 권한과 예산편성의 권한과 행정사무의 권한을 모두 거머쥐고 있는 제왕적 단체장에게 주민자치는 거추장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공무원을 동원하면 훨씬 더 손쉽게 할 수 있는데, 굳이 주민자치로 할 필요가 있는가. 단체장의 생각이 이러할 진대 단체장의 지휘를 받는 읍면동장은 어떠할까?

주민자치가 소란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거나 자신들의 입지를 축소시키는 것에 불과하다고 여긴다. 그래서 조례로 정해진 일이니 하기는 하지만 도저히 주민자치를 할 수 없도록 갖은 지혜를 동원해 제약을 가하고 장애를 만들어 버린다. 그것이 바로 주민자치위원회를 도토리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단체장의 친분으로, 의원의 연고로, 정당의 기반으로 주민자치위윈회에 진입한 위원들은 주민자치에는 소홀할 수 있지만, 본인들의 처우에는 민감해 읍면동장의 잘잘못에 대해서 목소리를 높이게 된다. 여기에서 주민자치위원회의 악순환의 고리가 형성된다. 주민자치의 본질을 떠나서 읍면동의 정치-행정 구도에 편입돼 정치적이고 행정적인 역할에 몰두하고, 본연의 임무인 자치에는 소홀하고 만다. 그래서 주민자치위원회는 읍면동과 주민, 그리고 마을에서 도토리가 되고 만다. 행정과 자치는 전혀 다르다. 법규, 명령, 예산으로 정형화된 일을 안정적으로 하는 것이 행정이라면, 마을의 다원성, 주민의 다양성, 내용의 다층성을 모두 담아내는 과정과 숙성시키는 비정형적인 과정이 바로 자치다. 행정과 자치의 관계는 어떤 경우에는 모순矛盾이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대당對當 관계이기도 하다.

 

주민자치는 주민의 몫이다

지난 십 수년간 주민자치는 거의 대부분 단체장과 국·과장의 친분으로 선정된 행정학 교수나 주민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운동가들에게 주민자치 교육을 맡겨서 주민-자치로 이뤄지는 과정을 공무원-행정 혹은 시민-운동으로 대체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이제 주민-자치의 기본에 충실할 수 있도록 바로 잡아야 한다.

먼저, 단체장들이 주민자치에 대해서 올바른 견해를 가질 수 있도록 시군구 주민자치회가 단체장을 설득해야 한다. 면담과 학술·정책행사로 설득하고, 필요하면 주민자치 발전을 위한 의지를 담아 계획을 수립해 제안해야 한다. 그것도 부족하면 단체장이 용기를 얻을 수 있도록 주민자치회가 단체장에게 힘을 실어줘야 한다. 주민자치회가 나서서 주민자치 실질화를 위한 사업계획을 수립해 능동적으로 제안해야 한다. 필요한 예산이 있으면 당당하게 요구를 해야 한다. 필요한 일이 있으면 구체적으로 연구해야 한다. 그것이 단체장이 주민자치를 위해 필요한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또 시군구의원들이 주민자치에 대해 충분한 이해를 가질 수 있도록 시군구 주민자치회가 나서야 한다. 주민자치 실질화에 필요한 일들에 대해서 공감을 나눌 수 있는 학술·정책행사를 규모에 관계없이 자주 만들고 주민과 함께 구정의 설명을 요청해 주민자치에 대한 의원들의 소신을 밝힐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주민자치의 안목으로 예산을 심의하고, 사무를 감사해 주민자치 실질화에 앞장 설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고, 주민자치의 실질화가 이뤄질 수 있도록 조례를 개정하고, 제정할 수 있도록 시군구 주민자치회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조례개정과 제정요구를 해야 한다.

주민자치가 행정과 주민, 그리고 마을에서 도토리 신세를 면하는 데 요구되는 일들은 각각의 단위에서 주민자치회가 주민자치를 실질화함으로써 저절로 이뤄진다. 주민자치는 주민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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