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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중앙정부의 향약 시행에 대한 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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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중앙정부의 향약 시행에 대한 논의
  • 박경하 한국주민자치학회 부설 향약연구원장(중앙대학교 역사학과 명예교수)
  • 승인 2023.04.05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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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하 교수의 향약이야기]

‘조선시대 향촌사회의 자치규약’. ‘향약’의 사전적 의미이다. 여기에 바로 이어지는 것은 ‘덕업상권’‘과실상규’‘예속상교’‘환난상휼’ 등 학창시절 역사시간에 달달 외웠던 ‘향약의 4대 강목’이다. 다분히 정형화되고 박제화 된 향약에 대한 인식을 바꿔준 것이 바로 조선시대 기층민들의 상부상조 자치조직 ‘촌계’이다. 오늘날 주민자치의 한 원형과 단초를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이에 조선시대 향약 연구 전문가로 사단법인 한국자치학회 부설 향약연구원장인 박경하 교수의 향약이야기를 연재한다. 전통시대 향약·촌계를 재조명함으로써 오늘날 주민자치에 주는 의미와 시사점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편집자주]

조선시대에 전국적으로 시행된 향약은 그 기원이 언제부터인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다만 중국 북 인종(1076) 때 섬서성 남전현에서 정주학(程朱學)을 신봉한 도학자 여씨 네 형제(大忠·大防·大鈞·大監)가 그들 향리에서 여씨 일족들의 교화와 환난상구(患難相救)를 위해 시행한 여씨향약(呂氏鄕約)”이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걸쳐 전래된 것으로 파악될 뿐이다. 조선 초에 전래된 주자대전(朱子大全)주자증손여씨향약(朱子增損呂氏鄕約)이 포함되어 있고, 또한 소학여씨향약이 들어가 있어서 유학자들에게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조선조 향약 보급이 사회통치 정책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517(중종 12) 경상도 함양군 유생 김인범(金仁範)의 상소문이 그 효시였다(중종실록(中宗實錄), 28, 126월 갑술조(甲戌條)) 그는 이 상소문에서 향약을 시행을 통해 풍속을 교화(敎化)할 수 있다고 하여 향약의 보급을 주장하였다. 중종은 그 취지에 찬동하고 대신들에게 향약의 시행방법을 검토해 보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대신들도 김인범의 주장에 동의하고 향약을 팔도에 시행케 하는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신료들 모두가 찬성한 것은 아니었고 담당 기관인 예조에서도 향약을 소학 중의 일부라고 보고 별도로 시행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또 중종 127월 여씨향약을 국령으로 시행케 하자는 건의를 하였다."(중종실록, 28, 127월 병자조)

강릉 율곡기념관의 모습. 사진=강릉시청

 

향약, 중종 때 김안국 등의 상소로 보급 시작

이후 향약 보급을 효과적으로 시행하기 위하여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한(중종 122~13222) “김안국(金安國)1718(중종 13) 41일에 여씨향약언해본을 널리 전파하자는 상소를 올렸다. 중종은 이를 받아들여 언해된 향약을 간행해 널리 펴서 알리도록 하였다.”(중종실록, 32, 134월 기사조) 이로써 향약 보급이 전국적으로 시행이 가능하게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중종 때 실제 향약이 시행된 사례를 보면, 이 해 9월 조광조는 온양에서도 시행이 잘 되고 있음을 임금에게 보고하고 있다.(중종실록34, 139월 임인조) 특히 청주사람 한충(韓忠)이 충청도의 향약 실행상황을 일컬어 "충청도의 향약이 타도에 비하여 우수하고 충청도에서는 충주가 가장 잘 시행되었다."(중종실록36, 147월 정사조)라고 한 사실을 보더라도 향약이 널리 보급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급격하게 보급되는 데에 대해서는 1518(중종 13)부터 논란이 구체적으로 제기되었다. 중종 139월부터 147월까지 향약 시행에 대한 논란을 보면, 정광필 · 김식 · 남곤 등은 향() 보급을 경계하였다. 특히 기묘사화(1519)의 주체세력이었던 남곤은 향약 때문에 국가의 금법이 무시될 것을 우려했다. 그러나 신진사류 조광조는 향약을 시행하여 주자학적 윤리와 향촌자치제를 강화하려고 하였고, 참찬관 한충 역시 여씨향약을 지방의 유향소(留鄕所)와 경성 오부 각 동의 약정에 분급하여 실시케 하여 자치조직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논쟁이 표면화된 이유는 조광조 일파의 도학정치에 대한 남곤 등 훈구 재상의 반목과 알력 때문이었다. 이들 간의 대립은 1519(중종 14) 11월 드디어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 일파가 제거됨으로써 향약 시행이 중지되었다. 이후 1524(중종 19) 10월 범죄사건 등이 빈발하자 다시 향약 시행에 대한 논의가 일어났고, 1543(중종 38) 11월에 좌의정 홍언필이 시행을 건의하여 다시 시행하게 되었다(중종실록, 38, 151월 경자조)

율곡 해주향약1. 사진=국사편찬위원회
율곡 해주향약. 사진=국사편찬위원회

 

정치세력 간 반목·알력이 향약 논쟁에도 영향 미쳐중앙vs지방-vs민 이슈도

그 후 백운동서원을 창설했던 주세붕은 1546(명종실록명종 원년 8월 갑오조)에 향약을 궁촌벽항(窮村僻巷)에까지 시행하자고 건의하였다. 이때 수렴청정을 하던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는 삼정승을 모아 놓고 향약 대신에 향촌 마을마다 있는 계()를 결성하여 환난상구케 함이 어떻겠느냐”(명종실록명종 원년 8월 정미조)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에 영의정 윤인경은 “(향약은) 스스로 행하고자 하는 자가 있으면 행하여도 좋지만 조정이 입법하여 시행하는 것은 어렵다라고 대답하였다. 이것은 향약을 관 주도로 이끌지 말자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명종대(1545~1567) 부터는 지역에 따라 특징이 다른 향약이 제정 시행되었다.

이에 해당되는 향약이 퇴계 이황(李滉)의 예안향립약조과 율곡 이이(李珥)의 서원향약(西原鄕約해주향약(海州鄕約사창계약속(社倉契約束해주일향약속(海州一鄕約束) 등으로 이들 향약이 조선조 향약의 전범이 되었다.

이후 향약 시행에 대한 논란은 계속적으로 일어났으나 1571(선조 4) 흉년으로 인하여 백성이 기한(飢寒, 굶주림과 추위)에 떨고 있었기 때문에 예교(禮敎)보다 경제적 안정책이 요구되었기 때문에 향약은 다시 중지되었다. 이후 재이(災異, 재난과 이변)가 연달아 일어나 사회 질서가 더욱 혼란해지자 1573(선조 6) 8월 삼정승은 향약시행을 주장했다.

영상 권철은 향약을 시행하면 "인심이 맑아지고 세도가 회복된다고 하였다. 좌상 박순은 도시부터에서 향곡에 이르기까지 동계나 향도회가 있는데 이것은 스스로 조성된 것이지 조정에서 시행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규정(糾正)의 권위를 지니지 못하여 강한 자는 이와 같은 계를 무시하고, 악한 이들 이 규약을 무너트리는등의 폐단을 일으키고 있으니 조정에서 향약 시행을 명한다면 향촌민들이 이를 따를 것이라고 하였다. 우의정 노수신은 향약을 시행하지 않으면 해가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선조실록7, 68월 갑자조)

이에 선조는 국령으로 다시 시행케 하는 것보다는 지방민의 자치에 맡겨 시행토록 하자고 하였다. 이에 불구하고 삼사(사헌부·사간원·홍문관)에서 향약 시행을 주장하자 선조도 결국 동의하여 다시 국령으로 시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예조에서는 중국과는 생리풍습이 다르므로 향약을 우리의 풍토에 맞게 다시 만들어 시행할 것을 주장하였다.(선조실록, 7, 68월 기축조) 즉 조선화 된 향약을 주장한 것이다.

율곡 해주향약. 사진=국사편찬위원회
율곡 해주향약. 사진=국사편찬위원회

관 주도 시행·중지 반복 속 율곡의 해주향약조선화 된 방식으로 시행

그러나 향약을 강행한다는 것은 어려운 여건이었다. 왜냐하면, 명종 대의 흉년과 도적의 횡행 등으로 인한 민생고가 선조 대까지 지속되었기 때문이었다. 1574년 향약 시행에 경험이 있던 율곡은 의식이 풍족한 후에야 예의염치를 안다는, 즉 선양민(先養民) 후교민(後敎民) 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세워 향약의 조급한 실시를 반대하였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여건으로 대신들 간에도 의견이 일치되지 않자 선조는 1574년 향약 시행을 정지토록 명하였다.(선조수정실록, 8, 72월삭 병오조)

이와 같이 선조 대 향약도 국령에 의한 전국적 시행은 실현되지 못하고 다만 지역적으로 시행되었을 뿐이다. 이때 시행된 대표적 향약이 1577(선조 10) 율곡의 해주향약이었다. 이 향약은 덕업상권(德業相勸과실상규(過失相規예속상교(禮俗相交환난상휼(患難相救)을 목적으로 하고, 운영 방식은 서원을 중심으로 하여 관의 간섭이나 통제를 받지 않는 자치적 방법으로 운영된 것이다. 특히 상장(喪葬) 재앙(災殃) 등이 발생할 때에 향촌민 상호간의 경제적 공조를 위하여 자조적(自助的)인 재원 조성 방법까지 반영하였다. 이 해주향약은 화민성속(化民成俗, 백성을 교화하여 아름다운 풍속을 만드는 것)보다 양민(養民, 백성을 먹여살리는 것)을 우선한 조선적 향약으로 시행된 것이라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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