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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들에게 더 잘 보이는 것들 '아줌마' '로기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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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들에게 더 잘 보이는 것들 '아줌마' '로기완'
  • 윤성은 영화평론가
  • 승인 2024.04.16 10: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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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사람들 그리고 영화] Town in Movie
많은 영화의 배경이 ‘마을’이다. 영화 주인공들의 삶의 터전 역시 그들이 사는 마을이고 동네이기 때문이다. 스크린 속 인물들은 배경이 되는 마을, 그리고 이웃들과 때로 갈등하고 협력하며 여러 이야기들을 만들어나간다. 그 이야기의 결말은 해피엔딩이 되기도 하고 비극으로 치닫기도 한다. 앞으로 ‘마을, 사람들 그리고 영화’에서는 마을과 사람들의 케미스트리, 그들 사이의 교감과 성장, 변화를 다룬 작품들을 소개한다. 그 속에서 주민자치의 바람직한 방향, 때로 반면교사의 깨달음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편집자 주]

* 영화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래 전 남편을 잃고 아들과 단둘이 살고 있는 중년여성이 있다. 아들은 일 때문에 매일 야근이라 엄마는 친구들과 운동을 하고 혼자 드라마를 본다. 늘 아들 생각뿐인 엄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들은 자기 일에만 열심이다. 결국 오래 전에 계획한 설 연휴 해외여행을 앞두고도 아들은 미국 회사에 면접을 보러 가야 한다며 엄마를 실망시킨다.

아들이 여행지 대신 미국으로 떠나자마자 도착한 것은 화질 좋은 텔레비전이다. 엄마는 그녀가 좋아하는 남자 배우가 나오는 TV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전화 한 통을 받는다. 여행 상품이 환불이 안 된다는 내용이다. 엄마는 캐리어를 끌고 혼자 공항으로 간다.

 

한국드라마 덕후싱가포르 아줌마의 서울 표류기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을 법한 풍경이지만 한국이 아니라 싱가포르에 살고 있는 림메이화’(홍휘팡)의 이야기다. 림메이화는 또래의 이웃들과 마찬가지로 한국 드라마를 무척 좋아하며 여진구의 열렬한 팬이기도 하다. IT업계에 종사하는 똑똑한 아들은 야근하기 일쑤라 가뜩이나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은데 명절 여행까지 파투를 내다니 림메이화는 처량한 마음뿐이다. 그래도 옷을 두툼하게 챙겨 입고 드라마에서만 보던 서울 풍경을 접하니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것 같다.

림메이화는 다른 관광객들과 함께 술잔도 기울여 가며 여행을 즐기려 애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관광버스가 메이화를 빠뜨리고 숙소로 떠나 버리는 사고가 발생한다. 돈도 한 푼 없고 핸드폰까지 망가진 싱가포르 아줌마는 졸지에 타국에서 미아가 된다. 한국 드라마를 아무리 봤어도 할 줄 아는 한국말이라곤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괜찮아’, ‘가지마’, ‘사랑해요정도다. 어쩔 줄 모르는 그녀에게 아파트 경비원 정수’(정동환)가 말을 걸어온다. 그렇게 언어가 전혀 통하지 않는 두 사람의 하룻밤 모험이 시작된다.

한류’(K-wave)라는 단어도 20년 넘게 들어왔고 OTT 플랫폼이 활성화되면서 세계적으로 K-콘텐츠의 인기가 높다는 것도 눈으로 확인하고 있지만 그것을 직접 체감할 기회를 얻는 한국인들은 드물다. ‘아줌마’(Ajoomma, 감독 허슈밍. 2023)는 한국과 싱가포르의 첫 번째 합작 영화로 K-콘텐츠에 대한 싱가포르인들의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주인공이 늘상 한국드라마를 켜놓고 사는 인물인데다 실명을 차용한 한국배우, 여진구에 대한 팬심도 영화 내내 보여주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 가수나 배우들 때문에 한국으로 여행을 오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영화에 등장하는 여행상품 이름도 스타의 비밀이다. 45일간의 강원도 투어로 드라마 촬영지를 방문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한순간에 악몽으로 변해버린 메이화의 한국여행에는 여행사 직원인 권우’(강형석)의 불편한 사정이 있다.

권우는 갑작스런 돈 문제 때문에 사채업자들에게 쫓기는 터라 가족들과도 떨어져 있고 설연휴도 계속 일을 하며 보내야 하는 처지다. 혼자 온 메이화를 편의대로 다른 여행사에서 온 중국인 관객들과 합치고 설명도 제대로 해주지 않는다거나 메이화가 타지 않았는데도 차를 출발시키는 부주의함은 이러한 그의 심난한 상황과 관계가 있다. 그러나 권우의 잘못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사장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다른 관광객들을 먼저 투숙시키느라 메이화가 있던 곳에 느지막하게 도착하는데 그녀는 이미 정수와 그 곳을 떠난 후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물론 이 영화의 목적이 한국의 허술한 패키지여행 시스템이나 무책임한 가이드를 비판하는데 있는 것은 아니다. 우연히 만난 또 다른 한국인, 정수의 호의는 권우의 잘못을 상쇄시켜준다. 정수는 생면부지의 외국인에다 말도 안통하고 돈도 없는 메이화에게 밥을 사준 다음 정말 갈 데가 없자 자기 집으로 데려와 잠잘 곳도 내준다.

두 사람이 마주 본 채 차를 마시면서 영어로 더듬더듬 소통을 시도하는 부분은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 중 하나다. 상대방과 소통하고자 하는 마음이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는 것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아들이 둘 있지만 다 타지에 있고 혼자 두키라는 늙고 병든 개를 키우며 살고 있는 정수는 메이화의 한국 남성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정수는 취미로 드라마 시청 대신 나무를 깎아 작은 인형들을 만든다는 것이다.

정수의 남다른 취미는 두 사람 사이에 대화거리가 되기도 하고 두 사람이 헤어지고 나서도 서로를 생각하게 하는 매개가 된다. 정수의 배려 덕분에 메이화는 노숙자 신세를 면하고 따뜻하고 편안한 잠자리에 든다. 나중에 권우가 정수에게 왜 모르는 사람을 도와줬냐고 묻자 정수는 대답한다.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 봐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모른 척 할 수가 있나.”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은 일상에서도 많이 쓰지만 최근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 후보에도 오른 바 있는 패스트 라이브즈’(감독 셀린송, 2023)라는 작품에 사용되면서 그 의미에 더 무게가 실리고 있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서양인들에게 불교의 인연이라는 개념을 각인시킨 영화로 알려지고 있는데 현생에서 옷깃만 스쳐도 전생에 8천 겹의 인연이 쌓여 있다는 윤회사상이 신비롭게 느껴지기 때문으로 보인다. 우연히 만나게 되는 사람들 하나하나를 허투루 대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 또한 따뜻하고 현명하다.

 

한국드라마 유사체험가능케 한 한국여행

이런 생각을 가진 정수의 사심 없는 친절함은 한국에 부정적 인식만 갖고 떠날 수 있었던 메이화에게 오히려 남다른 추억을 남기는 계기를 만들어준다. 자의는 아니었지만 그녀는 한국 현지인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도 하고 길거리에서 떡볶이도 사먹어 보고 직접 운전대까지 잡는 등 진짜 한국인들의 생활을 체험하게 된다. 시청자의 자리에서 벗어나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어 본 것이다.

사채업자들에게서 권우를 구해낸 것은 관찰자가 아니라 한 공동체의 일원이 된 경험이기도 하다. 정수와의 관계에서는 어쩐지 애틋한 감정도 드러나는데 이 또한 그녀가 즐겨 보는 한국드라마의 로맨스를 살짝 맛보는 것처럼 의도된 연출이라고 할 수 있다. 꼭 연애 감정이 아니라도 그녀는 정수를 통해 한국에도 자신과 비슷한 외로움을 느끼는 장년층이 있음을 알게 되고 권우와 이야기를 나누며 사채업자에게 쫓기는 청년세대의 절박함도 느껴 본다.

권우는 메이화의 아들 또래로서 강한 유대감과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다. 이것은 그녀의 꿈 속에서 여진구가 잃어버렸던 엄마, 즉 자신을 찾아오는 장면이 등장할 때 분명해진다. 이처럼 림메이화에게 한국드라마와 한국여행은 많이 다르면서도 한편으로 유사한 체험으로 남게 된다.

영화에서는 낭만적으로 마무리 되었으나 만약 정말 림메이화 같은 경험을 한 여행객이 있다면 한국에 대한 평가는 냉혹할지 모른다. 한 국가나 문화권에 대한 객관적인 판단은 이방인들이 그 공동체 안에 들어올 때 이루어지는 것 같다.

 

한 국가나 문화권에 대한 객관적 판단은 이방인들이 그 공동체 안에 들어올 때 가능해져

장르도 다르고 메시지도 다르지만 한 달 전 넷플릭스에서 공개한 영화, ‘로기완’(My Name is Loh Kiwan, 감독 김희진. 2024)도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만한 여지가 있는 작품이다. 탈북민인 로기완’(송중기)은 엄마의 목숨 값으로 벨기에에 도착한다. 벨기에는 복지가 잘 되어 있고 난민들의 인권에도 관심이 많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난민신청을 하러 간 기관은 지극히 사무적인데다 끝까지 그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로기완은 첫 난민심사까지 남은 두 달 가량을 공중화장실에서 새우잠을 자며 처절하게 버틴다. 그러나 화장실이 폐쇄되면서 그는 갈 데가 없어지고 거리를 전전하다 불량배들에게 갖은 고초를 다 당하기도 한다.

우여곡절 끝에 정육공장을 소개받아 일을 시작한 기완은 선주’(이상희)에게 많은 도움을 받으며 조금씩 정착해 나가는 듯하다. 그러나 재판에서 기완이 북한 사람임을 증명해주겠다고 약속했던 선주도 그녀의 비자 연장 문제 때문에 기완을 배신하고 만다. 벨기에에서 겪는 이 모든 사건들은 기완에게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일일 뿐이다.

한편 남한 출신으로 기완과 조금씩 가까워지며 연인으로 발전하게 되는 마리’(최성은) 또한 도박을 둘러싼 조직 폭력배들과 엮여 고통을 당하는 인물이다. 브뤼셀도 그 아름다운 풍광과 달리 낯선 사람들에게 지극히 배타적이고 위험한 곳이라는 점에서 다른 도시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아줌마의 서울이든 로기완의 브뤼셀이든 영화 속의 모습이 그 도시의 실체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방인의 시선으로 묘사되고 있기에 공동체 내부에서는 잘 알 수 없었던 것들을 깨닫게 해주는 면들이 분명히 있다. 영화를 이미 본 사람들이라도 이런 관점에서 접근해 보면 더 흥미로운 지점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싸이더스/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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