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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자치에서 토론이 갖는 불교적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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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자치에서 토론이 갖는 불교적 의의
  • 류제동 성균관대 유학동양학과 강사
  • 승인 2021.10.31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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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주민자치 20년’ 다시 생각하는 주민자치

주민자치가 왜 필요한 것인가? 너무 원론적인 질문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문제 상황이 복잡할수록 그 근본으로 돌아가서 다시 생각해보는 것도 요긴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세속 국가에서는 구성원들이 민주시민으로서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권리를 충분히 누리는 것으로 족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불교라는 종교의 차원에서 이야기하자면, 주민자치는 이상적인 불자 공동체에서 각각의 구성원이 온전히 깨달은 붓다로 나아가게 하는 기반이어야 한다. 이 글에서는 자치의 과정에서 필수적인 토론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를, 토론 과정이 매우 정교하게 발달한 티베트 불교의 전통에 따라서 성찰해보고자 한다.

 

패배 아닌 의혹 줄이는 과정인 티베트 불교의 토론

티베트 불교에서 토론은 명쾌한 논리로 누군가를 패배시키는 과정이 아니다. 토론은 성불의 과정에서 서로의 이해를 더 확실하게 하여 의혹을 줄이는 과정이다. 토론에 참여하는 사람은 각자 서로의 입장에 대하여 질문을 제기하고 그 입장에 모순되는 점이 있으면 지적하여 그 입장을 다듬어가도록 도전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쌍방 모두가 도움을 받도록 하는 과정이다. 현실에서는 주민자치와 상당히 거리가 있는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지만 최근 대선 토론에서도 빈번하게 보이듯이 서로를 향해 날선 공격이 이어지는 것이 비일비재하다.

특히 이번 대선 과정에서는 우리 시대의 논객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하는 진중권 씨의 말마따나 어떤 후보도 적극적으로 환호되기보다는 상대 후보에 대한 배타적 의식에 따른 지지 양상으로 치닫고 있어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토론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토론 문화를 일신하여 상생적 토론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라도 불교적 토론 태도는 매우 절실하다고 하겠다. 다만 여기에서 불교적 토론 태도는 이상적 관점에서 제시하는 것이기에 현실에서 불자들이 얼마나 그 이상에 다가가고 있느냐는 또 다른 문제라고 하겠다.

티베트 불교에서는 어떤 불자가 다른 모든 반박에 대하여 자신의 입장을 방어할 수 있고 그 입장에 어떠한 논리적 불일치나 모순도 없다고 확신한다면, 그 불자는 그 입장을 흔들리지 않는 결정적인 통찰로 받아들여서 집중적인 수행의 기반으로 삼을 수 있다. 불자는 무상(無常), 자신과 타자의 평등성, 보리심(菩提心), 그리고 공성(空性) 등 불교의 어떤 핵심 주제에 대해서든 일관되게 집중함으로써 굳은 확신에 도달할 필요가 있다.

이 과정에서 개인적으로 분석적인 명상이나 사색을 통하여 확고한 앎에 도달하고자 노력할 수도 있겠지만 현실에서 다양한 부류의 식견을 갖춘 사람들과 토론을 하면서 자신의 이해에 관하여 온갖 질문을 받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혼자서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쉽게 그 사람의 논리에서 불일치점이나 실수한 곳을 발견해서 지적할 수 있는 것이다.

티베트 불교에서 오히려 명상보다 토론을 더 중시하기도 하는 것은 집중력을 개발하는 데에 명상보다 토론이 더 도움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토론에서 상대방의 도전과 더불어 상대방이 자신의 말을 듣고 있다는 사실은 스스로 더 집중하도록 영향을 준다. 혼자 명상을 실천할 때 마음이 방황하거나 졸음에 빠지는 것을 막는 것은 자신의 의지에 달려 있을 뿐인 것과는 차이가 있다.

티베트 불교의 토론 과정에서 산만해지거나 화를 내게 되면, 그 사람은 실패한 것으로 간주된다. 우리의 현실에서 얼마나 자주 토론이 산만해지고 또 서로의 감정이 상하게 되는지를 상기해 본다면, 티베트 불교의 이상적인 토론 과정이 정말 멀게 느껴질 수밖에 없을 수도 있지만 중요한 반성의 계기를 부여한다고도 하겠다. 이와 같은 토론 태도와 기술을 숙달하게 되면 오히려 명상 과정, 특히 시끄러운 곳에서의 명상 과정에도 크게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더 나아가 티베트 불교에서의 토론은 개인의 성품을 계발하는 데에도 도움을 준다. 수줍어하면서 머뭇거리는 태도로는 토론을 활발히 하기가 힘들기에, 보다 적극적인 태도를 계발시켜 나가게 된다. , 토론에 참여하면서 상대방의 도전에 대하여 또렷하게 발언하는 태도를 익혀야 한다. 또한, 오만해지거나 화를 내거나, 마음이 흐릿해지면, 토론 과정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다. , 항상 정서적인 균형을 견지해야 한다.

 

무조건적 맹신에 대한 배격, 자유롭지만 엄격한 토론의 기본원칙으로 이어져

궁극적으로 티베트 불교에서 추구하는 것은 무아(無我)의 자각과 실현이다. 토론에서 이겼다고 생각하든 졌다고 생각하든 토론은 언제나 논파되어야 하는 를 인식할 탁월한 기회를 제공해준다. “내가 이겼다” “나는 이렇게 똑똑하다” “내가 졌다또는 나는 이렇게 멍청하다라고 생각하거나 느낄 때 토론에 참여하는 각자는 자기가 스스로 동일시하고 있는 견고한 가 투사되고 있음을 뚜렷이 인식할 수 있다. 티베트 불교에서 이 는 논파되어야 할 것이고, 순전한 픽션(fiction)에 불과하다.

덧붙여서 상대방의 입장이 비논리적임을 입증한다고 하더라도 그 입증에서 자신이 더 똑똑하고 상대방은 멍청하다는 것이 판명되는 것은 아니다. 티베트 불교에서 토론 참여자의 동기는 언제나 상대방이 명료한 이해를 계발시키도록 돕는 것이어야 한다.

위와 같은 토론의 태도에서 새삼 상기할 필요가 있는 것이 붓다의 자유로운 탐구 헌장(The Buddha’s Charter of Free Inquiry)”이라고도 불리는 깔라마 숫타(Kalama Sutta)이다. 이 경전에서는 붓다가 여러 견해의 상호 다툼으로 혼란을 겪고 있던 깔라마 족 사람들에게 자유로운 토론의 기본원칙을 천명한다.

붓다는 우선 확신이 들지 않는 것에 대하여서는 의심을 품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익히 널리 알려져 있듯이 불교는 무조건 믿으라는 태도를 배격한다. 이어서 붓다는 여러 번 반복해서 들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믿어서는 안 되며, 전통이라고 하더라도 믿어서는 안 되며, 소문이 났다고 하더라도 믿어서는 안 되며, 경전에 있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믿어서는 안 되며, 추측이라고 하더라도 믿어서는 안 되며, 자명한 이치라고 하더라도 믿어서는 안 되며, 그럴듯한 추론이라고 하더라도 믿어서는 안 되며, 숙고된 관점이라고 하더라도 믿어서는 안 되며, 발언자가 그럴듯한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믿어서는 안 되며, 발언자가 자신의 스승이라고 하더라도 믿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한다.

붓다는 여기에서 지나치게 엄격한 기준을 제시한다고도 할 수 있다. 우리가 일상생활을 영위하려면 이렇게 엄격한 기준으로 살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붓다의 위와 같은 말씀을 다소 에누리하여 새겨듣는다면, 위에 열거한 것들에 대하여 절대적인 신뢰를 주지는 말라는 말씀이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 우리가 누군가와 다투게 될 때에는 어떤 특정한 견해에 대하여 과도한 신뢰를 고수하기 때문인 경우가 적지 않다. 직접 확인해볼 때까지 견해의 다툼을 유보할 필요가 있는데, 그렇게 유보하지 못하고 자신의 견해를 고수하면서 다툼이 끊이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직접 확인한 것은 얼마나 믿을 수 있을까? 붓다의 전생 이야기 중 박태기나무를 보고 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옛적에 베나레스의 브라마닷타 왕에게 네 아들이 있었는데 그 네 아들이 마부를 불러 그에게 박태기나무를 보여 달라고 청하였다. 마부는 네 아들 모두에게 한꺼번에 그 나무를 보여주지 않고 우선 첫째 아들을 데리고 가서 그루터기에서 막 싹이 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마부는 둘째 아들에게 푸릇푸릇한 잎이 나온 모습을 보여주고, 셋째 아들에게는 꽃이 만개한 모습을 보여주고 넷째 아들에게는 열매를 맺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나중에 네 형제가 모여 앉아서 박태기나무가 어떤 나무인가 이야기하게 되자 첫째 아들은 불에 탄 그루터기와 같다고 이야기하였고, 둘째 아들은 커다란 벵골보리수와 같다고 하였고, 셋째 아들은 고깃덩어리 같다고 이야기하였고, 넷째 아들은 아카시아 나무 같다고 하여 서로 답이 다른 것에 대하여 짜증을 내게 되었다. 마침내 그들은 아버지를 찾아가서 도대체 박태기나무가 어떤 나무인가를 물었다. 이에 아버지는 대답하기를 너희 넷 모두 그 나무를 보았지만 마부가 그 나무를 보여주었을 때 그에게 그 시기를 묻지는 못하였다. 그래서 구별을 하지 못하였고 그리하여 혼란스러워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위의 이야기가 단순한 우화라고도 할 수 있지만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무상(無常)의 진리를 잘 일깨워주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다투게 되는 것은 서로 같은 대상을 두고 서로 다른 견해가 있어 토론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각자 본 것이 일면 맞는 부분이 있고 그러면서도 전체의 그림에서 일부분일 뿐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면 보다 상생적인 토론이 이루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현실은 여전히 눈을 감으면 코를 베어 가는 세상이고, 서로 사기를 쳐서 무언가 큰 불의의 이득을 보려고 호시탐탐 노리는 것이 아닌가. 너무 순진하게 받아들이면 위험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주민자치에 개방적이고 상생하는 토론 문화 자리 잡혀야

앞에서 붓다의 자유로운 탐구의 헌장에서도 언급했듯이 그 무엇도 절대적인 신뢰를 너무 쉽게 주지는 말아야 하지만 불신 속에서 아무런 대화도 하지 말자는 것이 붓다의 태도는 아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개방적이고 상생적인 자세로 토론을 하자는 것이 붓다의 태도이다.

주민자치를 이루는 데 있어서 우선적으로는 주민들의 만남이 잘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다만 그 만남이 잘 이루어지기 위해서나 그렇게 이루어진 만남이 성공적인 결실을 보려면 개방적이고 상생적인 토론 문화가 자리 잡아야 한다. 각종 이익집단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서로 속이기에만 골몰하는 상황, 최근 일파만파로 퍼지고 있는 대장동 사태를 생각하면 서로 신뢰하는 가운데 개방적이고 상생적인 토론, 서로의 인격을 계발하는 데 도움이 되는 토론을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급할수록 돌아가야 한다는 말도 있고 서두에서 이야기했듯이 근본으로 돌아가서 우리의 자세를 가다듬을 필요도 있다고 할 것이다. 너무 비현실적인 원론적 이야기라고 타박할 수도 있겠지만 공자도 일찍이 무신불립(無信不立)이라고 하였다. 서로의 신뢰를 회복해 나가는 가운데 토론 문화를 일신하려는 의지와 자세가 주민자치로 나아가는 길에 하나의 초석이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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