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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보아야 보이는 것들 ‘결백’ ‘탐정 홍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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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보아야 보이는 것들 ‘결백’ ‘탐정 홍길동’
  • 윤성은 영화평론가
  • 승인 2022.05.25 09: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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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사람들 그리고 영화 Town in Movie

많은 영화의 배경이 마을이다. 영화 주인공들의 삶의 터전 역시 그들이 사는 마을이고 동네이기 때문이다. 스크린 속 인물들은 배경이 되는 마을, 그리고 이웃들과 때로 갈등하고 협력하며 여러 이야기들을 만들어나간다. 그 이야기의 결말은 해피엔딩이 되기도 하고 비극으로 치닫기도 한다. 앞으로 마을, 사람들 그리고 영화에서는 마을과 사람들의 케미스트리, 그들 사이의 교감과 성장, 변화를 다룬 작품들을 소개한다. 그 속에서 주민자치의 바람직한 방향, 때로 반면교사의 깨달음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편집자 주]

 

* 영화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결백’(감독 박상현, 2019)에서 오프닝 타이틀이 나오기 직전의 첫 시퀀스는 매우 인상적인 촬영을 보여준다. 첫 시퀀스가 중요하다고는 해도 끝까지 이 부분만큼 힘을 준 장면이 없다는 것이 좀 아쉽지만 여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어 보인다. 430초에 달하는 롱테이크로 찍은 장례식장의 모습이 곧 이 마을의 상황을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아비규환의 장례식장, 이야기의 발단이면서 결말

카메라는 청명한 하늘에서부터 시골의 전경으로 내려와 어느 한옥 상가집 앞에 멈춰서는 고급 승용차를 비춘다. 이 차에서 내려 성큼성큼 대문을 들어가는 이는 현재 이 마을 시장이자 도지사 후보로 출마한 추인회’(허준호).

중년 남자들 한 무리가 추인회를 반갑게 맞으며 평상에 앉히고 너나 할 것 없이 도지사 당선을 지지한다는 덕담을 들려준다. 대화 속에 추인회가 마을에 카지노를 유치해 주민들이 잘 살게 되었다는 말이 슬쩍 흘러나온다. 추인회는 함께 막걸리를 마시며 겸손한 척, 순진한 척 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상주에게 가는데, 툇마루에 나와 앉은 고인 안태수의 아내 화자’(배종옥)는 정신이 나간 듯 추인회의 인사도 받지 않고 꽃밭에서라는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다.

분향소에 있는 고인의 아들 정수’(홍경)도 어딘가 모자라 보인다. 카메라는 잠시 추인회를 내버려두고 옆방에서 나와 화자를 나무라는 고인의 동생을 따라간다. 그녀는 화자에게 이렇게 좋은 날엔이라는 노래 가사를 겨냥해 남편이 죽었는데 뭐가 그렇게 좋으냐며 서울 간 딸은 왜 오질 않느냐고 따진다. 딸 이야기가 나오자 화자도 정신이 드는 듯 발끈하며 애들 고모의 머리채를 잡는데 마당에는 이보다 더 큰 소란이 벌어져 있다. 방에서 뛰어나온 정수가 마당에 쓰러져 있는 한 남자의 틀니를 갖고 껑충껑충 뛰어다니는 모습과 함께 화면에는 여기저기서 구토를 하며 쓰러지는 남자들이 보인다. 아까 추인회와 함께 막걸리를 마셨던 사람들이다. 툇마루 앞에 있던 추인회도 곧 허연 토사물을 뿜으며 배를 잡고 쓰러진다.

정작 주인공은 등장하지 않지만 이 아비규환의 장례식장은 영화의 발단이면서 결말과도 같다. 스무 살 때 폭력적인 아빠, 무기력한 엄마와 연을 끊고 변호사가 된 정인’(신혜선)은 엄마가 막걸리에 농약을 탄 혐의로 구속되자 오랜만에 고향으로 내려간다.

정인이 보게 된 것은 예전보다 더 퇴보한 듯한 마을의 모습이다. 초동수사는 엉망이고 변호사도 무성의한데 여론은 이미 화자에게 불리하게 기울어져 있다. 이에 정인은 치매까지 걸린 엄마의 결백을 직접 입증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 다니지만 경찰과 검찰, 정치권까지 다 한 패로 엮여 있어 수많은 난관에 부닥친다. 단 한 사람, 그녀의 초등학교 동창인 양순경 만이 정인을 도와주는데, 두 사람은 끈질긴 수사 끝에 농약 막걸리 사건이 아주 오래 전 이 마을에서 있었던 정인 친아버지의 죽음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추인회, 안태수 및 막걸리를 마시고 쓰러졌던 남자들은 화자의 첫 남편을 죽였던 장본인들이고 추인회는 권력가들과 함께 카지노의 이권을 차지하려 오랫동안 준비해온 범죄자였던 것이다.

이 마을의 비극은 먼저, 수십 년 전에 일어났던 살인사건이 실족사로 위장되면서 발생한다. 가해자들은 다 잊혀진 일이라 생각했겠지만 침잠해 있던 그 사건은 결국 수면위로 떠올라 화자를 자극한다. 가해자 중 한 사람이었던 안태수의 가정폭력이나 추인회를 향한 협박은 그 잉걸불과도 같다. 농약 막걸리 사건은 결국 마을 사람들의 무관심과 무지, 해결되지 않았던 어두운 과거가 불러온 불행이다.

 

마을사람들의 무관심과 무지미해결의 어두운 과거가 불러온 불행

정인은 배후를 알 수 없는 폭행과 자동차 사고 등에 시달리면서도 수사에 매달린다. 정인이 이 마을을 떠나지 않았다면 그녀 또한 대부분의 주민들처럼 소문에 휩쓸리며 살았을지도 모르지만, 이제 정인은 외부인의 시선으로 그녀에게 트라우마를 남긴 고향의 면면과 사람들을 관찰한다. 그리고 추인회와 그 일당이 벌인 일들을 낱낱이 고발하면서 범죄 없는 마을이라는 허울을 벗겨 버린다. 처음에는 단지 엄마의 결백을 입증하는 것이 목표였지만, 그 결과가 지역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정인이 밝혀낸 불편한 진실 때문에 조용했던 마을은 소란스러워진다. 주민들은 자신의 아버지, 남편, 이웃이 살인자였고 사기꾼이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고름을 짜내는 고통을 감내하고 나면 그 곳에 새 살이 돋아난다는 사실이다.

영화는 종반부에서 일종의 반전을 준비해 놓고 있다. 그러나 사실상 새롭거나 예측 불가능한 반전은 아니다. 그래서 관객들은 범인의 정체에 놀라기보다 정인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 마지막 재판과 그 결과를 궁금해 하게 된다.

여기서 다시 영화의 첫 시퀀스를 상기해 보자. 추인회를 위시한 공범들이 막걸리를 마시고 토악질을 한다. 그 사단의 직전까지 화자는 능청스럽게 이렇게 좋은 날엔이라는 가사를 읊조렸고 자폐증이 있는 정수는 사람들이 쓰러지는 와중에도 히히덕거리며 아수라장이 된 장례식장을 휘젓고 다닌다. 이 공간에서 벌을 받는 사람들과 그들을 벌하고 조롱하는 사람들의 관계는 사회적 위계질서에서 전복된 것이다.

정인의 최종 선택 및 재판 결과, 즉 감독의 결정도 이와 다르지 않다. 정인의 대사에 등장하듯이 적어도 이 영화의 약자들은 이미 수십 년간 죄의 대가를 치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사필귀정의 잣대를 들이대자면 다소 불편할 수 있으나 심정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결말은 아닐 것이다.

장르나 분위기면에서 전혀 공통점이 없어 보일 만큼 다른 작품이지만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감독 조성희, 2016. 이하 홍길동’)에도 비슷한 설정이 등장한다. 흥신소에서 일하는 탐정 홍길동’(이제훈)은 마침내 20년 전 어머니를 죽인 원수 김병덕의 주소를 알아낸다. 그러나 호기롭게 강원도 명월리에 있는 김병덕의 집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다른 조직에 납치당한 후였고 어린 손녀 동이말순만 남겨진 상태다.

길동은 김병덕의 행방을 찾기 위해 아이들까지 데리고 다니며 여기저기 쑤셔보지만 별 소득은 없고 마을 곳곳에서 수상한 이들과 마주치기만 한다. 그러다 길동은 자신의 어머니를 알고 있는 강성일’(김성균)을 만나게 되는데 그는 막강한 세력을 등에 업은 비밀조직 광은회수장의 아들임이 밝혀진다.

광신도 집단이었던 광은회는 수십 년 전 그들이 만든 이 마을에서 사람들을 착취하고 온갖 잔악한 짓들을 자행해왔다. 세력이 커져 정계 및 군사의 요직까지 진출하자 그들은 과거를 지우기 위해 명월리 사람들 모두를 학살하려 음모를 꾸미는 중이다. 큰 충격 때문에 어린 시절의 기억이 지워졌었던 길동은 결국 이 곳이 자신의 고향이었고 엄마가 광은회에서 탈출하려다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된다. 그는 광은회를 탈출한 유일한 소년이었던 것이다.

 

과거 악의 싹에서 비롯된 비극외지 영웅의 활약?

명월리의 비극 또한 결백에서처럼 과거에 잘라내지 못한 악의 싹으로부터 비롯된다. 길동은 정인과 마찬가지로 고향을 떠나있었기에 이 마을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꿰뚫어 보게 된다. 길동의 동기도 처음에는 어머니의 원수를 갚는 것, 즉 지극히 사적인 것이었지만 두 소녀와 정이 들기 시작하면서 동이, 말순 자매를 구하고 나아가 마을의 학살을 막는 것으로 바뀌게 된다.

외부로부터 온 영웅이 위기에 빠진 마을을 구한다는 서사는 초기 서부극의 플롯이기도 하다. 잘못 응용하면 이것은 엘리트주의나 오리엔탈리즘이 되기도 한다. , 한 사람의 엘리트가 무지한 사람들을 일깨운다거나 도시의 자본이 시골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는 식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다.

결백은 마을의 비리를 파헤치면서도 정인 모녀의 관계를 계속 부각시킴으로써 그러한 비판을 비해간다. 모녀가 그 집안에 잠재한 역사의 상흔을 씻어냄으로써 비로소 마을도 정화된 것이다. ‘홍길동에는 소녀들을 비롯해 결백보다 많은 마을 사람들이 길동을 돕는 일에 동참하는 장면이 나온다. 물론 그것은 처음부터 대의를 위해서가 아닌, 착한 마음에서 비롯한 크고 작은 선행이었지만 나중에는 희생이 되고, 마을을 구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이 된다.

영화의 뒷맛이 깔끔한 것은 이처럼 윤리적 올바름 때문일 것이다. ‘홍길동은 본래 3부작까지 기획된 시리즈였는데 1편의 흥행이 기대에 못 미쳐 중단된 프로젝트로, 2, 3편을 보지 못하게 된 아쉬움이 남는다. 다소 시대를 앞서간 작품이었다고 평가해 본다.

 

사진=소니픽쳐스엔터테인먼트코리아㈜․()키다리이엔티/CJ E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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