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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기 지식인은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연구세미나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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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기 지식인은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연구세미나94]
  • 김윤미 기자
  • 승인 2024.03.29 14: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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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회 망국의 책임을 묻지 않는 역사

우리는 왜 조선 망국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는가? 격동기의 지식인은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이 뼈아픈 문제적 질문에 관한 논의가 지난 29일 서울 인사동 태화빌딩에서 열린 한국주민자치학회 제94회 주민자치 연구세미나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의 특강으로 펼쳐졌다.

자전에세이 <인생은 찬란한 슬픔이더라>를 막 출간한 신복룡 교수는 격동기의 지식인은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매천야록으로 유명한 구한말의 유학자 황현의 절명시(絶命詩) 한 수를 소개하며 특강을 시작했다.

 

새와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니 무궁화 세상은 이미 더럽혀졌도다.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천 년을 되돌아보니 난세에 배운 사람 노릇이 어렵기도 하구나.

鳥獸哀鳴海岳嚬 槿花世界已沈淪

秋燈掩卷懷千古 難作人間識字人

 

신복룡 교수는 이날 특강 주제에 인사이트를 준 두 학자로 맹자와 토인비를 지목하며 한 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보면 우선 그 스스로가 멸망할 짓을 한 후에 다른 나라가 그를 멸망시킨다”(맹자), “인류의 역사에는 26개 문명 가운데 16개가 멸망했고 그 가운데 6개의 서구국은 내부 모순 때문에 멸망했다”(토인비)는 문장을 인용했다.

 

조선 내부의 극심한 부패

 

이어 조선 폐망의 중요한 원인으로 꼽히는 부패에 대해 언급했다. 신 교수는 역사는 발전(진화)하는가? 역사가 진화하는 속도로 부패도 진화했다라며 조셉 나이(Joseph S. Nye)의 말을 인용해 부패의 대해 위정자가 상대의 판단을 왜곡시키는 뇌물 정실주의-공적(功績)보다는 인간관계 개인의 용도를 위한 공금 유용(流用)이라고 정의했다.

계속해서 그는 나이에 따르면 부패가 없었더라면 18세기의 영국의 의원내각제와 19세기의 미국의 이민은 존재할 수가 없었다’. 그럼 왜 부패는 사라지지 않는가? 돈의 욕망에는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이 없으며, 부패는 기구를 작동시킬 수 있는 적절한 윤활유로 작용하고, 음지 공생(共生)의 음모노출 위험이 적다. 또 지나친 감시는 구성원의 사기를 떨어뜨리며, 부패를 줄이려는 방법에는 비용이 들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대한제국(조선) 부패의 근원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 신복룡 교수는 몽테스키외와 성호 이익의 말로 설명을 대신했다. 몽테스키외의 고전 <법의 정신>에는 그 생활이 완전히 예()에 따라서 생활하고 있는 유교 국가[중국]가 세계에서 가장 부정(不正)한 국민이라는 점은 참으로 기이하다라고 쓰여 있다. 또 성호 이익은 우리 나라의 봉록(俸祿)은 너무도 부족하여 벼슬아치들은 모두가 스스로 먹고 살 수가 없으므로 사세(事勢) 부득이 법을 어기고 가렴하게 된다라고 진단했다.

발제에 따르면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1897)로 유명한 이자벨라 비숍(Bishop) 여사는 그의 저서에서 1890년대 단양 토호이 매우 사치스러운 삶을 묘사했다. 비숍은 나는 조선이 희망 없는 나라라고 절망했다. 그러나 나는 시베리아 한인촌을 방문한 다음 그와 같은 생각을 후회했다. 한국인들이 그들의 조국에서 게으르고 불결한 것은 부패로 말미암아 삶을 포기한 탓이었다. 그래서 조선 사람들은 밖에 나가면 더 잘 사는 민족이 되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신복룡 교수는 이와 비슷한 외부인의 견해로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첩자였던 다치바나 야스히로(橘康廣)의 보고서 내용(일본이 반드시 이긴다. 왜냐하면 조선은 너무 부패했기 때문)도 소개했다. 신 교수는 “2017년 조선일보 기사에서 한국 국세청 보고서에 따른 한국 지하경제의 규모를 GDP8%라고 했는데 서구 학자들의 보고서에는 GDP24.7%라고 할 만큼 그 규모가 크다고 덧붙였다.

무인 핍박한 문민우위 원칙

 

부패에 이은 조선 폐망의 주요 키워드로 신복룡 교수는 문민우위의 원칙을 제시했다. 신 교수는 유사 이래 지구상에는 14500회의 전쟁이 있었고 36억 명이 죽었다. 인류의 역사에서 전쟁이 없었던 순간은 모두 230년에 지나지 않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현재까지 이 지구상에서 전쟁의 총성이 멎었던 순간은 단 하루도 없었다라며 한국사에서는 90회의 침략의 역사가 있다. 그런데도 무인을 핍박한 것은 기이한 일이다. 문위 우위의 원칙이 낳은 병례는 군사 문제를 문관이 다뤘다는 것이다. 서희, 윤관, 김부식, 김종서, 이이, 권율 등 외세침입격퇴, 국방, 전투 등에서 이름을 날린 이들이 모두 문관이었다. 무관 중에서는 남이 장군 만이 잠시 병조판서를 지냈다. 심지어 임진왜란 후 농공행상 기록을 보면 왕의 호성공신(환관) 86, 무공을 세운 선무공신 18명으로 되어 있는데 이 18명 중에서도 문관 9, 무관 9명이었다고 짚었다.

이어 신 교수는 “3.1운동 참여자가 당시 총인구의 6.1%에 해당하는 103만 명 정도였는데 이후 1907~11년 무장 항쟁 참여자는 전체 인구의 1.1%인인 14만 명 수준이었다. 임란 당시의 병력이 인구의 3.5%168000명이었던 것을 보면 그 숫자가 미약하다. 아마 내가 이런 나를 위해 항쟁한다고? 하는 체념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라며 군인을 모욕한 시대에는 틀 재앙이 따랐다. 전쟁을 좋아하는 민족도 멸망했고 전쟁을 두려워하는 민족도 멸망했다. 전쟁을 즐겨서도 안되지만 피하지 말아야 할 전쟁도 있다. 피하지 말았어야 할 전쟁을 피하고 피했어야 할 전쟁을 피하지 않은 역사의 과오도 있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다음으로 발표는 사무라이 애국주의 앞에 선 주자학의 세계관으로 이어졌다. 신 교수는 조선 말 적극적으로 정한론을 펼치며 결사적으로 행동한 사코우 가게노부, 다루이 도키치, 우치다 료헤이, 요시다 쇼인(이토 히로부미의 스승, 쇼카의숙을 열어 젊은이들에게 우국심 고취)의 사례를 소개했다. 사이고 다카모리의 경우는 1873년 어전회의에서 나는 조선의 정벌을 위해 일신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다. 개전의 구실이 분명하지 않다면 나를 조선에 파견하라. 내가 조선의 조정에 도착하여 그곳 대신들을 몹시 분개하게 만들어 놓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저들은 나를 죽일 것이니 그 때는 나의 죽음을 구실 삼아 조선을 침략하라고까지 했다고 한다.

신 교수에 따르면, 몽테스키외는 일본인에게는 종교적 죄의식이 없어 그토록 가혹하다 해상의 패권을 장악한 민족은 오만하다 해양민족은 이웃한 국가에게 고통을 준다고 평했으며, 일본 민족심리의 정체는 도서민족의 집단적 폐쇄공포증(closed-Island-phobia)’으로 그들은 국경을 부수고 넘어야 할 우리(fence)라고 생각했다. <국화와 칼>로 유명한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는 일본인에 대해 약한 먹이를 만나면 칼을 뽑고 강한 자를 만나면 국화를 내미는 민족으로 표현했다.

바다를 버린 해양 민족의 최후 그리고 탓의 역사학

 

조선 폐망과 관련한 또 다른 키워드는 바다를 버린 해양 민족이다. <해상권이 역사에 미친 영향>(1889)을 쓴 마한(Mahan)세계의 두 정복자 한니발(Hannibal)17년에 걸친 승리와 나폴레옹(Napoleon)16년의 승리도 해전에서의 패배와 함께 공허한 것이 되었다고 했고 몽고메리 원수는 결국 모든 역사에서 바다를 장악한 나라가 전쟁의 우세를 차지했다고 권고했다.

그렇다면 조선왕조는 왜 바다를 버렸을까? 신복룡 교수는 (空島)정책의 기원왜구에 대한 두려움 탈주나 모반 또는 외세와의 연통에 대한 공포 서학에 대한 두려움 뱃사람에 대한 비하로 꼽았다.

다음으로 신 교수는 각별히 민감한 문제를 제기했다. ‘친일파 때문에 조선이 멸망했을까?’. 그는 한일 관계를 바라보는 한국사학사의 특징으로 비분강개의 역사학을 들면서 망국의 책임을 묻지 않는 역사학의 특징으로 일본의 잔학상을 강조하는 데 역점을 둔다. 자신의 과오에 대한 회오(悔悟)가 보이지 않는다탓의 역사학에로의 귀결 광복 과정에서 자신의 역량을 과장한다(독립이 우리의 힘으로 이뤄진 것이 아님을 인정하기가 그토록 괴로운가?) 우리의 힘으로 독립되었다는 국사교과서, 현실은 일제 말엽이 되면 지식인의 90%가 친일화 되었다고 지적했다.

신복룡 교수는 또 빗나간 친일 논쟁과 관련해 정치권이 주도할 문제가 아니었다 친일을 추궁하는 것이 아니라 친일파의 자식을 찾아내는 작업이었다 국내에 있던 사람은 모두 친일파였다고 한 김구(金九) 선생의 오류 등도 짚었다.

그는 먼저 태어난 자의 슬픔과 늦게 태어난 자의 행운을 언급하며 우리가 그때 태어났더라면 우리는 모두 독립투사가 되었을까? 애국자가 없었던 시절도 없지만 애국자가 넘치던 시절도 없다라며 우리는 이완용(李完用)을 비롯한 을사 5적과 합방 7적의 이름으로 망국을 설명하려 함으로써 망국이라는 거대 담론을 희석시켰다. 독일의 프랑스 4년 지배와 일본의 한국 40년 지배는 성격이 다르다고 문제제기 했다.

끝으로 신복룡 교수는 대한제국의 멸망의 원인은 인칭(人稱)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인 것이었다. 500년 왕조의 피로와 권태 그리고 인습의 침윤(浸潤)이 나라를 망국의 길로 몰아가고 있었다. 망국은 우리 모두의 잘못이며 특히 왕실을 비롯한 지배계급의 책임이 컸다. 망국의 원인을 스스로에게 찾지 않는 것은 우리의 역사를 탓의 역사학으로 돌리는 것이라며 망국기의 한국의 지배층은 일본의 그들만큼 고뇌하지도 않았고 준비하지도 않았으며 시대를 바라보는 안목을 키우지도 않았다. 내재적 모순 속에서 망국에 마지막 일격을 가한 것은 해양 문화의 유산을 버리고 해상 방어를 소홀히 한 탓이었다. 망국과 관련하여 친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한국인은 그리 많지 않다고 정리하며 특강을 마무리했다.

사진=문효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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