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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의 페스트와 주민자치의 몽매함[이관춘의 마을·자치·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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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의 페스트와 주민자치의 몽매함[이관춘의 마을·자치·교육]
  • 이관춘 연세대 객원교수
  • 승인 2021.06.21 09: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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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춘
연세대학교 객원교수. 평생학습타임즈 논설위원. 전 한국성인교육학회장. 호주 시드니대 철학박사
저서 [거리의 파토스] [호모키비쿠스] [니체, 세월호 성인교육을 논하다] 등

악의(惡意)는 언제나 무지몽매(蒙昧)함에서 온다.”

알베르 카뮈가 페스트에서 주인공 베르나르 리외(Rieux)의 입을 통해 한 말이다. 새삼스레 소설의 줄거리를 소개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중세 유럽을 지옥으로 몰아넣었던 페스트의 악몽을 20세기 알제리의 해안도시 오랑(Oran)으로 불러들이는 카뮈에게서, 코로나19 먹구름이 걷히지 않은 우리사회를 돌아보게 되는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럽다. 소설 페스트의 형식과 전개과정 역시 아무리 봐도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19 상황과 흡사하다. 페스트가 엄습한 오랑에서 한국으로 도시만 옮겼을 뿐 페스트와 맞선 싸운 인간, 페스트를 대하는 다양한 캐릭터들은 지금 코로나19를 대하는 사람들이나 캐릭터를 빼닮았다.

 

우리 모두의 문제가 된 페스트

우리 사회에도 지는 싸움이라 할지라도 결연히 맞서 싸워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장 타루 같은 자원봉사자들이 있고 의사 리외처럼 단지 고통 받는 사람들이 치료를 원한다는 사실때문에 환자 곁을 떠나지 않는 의료진들이 포진해 있다. 물론 오랑이나 한국이나 이런 윤리적 캐릭터들만 등장하는 건 아니다. 밀수꾼 코타르도 있고 파넬루 신부와는 성격이 다르지만 역병을 악의적으로 이용하는 사이비 목회자들도 있다.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그에 반응하는 군상들의 모습은 시대와 지역에 차이가 없는 것 같다.

우리의 작금의 상황은 리외가 플랫폼으로 내려와 열차가 떠나길 기다리며 눈물을 글썽이는 아내에게 한 말로 대변된다. “나도 모르겠어. 해괴한 일이지만 지나가겠지, .” 그리고 아내에게 당부한다. “제발 몸조심하도록 해요.” 코로나 역시 곧 지나갈 거라 생각했지만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소설은 이어진다. “그 숫자가 매일같이 목격하던 광경에 분명한 의미를 부여함에 따라 시민들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다. 이제는 규모를 정확히 알 수 없고 원인도 규명할 수 없는 이 현상에 뭔가 위협적인 면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영국, 남아공, 인도 발 변이바이러스의 위협은 있다지만 그래도 지금은 백신이라도 있다. 주인공 리외를 따라가다 보니 문장 하나에 시선이 멈춘다.

그 순간부터 페스트는 우리 모두의 문제가 되었다.”

민음사 발행 카뮈 '페스트' 표지
민음사 발행 카뮈 '페스트' 표지

불현듯 카뮈의 이 문장을 보는 그 순간부터필자의 생각은 오랑에서 현실로 돌아왔다. ‘페스트는 무엇이고 우리 모두의 문제란 또 무엇인가? 코로나19거리두기의 그런 전염병만이 아닐지 모른다. 전염병이긴 해도 우리 각자의 개별성에 자리 잡은 도구적 이성이나 주관적 감성 같은 매개체(vector)에 의한 정신적 감염병일 수도 있다. 전염력은 약할지 모르나 쉽게 치료되지 않는 이성(理性)’의 병이다. 이성이 있다는 것은 결핍존재인 인간의 유일한 희망으로 여겨왔다. 다른 동물과 구분되는 인간의 위대함, 아름다움이 이성이라고 하지 않는가. 이성을 꽃피워 인간을 삶의 주인으로 세우자는 것이 계몽주의였다. 그러나 계몽의 프로그램이 만개하던 18세기에도 이성의 도구화, 도구적 합리성은 이미 인간다운 삶을 짓밟는 아킬레스건이었다.

 

무지 아닌 무식의 신념

문학과 철학의 눈으로 당시 사회를 꿰뚫어봤던 요한 볼프강 괴테(Goethe)파우스트에서 이성이 수단으로 전락할 때 어떤 인간이 되는지를 말해준다. “이 지상의 어린 신()들은 언제나 같은 꼬락서니를 하고 있어 천지개벽하던 날과 조금도 다름없이 기묘한 존재이죠. 차라리 인간에게 하늘의 불빛 따위는 주시지 않았던들 좀 더 잘 살 수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 놈들은 이것을 이성이라 부르고 오직 그것을 어떤 짐승보다도 더욱 짐승답게 사는 데만 이용하고 있습죠.” 괴테가 질타한대로 인간만의 특권이란 그 이성은 일상에서는 허접하기 그지없다. 비행기 수하물에 붙이는 취급주의(fragile)’ 태그처럼 잘못다루면 깨지기 십상이다. 어쩌면 카뮈가 말하는 우리 모두의 문제란 바로 그 도구적 이성일지 모른다. 그래서인지 카뮈는 말한다.

"악의는 언제나 무지 몽매함에서 온다. 선의(善意)도 계몽됨이 없이는 악의와 똑같이 파괴적일 수 있다.“

행간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카뮈의 말을 영어판(Vintage Books)에서 찾아보았다. 더 정확한 번역은 이렇다. “세상의 악한 것(evil)은 거의 항상 무지(ignorance)에서 온다. 선의(goodwill)일지라도 계몽되지 않는다면 악의(ill-will)만큼 파괴적인 해를 끼칠 수 있다.” 악의(악한 의도)가 아니라 (evil)’이 무지에서 온다는 강한 어조이다. ignorance의 우리말은 무지와 무식 혼용이 가능하다. 그러나 한자어의 자의(字意)로는 차이가 난다. 무지(無知)는 앎이 없음이고 무식(無識)은 인식이 없음이다. 지식은 있으나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게 무식이 된다. 무지를 영어로 ‘clueless’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지식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개념(clue) 없는 혹은 인식(認識)이 박약한 사람이란 뜻이니 무식에 가깝다. 이렇게 본다면 카뮈의 말은 악은 무식에서 온다는 해석이 낫다. 그런데 무식은 감정에 앞선 이성의 소관이 아닌가.

카뮈가 말하는 우리 모두의 문제는 결국 무지가 아닌 무식이며 이성의 허접함이다. 그렇다면 카뮈의 페스트는 바로 무식이기도 하다. 전상직 한국자치학회장이 무식한 사람이 용감하다’(주민자치 20214월호)라고 말한 것도 아마 같은 맥락일 것이다. ‘주민자치에 대해 무지하면서도 오만한 시민운동가들에 대한 일침이었다. 실질적 주민자치의 활성화를 가로막는 이런 무식이 카뮈가 말하는 사회악이다. 그러나 무식은 수치심이 분명한데 역설적이게도 무식이 때론 권력이자 완장이 된다. 바로 자신의 무식을 모르기에 자기 위치를 모르는 경우이다. 주민자치의 철학에 대한 지식과 성찰이 없을 경우 주민자치를 단순한 시민운동의 범주로 치부하는 용감성을 발휘하며 뛰어들게 된다. 게다가 단체장을 포함한 행정가마저 용감해지면 수습이 어려워진다.

 

페스트, 모든 걸 안다는 자만심

무지몽매도 문제임에 틀림없다. 허나 교육기회 부족으로 인한 무지는 사회악이라 단정할 수 없다.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유식한 무식으로, 지식이 있는 무식 몽매는 더 고질적인 사회악이 된다. 배우지 않아 2차방정식을 모르는 무지와, 이를 모르는 수학전공자의 무식과는 구분된다. 게다가 학력(學力)이든 학력(學歷)이든 유식 혹은 무식과는 무관하다. 마치 깡패 같은 우리나라 학벌사회에서도 학벌이 별로인 사람들이 유식한가하면, 스스로 유식하다고 확신하는 학벌 좋은 무식쟁이들이 적지 않다. 카뮈가 포착한 페스트가 바로 무식의 신념이었나 보다. 카뮈는 그 무식의 확신이 얼마나 소름끼치는해악이 될 수 있는지를 명확히 일러준다.

무지로 인한 가장 소름끼치는 악(, vice)은 모든 걸 다 안다고 자만하는 것이다.” (최대한의 계몽을 통한) 명확한 혜안(clear-sightedness) 없이는 진정한 선이나 참된 사랑은 존재하지 못한다.

 

철학의 출발은 모든 걸 다 안다는 자만의 유혹을 경계하는데서 비롯되었다. 소크라테스는 무지의 지(), 너 자신의 무지를 알라에서 시작했다. 특히 우리가 무엇을 안다[]는 것은 신념을 수반하게 되는데 소크라테스는 그 믿음과 신념의 유혹을 극복하는 것이 참된 앎(episteme)이라고 말한다.

봄이 오면 목련이 핀다는 믿음은 봄에 대한 지식으로 이어진다. ‘봄에는 목련이 핀다는 지식이 생성되는 것이다. 특히 명제지식에서는 신념이 결정적이다. ‘하늘이 파랗다는 지식은 명제로서의 지식이다. 그러나 노을이 물든 하늘은 붉으며 빛이 닿지 않는 밤하늘은 까맣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하늘이 파랗다를 흔들림 없는 명제지식으로 믿고 있다. 왜냐하면 가정에서, 학교에서, 종교기관에서 그렇게 학습했기 때문이다.

하늘은 파랗거나 붉거나 특정한 색깔이라 믿는 방식이 바로 이성의 허접함에서 기인하는 선의이다. 하늘은 그저 허공일 뿐이다. 참된 인식에 기반 한 지식은 특정한 믿음과 동일시됨으로써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담보해야 한다. 믿음이 지식의 필요충분조건이 되기 위해서는 진리성이 담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진리 혹은 진리성의 판단 기준이 인간의 순수이성이 아닌 도구적 이성이나 종교적 믿음으로 환원될 때이다. 이 경우, 카뮈가 지적하는 대로 선의는 악의와 똑같이 파괴적일 수 있다.” 그 악의와 다를 바 없는 선의의 파괴성은 오랑 시의 페스트나 한국의 코로나19 상황에서 보여주는 그대로다. “너 때문이야!”를 목청 돋우는 국내 정치인들, “중국은 사과할 필요 없다는 중국 언론, “바이러스가 마귀의 장난이며 우리 교회에는 바이러스가 못 들어온다는 사이비 목회자들. 이들에게 진리는 그저 한갓 허황된 나만의신념일 뿐이다.

무식의 부조리와 선의를 교육해야

카뮈의 페스트는 인간 실존의 부조리함을 낱낱이 파헤치고 있다. 전염병으로서의 페스트나 코로나19는 인간 실존의 부조리다. 실존의 속성이자 양상이다. 중세유럽의 페스트나 21세기의 메르스, 사스 같은 역병이나 모두 마찬가지다. 허나 중세는 그렇다 쳐도 인공지능에 기반 한 자동차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4차 산업혁명시대에 바이러스 하나에 속절없이 당하는 인간 실존의 모습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부조리하다. 중세 때도 그랬고 카뮈의 오랑에서나 코로나19에서도 사람들은 이게 왠 날벼락이냐?‘고 묻는다. 그리고 그 '날벼락'이 왜 하필이면 내가 사는 시대에 떨어졌느냐고 탓한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의 무차별성과 불가피성이 카뮈가 말하는 인간실존의 부조리다. 인간이나 세계 자체가 부조리한 것은 아닐 것이다. 문제는 합리적 이성을 가졌다는 인간의 세계인식과, 그 이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실존상황이란 두 대립항이 공존한다는 게 부조리다. 나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세상에 내던져진 것도 부조리이다. 헌데 나의 삶에서조차 나 아닌 다른 사람, 역병과 같은 다른 것들이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으니 더더욱 부조리한 것이다. 바이러스 하나로 사회적 거리가 강요되면서 나의 자유를 스스로 반납하고 나는 내 삶의 구경꾼으로 전락해 버린 실존, 이게 부조리이다.

그러나 어찌 보면 카뮈가 말하는 무식과 무지몽매함, 계몽되지 않은 선의 또한 실존적 부조리인지도 모른다. 카뮈는 계몽되지 않은 선의는 악의만큼 치명적이라고 말했지만, 타자의 계몽되지 않은 선의 또한 나 자신의 합리적 이성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합리적 이성과, 스스로 합리적 이성으로 확신하는 믿음이라는, 또 다른 두 대립항이 공존하는 것이다. 이러한 부조리는 칸트의 계몽이나 교육을 통한 합리성의 발전 혹은 종교적 선의지의 성장에 의해 개선될 수 있으리란 희망은 환상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발전은 결국 그런 환상이 사람들의 영혼을 부추겨 숭고한 광기를 불러일으키면서 이뤄질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교육이다.

페스트에서 말하듯 코로나 바이러스는 머지않아 잦아들고 우리사회는 다시 일상의 평온을 되찾는 해방을 맞이할 것이다. 그러나 페스트가 잦아드는 시점에 맞이한 타루의 죽음을 통해 암시하듯 우리가 이성을 통한 계몽의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정신적 코로나 바이러스인 무지 몽매함으로부터 결코 해방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코로나19 사태는 뉴스마다 등장하는 우리 주변의 무지 아닌 무식으로 인한 악의가, 카뮈의 말대로 얼마나 소름끼치는악인지를 깨우치고 있다. 카뮈는 교육을 통해 명확한 혜안을 키우라고 말한다. 혜안의 첫발은 모든 걸 다 안다고 자만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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