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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주민자치법 입법연구 포럼 ⑨한국의 주민자치] “주민자치센터는 커뮤니티센터라고 명칭해야 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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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주민자치법 입법연구 포럼 ⑨한국의 주민자치] “주민자치센터는 커뮤니티센터라고 명칭해야 타당”
  • 김찬동 충남대학교 자치행정과 교수
  • 승인 2016.12.01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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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 I / 주민자치센터의 비판적 고찰
김찬동 충남대학교 자치행정과 교수
김찬동 충남대학교 자치행정과 교수.

 

한국의 주민자치센터 발족은 주민자치를 실시하려고 제도 설계된 것이 아니다. 1998년 한국은 IMF로 인해 경제가 위기에 직면했고, 민간경제는 물론 공공영역의 감축과 개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허리를 졸라매는 긴축과 뼈를 깎는 감축을 해야하는 상황에서 공공부문의 개혁과정에서 읍·면·동 공무원 수를 축소하는 개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읍·면·동 공무원수를 약 50%이상 축소하는 과정에서 읍·면·동사무소의 50%는 유휴공간이 되게 된 것이었다. 이에 아이디어를 낸 것이, 이 공간에 주민들이 참여해 주민자치를 하도록 하자는 것이었고, 주민자치센터를 설치하고 운영을 담당하는 주민대표로서 주민자치위원회를 두도록 한 것이다.

본고에서는 이 때 설치된 주민자치센터가 왜 주민자치가 아닌가에 대한 것을 살펴보면서, 주민자치센터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시도해보려고 한다.


주민자치와 주민자치센터 비교적 고찰------

주민자치의 본질

주민자치(residents self-governance)는 스스로 다스린다는 것으로 주민자치정부(residents self-government) 개념이 발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주민이 스스로 정부를 형성할 수 있어야 이것이 ‘주민자치’라는 것이다.

자치의 개념을 일본의 니시오(西尾) 교수는 ‘자기입법과 자기통제’라고 하는 개념으로 정리하고 있다.

첫째, 자기입법이란 법을 만들어서 지역공동체를 규율한다는 것을 전제하면서 그 법을 스스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법을 스스로 만들기 위해서는 주민들이 자신의 대표를 보내거나 직접 주민총회를 통하여 공동체를 규율할 수 있는 법을 만든다는 의미가 들어 있는 것이다. 둘째, 자기통제란 만들어진 법을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집행하기 위해서는 집행조직이 필요하고, 그 조직을 유지하고 공공재를 공급하기 위한 세원을 구성원으로부터 징수할 수 있는 강제력을 가진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그 강제력을 위해 자치경찰이 필요한 것이고, 다음세대를 길러내기 위해 자치교육이 필요한 것이다. 다시 말해 주민자치는 주민들이 근린생활정부를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주민자치에 대한 원형을 우리는 그리스 아테네의 ‘민회’에서 발견한다. 민회를 위해서 아고라(agora)라고 하는 광장에서 매일 추첨으로 6000명의 대표들이 모여 연 40회의 회의를 통해 주요한 공공의제들을 토론하고 의사결정을 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다룬 내용들은 공공질서유지, 재정, 과세, 외교, 도편추방 등의 내용을 다수결로 결정했다. 또 이민회를 위해 사전에 의제를 선정하기 위해 500인 평의회가 구성돼 의안을 준비했고, 정부관리 활동에 대한 감독과 조정을 했으며, 행정관에 대한 탄핵도 했다. 그리고 의장은 매일 추첨으로 선출했다는 것이다(이승종 외, 2015:26-27). 권력의 집중을 막기 위한 처절한 제도적 장치를 2500년 전에 갖고 있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50인 위원회는 500인 평의회의 상임집행위원회와 같은 조직이었고, 주로 회의를 주관했다. 시민법정도 있어서 6000인의 시민단에서 배심원 후보를 재판당일 추첨으로 선출했다. 일반사건은 201인, 보통재판은 501인, 중요사건은 1501인이 선출돼 정기적으로 행정관의 불법 비리에 대해 제소하고 재판했다. 당시 그리스 아테네의 인구 규모는 1만명 정도로 성벽에 의해 도시부와 전원부로 구분돼 있었다고 한다(김혜천 외, 2011:36).

여기서 인구 규모를 말하는 이유는 현재 읍·면·동의 인구 규모인 1~2만명 정도는 고대도시에서 도시국가 규모에 해당하는 것을 밝히기 위함이다. 다시말해 한국의 주민자치센터가 그 구역으로 설정하고 있는 읍·면·동의 규모는 주민자치를 제대로 할 수 있는 정도의 인구 규모일 수 있다는 점이다. 즉 주민들이 주민총회를 구성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설계’ 해채 택할 수 있는 규모란 점이다. 다시말해 주민자치를 제대로 하려고 하는 ‘의지’가 있다고 하면 할 수 있을 텐데, 현재의 집권그룹들이 의지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주민자치답기 위한 최소한의 요건

주민자치가 주민자치답기 위해서는 ‘주민의, 주민을 위해, 주민에 의해’ 다스려져야 할 것이다. 이것은 링컨이 말한 민주주의는 ‘시민의, 시민에 의한, 시민을 위한’ 정부가 돼야 한다는 말과 일치하는 것이다. 지역공동체 생활양식이 바로 주민자치며, 사회생활의 원리가 주민자치인 것이다. 주민이 지역공동체의 주인이 돼야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지역공동체에서 주민이 자치적 근린정부를 구성할 수 있어야 그것이 민주주의인 것이다.

이런 민주적 가치가 작동하지 않는 공간구역(district of life space)은 관료적 통제가 작동하기 쉽고, 대의제에 의한 엘리트주의적 통치가 작동하기 쉽다. 따라서 민주적 가치가 제대로 작동하는 공간구역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 공간구역의 주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직접민주제의 제도적 장치가 작동하도록 공간구역에 대한 ‘자치제도 설계’가 도입돼야 하는 것이다. 자치제도설계라 함은 바로 공간구역의 주민들이 참여하는 근린정부를 구성하도록 제도적 장치가 도입돼야 하는 것이다. 근린생활정부는 구성원인 주민들에 의해 구성돼야 하고, 그 근린생활정부는 그 주민들을 위해 작동돼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첫 번째가 근린생활공간의 주권이 주민에게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두번째가 근린생활정부에 주민들이 참여하는 것이어야 하고, 세 번째가 주민들의 행복을 위해 근린생활 공공서비스를 공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근린생활공간이 인치(人治)가 되지 않기 위해 주민들 스스로 규율하는 법이 있어야 하고, 이 법을 만드는 것도 주민들이 총회에서 해야 하며, 이 법을 스스로에게 강제하기 위한 강제력을 가진 집행조직을 구성해야 한다. 이 집행 조직운영과 유지를 위해 세금을 주민들로부터 징수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주민총회를 운영하기 위한 상임집행위원회로서 주민자치위원회가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주민자치위원회는 주민총회에서 논의할 의제를 준비하고, 주민총회의회를 주관하는 조직이어야 할 것이다. 한국의 주민자치위원회가 주민자치답지 못하게 된 원인 중 하나는 주민총회가 없는 조직이 돼버린 것에 있다. 즉 주민자치답게 만드는 주민자치위원회가 아니라 주민자치단체 행정관리조직의 자문형 주민참여기능을 수행하는데 불과해 한국의 주민자치를 형해화하고, 유사(pseudo) 자치화 시키는 주범이 되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주민자치위원회는 읍·면·동 주민들을 규율할 수 있는 규정을 만들 수 있는 조직도 아니고, 주민들로부터 자치세를 거둘 수 있는 권능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단지 주민들이 참여해서 행정관리의 집행과정을 보조하는 기능에 불과한 지위와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다. 주민자치답지 못하고, 주민자치란 개념을 부끄럽게 할 정도의 실상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는 주민자치란 단어를 쓸 것이 아니다. ‘주민참여 모임’에 불과한 것이 현재의 한국의 주민자치위원회가 아닌가 한다. 비판적으로 고찰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주민자치센터란

주민자치위원회는 1998년 읍·면·동 행정기능 전환의 부산물로서 생긴 것이다(김찬동, 2014 : 25). 당시 정부는 읍·면·동 사무소를 폐지하고 주민자치센터를 설치하려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개혁과정에서 읍·면·동 사무소 폐지는 행정인력감축이 수반돼 기능을 축소하는 선에서 봉합됐다. 즉 읍·면·동사무소 존치와 일부 업무 시·군·구로의 이관, 유휴공간에 주민자치센터 설치가 세트로 진행된 것이다. 그리고 당시 주민자치를 제도 설계하면서 기본적인 철학은, 주민들이 스스로 다스리는 것이니 법률적인 권한이나 위상을 부여하지 않는 임의조직으로 한다는 것이었고, 이런 생각은 지방자치법에 ‘법적근거’를 공식적으로 두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주민자치센터를 설치하는 근거규정은 지방자치법 8조에 뒀지만, 주민자치위원회의 구성이나 기능은 행정자치부의 조례예규에 언급하는 것에 그쳤다.

다시말해, 주민자치위원회는 법적 위상을 가진 조직이 아니다. 따라서 주민자치위원회를 위해 법적권한을 이관하기도 불가하고, 예산사용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는 조직도 아니다. 어디까지나 읍·면·동장에게 주어진 법적 권한의 통제를 받는 조직에 불과하고, 주민자치위원회가 관리하는 예산에 대한 책임은 읍·면·동의 담당공무원이 져야하는 것이다. 주민자치위원회는 주민자치센터의 공간운영을 위해 일부 주민들이 행정집행과정에 참여하는 모임에 불과한 것이다.

‘주민자치센터 설치 및 운영조례’에는 주민자치센터의 기능과 시설, 프로그램, 주민자치위원회의 기능구성 등에 대한 조항을 두고 있다(전게서, 26). 즉 주민자치위원회는 주민자치센터의 운영에 관한 사항을 심의하는 것이고, 읍·면·동에 대한 주민자치를 위한 종합적이고 대표성 있는 법적권한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주민자치센터가 구상됐는가? 1998년에 주민자치센터를 설치할 때 일본의 커뮤니티센터를 모델로 한 것이었고, 이것은 주민자치와는 거리가 있는 개념이었다. 오히려 도시정부와 주민자치회를 매개하는 시설로서 설치됐던 것이고, 주로 시민들의 회합의 장소와 레크리에이션을 위한 시설공간으로서 도시정부가 설치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도시정부 시설에 공무원을 배치해 관리하기 보다는 주민들로 하여금 자치적으로 관리할 수 있도록 위탁하는 개념으로 커뮤니티센터의 주민협의회를 만들도록 한 것이다.

다시 말해, 한국의 주민자치위원회가 주민자치센터를 관리하는 것을 ‘주민자치’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란 것이다. 일본의 주민자치를 벤치마킹하려고 했다고 하면, 정내회 혹은 지치가이(jichi-gai)라고 하는 주민자치회를 벤치마킹했어야 하는 것이고, 커뮤니티센터와 주민협의회를 벤치마킹하면서 주민자치를 한국에 도입했다고 주장할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바로 이런 오해로 인해 한국의 주민자치는 전혀 주민자치답지 않은 국적불명의 제도가 돼버린 것이다.

즉시 주민자치센터의 주민자치란 단어를 삭제하는 것이 필요하고, 커뮤니티센터라고 명칭하는 것이 타당하다. 즉 현재의 주민자치센터는 주민자치를 하는 중심적 공간(center)이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민자치의 센터라고 명명해선 안된다. 오히려 세종특별자치시에서 ‘복합 커뮤니티센터’라고 명명하고 있는 것이 진실에 가까운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에 주민자치를 과연 어떻게 도입해야 하는가는 이제부터 새롭게 시작해야 할 과제다. 다음 절에서는 과연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주민자치위원회가 ‘가짜자치’ 혹은 ‘유사자치’ '비정상 주민자치’가 돼버린 것일까? 그 원인을 몇가지 분석해 보자.


유사자치로서의 주민자치위원회 분석-------

행정관리기관으로서의 읍·면·동

지방자치법에서 지방자치단체로서 인정하고 있는 것은 두 가지 종류다(지방자치법 제2조). 즉 특별시, 광역시, 도, 특별자치도가 한 가지 종류고, 시·군·구가 또다른 하나의 종류다. 지방자치단체는 법인으로 하고, 특별시와 광역시, 도와 특별자치도는 정부의 직할로 한다고 하고 있다. 시는 도의 관할구역 안에, 군은 광역시나 도의 관할구역 안에 두고, 자치구는 특별시와 광역시의 관할 구역 안에 둔다고 한다(제3조).

그리고 특별시 또는 광역시가 아닌 인구 50만 이상의 시에는 자치구가 아닌 구를 둘 수 있고, 군에는 읍·면을 두고, 시와 구(자치구포함)에는 동을, 읍·면에는 리를 두도록 하고 있다. 또 시 중에서 도시의 형태를 갖춘 지역에는 동, 그밖에 도시의 형태를 갖추지 못한 지역에는 읍·면을 두고, 자치구가 아닌 구에 둘 경우에는 그 구에 읍·면·동을 둘 수 있다고 하고 있다. 여기서 주민자치와 관련해 주목할 것은 읍·면·동은 지방자치법이 규율하고 있는 지방자치단체가 아니다. 읍·면·동은 시·군·구의 행정관리를 위한 하부기관에 불과하다.

지방자치법 목적이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사이의 기본적인 관계를 정하고, 이로써 지방자치행정을 ‘민주적’이고 능률적으로 수행하며, 지방을 균형 있게 발전시켜서, 한국을 민주적으로 발전시키려고 하는것 이라고 하고 있다(제1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읍·면·동 계층을 자치계층으로 하지 않고 행정기관으로 두고 있다는 것은, 지방자치법이 한국을 민주적으로 발전시키려는 ‘의지’를 갖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한다.

한국의 지방자치법이 상정하는 지방행정을 민주적으로 하길 진정으로 원하는 의지가 있다면, 읍·면은 지방자치단위로 하고, 시와 동격의 지방자치단체로 해야 할 것이다. 도시는 무엇보다도 자치권을 가진 공간구역의 대명사라고 할 것이다. 이점에서 도시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자치권을 가진 공간단위가 되는 것이고, 읍·면의 경우에는 주민들의자치를 위한 적절한 공간규모의 단위가 되는 것이다.

읍은 도시형태를 갖추고 인구 2만 이상이 되는 지역으로(지방자치법 제7조 3항), 군사무소의 소재지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구 2만이나 되는 공간구역에 자치권을 부여해 지방자치단체를 구성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군을 행정관리단위로만 생각하고, 민주적으로 지방자치를 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지 않은 것이다. 다시 말해 읍·면을 여전히 행정관리단위로 두고, 지방자치를 실시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글로벌한 표준에서 벗어난 어색한 제도인 것이다.


지방자치법과 보충성의 원칙

읍·면·동장은 지방자치단체의 하부행정기관에 불과하다. 지방자치법 제 117조에 의하면, 하부행정기관의 장으로서 자치구가 아닌 구에는 구청장, 읍에 읍장, 면에 면장, 동에 동장을 둔다고 하고 있다. 또 자치구가 아닌 구의 구청장은 일반직 지방공무원으로 하고, 시장이 임명하는 것으로 하고 있다. 읍장, 면장, 동장은 일반직 지방공무원으로 하고 시장, 군수, 자치구의 구청장이 임명한다고 하고 있다. 읍·면·동장의 권한에 관한 부분을 보면, 하부행정기관으로서 자치구가 아닌 구의 구청장, 읍·면장은 시·군·구청장의 지휘 감독을 받아서 소관의 국가사무와 지방자치단체의 사무를 맡아서 처리하고, 소속직원을 지휘감독하는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읍·면·동장은 행정관리단위로서 상위정부의 사무를 처리하고, 소속직원을 지휘감독하는 ‘관치(官治)적 관리자’고, 주민들의 ‘자치적 관리자’가 아니다.

지방자치법이 상정하고 있는 지방자치단체는 시·도와 시·군·자치구만이기 때문에(지방자치법 10조) 시·군·자치구 규모의 주민들의 편의와 복리증진을 위해 노력을 하는 것에 불과하고, 읍·면·동 규모의 주민들의 편의와 복지증진은 몰입적으로 노력할 개연성이 적다고 비판적으로 고찰할 수 있다. 즉 지방자치단체의 종류별 사무배분기준을 보면, 지방자치단체의 사무를 보면, 주민의 복지증진에 관한 사무, 농림상공업 등 산업진흥에 관한 사무, 지역개발과 주민의 생활환경시설의 설치관리에 관한 사무, 교육체육 문화예술의 진흥에 관한 사무, 지역민방위 및 소방에 관한 사무, 구역조직행정관리 등에 관한 사무 등 6가지 영역에 이르고 있다(지방자치법 제 9조).

그러면서 제10조 시·군·자치구의 사무를 보면, ‘시·도에서 처리하는 것으로 돼 있는 것으로 돼 있는 사무를 제외한 사무’라고 규정함으로써 광역자치단체에 해당하는 시·도에서 처리하기로 한 사무가 있다면 이것을 우선한다는 규정이다. 이것은 보충성의 원칙(the principle of sudsidiarity)을 정면으로 반하는 규정이다. ‘보충성의 원칙’이란 주민들과 가까운 자치정부에서 우선적으로 자치사무를 처리할 수 있도록 한다는 원칙이다. 이것은 ‘보조성의 원리’라고도 하는 것으로서 집단의 횡포로부터 개인을 보호하고, 상위집단의 전횡으로부터 하위집단을 존중하고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즉 개인의 창의와 노력으로 완수 할 수 있는 것을 개인으로부터 빼앗아서 사회에 맡길 수 없다는 확고부동한 사회철학의 원리다.

즉 한층 더 작은 하위조직의 조직체가 수행할 수 있는 기능과 역할을 더 큰 상위의 집단으로 옮기는 것은 불의이고 해악이며 올바른 질서를 교란시키는것이란 것이다. 보조성의 원리가 무시되면, 개인의 자유와 자기결정권과 창의성이 제약되거나 훼손된다. 이것은 결국 인간의 존엄성의 훼손으로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전게서).

이처럼 한국의 현행 지방자치법은 지방자치라고 하는 질서를 교란하고 있는 법이고, 개인의 창의와 자유, 자기결정권을 침해하고 있는 법이라고 비판적으로 말할 수 있다. 즉시 현행 지방자치법은 자치의 본질과 철학에 부합하도록 개정돼야 할 것이다.


주민자치위원회의 한계

하물며 시·군·자치구에 대한 보조성의 원리가 적용되지 않는 상황에서, 시·군·자치구의 행정관리기관에 불과한 읍·면·동장의 권한에 해당하는 주민자치센터의 설치 및 운영조례에 비로서 주민자치위원회가 등장한다(강릉시 주민자치센터 설치 및 운영조례 시행규칙 24조에서 25조 참조). 지방자치법상에는 주민자치란 단어는 물론 주민자치센터란 단어도 나타나지 않는다. 즉 한국의 지방자치법에서는 주민자치란 것을 전혀 상정하고 있지 않는 법으로서 주민자치 없는 단체자치만을 지방자치라고 생각하고 있는 악법(자치적인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고찰하면)에 해당하는 것이다.

주민자치센터에서 운영하는 주민자치·지역복지·국민편의·사회진흥 기능의 자치프로그램이나 문화여가 시민교육기능의 강좌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권한은 동장이 갖고 있다. 동장은 주민자치위원회의 심의를 거쳐서 결정하고, 위원회가 수행하도록 이를 지원하는 역할을 하도록 시행규칙은 규정하고 있다(강릉시 주민자치센터 설치 및 운영조례 시행규칙 제 9조).

요컨대, 주민자치위원회는 동장의 심의기관에 불과하고 의결기관도 아니다. 읍·면·동의 자치프로그램이나 강좌프로그램을 주민자치위원회가 ‘자치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법적 규정이 없다. 한국에 주민자치는 읍·면·동 공간구역에서는 ‘없다’. 한국에서 주민자치는 시·군·구 공간구역에서만 ‘있고’, 주민들이 시·군·구의 대의기관으로서의 의회에 ‘참여’하거나 시·군·구의 집행기관으로서의 행정과정에 ‘참여’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읍·면·동장의 식민통치를 뚫고 나가서 시·군·구의 ‘주민자치’에 ‘참여’ 하기란 하늘에 별따기와 같이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한국에서 읍·면·동 단위에서 ‘주민자치다운 주민자치’는 ‘법적’으로 없다.

국가별 지방의원의 1인당 인구수

유사자치에 불과한 주민자치위원회

주민자치위원회가 주민자치답기 위해서는 주민들로부터 대표성을 확보해야 한다. 주민총회에서 선출되든가, 주민의 투표로 읍·면·동의 근린생활의회를 구성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의 주민자치위원회는 그 어떤 요건도 구비하지 않고 있다. 또 주민자치위원회는 읍·면·동장이 위촉한다. 주민자치위원 선정은 선정위원회가 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강릉시 주민자치센터 설치 및 운영 조례 시행규칙 제 25조). 그런데 이 선정위원회란 것이 읍·면·동장을 포함해 각계각층의 지역사회의 지도자 등 주민을 ‘대표’할 수 있는 사람으로 5~10인 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대표란 어떻게 선발되는가가 매우 애매하고, 그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갖고 있지 않음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하면, 이렇게 선정된 주민자치위원회는 주민의 대표도 아닐뿐만 아니라, 주민총회로부터 권한을 위탁받은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일본의 정·촌처럼 근린생활단위에서 지방자치단체로서 법제도적으로 보장된 것도 아니다. 결과적으로 주민자치위원회는 읍·면·동의 주민 2만여 명에 의해 구성된 것도 아니고, 주민들의 것도 아니며, 과연 주민들을 위해 일할 조직인가가 불명하다.

따라서 한국의 지방자치법이 진정으로 한국을 ‘민주적’으로 발전시키려고 한다면, 3권 분립과 함께 지방자치를 자치답게 구현할 수 있는 제도적 설계를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근린생활단위에 해당하는 읍·면(혹은 그 이하인 리)과 동단위는 ‘주민자치를 통한 지방자치’를 구현할 수 있도록 제도설계돼야 한다. 읍·면·동 단위에 대의기관으로서의 지방의회를 제도적으로 만들어주지 못한다고 한다면, 최소한 주민자치를 할 수 있는 제도적장치를 모색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주민총회를 통해 읍·면·동의 운영위원회에 해당하는 상임집행위원회를 조직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상임집행위원회에 반드시 주민총회를 거쳐야 하는 자치세율결정이나 정관개정, 근린생활 공간의 공공재산처분 등의 사항 이외의 것은 위임·위탁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군에 대한 자치계층을 폐지하고, 읍·면에 대한 자치계층을 도입하는 것으로 가능하고, 이렇게 하면 2개의 자치계층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하다. 읍·면에 대한 지방의회의 구성은 이미 제1~3대 지방의회 시기(1952~1961년)에 실시됐고 경험한 바 있다. 이때는 읍·면에 지방의회를 설치했고, 주민들이 직접 지방의원을 읍·면 지역에서 선출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지방의회의 정지기에 해당하는 1961년에서 1991년까지 30년간 지방의회 자체가 폐지됐고, 1991년 지방의회를 새롭게 부활시킬 때도 읍·면은 지방의회의 구성을 배제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현재의 지방자치법은 지방자치단체를 2계층으로 한정하고 있고, 그것도 기초지방자치단체 규모를 세계에서 가장 큰 인구규모로 설정하고 있어 주민들이 지방자치단체에 제대로 ‘참여’하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즉 기초지방자치단체 평균인구 규모를 보면, 한국이 얼마나 과대한(?) 규모인가를 알 수 있고, 주민대표들이 몇 명의 주민들의 의사를 대표하는가를 보면, 한국의 지방자치가 얼마나 자치하기 어려운 것인가를 알 수 있다.

국가별 지방의원의 인구규모를 보면, 주민대표로서의 지방의원 숫자가 영국은 7배, 프랑스는 15배 이상임을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 지방자치의 핵심기관 이라고 할 지방의회의 의원 1인당 인구수는 한국이 가장 큰 규모가 되고 있다. 한국이 정상적인 지방자치를 하려고 한다면, 읍·면·동에 해당하는 주민자치위원회가 진정한 지방자치를 할 수 있도록 지방자치 단체화 하든지, 주민총회에 기반 한 근린생활자치를 할 수 있도록 개혁해야 한다.

김찬동 교수는 이날 포럼에서 "한국의 지방자치법이 진정으로 한국을 ‘민주적’으로 발전시키려고 한다면, 3권 분립과 함께 지방자치를 자치답게 구현할 수 있는 제도적 설계를 해야 할 것"이라고 역설했고 그 해결책으로 "근린생활단위에 해당하는 읍·면(혹은 그 이하인 리)과 동단위는 ‘주민자치를 통한 지방자치’를 구현할 수 있도록 제도설계돼야 한다"고 제시했다.

주민자치의 본질회복
(과연 자치를 어떻게 해야 하나)----------

총회를 통한 주민자치권의 회복

민주주의를 제대로 하려면, 이상적인 제도는 직접민주정이다. 대의민주정은 불가피한 차선책이다. 도시화로 인해 일정한 공간에 인구규모가 급증하면서 주민총회와 같은 직접민주정이 불가능하기에 간접민주정으로서 도입된 제도다. 직접민주제의 전형은 그리스 아테네고, 주민총회에 해당하는 민회에서 토론을 통해 공동의 의사결정을 함으로써 모든 시민에 의한 정치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시민성이 강조되는 것이고, 시민성이 살아서 약동하는 것이다.

이런 직접민주제의 형식을 지금도 유지하고 있는 것이 스위스의 캔톤(canton)이고, 미국의 타운이나 타운십(township)이다. 여기서는 주민총회형식을 통해 직접민주정치가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인구규모가 확대되고, 도시화가 진전되면서 직접민주정을 할 수 없는 공간 규모가 돼 간접민주정이 불가피해지고, 대의자를 통해 의사결정을 하도록 위탁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행정국가화 현상으로 인해 대의제의 권한을 전문가집단인 행정부에 이양하게 됨으로써 시민으로부터 선출되지 않은 관료집단이 정책 결정을 하게 되는 경향이 나타나게 됐고, 대의제 자체도 기능부전의 한계를 드러내게 된 것이다.

그래서 1970년대 이후로 대의민주제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주민들이 직접 행정과정에 참여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그렇지만 이런 시민참여가 아무리 활성화돼도 대의제도를 치환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시민들이 행정과정에 참여한다고 해도 전업으로 시간을 내거나 노력을 경주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고, 이에 따른 사회적 비용도 커질 것이다. 그러나 복잡 다양한 사회문제와 공공문제를 해결하는데 대의자로서의 지방자치단체 의원이나 전문 관료들에게만 의사결정을 하도록 둘 수 없다는 것으로 인해 주민참여의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직접민주정과 간접민주정 선택의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을까? 이상적인 해결대안은 직접민주정의 인프라 위에 간접민주정이 서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한국의 경우에는 직접민주정이 부재한 상태에서 간접민주정으로서의 지방의회만이 시·군·구와 시·도에 설치돼 있어 지방자치가 지난 26년간의 재도입에도 불구하고, 지방자치가 역주행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즉 1991년도에 비해 현재의 지방자치단체의 재정자립도는 10% 이상이 낮아지고, 국고보조사업의 개수나 예산규모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말해 지방자치단체는 국가에 더욱더 의존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지방자치의 역주행을 막을 시급한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그것은 읍·면에 대한 지방자치단체화 및 동에 대한 주민총회의 도입이다. 이를 통해 주민들에게 읍·면·동이란 공간에 대한 주권을 회복하게 해주고, 주민들에 의해 근린생활정부를 구성하도록 해, 이 근린생활정부가 주민들을 위해 자치행정 관리를 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할 것이다. 이것이 링컨이 말한 민주주의다.


근린자치의회의 형성

그러면 일단의 사람들은 주민총회나 읍·면의 지방자치단체화를 통해서 무엇을 하고자 하느냐고 물을 것이다. 근린생활공유서비스를 공급하고, 근린생활 공유를 위한 공유재산을 취득하고 관리하기 위함이다. 현재의 구조는 공유재산이라고 하면, 국가의 행정재산과 일반재산을 의미한다. 국가의 행정재산은 국가의 행정관리를 위해 필요한 재산이고, 일반재산은 국가가 공공용이나 공유용, 공익사업을 위해 취득하고 있는 재산을 의미한다.

이런 공유재산을 관리하기 위해 공유재산 심의위원회를 두기도 하지만(강릉시 공유재산 관리 조례 제4조), 궁극적으로는 공유재산의 관리책임은 지방자치 단체장에게 있다(동 조례 2조). 만일 근린생활구역에 이런 공유재산이 없거나, 공유생활서비스가 없다고 하면, 굳이 근린자치를 할 필요도 없고, 근린자치의회를 형성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보다 주민들이 생활의 질을 맞춤형으로 향상하고, 근린생활공동체의 지역발전을 위해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사업과 전략을 모색하고자 한다면, 이것을 결정하고 추진할 수 있는 근린생활정부가 필요하고, 이것을 자치적으로 하는 민주적제도가 바로 근린자치 의회다. 만일 민주적인 제도로서 대의제 보다는 직접민주정을 선호한다고 하면, 주민총회를 정기적으로 개최해야 할 것이다.

이런 근린자치의회나 주민총회가 없는 주민자치는 자치가 아니다. 이점에서 주민자치위원회는 주민 없는 자치고, 주민총회 인프라가 없는 위원회에 불과하다. 진실된 주민자치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근린생활서비스가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자. 그리고 근린생활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근린생활 자치관리사무로서는 어떤 것이 있을까를 생각해 보자. 아파트단지를 예로 들어보면, 주민들이 공유하는 재산이 있어야 하고, 주민들이 함께 그것을 관리해야 주민들의 재산가치가 유지·보전되는 관계가 있어야 한다.

최근에 주소를 도로명으로 정하는 경우가 많은데, 일정한 폭의 도로로 만들어지는 구역을 하나의 근린생활자치 관리단위로 정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구역안에서의 쓰레기 처리, 도로 정비, 주차장 확보, 조경관리, 조명관리, 방범시설 설치, 레크레이션을 위한 커뮤니티시설, 엘리베이트 관리 등의 공유생활 서비스를 들 수 있다. 그리고 그 공간 안에서의 도로점 유료징수라든지, 광고판 관리수입, 유기농 농산물 판매 등의 관리사업을 운영(주민공동체에서 사회적 협동조합 등을 만들어서 위탁줄 수도 있음)할 수도 있고, 어린이집이나 소규모의 방과후학교 등을 학부모회 등이 자치적으로 운영하게 할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근린생활이 편리해지고, 유용한 근린생활서비스가 풍부해질수록 그 구역에 사는 주민들의 만족도와 행복도가 높아질 것이다. 그러면 지가도 상승하게 될 수 있다.


자치세의 신설통한 재정자치 확립

자치다운 자치의 핵심은 ‘재정적 자치’다. 재정적 자치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근린생활정부 운영을 위해 상위정부나 외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또 자치란 것이 재정적으로 자립할 수 있을 때 주장할 수 있는 것이지, 의존된 상태에서는 자동적으로 지원을 해주는 측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스스로 필요한 것을 결정하지 못하게 된다. 외부로부터 감사나 규제, 통제나 간섭을 받게 될 것이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주민들이 스스로의 삶의질을 높이기 위한 공동의 의사결정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근린생활자치 관리비라는 이름으로 자치세를 신설하는 것이 필요하다. 근린생활자치구역에서 필요한 공동생활서비스가 있는데, 이것에 대한 공급과 관리를 근린생활정부가 담당하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근린생활정부가 자치관리비를 징수할 수 있어야 하고, 이에 불응할 경우에는 생활의 필수적인 전기나 수도 등의 서비스 공급을 일정기간 유예기간 후에 중단한다든지, 연체 시에 연체료를 징수하고, 이것에 불응할 경우에는 간이재판을 통해 강제징수도 할 수 있는 사법적제도도 구비돼야 한다.

현재 한국의 지방세구조를 보면, 도세와 시군세로 구분되고 있다. 도세에는 보통세로서의 취득세, 등록면허세, 지방소비세, 레저세가 있고, 목적세로서 지역자원시설세, 지방교육세가 있다.

시군세로서는 보통세로서 주민세, 재산세, 자동차세, 지방소득세, 담배소비세 등으로 나눠져 있다. 자치구세로는 시군세의 재산세와 도세에 있는 등록면허세로 구성돼 있고, 특별시와 광역시세는 시군세의 재산세를 뺀 모든 세원과도 세의 등록면허세를 뺀 모든 도세를 한꺼번에 징수하는 것으로 돼 있다. 즉 세원구조에서 특별시와 광역시세는 시도세와 시군세를 통합해 징수하는 구조로 돼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특별시와 광역시는 시·군이 수행하는 고유사무는 물론이고, 도가 수행하는 광역 고유사무도 통합적으로 담당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주민자치다운 자치를 하기 위해서는 근린생활자치구역세를 신설하고, 이것은 현재의 세원체계에서 보면, 주민세와 자동차세를 세원으로 이관해주는 것을 가설적으로 검토할 수 있다. 근린생활자치는 주민들이 하는 것이니 주민세를 근린생활정부가 징수하도록 하고, 자동차라고 하는 재산에 대해서 주차장 관리라든지 방범 등의 근린생활 서비스의 제공과 매칭될 수 있는 재산의 하나로 간주한다고 하면, 근린생활정부의 주된 세원으로 배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근린생활정부가 근린생활 공유서비스를 제공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자립적 재원을 확보하도록 지방세체계를 개정하는 것이다. 현재 이와 유사한 시스템을 도입하고 있는 것이 바로 아파트단지의 관리비제도다.

다시 말해 이런 근린생활공유서비스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주민들이 세대당의 주민세를 내거나 자동차세 등 근린생활서비스의 제공에 상응하는 세원을 자치관리비라는 개념으로 징수해 근린생활정부의 운영유지비를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가능한 법제도를 구축해야 한다. 이에 대한 선례는 이미 아파트단지의 자치적 관리를 운영하고 있는 주택법을 참고로 하면 될 것이다.

지방정부의 지방세구조

근린지역의 법으로서의 규약제정권과 특별자치구역권 부여

자치는 무엇보다도 법치다. 법을 주민총회를 통해서 제정하거나 대의체인 의회를 통해서 제정하는 것이다. 차이는 법이 영향력을 미치는 공간의 규모가 어느 정도이냐의 차이일 것이다. 또 법이 영향력을 미치는 배후지가 넓으면 넓을수록 상위의 중심성을 갖는 법이 될 것이다. 그래서 법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의 규모에 따라서 저차중심지, 중차중심지, 고차중심지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다. 차이는 법이 영향력을 미치는 공간의 규모가 어느 정도이냐의 차이일 것이다. 또 법이 영향력을 미치는 배후지가 넓으면 넓을수록 상위의 중심성을 갖는 법이 될 것이다. 그래서 법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의 규모에 따라서 저차중심지, 중차중심지, 고차중심지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저차중심지의 법과 고차중심지의 법 간에 어떤 관계에 있도록 할 것인가다. 즉 양자 간의 관계를 수직적인 통제관계에 둘 것인가, 역할분담에 기인한 수평적인 병렬관계 혹은 대등관계에 둘 것인가다. 만일 보충성의 원칙(혹은 보조성의 원칙)에 따라서 저차중심지에 법의 우선적 적용을 하고, 중차중심지 혹은 고차중심지의 법을 저차중심지의 법을 보완하거나 지원하는 역할로 분담한다고 하면, 미국의 홈룰에 기반한 자치헌장(charter)와 같은 자치권을 수여하는 방식이 될 것이다.

그래서 근린지역의 저차중심구역에서도 주민들에 의해 근린생활정부를 구성하고, 기관구성이나 세원, 조직, 인사, 재정, 도시계획, 입법 등의 자치권을 갖게 될 것이다. 한국에서 읍·면·동 혹은 통·리(아파트단지 포함)단위의 주민자치를 도입한다고 하면, 그 공간구역에 대한 규약제정권을 수여하고, 그 규약은 그 공간구역에 거주하는 주민에게 효력을 미치는 것으로 해야 할 것이다.

상위정부에 해당하는 시·군·구나 시·도에서 직접 특별자치구역권을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의 한국의 지방행정 시스템에서는 국가위임 사무제도에 의해 여전히 중앙정부부처가 예산이나 법적권한을 상당히 갖고 있는 현실이기에, 이런 제도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국회에서 특별법을 제정해 근린생활구역에 대한 특별자치권(특구개념과 유사하지만, 자치다운 자치권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차이)을 부여해야 할 것이다. 현재 한국의 법제도에서는 광역 시·도단위에는 특별자치도, 특별자치시라는 개념을 도입하고 있어, 부분적으로 이 제도가 활용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점에서 특별자치(구역)제도를 도입할 수 있는 특별법을 제정하고, 이의 운영주체로서 광역시·도가 근린생활권역 혹은 근린생활구역에 자치권을 부여하는 방식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주민자치의 본질 회복을 위해서는 주민들이 근린생활공동체에 적용될 수 있는 법을 스스로 만들 수 있는 자치역량이 있어야 하고, 이것을 뒷받침하는 제도가 설계돼 있어야 한다.


결론 및 제언---------------------

민주정치의 핵심적 가치

지방자치법에 주민자치란 단어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라고 한다면, 주민은 지역의 주인이다. 국민과 주민의 정치에의 참여는 민주정치의 핵심적 가치다. 국민이 국정에 직접참여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고안한 제도가 대의민주정이다. 즉 국민은 국정의 대표자로서 국회의원들과 대통령을 선출해두고, 일정한 기간 국정에 대해서는 방임하게 된다. 그리고 국민은 경제영역이나 사회문화영역의 이슈에 전념하게 되고, 이것이 정치가와 국민의 역할분담이고, 각자의 역할에 책임을 다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주민이 주민다운 것은 자신의 근린의 생활에 필요한 공동체에 속해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서로간에 호혜적인 교류를 할 때, 삶의 질이 높아지고 행복해지며 인간다운 즐거움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을 폴리스(polis)적 존재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현대의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해 농촌공동체를 떠나온 개인들이 도시적 삶에 적응하면서 익명화되고 원자화되면서 고립되고 소외된 존재가 된 것이다. 그래서 공동체를 잃어버리고 인간다운 삶에 필수적인 커뮤니티를 상실하게 된 것이다. 인간은 이런 외로움속에서 이상적인 삶을 그리게 되면서 도시속에서도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참여하려는 욕구를 갖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욕구를 충복시켜줄 제도의 불비로 인해 인간은 직장이나 경제활동에 몰입하게 되고, 승진이나 돈을 인생의 가치로 우상화하는 현상에 빠져버리게 됐다. 그리하여 점점 인간적인 삶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나, 이웃들 간의 소통을 통한 참여의 효능감은 단절돼 버린 것이다.


근린생활 단위자치제도 설계 필요성

근린생활단위에서의 자치제도를 설계해야 할 필요성은 현실적인 필요성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인간다운 삶의 회복을 위해서도 필요한 측면이 있다. 현재의 지방행정시스템은 인간다운 삶의 회복에 필요한 공공서비스 및 공유서비스를 행정관료제가 모두 공급한다는 이념에 빠져 있는 것 같고, 이 이데올로기를 구현하기 위해 점점 행정관료제가 사회가 가용할 수 있는 권한과 예산을 집중하거나 독점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행정관료제 간에도 현장관료제보다는 점점 계층상의 상위의 관료들이 더 큰 권한과 예산을 독점하려고 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런현상을 가속화 시킨것은 바로 행정국가화 현상이고, 수도권집중이었으며, 정치와 경제의 유착현상과 글로벌경제화라는 흐름이었다. 신자유주의로 대변되는 글로벌주의와 신공공관리(NPM)로 상징됐던 행정개혁의 종착지는 결국, 인간을 점점 격화된 경쟁과 성과주의 속에 매몰되게 만들었고, 돈의 논리와 가치(value for Money)에 예속되게 만들었다. 이런 문제를 풀어내기 위해 공유경제나 사회적경제 등의 새로운 경제시스템에 대한 논의가 나타나고 있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전통적인 발견이었고 방법이었던 지역사회에 자치권을 우선적으로 부여하는 보충성의 원칙에 입각한 근린생활자치제도의 설계가 20대 국회의 입법과정에서 열매를 맺어야 할 때다. 헌법 개정에서도 반드시 들어가야 할 사항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민주주의를 한 단계 진전시키는 시금석이 바로 근린생활지구에 대한 주민자치제도의 새로운 설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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