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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Ⅱ-조선 향촌자치에서 배우는 주민자치 콜로키움] “전통시대 향약은 지배층이 하층민을 지배하기 위한 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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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Ⅱ-조선 향촌자치에서 배우는 주민자치 콜로키움] “전통시대 향약은 지배층이 하층민을 지배하기 위한 도구”
  • 정기호 기자
  • 승인 2019.05.13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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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 / 조선시대 향촌자치에서 배우는 주민자치
박경하 중앙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박경하 중앙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조선시대에서 향촌 자치규약인 향약(鄕約)은 향약, 향규약, 향헌, 동계, 동약, 촌계, 촌약 등 다양한 용어로 표현됐으나 ‘재지사족’은 지방지배를 위해, 국왕의 대행자인 ‘수령’은 지방 통치를 위해, ‘상천민’들은 같은 신분 간의 상호부조적 목적에서 향약을 시행했다.

조선시대의 대지방통치정책은 사족들에게 분권(分權)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방식이었다. 따라서 지방사족들은 자치적 요소가 강한 향약을 시행했으나, 그 향약의 성격은 일률적이 아니고 지역별로 다양했다.

필자는 향약을 시행시기, 시행주체, 시행대상, 시행단위에 따라 크게 4대 분해 그 성격을 분류했다. 다음에서는 조선후기 향촌사회 내에서 ▲재지사족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일군현 단위에서 조직된 오늘날과 유사한 지방의회적 기능으로서의 향규(鄕規) ▲동리 단위에서의 재지사족의 대민 지배로서의 동계(洞契) ▲왕권의 대행자인 수령이 지방 통치를 위해 앞장서 실시한 주현향약(州縣鄕約) ▲주로 자연촌락에서 기층민간에 상호부조하던 생활공동체로서 오늘날 주민자치적 성격의 촌계(村契)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아울러 갑오개혁 이후 이전에는 양반들만 참여하던 향회에 기층민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향회의 시행을 통해 주민자치의 역사적 의의를 분석하고자 한다.

조선시대 지방행정체계 및 조직.
조선시대 지방행정체계 및 조직.

조선시대 자치조직 향약의 성격

재지사족의 향촌 지배구조와 향규

선초 관권 우위의 중앙정부의 향촌 통치에 반발한 재지사족과 중앙정부와의 갈등은 선초의 경재소(京在所) 설치, 유향소(留鄕所)의 혁파와 복립, 사창제(社倉制) 실시, 신명색(申明色) 치폐, 향약보급운동 등을 통해 표출됐다.

15세기부터 등장한 사림파는 고려의 군현향리 이족(吏族)으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여말선초의 사회적 변동과 이에 따른 신분의 재편성 과정에서 사족과 이족으로 나눠졌다.
이들은 같은 토성에서 일부는 군공(軍功)·첨설(添設)·산직(散職) 등으로 신분을 상승시켜 품관화(品官化)되고, 관인자원이 15세기 후반부터 크게 증가하자 이족의 사족화의 길이 봉쇄됐다.

16세기 이후부터는 양반과 중인층의 확연한 구분에 따라 이제는 같은 토성이면서 향리와 사족과는 별개의 신분으로 봐 천시했다. 농민들에 대한 수탈을 자행해오던 훈구계열과 이들의 하수인인 이족이 사림에 의해 향촌 사회에서 세력을 잃어갔다. 동시에 재지사족은 사족 중심의 향촌 지배 운영원리로서의 향규를 제정해 향촌 지배질서를 유지하고자 했다.

향규는 향안(鄕案)에 오른 향원(鄕員)들간의 약속으로 유향소 조직, 즉 좌수의 선임, 그 소관업무, 향안입록절차, 향선생(향헌) 및 그 서무인 향유사의 업무와 호장 이방 등의 선임에 관한 것을 주 내용으로한다.

향촌에서는 향규 향안을 통해 토성이 아닌 신래사족과 향리들의 향권 참여를 배제하는 동시에 재지사족들의 하층민에 대한 무단행위를 견제하는 등 자율적 규제 속에서 향촌 사회를 안정시키고, 치향지인(治鄕之人)으로서의 위치를 지켜나가고자 했다. 이 향규는 중국의 여씨향약과는 기원 및 성격이 다른 조선향약이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퇴계향약으로 칭해지는 예안향립약조를 들 수 있다.

재지사족의 촌락지배와 동계

임란을 겪으면서 재지사족의 경제적 기반의 붕괴와 그들의 기반이었던 유향소와 향안이 소실된 상황이나 향사당 향안의 중수, 향약동계의 실시 등으로 사족중심의 향촌 지배질서를 임란 후에도 꾸준히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했다.

16세기이래 재지사족은 동족적인 차원에서 동계를 만들었다. 임란 후의 상하합계(上下合契)는 임란 전 상천민들 간의 상호부조하던 향도계(鄕徒契) 촌계들을 사족중심의 동계의 하계로 끌어들인 것으로 지역 전 주민의 가입이 의무적이었던데 특징이 있다. 이것은 기존의 사족 중심의 촌락 지배 운영원리를 기저로 하면서 여기에 상하동민을 결속시켜 사족적 신분질서의 재확립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향중공론에 의해 제정된 향규를 기본원리로 한 운영체제는 1603년 경재소 혁파 이래의 유향소 기능의 변질, 즉 유향소가 수령의 보좌기관화 돼 사족들이 향임을 기피하게 됐다. 또 1675년(숙종 5)의 ‘오가통사목’의 반포 이후, 상천의 역이었던 면임에 지배계층의 영향력 있는 인사로 임명하려 해 사족의 모피현상이 가속화됐다.

사족이 향임(鄕任)을 기피하게 되자 이 자리를 향외인인 한미한 가문 출신자들이나 서얼들이 차지해 지역에 따라 차이를 보이나 향족이라는 새로운 계층을 형성하게 됐다. 향안입록을 둘러싼 신구세력 간의 유향분기(儒鄕分岐)로 17세기 후반 18세기 초반에는 향안에의 입록자가 급증하거나 향안의 파치가 일반화됐다. 이에 따라 사족의 이해를 반영하는 향규는 유명무실해지게 됐고, 이는 사족의 향권상 상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실상 재지사족의 일향 지배를 가능하게 하는 구체적인 내용은 교화(敎化)와 부세(賦稅) 운영이었다. 교화라는 명분론적인 지배를 보완하면서 농민을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부세 운영에 일정한 참여였다. 그러나 1712년(숙종 38)의 ‘양역변통절목’의 이정법(里正法)의 시행으로 부세 부과에서 사족의 영향력이 줄어들게 되고, 면리제 운용의 실무에 신흥세력이 참여함으로써 재지사족은 점차 부세 운영에서 소외됐다.

17세기 후반 이후 향촌에서는 당색에 다른 사족의 분열, 신향이라는 새로운 세력의 등장, 즉 유향분기로 인해 사족의 향촌 지배는 동요되고, 여기에 수령의 향촌 통치의 강화로 사족의 영향력의 약화는 가속화됐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일향에서 사족의 영향력이 축소되는 배경에서, 사족은 그들의 동족적 경제적 기반인 촌락에서의 동계의 결성에 관심을 기울이게 됐다. 임란 후의 상하 동계의 시행이 그것이다.

전기에도 동계가 있었으나, 그것은 양반들만을 구성원으로 길흉 시 부조하는 성격의 것이나, 난후의 동계는 전기 양반들의 동계, 즉 상계와 상천들 간에 상호규검하던 조직인 향도와 같은 하계를 합한 상하합계였다. 이것은 전란으로 인한 막대한 인명재산의 손실로 이웃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살기 어려운 형편 속에서 상천을 회유해 향촌 복구에 함께 참여시킬 필요성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난후 양반들이 상천을 회유시켜 합력하고자 한다고 해서 반상 간 차별을 완화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상하합계 형태의 동계를 통해 사족은 기층의 민중조직을 포용·흡수해 사족적 신분질서를 재강화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동계는 원래 농민의 촌락 공동체조직인 촌계, 즉 하계를 사족중심으로 조직·흡수한 것이므로 하민의 저항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사족 중심의 신분질서와 부세운영에서나타났다.

17세기 후반 18세기에 들어서 중앙정부의 일련의 향촌 통치의 강화책으로 면리제의 강화, ‘양역변통절목’의 반포에서 법제화된 이정법의 시행과정에서 사족이 중심이 된 동계조직이 부세 수취의 단위가 되는 공동납제에서 그 위치가 흔들리게 됐다. 상하간의 동역의 부담이나, 사족의 동계하부에 편성돼 있는 민촌과의 관계에서 공동납세액의 조정과 부담의 문제들이 계층 간의 다양한 모습으로 표출됐다.

사족의 촌락 지배에 저항한 세력은 신분상으로는 상민에서 중인 양반층으로 신분을 상승시킨 계층이었으며, 경제적으로는 일정한 토지와 약간의 노비를 소유한 자소작농민층으로 소위 요호부농(饒戶富農)이었다. 이제 사족의 동계를 통한 촌락 지배는 불가능했고, 사족은 향리 또는 수령과 결탁함으로써 부세 부담에서 제외되고, 경제 외적 강제를 보장받거나 아니면 부세 운영에 농민과 함께 참여해 일정한 부담을 짐으로써 농민의 저항을 흡수하거나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형태를 띨 수밖에 없었다.

지방관의 향촌통치와 주현향약

한편, 중세적 지배질서가 제반 변화로 동요돼가는 형세에서 사족을 통해 향촌 사회를 이사약민(以士約民)이라는 간접지배 방식을 바꿔 군현체제의 정비과정에서 수령이 직접 향촌 사회를장악해 나가고자 했다.

바로 수령의 직접 지배방식의 하나가 수령이 앞장서 실시한 주현향약이다. 즉 일향의 교화를 사족이나 향족에게 자치적으로 맡길 수 없는 상황에서 수령이 직접 앞장서 관의 적극적 주도에 의한 주현향약이 출현하게 됐다.

주현향약의 선구로는 율곡을 들 수 있다. 향약이 지금까지 유명무실했던 이유는 시행했다 말았다하는 일관성이 없었던 점과 마을마다 촌계가 있으나 관권의 뒷받침이 없어 범법자가 있더라도 징계할 수가 없었으므로 효과적인 시행으로 주현은 면을, 면은 리를 감독해야 함을 제시했다. 이를 청주목사목시 ‘서원향약’에 반영하고 있다. 이 향약은 호서·호남지방의 주현향약의 전형을 이뤘다.

영남지방은 1602년(선조 35) 안동에서 김기가 찬한 ‘향약’이 그 전형이 됐다. 두 향약 다 당시에는 빛을 보지 못했으나, 17세기 후반 수령권의 강화와 사족의 향촌자치력이 약화되는 과정에서 원용됐다.

주현향약의 내용은 상품화폐경제의 농촌의 침윤 및 토호의 침탈 등으로 인한 농민들의 유망현상을 심각하게 받아들여 이들에게 권농을 강조해 상부상조하는 농업공동체적인 향약을 권장했다. 이와 함께 부세의 과도한 부담을 줄이고, 토호 향족 향리 층에 의한 무궤도한 침탈을 방지하고자 했다. 즉 사회경제적 변동 속에서 향약을 통해 농민의 토지 이탈을 막고, 농민들을 향촌 사회에 긴박시키며, 그들을 공동체적으로 결속시킴으로써 농업경제에 바탕한 체제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했다.

주현향약은 상하민 전원이 그 구성원이 돼 의무적으로 참여해야만 했다. 17세기에는 유향소를 중심으로 향약의 도약정은 수령이 택하고, 각 면에는 풍헌유사를 둬 면을 기간단위로 했다. 면 이하는 기존 사족이 운영하는 동계를 하부조직으로 흡수하되, 동은 비교적 사족의 자율적 운영에 맡겼던 것 같다. 그러나 18세기에 오면 향약의 도약정을 수령이 직접 맡았고, 향교조직을 이용했다.

이는 18세기 유향소는 수령의 하부기관 화해 교화를 향족에게 맡기기 어려운 사정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동계를 부세의 수취 단위로 파악해 통제하고자 했다. 운영에 있어 교화 행정을 이원화해 사족에게는 교화를 전담하고, 부세 등의 행정업무는 향족들을 임명해 향약조직에 사족을 끌어들여 사족의 뒷받침을 받고자 했다.

이는 실상 17세기 사족의 향촌 지배가 가능할 당시 향약의 약임과 향임을 분리시켜 향약을 사족이 독점해 명분상 교화가 통치의 대본이고, 향임의 소관은 그 하위에 위치하는 실무사무이기 때문에 지배의 대본을 독점함으로써 사족 우위를 확보하겠다는 사족의 주장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서 사족세력이 향권의 핵심인 부세 조정에 있어 간여하지 못하고, 향임을 천역시하는 상황에서 사족의 적극적 참여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중앙 위정자들의 향약에 대한 상소에서 알 수 있듯이 귀천 노주(奴主)의 명분이 흔들리고 상한이 양반을 능욕하고, 간도들이 지주를 쫓아낼 묘방을 도모하는 등의 상황, 즉 사회신분제와 지주전호제에서 나타나는 봉건사회 내부의 신분 계급적인 모순을 강상 인륜의 차원에서 인식하고, 이에 대한 해결을 향약 시행을 통해 상천에 대한 교화에서 찾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19세기의 중세 해체기의 모순이 노정되는 상황에서 주현향약을 변화에 대한 방파제로써 기대해 향촌민을 통제할 구체적인 향촌 통제책으로 내세울 수밖에 없었으나 그 효과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기층민의 주민자치조직촌계

전통시대의 향약을 흔히 덕업상권, 예속상교, 과실상규, 환난상휼하는 상호부조적인인 것으로 알고 있으나, 실제 역사에서는 지배층이 하층민을 지배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했던 측면이 강했다.

18세기 후반 상계원이 중심이 된 동계에서 하계들이 분리 분동돼 갔다. 동계에서 분리 분동된 동계는 상천민들 간에 촌계라는 자치조직을 구성했다. 촌계의 기원은 조선전기 기층민들 간의 자치조직인 향도(香徒·鄕徒)에서 찾을 수 있다. 촌계의 규모는 10호에서 50호 미만이 대부분을 차지했고, 반촌(班村) 대 민촌(民村)의 구성비율도 대략 2:8 정도였다.

신분 구성에 있어서 반촌의 경우는 가문노비나 소작인들이 대부분이므로 어느 정도 통제 가능했으나, 반상혼거촌 특히 독립된 민촌일 경우는 상당한 마찰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동계의 경우 몇 개의 자연촌을 묶어 운영한 형태가 많았다. 즉 한 동계 내에 몇 개의 리가 병렬적으로 존재했다. 이같이 상천민간에 상부상조하는 조직은 40~50호 내의 자연촌락에서 촌계 동계라는 이름으로 광범위하게 존재했고, 호남에서는 주로 촌계라 칭했다.

촌계 조직에서의 기능은 크게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정월대보름의 마을굿을 수행하는 사신(祀神) 공동체의 성격과 노동공동체적 기능으로 두레와 황두 등의 조직이 있었고, 일상생활 속에서 서로 돕고 의지하며 사는 생활 공동체로서의 역할이 있었다.

그러나 양반들에 의한 향약 등의 기록은 많이 남아 있으나, 전통시대의 민중들은 기록을 남기지 않아 현대에는 지방에서 정월대보름에 행해지는 동제에서 촌계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동제는 전국적으로 볼 때 정월 초와 정월대보름, 10월 초에 주로 치러진다. 정초는 한 해의 시작이라는 의미를 지니며, 대보름은 달이 가득 차 풍요다산을 기원하는 뜻이 있고, 10월 상달은 일종의추수감사제적인 성격을 갖는다. 이처럼 동제는 논경의례와 연관을 갖고 있다. 특히 호남지역은 농사지을 너른 평야가 있어 일년의 풍흉을 점치는 대보름에 주로 한다.

조선총독부의 村祭(部落祭) 報告書에서 村祭의 祭 前에 열리는 마을회의의 내용을 보면, 祭官을 선정하는 일만 협의하는 것이 아니라, 비용의 할당과 거출 문제를 다루기도 하고, 祭日의 선정, 祭物의 준비 등 村祭집행에 관한 일들을 협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촌제의 祭 前에 열리는 마을회의는 촌제의 전 과정을 협의하며 결정한다. 그리고 祭 後에 열리는 마을회의에서는 村祭의 결산 이외에 마을의 도로 교량의 보수, 農事 공동작업에 대한 협의 등일년간의 공동사항에 관한 것을 더 많이 다뤘다.

이와 같이 지역에 따라 명칭은 다양하지만 마을 자치조직으로서 촌계가 광범위하게 존재했고, 이 조직에서 村祭를 주관하고, 村祭 前後에 걸쳐 회의를 열어 촌제뿐만 아니라 마을의 공동사를 협의해 생활해 나갔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둘째는 생활 공동체로서의 기능이다. 村祭前 또는 後에 村會를 열어 마을의 임원을 뽑고, 洞舍(마을회관) 도로·교량·제언(堤堰) 등의 수리·도정(淘井)이며, 四山의 금양(禁養)을 위한 작업을 협동해 수행했다. 또 남의 논밭 경계를 침범하는 자, 남의 농업용수(農業用水)를 훔친 자, 남의 밭에 방우(放牛)한 자 등 주민 사이의 분쟁(紛爭)을 조정(調整)·징계(懲戒)하고 특히 상장(喪葬)을 중요시했다.

기타 가뭄, 수해(水災), 질병(疾病), 도적(盜賊) 등 환(患)을 당한 자는 동리(洞里)에서 힘을 모아 도와주고 고아(孤兒)나 노약자(老弱者)를 휼호(恤護)하고 혼기(婚期)를 놓친 노처녀의 혼처를 주선하는 데 이르기까지 동리는 공동체적인 우애와 협동의 질서가 뿌리내리고 있었다.

특히 남을 도울만 할 때 돕지 않고 방관하거나 남에게 물건 등을 꿔줄만한데 꿔주지 않은 자는 벌(罰)받는 것이 대개의 촌약(村約)에서 규정돼 있었으며, 그 중에 힘이 미치는데도 남의 환난을 좌시한 자는 비교적 무거운 중벌(中罰)에 받는 것이 예사였다. 이런 시벌과 선행자에 대한 시상 등 상벌의 실시는 촌계의 중요한 기능이었다.

촌계의 집회소로 전라도에 있어서는 모정(茅亭)을 들 수 있다. 모정은 마을 공동체적 산물로서 자치적 집회소로서의 기능을 하면서 공동체의 사회 통제, 생산적 기능을 담당하며, 수도작 공동노동인 두레를 관장하고, 종교적 기능으로서는 정자나무로 상징되는 마을 공동체의 정신적 지주로서의 역할을 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모정은 농업노동조직인 이른바 두레의 조직 및 운영과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다. 그러므로 아예 모정을 ‘농정(農亭)’ 혹은 ‘농청(農廳)’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농기, 풍물 및 두레 성원의 의복을 보관하고 두레먹이는 곳으로서 하루의 피로를 푸는 장소이자 노동회의가 열리는 곳이 모정인 바, 때로는 당산굿이 열려지는 실제적인 신성공간으로도 사용됐으니, 모정은 곧 공동 집회, 공동 노동과 결부된 공동 휴식, 오락 및공동제전의 장소였다. 동시에 어떤 곳에서는 마을의 자치재판소로서 덕석모리, 뭇매, 마을 추방, 훈계 등 제재를 결의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같이 촌계는 마을구성원 간에 상호부조(相互扶助)·상호규검(相互規檢)하는 생활 공동체로서 기능했다.

향약 원문의 일부(향규).
향약 원문의 일부(향규).

셋째로는 노동 공동체로서의 두레를 들 수 있다. 촌계에서는 노동 공동체로서의 ‘두레’를 조직운용해 이양법(移秧法)에서 요구되는 집중적인 노동력 수요에 적응했다. 두레는 기본적으로 마을 단위의 조직이었으며, 지주층의 참여와 간섭을 배제하는 노동조직이었다. 촌계에서 두레를 주관했음은 두레의 모임일자가 정월 대보름과 7월 백중(百中)을 전후하는시기로 촌계(村契)서 주관한 촌제(村祭) 치제시기와 거의 일치하고 있다.

동계 농한기인 정월 전후는 장기적 농한기로서 농업노동이 실제적인 휴식을 취하는 시기며, 한해 농사를 준비해야 하는 신년이니, 이는 곧 1년 농사의 풍족한 수확을 기원하는 유감주술(類感呪術)의 생산의례(生産儀禮)가 열리는 시기였다.

하계 농한기인 백중절 전후는 수도작답에 대한 마지막 제초작업과 중경(中耕)을 끝내고 춘곡(春穀)인 맥류(麥類)의 수확을 마친 전작지(田作地)에 간작(間作)했던 두류(豆類)의 제초작업(除草作業)마저 끝난 대부분의 농민들이 삼복(三伏)중에 휴식을 취하게 되는 기간이다. 이 기간 동안에 백중명절이 포함돼 있는 것이니, 이는 곧 생산의례로서 농번기 속의 농한기에 이뤄지는 의례로 촌계(村契)에서 중요한 행사로 여겨왔던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후기 촌계의 규모는 10호에서 50호 내외가 80% 이상이었던 점으로 볼 때 촌제(村祭)를 주관하는 집단과 두레를 구성하는 집단을 별개로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볼 때 삼남지방에서의 두레의광포(廣布)는촌계(村契)조직의 광포를 반영하는 사례라 할 것이다.

조선후기의 촌계는 사족의 동계와 지방관에 의한 주현향약 등의 하부조직으로 흡수 편입되기도 했으나 끊임없이 기층민의 입장을 반영하면서 그 독자성을 유지해왔다. 또 19세기 중·후반 촌계에서의 두레조직이 지배층의 수탈에 저항한 농민항쟁의 일부세력으로서 참여하기도 했다. 이는 민의 사회의식의 성장과 아울러 끊임없는 저항을 통해 자치성을 확보해 나가는 면을 보여주는 것이라할 수 있다.

기층민의 조직인 촌계는 지배층의 지배이념·사상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사족의 동계 등에 흡수되는 등 외형적 형태는 변화되고 있었지만, 그 모습이 용해되거나 분해됨이 없이 주민 생활 공동체로서의 자생적인 필요를 바탕으로 오랜 전통을 유지해 왔다.

갑오·을미개혁의 향회 설치와 주민자치의 특징-------

1894년 7월 12일에 ‘향회 설치에 관한 지시’를 통해“각 지방관으로 하여 금향회를 설치케해 각 면에서 1명씩을 뽑아 향회원으로 하고, 그들이 고을의 공회당에 모여 법령의 시행과 폐단의 시정 등 고을에서 시행하는 일이 가부를 의논하고 공동결정한 뒤 시행하라”고 했다.

1895년 5월 27일에 ‘지방제도 개혁에 관한 건(조칙)’을 내렸고, 1895년 8월 훈령을 내려 지방 개혁사업을 향회에 맡기도록 했다. 1895년 11월 3일에는 ‘향회조규·향약판무규정’(주본)에 “군과 면과 리에 대·중·소 향회를 둬 지방에 관련된 각종 사무를 회의해 결정하고, 리의 존위를 리민이 직접 선출케 한다. 면의 집강을 각 리의 존위 및 선거인으로 하여금 선출케한다”고 했다.

그 구체적 내용으로 주민의 선거로 향회를 구성하고, 사무담당자를 선출하며, 향회 회의 사항으로는 교육, 호적, 위생, 사창, 구휼, 도로, 식산, 산림 및 제언, 세목 및 납세, 공공 복역 등의 12개항을 규정해 향회에서 담당하도록 했다. 자치사무 담당자 중 유급 직원급료는 지자체에서 부담하고, 리 및 면의 하유사 면주인 급료 및 지필비 등은 리와 면에서 부담하도록 했다.

선거 시 자격 제한 및 자격 서열 규정은 반상불논하며, 부의 정도에 따라 자격과 서열을 정하고, 조세체납자는 출마자격을 박탈했다. 부역을 많이 지는 상등호민은 회의 시 주재자 차석에 위치토록 했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일정액 이상의 조세 납부를 규정하지는 않았다. 갑오·을미개혁의 지방제도 개혁은 어느 정도 한계는 있지만, 통치권 일부를 자치권의 형태로 지방자치단체에 이양 함으로써 근대적 자치제의 형태는 갖췄다고 사료된다.

지방(주민)자치의 역사적 의의-

갑오개혁과 을미년의 ‘향회조규’와 ‘향약판무규정’이 우연히 등장한 것이 아니다. 조선시대 향촌자치의 유제인 향회 유향소 향약의 전개과정을 통한 지방자치와 민권 향상을 향한 끈질긴 노력과 희생으로 정립된 것을 반영, 제도화된 것이다. 광무년 간에 향회제를 폐지하지 않은 것은 면면히 이어온 향회의 역사성과 기층민의 주민자치 정신을 반영한 것이다.

근대적 측면에서는한계를 갖지만 일정 부분의 자치권 부여, 주민참여, 국왕의 법률적 승인 등의 성격을 갖고 있다. 전통시대에 있어서 어려움에 처했을 때 이웃 간에 서로 의지하고 돕는 마을 공동체적 생활방식은 정체가 아니라, 수많은 자연재해와 지배층의 수탈 속에서 민족적 생명력을 지탱해줬던 삶의 지혜였다.

일제의 기본 정책은 우리의 전통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마을의 정신적 유대요 기반이었던 마을 굿(洞祭)을 낭비며 미신이라 해 금압하는 등 마을의 단합을 온갖 명목으로 탄압했다. 왕년의 우리 농촌이 수전 농업 사회에서의 일반적 속성에서 연유하는 상대적인 정체성과 폐쇄성을 지녔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마을 공동체의 인정과 의리, 협동과 상호부조, 주민자치 정신은 우리가 새롭게 재조명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할 귀중한 전통문화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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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민자치위원, 마을과 주민 위한 소통의 리더십 발휘해야
  • ‘정책’문해 그중에서도 ‘주민자치’문해력 높이려면?[연구세미나98]
  • "주민자치, 주민이 이웃되어 가까이 자세히 오래 보는 것"
  • 주민자치위원, 주민에게 존중받는 품위와 역량 가져야
  • “주민참여예산제, 관주도, 취약한 대표성과 전문성, 형식적 운영 심각”[연구세미나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