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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마을을 떠나고 싶지 않은 이유 ‘벨파스트’ ‘집의 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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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마을을 떠나고 싶지 않은 이유 ‘벨파스트’ ‘집의 시간들’
  • 윤성은 영화평론가
  • 승인 2022.06.21 09: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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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사람들 그리고 영화_ Town in Movie

많은 영화의 배경이 마을이다. 영화 주인공들의 삶의 터전 역시 그들이 사는 마을이고 동네이기 때문이다. 스크린 속 인물들은 배경이 되는 마을, 그리고 이웃들과 때로 갈등하고 협력하며 여러 이야기들을 만들어나간다. 그 이야기의 결말은 해피엔딩이 되기도 하고 비극으로 치닫기도 한다. 앞으로 마을, 사람들 그리고 영화에서는 마을과 사람들의 케미스트리, 그들 사이의 교감과 성장, 변화를 다룬 작품들을 소개한다. 그 속에서 주민자치의 바람직한 방향, 때로 반면교사의 깨달음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편집자 주]

* 영화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사를 앞두고 마을을 떠나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이사에 수반되는 정신적 스트레스나 비용 문제 때문이 아니라 지금 살고 있는 동네가 살기 좋은 곳이라는 확신이 들 때 말이다. 여기에는 교통, 교육, 자연환경 등 다양한 합리적 기준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저 고향이라서 라든가 특별한 추억이 있다든가 하는 감성적인 요인들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 어쨌든 하루 빨리 탈출하고 싶은 곳이 아니라 계속 살고 싶은 곳에는 다 이유가 있다.

벨파스트’(Belfast, 감독 케네스 브래너, 2021)94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비롯한 6개 부문 후보로 올라 각본상을 차지한 작품으로, 고향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않는 한 가족의 마음이 잘 묘사되어 있다.

 

벨파스트고향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않는 한 가족의 마음

영화는 북아일랜드의 수도, 벨파스트의 아름다운 현재 모습을 가득 담으면서 시작한다. 예술적인 건물들, 잘 정돈되어 있는 집과 도로, 깨끗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거리, 미세 먼지 하나 없을 것 같은 파란 하늘 등은 이내 관객들이 이 도시에 호감을 갖게 만든다. 그러나 약 50년 전으로 돌아가는 다음 신에는 예상치 못한 폭력사태가 등장한다. 흑백으로 촬영된 아담한 골목에 별안간 복면을 한 무장단체가 들어와 화염병을 던지기 시작하자 어린아이들이 놀고 있던 평화로운 주택가는 순식간에 깨진 유리창과 불타는 자동차로 아수라장이 된다. 이것은 1969815일 벨파스트의 실제 풍경으로, 30년간 3700명의 사망자를 낸 개신교도와 천주교도 간의 분쟁이 그 원인이다.

케네스 브래너 감독은 자신의 유년시절 경험을 바탕으로 만든 이 영화에서 선택의 기로에 놓인 한 가족을 보여준다. 아홉 살 소년, ‘버디’(주드 힐)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좋아하는 소녀가 함께 사는 이 마을이 좋지만 부모님은 타 지역으로의 이주를 고민 중이다. 아빠는 이미 다른 곳에서 일하느라 2주에 한 번 집에 오기도 힘든 상황이고, 엄마와 아이들만 집을 지키기에 종교 갈등은 심상치 않다.

어린 버디는 학교에서 좋아하는 소녀와 가까이 앉는 것, 영화관에 가는 것 말고는 거의 관심이 없지만 이 가족을 둘러싼 환경은 중대한 선택을 재촉하고 있다. 우선, 교회에 다니는 버디의 가족들은 천주교도를 핍박하는 편에 설 것을 종용 당한다. 이 문제에 있어서 버디네 어른들은 성숙한 입장을 취한다. 버디가 짝사랑하는 소녀의 종교에 대해 궁금해 하자 아빠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해준다.

걔는 힌두교일수도 있고 남침례교이거나 채식만 하는 적그리스도일 수도 있어. 하지만 친절하고 올바른 애니까 서로 존중한다면 저 애와 가족 모두 언제든 우리 집에 와도 좋아.”

이처럼 종교 분쟁에 중립적 입장을 보이고 폭력에도 찬성하지 않는 버디 부모님은 몇몇 마을사람들의 눈총을 받지만 그들은 크게 개의치 않는다. 그래서 버디가 폭동이 난 마트에서 도둑질을 강요당하자 효소 세제를 품에 안고 나오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정치적, 종교적 색깔이 없는 소년이 엉겁결에 들고 나온 효소 세제는 어떤 때나 얼룩도 하얗게 지울 수 있다는 점에서 은유적 도구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간에 깃든 추억익숙함이웃들심리적 안정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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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버디 가족에게 사실상 종교 분쟁보다 더 큰 이슈는 아빠의 일자리를 따라 마을을 떠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당시 벨파스트 노동자 전체의 문제이자 고민이기도 하다. 버디의 아빠가 영국에서 살면 정규직으로 승급되어 정원이 있는 큰 집도 나오고 연봉도 오른다고 말하지만 아내는 잘 모르겠다는 듯이 눈물을 글썽이며 대꾸한다.

우린 아주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어. 거리 구석구석 모르는 곳이 없고 어느 집에 누가 사는지 속속들이 알고 있어. 난 그게 좋아. (중략) 애들이 놀 수 있는 정원이 있다고 했지? 여기선 어디서든 마음대로 놀 수 있어. 모두 우리 애들을 알고 예뻐하고 보살펴 주니까. (중략) 사람들 중 절반이 우리 말투를 비웃겠지.”

버디 엄마의 대사에는 거주지의 가치로 경제적 윤택함보다 공간에 깃든 추억, 익숙함, 이웃들, 심리적 안정감 등을 꼽고 있음이 드러난다. 모든 것을 금전적 손익으로 판단하는 현대의 관점에서는 순진하고 낭만적인 태도로 보이기도 한다. 부동산 투기를 위해 메뚜기처럼 이사를 다니는 사람들에게는 분명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일반 서민들이 부득이하게 오래 살던 집을 옮겨야 할 때 먼저 떠오르는 아쉬움들은 여전히 편의성 보다 이처럼 감정적인 것들임을 부인하기도 어렵다.

 

재건축 앞둔 한 아파트 단지 주민들의 인터뷰 담은 집의 시간들

50년 후의 한국을 배경으로 한 집의 시간들’(감독 라야, 2017)을 보면 집에 대한 사람의 생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거의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집의 시간들은 재건축을 앞둔 서울의 한 아파트 단지 주민들을 인터뷰한 다큐멘터리다. 그러나 영화에는 인터뷰이의 얼굴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카메라는 거대한 아파트 단지와 인터뷰이의 집안을 구석구석 비춘다. 제목처럼 그 집에서의 시간을 추억하는 목소리와 집안의 풍경만으로 그들의 성별과 연령, 직업 등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집의 시간들은 집 내부를 보면서 주인을 상상하게 만드는 독특한 게임으로 점철된 다큐다. 놀랍게도 음성과 인터뷰 내용, 그리고 집안의 모습들은 생각보다 인터뷰이의 많은 것을 알게 해준다. 책장에 꽂혀 있는 책이나 DVD가 취향이나 직업을 알려주기도 하고, 아기 용품들이 가족구성원을 맞추게도 한다.

결론적으로 집의 시간들의 목소리 출연자들에는 남녀노소가 고루 분포되어 있으며, 이 곳에 오래 산 사람, 이사 온 지 얼마 안 된 사람, 잠시 거쳐 갔던 사람도 있다. 이들은 재건축을 앞둔 이 아파트 단지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다양한 관점에서 진술해나간다. 인터뷰이의 얼굴이 등장하지 않는 이유는 다큐의 진정한 주인공이 바로 아파트 단지와 그 안에 들어 있는 집 하나 하나라는 점을 확실히 해두기 위해서다.

부정적인 이야기들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정든 집이 곧 허물어진다는 데 대한 아쉬움이 강하게 드러난다. 아파트와의 이별이 슬픈 데에는 감정적인 요소 뿐 아니라 환경적인 요소도 있다. 오래된 대단지인 만큼 큰 나무들과 녹지가 많은 것은 모든 이들이 꼽는 이 아파트의 장점이다.

평생에 다시 한 번 이런 데서 못 산다는 생각. 도심에서. 인공적인 조명, 조경, 분수대. 이런 거 싫어. 싫어요. 대리석 발라놓고 삐까번쩍 하고 그런 거 뭐. 그런 걸 바라는 게 아니라 자연과 조화롭고 우리 안에 있는 산 같은 거 살려서, 그런 재개발이 됐으면...”

남들은 서울 재건축 아파트 조합원이라면 부러워하겠지만 인터뷰이의 목소리에서는 오히려 새 집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이 느껴진다. 화려한 모습보다는 사시사철 새소리, 바람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동네가 벌써 그리운 눈치다.

 

많은 주민들의 시간추억관계애정이 쌓여

집의 시간들의 주인공은 단군 이래 최대의 재건축 단지라 불리는 둔촌주공아파트다. 여기서 나고 자란 아파트 키드들은 자신들의 인생을 처음부터 함께 한 이 곳이 사라지는 것을 아쉬워하며 안녕, 둔촌주공아파트와 같은 책을 시리즈로 내기도 했다. 길고양이 이주문제를 다룬 고양이들의 아파트’(감독 정재은, 2020) 또한 둔촌주공아파트를 배경으로 한 다큐다.

그러나 이처럼 주민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녹지대 속 아파트가, 길고양이의 천국이라 불릴 만큼 동물친화적이었던 대단지가 재건축 과정에서 파국을 맞아 연일 최악의 재건축 사례로 뉴스에 오르내리고 있다. 조합과 시공사 간의 갈등 때문에 공사를 멈춘 지 두 달째인데 해결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6000세대가 살았고, 재건축 후에는 약 12000세대가 들어올 예정이니 인구로 따지면 작은 군 하나의 규모는 된다. 진통 후 입주할 미래의 주민들도 이 곳을 떠나기 싫어하게 될까. 아름드리 거목이 잘려 나간 자리에 다시 심겨진 나무들이 커다란 그늘을 만들 때쯤에는 비로소 가능할지 모르겠다. ‘벨파스트집의 시간들이 가르쳐주듯이 떠나고 싶지 않은 마을이 성립되는 데는 많은 주민들의 시간과 추억, 관계와 애정이 쌓여야만 하니까 말이다.

 

 

사진=유니버설픽쳐스/KT&G 상상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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