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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역사 속 원주민과 원주민 자치운동의 머나먼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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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역사 속 원주민과 원주민 자치운동의 머나먼 여정
  • 정창원 제주대학교 사학과 교수/공동자원과 지속가능사회 연구센터 부센터장
  • 승인 2023.07.10 11: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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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자원과 주민자치

대만섬, 그리고 역사의 시작

현재 대만섬을 통치하고 있는 국가명은 중화민국이다. 중화민국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조(淸朝)가 멸망하고 1912년에 수립된 중국 최초의 공화국이다. 당시 중화민국을 이끌던 국민당 정부는 국공내전에서 중국공산당에게 패하였고 그 결과 국민당 정부는 중국대륙을 상실하고 194912월 대만섬으로 퇴각하였다. 이때부터 중화민국은 대만과 주변 몇 개 도서만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냉전이 한창이던 시기 자유중국으로 불리기도 했던 이 도서(島嶼)는 지금은 대만(타이완)’이라는 명칭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대만섬은 사방이 개방된 환경으로 서태평양 교통의 요충지에 위치하여 예로부터 남도어족의 큰 울타리에 속해 있었던 여러 종족들의 이동 거점이었다. 태평양의 각 도서에 분포하며 항해에 능했던 이들 종족들은 서로 다른 시기에, 서로 다른 장소에서 대만섬에 상륙하여 오랜 기간 동안 서로 세력을 확장하며 각자의 영역을 차지해 왔다. 이들 그룹은 그 세력범주가 서로 달랐지만 각자의 지혜와 환경 자원에 따라 독특한 생활양식을 발전시켜 나가며 다양한 문화 형태와 내실을 갖추어 나갔다.

16세기 이후 서구 국가들의 식민지 제국주의가 확장되면서 지구 전체에 그 세력을 넓혀갔다. 이 같은 세계사적 흐름 속에서 이주한 남도어족의 각 종족들이 그들의 영역을 가꾸며 생활하던 대만은 처음에는 네덜란드와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다.

1662, 반청복명(反淸復明)의 기치를 내걸고 청조(淸朝)에 대항하던 정성공(鄭成功)이 군대를 이끌고 네덜란드 동인도주식회사의 질란디아 기지를 공격한 끝에 함락시킴으로써 서양세력을 축출하고 대만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된다. 정성공 세력은 대만과 남중국 해안을 중심으로 한동안 지배체제를 굳히지만 1683년에 청나라에 패배하였다.

결국 1684년 대만은 청나라 푸젠성(福建省)의 부()로 편입되면서 중국의 영토가 되었고 이후 중국 남부의 푸젠성과 광둥성(廣東省) 사람들을 중심으로 대륙으로부터의 본격적인 이민이 시작된다. 그리고 이들은 대만섬의 초기 이주민이었던 대만 원주민들의 영토를 탈취·개간하여 농지로 전환시키며 한족(漢族) 이주민을 중심으로 한 지역사회를 완성시켜 나갔다. 이후 청일전쟁에서 청조가 패전한 결과 자신(대만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본에 할양되어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식민 통치는 그 후 51년 동안 지속되었다.

원주민 집회 모습

 

한족의 이주와 일제식민지 시기 원주민 자결권의 상실

대만은 대략 17세기부터 외부세력의 침략과 대규모 이주를 경험했다. 원주민들은 그 과정에서 생활공간의 축소를 경험했고 토지와 정치적 자결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특히 18세기의 건륭시기(1736~1795)에는 한족의 이주가 급증하면서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고 그 결과 평지에 거주하던 평포족(平浦族)은 한족 문화에 점차 동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이 시기까지도 산지에 거주하는 고산족(高山族)은 여전히 산악지대와 동부 평원지대를 장악하고 있었으며 고산지대로 침입해 들어가려는 여러 시도가 거듭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산지역 원주민들을 무력으로 정복하려는 시도는 실패했다.

원주민의 토지 문제에서 큰 분기점이 되는 것은 1895년에 청나라가 청일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체결한 시모노세키 조약이다. 이 조약에 따라 대만이 일본에 양도되면서부터 일본정부는 체계적이며 자본주의적인 관리방식을 도입하여 대만의 경제적 자원을 수탈했다. 특히 대만의 숲과 광물자원, , 잠재적인 관광자원에 대한 통제권을 획득하기 위해 1898년부터 대규모의 토지조사사업을 진행했다. 그 결과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일제는 생번지(生蕃地)로 불리던 원주민의 전통적인 영토(산악지대)를 무주지(terra nullius)로 선언하고 그 토지를 일률적으로 국유지로 편입하게 된다.

1925년에는 대규모의 삼림조사사업을 실시하였고 대략 2백만 헥타르(ha)에 이르던 원주민의 생활공간은 일제가 번인소요지(蕃人所要地)라 부르던 24천 헥타르의 산지보류지(山地保留地)로 축소되었으며 원주민들은 이 제한된 지역으로 강제 이주를 당했다. 일제의 체계적인 토지 장악과 동화정책으로 인해 원주민의 전통적인 정치경제문화 시스템은 붕괴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다시 이어진 동화정책과 원주민운동의 시작

태평양 전쟁 종전 후 대만섬은 또다시 그들 스스로의 선택지를 상실한 채 중국에서 건너온 국민당 정부의 작은 영토가 되었다. 장제스(蔣介石)는 국민당을 이끌고 대만으로 패퇴한 후 이후 '중화민국'이라는 대의명분을 바탕으로 대내적으로 엄격한 통치 정책을 시행했다. 당시에는 중화문화를 중심으로 언어, 역사, 지리를 비롯한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그 속에서 원주민들은 한민족에 대한 동화정책으로 같은 교육 시스템에 편입되어 한민족 사회의 가치관에 영향을 받으면서도 사회 상승 이동이 활발하지 못한 채로 남아 있었다.

1980년대 원주민 권리 쟁취 운동으로 인해 인정받은 원주민 부족은 20146월 현재 16개 종족에 이르고 있다. 인구는 2008년 조사에 의하면 488773명으로 집계되었으며, 20146월에는 536509명으로 증가했다. 최근 2022년 기준으로는 582846명으로 대만 인구의 2.47%에 달한다.

원주민 종족의 구성은 약 20만명으로 가장 많은 인구수를 보유한 아미족(阿美族)을 필두로 파이완족(排湾族), 타이얄족(泰雅族), 타로코족(太魯閣族), 부눈족(布農族), 푸유마족(卑南族), 루카이족(魯凱族), 쩌우족(鄒族), 사이시얏족(賽夏族), 타오족(達悟族雅美族), 카발란족(噶瑪蘭族), 타오족(邵族), 사키자야족(撒奇莱雅族), 시디크족(賽徳克族) 외에 20166, 새롭게 인정된 흘라알루아족(拉阿嚕哇族)과 카나카나부족(卡那卡那富族)을 포함한 16개 종족으로 이루어져 있다. 1994년 헌법 개정으로 대만에서는 '()' '고산족(高山族)' '산지동포(山地同胞)'와 같은 차별적 용어 대신에 '원주민족(原住民族)'이 공식적인 용어가 되었다.

1980년대에 나타난 정치·경제·사회적 변화를 배경으로 대만에서는 원주민운동 및 토지반환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중반까지 원주민운동은 주로 빈곤, 노동권, 거주 및 교육문제를 중심으로 평등한 처우를 요구하는 개인적 권리운동으로 전개되어 왔다면, 8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자치와 정체성의 문제를 중점적으로 제기하는 집합적 권리운동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대만 원주민 청년들(ACFI_公益平台-國際)
대만 원주민 청년들(ACFI_公益平台-國際)

 

대만 원주민 자치의 머나먼 여정

대만은 원래 원주민의 땅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원주민의 영토가 170만 헥타르가 남아있었다. 그러나 국민당 정부의 유보지는 24만 헥타르에 불과하다. 그 중 일부는 정부나 개인이 점유하고 있는 곳도 있다. 1988, 1989, 그리고 1993년 세 차례에 걸쳐 일어난 '우리의 토지를 돌려 달라 운동(還我土地運動)'은 원주민 운동의 발전과정에서 정점이라고 할 수 있다. 수천 명이 참여하여 규모가 매우 컸을 뿐 아니라 3차 운동의 호소 대상이 행정원에서 외교부로 옮겨지고 원주민 운동단체가 돌출적으로 체제 밖 노선을 걷게 되면서 민족주의적 성격을 더욱 확고히 했다

이 운동은 절대다수에게 호소하여 주류 사회와 정부 당국에 받아들여졌지만 3차 토지 운동 이후 원주민 운동은 국민당에게 헌법을 개정할 기회라고 외치며 원주민의 헌법 기입을 요구하는 것으로 전환해 나갔다. 이는 새로 개정되는 헌법에 원주민을 정식으로 기입해 원주민의 권리 보장과 법적 근거를 마련하자는 것이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의 결과로 1996'원주민위원회'가 내각 부처로 설치되었고, 1998'원주민 교육법', 2001'원주민 신분법'이 제정되면서 대만 원주민의 권리 쟁취 운동은 교육권, 언어권, 문화권 보장에 그치지 않고 현재는 토지 자치권 확립을 요구하고 있다.

오랜 투쟁의 결과로 2005년 제정된 대만 원주민족기본법(原住民族基本法)에 따라 대만 원주민들은 1980년대 중반 이후로 줄기차게 요구해 온 다양한 권리, 예를 들어 원주민족 자치제도의 건립(4), 다원평등존중의 정신에 입각한 원주민족의 교육의 권리(7), 민족언어 발전의 추진(9), 문화 보존 및 보호(10), 부락과 산천의 전통명칭 회복(11), 원주민족의 전통적 생물다양성 관련지식과 지적 창작의 보호(13), 노동권의 보장(17) 등을 법적으로 보장받게 되었는데 이것은 특히 원주민들의 토지반환 요구와 관련하여 중요한 사항들을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사건이었다.

현재 대만에서는 민진당이 두 번째로 집권하고 있지만 대만 원주민의 3대 요구 사항인 고유명사권, 토지권, 자치권 중 절반도 채 충족되지 않은 상태에 놓여있다. 민진당의 첫 집권 직전인 1999910, 천수이볜(陳水扁)은 총통 후보로서 원주민 12개 민족 대표와 란위도(蘭嶼島)에서 '원주민과 대만 정부 간의 새로운 동반자 관계 조약'에 서명했다. 조약의 대표들은 오랫동안 원주민 운동의 리더로 활동해 온 사람들로 이 조약에는 원주민의 자연주권, 원주민의 전통 영역 반환 등 획기적인 조항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21세기 대만 원주민 운동의 새로운 세기가 열렸음을 상징한다. 그리고 천수이볜이 총통에 당선되면서 원주민의 자치는 새 정부의 행정 정책 사안이 되었다. 원주민의 자치가 단순히 원주민 운동가들의 구호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제 옛말이 되었다.

차이잉원 총통의 원주민들에 대한 사과 모습_방송 영상 캡처

 

법과 기구는 설치됐지만 현실의 벽은 여전히 높아

그러나 원주민 운동단체가 민진당과 계속 협력하면서 원주민 자치운동은 정부에 흡수되었고 원주민 의회 조직은 오히려 동력을 잃어버렸다. 자치는 지방 행정 관청의 업무가 되었지만 그것은 원주민이 지향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었다. 원주민족의 자치는 지방의 기존 정치문화에 안주해버렸고 그들의 주체성은 다시 행정체제에 가려져 버렸다. 이 시기 원주민 운동은 정부의 계획을 추진하느라 거의 활동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상황들로 인해 원주민 자치에 대한 국가의 강력한 주도와 정책이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다음 원주민 운동의 재부흥을 위한 밑거름이 마련되었다.

2016, 두 번째 민진당의 집권을 이끌어 낸 차이잉원(蔡英文) 총통은 정부를 대표해 원주민들에게 중화민국 총통의 이름으로 사과하고 '총통부 원주민족 역사정의와 정의전환 위원회(總統府原住民族歷史正義與轉型正義委員會)'를 설립해 원주민과 대만의 역사 정의에 관한 문제의 해결을 약속했다. 마침내 20223총통부 원주민족 역사정의와 정의전환 위원회에서 차이잉원 총통이 원주민 자치 시범구 설치를 약속했고 일부 학자들은 모법의 보호 없이 원주민 자치에 관한 임시 조례를 먼저 제정해 법적 근거를 갖춘 원주민 자치 시범구를 설치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2022420, 20년 넘게 표류하고 있는 원주민 자치에 관한 법률 심사가 대만 입법원에서 다시 열렸지만 원주민협회의 간절한 법안 통과 기대와는 다르게 대다수 의원들의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다. 이처럼 원주민족 권리에 대한 가시적 성과와는 별개로 토지 권리에 대한 진전은 더디고 자치권에 대한 권리는 여전히 현실의 벽에 부딪혀 있는 실정이다.

 

사진=필자 제공

 

2023년 계묘년 시작과 함께 제주대학교 공동자원과 지속가능사회 연구센터와 공동으로 공동자원과 주민자치를 주제로 한 시리즈기획을 새롭게 선보이게 되었습니다. 상부상조하는 공동체의 원형과 전통이 잘 계승되어 유지, 발전되는 특별한 지역 제주그리고 공동자원과 주민자치의 이야기가 지면을 한층 풍성하게 해줄 것입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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