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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없는, 세상 어디에나 있는 후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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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없는, 세상 어디에나 있는 후계동
  • 박소원 씨앤씨티에너지 마케팅 이사
  • 승인 2022.03.21 10: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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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이 있는 풍경

이 동네가 참 좋았대. 그 말이 니가 좋았다는 말로 들리더라.”

드라마 나의 아저씨는 내가 두 번이나 본 유일한 드라마인 것 같다. 그 드라마의 대사가 마음에 콕 박혔다. 우리에게, 누군가가 있어 그 동네가 참 좋아지는 누군가가 있는가? 그 누군가로 인해 참 좋아진 동네가 있는가?

2018tvN에서 방영된 나의 아저씨는 서울 어딘가 있는 마을을 배경으로 만들어졌지만 서울 어디에도 없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후계동! 드라마 속 후계동은 후계역, 후계 조기축구회, 후계 청소용역사무소, 후계 식당 등의 이름으로 빈번하게 존재감을 드러낸다. 후계라고 발음하면 솔직히 후지다. ‘라는 글자는 의 반대편에 있는 루저의 이미지를 먼저 전해온다. 그런 이름처럼 그곳에는 세상에서 조금 밀려난 사람들이 모여 있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 한 장면(사진=tvN)
드라마 나의 아저씨 한 장면(사진=tvN)

 

지친 하루를 품어주지 못하는 도시

아내를 후배이자 직장의 대표에게 빼앗긴 남자가 있다. 그가 나의 아저씨. 그는 삼형제 중 둘째 아들인데 그나마 대기업 부장이라 변변치 않은 나머지 두 형제를 어깨에 짊어지고 사는 억울한 남자다. 그가 후계동에 산다. 후계동 중에서도 더 후진 언덕 위 달동네에 나의 아저씨직장의 계약직 소녀가 살고 있다. 부모의 빚을 물려받아 어린 나이부터 빚쟁이에 시달리다 그 빚쟁이를 살해한 소녀이다. 이제 스무 살이 넘어 어른이 되었지만 그녀의 외모는 여전히 성장하지 못한 소녀 같은 모습이다. 아니, 소녀의 외모 안에 세상 험한 꼴 다 겪은 노파가 살고 있다. 그녀의 이름은 지안(至安)이지만 평안에 이르는 것은 너무나 요원해 보인다.

아침이 되면 또각또각 발걸음 소리를 내며 다들 도심으로 출근을 한다. 늦은 저녁 그 지친 몸과 마음을 이끌고 후계동으로 돌아오기 전에는 그들도 화려한 도시의 직장인들이다. 아무도 그들의 출근 태생지를 알지 못한다. 번화가의 시민들처럼 보이게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그 지친 하루를 도시는 끝까지 품어주지 못한다. 후계동에서라면 다르다. 화려한 옷을 벗어버려도 되는 곳이다. 모두가 서로 속내를 아는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니까. 후계동 사람들은 마침내 그곳으로 돌아온다.

후계동 마을로 접어드는 초입 중앙에 허름한 술집이 하나 있다. 정희네!

예비고사 만점을 받은, 그 동네에서 가장 촉망받던 연인이 출가해서 불교에 입문한 뒤 홀로 남겨진 여인 정희, 그녀는 20년이 넘도록 아직 그를 기다리며 후계동 마을에 남아있다. 정희네가 문을 여는 저녁이 되면 늘 같은 멤버들이 몰려든다. 그들의 이야기는 수십 년 전부터 이어져오는 맥락이 있다. 모두가 그 서사를 공유하고 있고 각자가 서사의 일부이기도 하다.

 

서사를 공유한 사람들끼리의 위로

사람 알아버리면, 그 사람 알아버리면 그 사람이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어. 내가 널 알아

은행 부지점장이 있다. 대기업 부장이 있다. 제약회사 임원이 있다. 천재소리를 듣던 영화감독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이력으로부터 모두 떠나온 사람들이다. 지금 그들은 분식집을 하고 청소대행업을 한다. 아직 현역으로 제대로(?) 된 직장에 다니는 사람은 나의 아저씨뿐이다.

그들이 저녁이면 정희네로 모인다. 가끔 특별한 이벤트가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날은 그저 어제와 다를 바 없는 날이다. 어제의 이야기에 오늘을 이어간다. 중심에서 모두 밀려나 있지만 화평하다. 밝다. 여유롭다.

그들이 어둠에서 도저히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던 지안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나는 이 드라마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지안의 표현처럼 세 번까지는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지. 세 번을 넘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세상에서 그들은 아예 불쌍히 여김을 하지 않는다. 그들과 다르지 않은 사람으로 지안을 대하는 것이다. 지안의 사정을 묻지 않는다. 그저 자신들의 곁에 있어 주기를 바라고, 그들이 지안의 곁에 먼저 있어 주는 것으로 그녀를 받아들인다.

정희는 지안을 자신의 집에 머무르라고 한다. 지안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희 자신을 위해서라고 한다. 정희는 지안이 자기 곁에 머물러주는 것이 너무 감사하다. 늘 혼자였던 그녀에게 동거인이 생긴 것이다. 함께 곁에 있어주면 그 사람을 알게 된다. 지금까지 너의 삶이 어떠했는지 물을 필요가 없다. 그저 서로 곁에 있어주면 알게 되고 그 사람 알아버리면 그 사람이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어가 되는 것이다.

당신 마음 속 후계동

이야기의 절정은 지안의 할머니 장례식이다.

나의 아저씨의 형은 대기업 다니다 나와서 사업하다 빈털터리가 된 사람이다. 아내로부터 밀려나와 천재소리 듣던 영화감독 막내와 엄마 집에 머물고 있다. 친구가 하던 청소대행업을 물려받아 동생과 마을에 청소를 다닌다. 한 푼 두 푼 돈을 모아 빚을 갚고 아내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러나 신용불량자라 통장도 하나 만들 수 없는 그는 청소해서 모든 돈을 방안 장판 아래 깔아 둔다. 그런 그가 아껴 모아둔 돈을 지안 할머니의 장례비로 모두 내놓는다. 쓸쓸하던 장례식장은 따뜻한 활기를 얻는다. 후계동 사람들이 모여들어 마침내 장례식장 텅 빈 주차장에서 그들의 놀이 축구가 잔치처럼 펼쳐진다.

후진 마을, 그러나 후한 마을 후계동에는 높낮이가 없다. 다 낮거나 다 높거나.

후계동의 정희네에 모이는 사람들은 서로를 안다. 그 사람 알아버리면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다는 말은, 속사정을 알면 그가 무슨 짓을 해도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하게 된다는 뜻일 테다. 아는 것은 서로를 받아들인다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이다같은 층 옆집 사람도 모르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후계동은 꿈같은 마을이다.

당신 마음에는 후계동이 있습니까내 어제와 오늘의 맥락을 아는 그런 사람들의 동네, 후계동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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