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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은 잔인한 달”, 그 ‘아름다운 모순’의 자치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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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은 잔인한 달”, 그 ‘아름다운 모순’의 자치의지
  • 이관춘 연세대학교 객원교수
  • 승인 2023.04.24 13: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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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춘의 마을·자치·교육

4월이 오면 마치 오랜 연인처럼 어느새 곁으로 다가오는 시, 사춘기 시절 교실에서의 동심(童心)의 추억처럼 되살아나는 시다. 시의 내용을 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봄꽃이 만발하는 4월에 가장 잔인한(cruelest) 이란 반어법에 꽂혀 첫 단락만을 읊조리며 홀로 감상에 젖게 만든 시의 첫 구절이다. 시에 특별한 관심이 없어도 이 첫 구절만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봄이 되면 애송되는 시, 공교롭게도 올 해는 이 시가 발표된 지 꼭 100년이 지나 처음으로 맞이하는 4월이기도 하다.

살바로트 로사의 작품 속 쿠마에 무녀의 모습(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웹사이트)
살바로트 로사의 작품 속 쿠마에 무녀의 모습(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웹사이트)

 

실존의 눈으로 본 잔인한 4

잘 알려진 대로 이 시구(詩句)는 미국 태생의 영국의 모더니즘 시인, 토마스 엘리엇(1888~1965)1922년 발간한 시집이자 장시(長詩)황무지(The Waste Land1부의 문을 여는 구절이다. 첫 단락을 음미하면서 가졌던 시에 대한 가벼운 느낌은, 이 시가 전편 433행으로 총 5부로 이어지는 것임을 확인한 다음에는 무겁게 바뀌게 된다.

어린 시절의 문학적 감수성을 부드럽게 자극했던 시구와는 대조적으로 1부의 제목은 다소 음울한 느낌을 풍기는 죽은 자의 매장이다. 이어지는 시의 제목과 내용들은 무거움에 난해함까지 더해진다. 2부의 제목인 체스 게임에 이어 불의 설교’(3), 4부의 의사(Death by Water’), 5부 제목 우뢰(thunder)가 말한 것등을 천천히 읽어 내려가면서부터는 시의 제목에 다시 눈길이 가게 되고 황무지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고민하게 된다.

시인의 폭넓은 사유의 지평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시에는 그리스 신화나 성서에서부터 우파니샤드를 비롯해 단테와 보들레르, 셰익스피어 등의 사상과 작품 내용이 유기적으로 곳곳에 녹아들어 있다. 무엇보다 제목 밑에 적힌 시의 에피그라프(epigraph)는 궁금증을 부채질한다. 친구이자 시인인 에즈라 파운드에게바친다는 의미로 쓴 제사(題詞)인데 마치 실존의 차원에서 존재의 차원으로 전락한 현대인의 가녀린 모습을 항아리 속 무녀에게서 보는 듯하다.

 

한번은 쿠마에 무녀가 항아리 속에 매달려 있는 것을 내 눈으로 보았지. 아이들이 '무녀야, 넌 뭘 원하니?' 물었을 때 그녀는 대답했어. ‘죽고 싶어’”

 

시 전체의 분위기를 전달하는 이 라틴어 에피그라프는 정서적 황폐에 빠진 채 인간성을 상실한 현대인의 모습을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쿠마에 무녀(Cumaean Sibyl)처럼 점점 몸이 쪼그라들어 항아리 속에 매달려 있는 처지로 비유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엘리엇은 왜 이렇게 인간실존을 차라리 죽고 싶다고 말하는 항아리 속의 무녀와 동일시하는 것일까? 철학과 문학이 그렇듯 시 또한 시대정신을 외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황무지가 발간된 그 시기가 무려 1천만 명의 군인들이 죽어간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이 끝난 지 몇 해 되지 않은 때임을 생각해 보면 이해의 실마리가 보인다.

시적 감수성이 솟구치던 젊은 시절을 가장 파멸적인 전쟁의 참상을 목격하면서 견디어 낸 젊은 시인에게 현대문명과 인간의 모습이 어떻게 비쳤을까를 상상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게다가 20세기 전후로 과학문명의 발달과 산업화로 인한 경제성장, 전쟁으로 인한 무질서와 혼돈 속에 사회전반에 걸친 이데올로기의 변화로 인한 전통적이며 절대적인 가치의 상실은 시인에게 무척이나 어렵고 혼란스러운 삶 그 자체였을 것이다. 엘리엇의 시가 어렵고 난해한 시대성과 실존주의적 세계관을 그려내는 모더니즘 시의 특징을 보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거리의 파토스가 시든 4월의 황무지

시에 문외한인 필자이다 보니 시를 감상하거나 이해할 때면 문학이 아닌 해석학적 접근에 기울어지는 경우가 많게 된다. 물론 두 방식이 반드시 상충되는 것은 아니라는 믿음 때문이다. 텍스트 속에 감추어진 의미를 끄집어내어 읽는 것은 문학이나 해석학이 공통적으로 중점을 두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렇게 볼 때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는, 아름다운 모순의 시어는 엘리엇의 시상(詩想)에 영향을 주었던 당시의 탐욕스런 자본주의 시대상이나 시인 자신의 사적 인간관계 경험에서 잉태되었으리라 본다. 이제 서른을 갓 넘긴 열혈청년 시인 엘리엇의 눈에 포착된 사월의 세상은 만물이 약동하는 희망의 봄이건만 그 봄을 맞이하는 인간 실존의 일상성은 꽁꽁 얼어붙은 겨울의 황무지였을지 모른다. 참된 인간애와 순수한 열정, 타자에 대한 배려와 공감이 얼어붙은 내면의 황무지다.

따라서 1부의 제목에서 묘사하는 죽은 자의 매장이란 말은 살아 움직이고 있지만 실상은 죽어있는 현대인의 실존에 대한 메타포(metaphor). 열심히 살아가고 있지만 의미를 찾지 못하고 공허하며 챗GPT로 상징되는 AI를 포함한 온갖 외적인 것들에 늘 소외를 당하며 실존 아닌 존재의 차원으로 전락한 현대인, 그 결과 죽은 자와 별반 다를 게 없는 현대인에 대한 은유인 것이다.

이 메타포는 바로 이어지는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란 형용모순처럼 보이는 시구와 맥락을 같이 한다. 4월은 생명과 생성이 약동하는 계절이듯 인간다운 삶을 향한 실존적 의지와 열정이 넘치는 계절이건만 전쟁(1차 대전)으로 몸과 마음이 폐허가 되다시피 한 데다 탐욕에 찌든 자본주의 정신으로 황폐해진 사람들은 마치 죽은 자처럼(little life) 잠들어 있다. 이런 현대인들에게는 시인의 말대로 겨울이 차라리 따뜻했다(Winter kept us warm)’. 그러니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엘리엇의 현대인에 대한 메타포인 황무지죽은 자의 매장’,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은 실존철학의 관점에서 중요하고도 심오한 시사점을 제시한다고 본다. 특히 프리드리히 니체가 인간의 본질로서 규정하고 있는 거리의 파토스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를 준거로 해석할 때 시의 의미는 확대되고 심화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니체가 말하는 인간이란 유전적으로 거리의 파토스(das pathos der distanz)를 내면에 품고 있는 존재다. 거리의 파토스란 AB 사이의 간격[거리]을 벌리려는 욕구, 즉 살아가면서 지속적으로 자기 자신을 넘어서려는 자기 극복에의 열정을 의미한다. 니체는 이런 파토스(열정)가 있기에 인간은 영혼 자체의 내부에서 점점 더 새로운 거리를 확대하고자 하는 요구힘에의 의지가 생겨난다고 강조한다.

니체의 시각에서 볼 때, 엘리엇의 시에서 표상된 살아있는 죽은 자’(the living dead)’는 거리의 파토스가 시들어 있고 힘에의 의지를 잘못 분출하며(하강하는 의지) 사는 사람이다. 시인은 그런 현대인을 말도 못하고 눈도 보이지 않아 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죽은 것도 아닌(Living nor dead) 존재로 묘사한다. 엘리엇은 이런 인간들이 발을 딛고 사는 서양문명을 붕괴된 황무지로 표현하는 것이다.

전후(戰後) 황무지에 사는 이런 인간들은 의미도 모르는 삶을 사느라 자신의 정체성이 붕괴된 채 타인과 의미 있게 소통할 줄도 모르는 공허한 존재다. 니체의 표현을 빌리면 자기 자신만의 의미 있는 삶을 창조하려는 거리의 파토스(pathos)가 사그라진 나약한 현대인이다.

더 나아가 영문학자인 존 캐리 옥스퍼드대 교수에 의하면, 이런 좌절된 거리의 파토스는 엘리엇 시인 자신에게서도 발견된다. 그는 저서 시의 역사에서 엘리엇이 첫 결혼생활이 자신에게 황무지가 나온 마음의 상태를 가져다주었다고 말한 것이나 여자와 성적 쾌감을 느껴본 적이 없다고 친구에게 털어놓은 일화를 전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엘리엇이 시의 제사(epigraph)에서 죽고 싶다고 묘사한 쿠마에 무녀는 혹시 거리의 파토스가 억눌린 엘리엇 자신은 아닐까하는 생각마저 든다.

니체
니체

 

아름다운 모순의 주민자치 의지

연인과의 성적 쾌감과 사랑 혹은 결혼생활은 니체의 거리의 파토스와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니체는 이런 내면의 파토스가 살아있을 때 힘에의 의지를 갖게 된다고 말한다. 거리의 파토스가 있기에 모든 생명체는 힘에의 의지를 갖는다.

따라서 힘에의 의지란 인간은 물론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본능, 가장 일반적이고도 가장 심층적인 본능이다. 한 마디로 인간을 정의한다면 인간은 힘에의 의지이다. 그리고 그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힘에의 의지가 모든 살아 있는 존재의 근본적 현상임을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내 말을 들어라. 더없이 지혜롭다는 자들이여! 내가 과연 생명 자체의 심장부 속으로 그리고 그 심장의 뿌리에까지 기어들어 가 보았는지 진지하게 살펴보아라! 생명체를 발견하면서 나 힘에의 의지도 함께 발견했다. 심지어는 누군가를 모시고 있는 자의 의지에서조차 나는 주인이 되고자 하는 의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니체에 따르면 인간을 포함한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의 내면에는 그를 지배하는 힘에의 의지가 잠복돼 있다. 엘리엇 시대의 제1차 세계대전을 포함해 인류 역사에 끊임없이 존재해 온 전쟁도 힘에의 의지로 설명할 수 있다.

물론 힘에의 의지란 개념은 세속적 의미에서의 타자에 대한 지배욕이나 권력을 추구하는 욕망이나 의지와 동의어는 아니다. 이런 의지는 퇴폐로 이어지는 하강의 의지일 뿐이다. 전쟁은 사람들의 일차적인 관심사가 생존보다는 자신의 위신과 자부심의 증대, 즉 자신의 퇴폐적인 힘의 증대에 있기 때문에 발발한다는 것이 니체의 생각이다.

인간은 어떤 다른 목적, 자신의 생존이나 도덕적 가치의 실현을 위해서 자신의 힘을 고양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힘의 고양 그 자체를 위해서 자신을 고양하고자 한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생존에 유리한 것보다는 자신의 힘이 고양되었다는 느낌을 주는 것을 더욱 중시한다.

엘리엇의 4월은 본래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우는”, 잔인할 정도로 강력한 생명에의 의지가 분출하는 계절, 대지의 뿌리 속에 웅크린 니체의 힘에의 의지가 역동적으로 솟구치는 계절이다. 하지만 세계대전이란 참혹한 전쟁의 상처와 탐욕에 젖어 비인간화된 자본주의 물결로 인해 사람들의 힘에의 의지는 쇠락과 퇴폐(데카당스)를 향한 하강하는 의지로 전락했다.

그런 데카당스에 찌든 현대인이 발을 딛고 사는 대지는 황무지로 변했다. 엘리엇은 메마른 불모의 대지에 사는 그런 현대인을 사는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존재, ‘자신도 알지 못하는존재라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인간 내면의 심층에서 외치는, 인간다운 삶을 향한 힘에의 의지가 시들거나 약화된 삶을 산다면 그는 사실상 살아있는 죽은 자일 뿐이다.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는” 4월이 눈부시게 찬란한 것은 대자연의 본질인 힘에의 의지가 당당하게 솟구치기 때문이다. 생동하는 그 의지가 사그라든 대지는 황무지로 변한다. 니체의 말대로 힘에의 의지가 모든 생명체의 본질이라면 인간의 삶이 그럴 것이다.

힘에의 의지가 있기에 4월의 대지가 그러하듯 실존의 대지에 발을 딛고 사는 인간 또한 끊임없이 생성하는 진행형의 존재이다. 인간에게 생성이란 힘에의 의지를 통한 투쟁으로부터 결과 된 어떤 것으로부터 다른 것으로의 건너뛰기이다. 건너뛰기는 교육을 통한 배움, 직장에서의 승진, 어제보다 더 성숙한 존재가 되려는 마음, 고통 받는 이웃에 대한 공감, 불공정과 부정의에 대한 분노 등과 같이 일상에서 다양한 형태로 발현된다. 인간은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이 생성하는 건너뛰기를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존재다.

주민자치에의 의지 또한 다를 바 없다. ‘주민관치에서 주민자치로의 건너뛰기는 인간의 본질적 요구이자 하지 않고는 못 배길 필연적 생성이다. 너무도 당위적인 말이지만 주민으로서의 인간이 자신의 일상을 스스로 계획하고 통제하며 책임을 지려는 의지는 인간의 실존이자 유전적인 본질이기 때문이다.

이 자치의 본질이 실현될 때 지역의 주인인 주민은 인간으로서의 살맛이 난다. 국가 간, 집단 간, 개인 간의 관계가 그러하듯 철학자 슈리프트(Schrift)에 의하면 주민자치를 향한 힘에의 의지는 힘의 발휘를 좌절시키는 무언가를 건너뛰는투쟁이다. 주민자치로의 건너뛰기는 주민들의 생존이나 어떤 가치실현을 위해서라기보다 그에 앞서 주민이 주민 자신의 힘의 고양(高揚) 그 자체를 위한 것이다. 주민관치의 줄을 놓지 못하는 정치나 행정은 무엇보다 주민들의 힘의 고양과 역사가 보여주듯 그 힘의 고양은 불가피하게 투쟁을 부른다는 점을 학습해야만 한다.

엘리엇의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은 상승하는 힘에의 의지가 약화되고 좌절된 황무지이기 때문이다. 황무지에 사는 인간은 살아있는 죽은 자. 주민관치 하에 주민들의 자치를 향한 상승하는 힘에의 의지가 약화된 지역사회는 엘리엇의 황무지다. 따라서 주민관치에서 주민자치로의 건너뛰기는 주민들의 약동하는 힘에의 의지이며, 내면의 황무지를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는희망과 환희의 정신적 대지로 탈바꿈시키는 생명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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