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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대 ‘가짜학문’ 교수와 확증편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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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대 ‘가짜학문’ 교수와 확증편향
  • 이관춘 연세대 객원교수
  • 승인 2021.07.08 16: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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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춘의 마을·자치·교육]
(왼쪽)하버드대 교문 상단 '베리타스' 상징 모습. 알아보지 못하게 깨진 글자가 묘한 느낌을 준다. (오른쪽)하버드대 교정에서 자주 눈에 띄는 '베리타스'. 건물 입구 상단에 보인다.
(왼쪽)하버드대 교문 상단 '베리타스' 상징 모습. 알아보지 못하게 깨진 글자가 묘한 느낌을 준다. (오른쪽)하버드대 교정에서 자주 눈에 띄는 '베리타스'. 건물 입구 상단에 보인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Homo Ratio)이라 한다. 교실 옆 자리 이성(異性)에도 눈뜨기 전 어린 시절부터 이성(理性)이 뭔지도 모르면서 학교 교과서에서 그렇게 배워왔다. 칸트의 교육론을 모르고 루소의 교육사상을 알지 못했어도 우리가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이성적 인간이 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이성적이란 말은 곧 참된 지식을 바탕으로 합리적이며 객관적이고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공평무사(公平無私)함으로 환치되었다. 플라톤 식으로 말하면 이성이 경계해야 할 것은 개인적 억견(臆見, doxa)’이며 추구해야 할 것은 참된 지식인 에피스테메(episteme)였다. 따라서 공부를 해야 사람이 된다는 말은 공부를 해야 이성적 인간이 된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그 공부의 최종 목적지는 대학으로 생각했다. 마치 출가한 수도승마냥 속세를 떠나 진리를 탐구한다고 해서 대학에 붙여진 이름이 상아탑(象牙塔)이었다. 비록 소 팔아서 등록금 댔다고 우골탑(牛骨塔), 부모님 등골 빼먹는다고 등골탑이란 비아냥도 들었지만 진리를 추구하는 자식 사랑 앞에 문제될 게 없었다.

그러나 최근 하버드대 어느 교수의 역사에 대한 개인적 억견을 보면서 우리가 신뢰하는 그 이성, 그리고 이성적이라는 인간이 추구하는 지식이나 신념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 의문을 갖게 된다. 또한 그런 사례와 의문이 실질적 주민자치를 위한 교육에 있어 하나의 반면교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버드대 교수의 가짜학문

미국 하버드대학교의 표어는 라틴어인 베리타스veritas’, 진리이다. 널리 알려진 대로 하버드는 1636년에 세워진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사립대이며 미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명문대학교로 손꼽힌다. 전 세계에서 찾아오는 학생들과 그 부모들의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인해 하버드대학 캠퍼스는 늘 붐빈다. 이 대학교 캠퍼스를 둘러보면 가장 눈에 많이 띄는 것이 바로 베리타스란 단어이다. 하버드대학교 소속 대학 및 기관들의 모든 방패 문장에는 이 베리타스란 단어가 신선한 무게감으로 아로새겨져 있다.

400여 년이 되어 가도록 하버드대학이 당당하게 내세웠던 그 베리타스가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학문의 목적이 진리의 추구이며 진리를 추구할 때 인간은 진정으로 자유로워진다는 상아탑의 신념이 너무도 허접할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주지하는 바대로 램지어라는 하버드대 법대교수의 위안부 관련 논문 때문이다. 그는 작년 12월 국제학술지 국제법경제리뷰에 발표한 논문, ‘태평양전쟁에서의 성 계약에서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의 위안부강제 동원이 자발적 매춘이라고 주장했다.

램지어 교수 논문 초록 화면 캡처
램지어 교수 논문 초록 화면 캡처

학문의 자유는 다른 부문의 자유와 마찬가지로 보장되어야 한다. 베리타스를 추구하고 지향하는 것이 학문하는 자의 존재이유라면 자유는 필연적으로 뒤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학문의 자유는 어떠한 이해관계나 외압에 굴하지 않고 진실을 추구해야 할 학자의 책임을 전제로 한다. 문제는 램지어 논문의 정직과 진실성이다. 학계의 평가는 한 마디로 논문의 근거가 왜곡된 사료와 날조된 자료라는 것이다. 역사학의 문외한이 보더라도 논문의 내용이 편향적이고 왜곡되었으며 지금까지 생생히 살아있는 역사적 사실들을 부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역사 왜곡이란 비판에 대해 아마도 램지어는 자신의 순수한 학문적 연구를 정치적 잣대로 재단한다고 항변할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같은 미국 학자들이 그의 논문을 두고 학문적 불법행위’, ‘가짜학문(fake scholarship)’이라고 평가하는지에 대해 답을 해야 한다. 왜 수많은 미국 학자들이 일본군 위안부를 매춘부로 규정한 램지어의 논문은 "학문의 자유의 보호대상이 아니며 즉각 철회돼야한다"고 규탄하고 있는지를 돌아봐야 한다. 플라톤 이후 지식의 기준으로 강조되는 정당화된 진실한 믿음(JTB)’의 조건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미네소타대학의 리처드 페인터 기업법 교수는, 램지어 교수가 논문에서 위안부 계약에 적용한 게임이론은 적용 자체가 거짓이라고 단정한다. 그는 게임이론은 합리적인 참여자와 동의, 협상력을 전제로 한다""아이들이 연루됐다는 건 제외하더라도 한쪽이 협상력이 전혀 없는 비대칭적 관계에 게임이론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게임이론이 아니라 차라리 음모론에 가깝다는 것이다. 그는 "가짜학문은 가짜뉴스보다 더 심하진 않아도 그에 못지않게 파괴적이라 강조하면서 "불행하게도 이 논문은 거짓말"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알렉시스 더든 코네티컷대학 현대 일본·한국·국제역사 교수는 "이 논문은 (역사) 부정하기의 초급 과정"이라고 평가한다. "지금은 허위정보와 가짜뉴스의 시대이며 누군가가 가짜뉴스를 사실로 둔갑시켜서 그걸 학문이라고 부르고 있다"고 비난했다. 홍콩 출신의 마이클 최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학(UCLA) 교수는 "이것은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일과 마찬가지"라고 단언했다. 그가 논문철회를 요청하며 학계에 연판장을 돌렸는데 여기에는 지금까지 3300여 명이 서명했다고 한다. 통상적으로 국제학술지 논문게재는 3명의 심사위원 중 1명이 불가평가를 해도 게재가 어렵다.

 

흔들리는 하버드의 베리타스

주목할 점은 일반인들도 아닌 미국의 학자들이 가짜학문으로 성토하는 이유다. 논문의 학문적 수준이 낮거나 부실해서가 아니다. 그들은 왜곡된 사료와 날조된 자료를 근거로 논문을 작성한 그 의도가 과연 무엇이었는가를 비판하는 것이다. “아주 피상적인 방식으로 게임이론을 이용하고 이를 전문성으로 위장하기 위해 썼다는 것”, 피해자 증언에 귀 기울이지 않고 위안부 여성의 성노예 이야기가 순전한 허구라고 매도한 이유를 묻는 것이다. 램지어는 자신의 논문에 대한 비판이 정치적 감각에 의한 거부반응이라고 주장할지 모른다. 허나 정작 정치에 오염되어 있는 건 램지어 자신이었다.

뉴스를 찾아보니 램지어의 전공은 역사나 위안부 연구와는 무관한 일본 회사법이었다. 여기서부터 의문이 든다. 그렇다면 전공도 아닌데 굳이 정치적으로 민감한 위안부 관련 논문을 쓴 이유를 묻게 된다. 알고 보니 램지어는 대표적 전범기업 미쓰비시 중공업이 낸 기금으로 하버드대에 채용된 사람이다. JTBC 보도에 의하면, 1970년대에 미쓰비시는 하버드에 당시 돈으로 100만 달러를 기부해 일본을 연구하는 석좌교수 자리를 따냈고 1998년엔 이 자리가 정식 교수로 승격됐는데 그 첫 수혜자가 램지어 교수이다. 학교 공식 직함도 아예 '미쓰비시 일본 법학교수'이다. 게다가 그는 유소년 시절을 일본에서 보내 일본어와 역사에 능통하고 2018년엔 일본 경제와 사회를 홍보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 정부 훈장인 '욱일장'을 받은 사람이다.

그럼 하버드대는 어떤가? 돈을 받고 교수 자리까지 만들어준 덕분에 전범기업 미쓰비시로부터의 후원은 더욱 밀려들었다. 보도에 의하면, 석좌교수 자리를 만들어준 직후 미쓰비시로부터 다시 200만 달러가 들어와 1년 반 동안 모두 300만 달러, 요즘 시세로 200억 원이 넘는 거액이 하버드대에 쌓였다. 1980년대에도 1억 달러(1100억원) 가까이 더 들어갔고 지금은 기부금 현황을 아예 공개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전범기업 미쓰비시가 세계적 유명세를 타는 하버드대에 그렇게 공을 들이는 이유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버드대는 과연 이런 사실을 모르는 것일까? 일본 돈으로 교수가 된 하버드 법대의 '노란 머리 일본인' 교수가 "위안부 피해자는 매춘부"라는 논문을 발표한 것을 학문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모르쇠로 일관하는 것이 하버드대의 현실이다. 마르크스 유물론의 가장 기본이 되는 명제가 있다. 경제적 토대인 하부구조가 사회 정치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를 규정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 규정관계를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사이의 관계에 적용시켰다. 혹시라도 돈과 자본이 사회 정치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를 규정하듯 하버드대학의 학문의 이데올로기인 그 베리타스마저 규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가시질 않는다.

 

이성에 대한 고전적 믿음

서양에서 이성에 대한 믿음은 뿌리 깊고 확고하다. 기원전 900년 경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의 주제는 아킬레우스의 분노다. 아킬레우스는 그리스 연합군 총사령관 아가멤논이 자신을 모욕하자 그의 목을 쳐버리겠다며 칼을 빼들었다. 그러나 그 순간 지혜의 여신 아테나가 급히 나타나 아킬레우스의 등을 확 잡아당긴다. 적을 앞에 두고 같은 편끼리 싸우다가 전쟁을 망칠 것인가란 지혜가 개입하게 된다. 아킬레우스는 칼을 놓고 노여움을 가라앉힌다. 아킬레우스의 마음속에서 지혜의 힘이 일어나 분노의 불길을 제압한 것이다. ‘일리아스라는 가장 오랜 서사시에서조차 인간이 가진 이성의 분별력이 원시적 정념을 이겨낼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호메로스의 이성에 대한 확신은 400년 뒤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좀 더 구체화된다. 플라톤은 파이드로스에서 인간의 정신을 한 사람의 마부와 두 마리 말이 끄는 쌍두마차에 비유했다. 오른 쪽 말은 혈통이 좋아 행동이 올바르고 명예와 절제, 겸손을 사랑하는 반면, 왼쪽 말은 혈통도 미천하고 말도 잘 듣지 않으며 방종과 오만으로 눈에 핏발이 서 있다. 오른 쪽 말은 문제가 없지만 왼쪽 말은 부정적이고 파괴적이며 온갖 쾌락을 뒤쫓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 여간해서 말을 듣지 않으며 아무리 채찍질해도 제멋대로 날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마부라는 이성이 있어 무엇이 좋고 옳은 것인지를 분별하여 이끄는 능력이 있다. 야생마와 같은 감정을 통솔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도 이성의 한계를 명확히 지적한다. 마부의 이성이 감정의 야생마에게 지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것이다. 이성이 감정에 패하면 마차는 자기이익과 쾌락을 향해 질주하는 욕망의 불덩이가 되기 때문이다.

이성에 대한 낙관적 전통은 17세기 근대철학의 문을 연 데카르트에 와서 절정에 이른다.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의심하고자 했다. 그는 자신의 감각이 자신을 속이고, 세상은 존재하지 않으며, 자신은 꿈을 꾸고 있는 것이라고 가정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다 의심해도, 의심하는 내가 없다면 의심한다는 게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도달했다. 의심하는 내가 유리 몸뚱이를 갖고 있다고 상상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 상상을 하는 것은 미치광이일 것이라 생각했다. 여기서 데카르트의 회의(懷疑), 즉 의심이 끝난다. 그리고 그는 단언한다. “비록 인간이 언제나 미치광이가 될 수 있지만, 진리를 인식하도록 의무 지워진 주체의 주권 행사로서의 사유는 결코 비이성적으로 될 수 없다.”

 

이성 같은 야생마 감정

이성적 사유에 대한 믿음은 근대철학의 바통을 이어받은 18세기 계몽주의에 와서 꽃을 활짝 핀다. 칸트는 인간은 이성으로 인해 개인적 감정이나 동정심을 초월하여 냉철하면서도 윤리적인 사유와 판단 및 행동을 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비슷한 시기, 괴테는 이성을 하늘이 내려준 불빛이라고 찬양했다. 그 이성의 불빛을 가장 선용할 것으로 믿는 분야가 학문과 예술의 세계다. 누구보다도 학자나 예술가는 이성의 불빛에 정직하며 또 정직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양의 학문적 전통은 바로 이런 이성에 대한 확신과 낙관적 믿음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허나 램지어 사례는 이성에 대한 이런 낙관적 믿음이 얼마나 허접한 지를 여실히 입증해주고 있다. 단지 하나의 사례를 들었지만, 개인적 감정과 편견이란 야생마에 압도당한 이성이 모는 플라톤의 욕망의 마차는 늘 주변에서 볼 수 있다. ‘로마인 이야기로 잘 알려진 일본 작가 시오노 나나미가 바로 그렇다.

그녀는 2014년 일본 월간지 문예춘추에 일본군 위안부에 관한 내용을 기고했다. 인도네시아에 거주하던 네덜란드 여성을 강제로 일본군 위안부로 삼은 소위 스마랑 사건과 관련된 글이다. 그녀는 백인 여성을 위안부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미국, 유럽에 알려지면 치명적이므로 정부 차원에서 대처하고 회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마저 그 신빙성을 운운하며 의문을 제기했다. 이성적인 순수성을 생명으로 하는 작가가 진실을 덮고 역사를 조작하는 일을 서슴없이 선동하고 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로마인 이야기의 진실성은 어찌 될 것인가?

'로마인이야기'로 유명한 시오노 나나미. 사진='로마인이야기' 저자 사진 캡처
'로마인이야기'로 유명한 시오노 나나미. 사진='로마인이야기' 저자 사진 캡처

플라톤은 파이드로스에서 인간 영혼을 9등급으로 나누어 가장 높은 자리에 지혜를 사랑하는 철학자, 아름다움과 시가(詩歌)를 사랑하는 영혼을 두었다.(248d-e) 반면에 가장 낮은 단계의 두 번째, 곧 여덟 번째 자리에 배정된 것이 소피스트와 민중선동가(데마고그). 개인적 이해관계에 의해 가짜역사를 만들거나 감각적이며 정치적인 거부감으로 진실을 호도하고 거짓 언어로 대중을 선동하는 자들인데 램지어나 시오노 나나미의 곡필(曲筆)의 몰골을 여기서 본다.

플라톤은 다른 등급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가장 높은 등급의 영혼을 가질 수 있는 길을 열어놓고 있는 셈이지만 소피스트와 같이 지식인을 자처하는 사람들의 비이성적 행태에 대해서는 작심한 듯 혹독한 비판의 날을 세우고 있다.

 

확증편향의 성찰과 교육

특정한 역사적 사건이나 정치적 현상에 대해 의견을 달리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다. 개인 간, 집단 간에 존재하는 감각적 거부감도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 있다. 문제는 램지어나 시오노 나나미의 경우처럼 지식인이라 자처하는 사람들이 개인적이며 정치적인 이해관계나 감각적 거부감을 학문이나 문학의 진실로 둔갑시키는 행태다. 학문이나 문학으로 교묘하게 포장한 비이성적 행위는 자신의 사회적 평판이나 지위를 등에 업고 진실을 왜곡하는 행위이며 그 파급력 또한 크다는 점에서 역사적 죄질이 더욱 무겁다.

감각적 거부감은 대상에 대해 즉각적이며 주관적이다. 자기 생각에 갇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입맛에 맞는 결론을 내린다. 즉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이다. 막스 베버는 이를 감정의 비합리적 직접적 이해라고 규정한다. 이런 경우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리고 나서 내 결정을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들만 선택하는 인지적 오류를 범하기 십상이다. 램지어처럼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에는 귀를 닫고 위안부 여성의 성노예 주장은 순전한 허구라고 단정한다. 게임이론을 몰랐을 리 없는 그가, 합리적인 참여자가 없고 자유로운 동의 아닌 강압이 있었던 당시 상황을 게임이론으로 위장하는 것 또한 확증편향의 전형이다. 베버는 이런 행태를 어리석고 비열할 수도 있는 인간의 평균적 결함들이라고 혹평한다.

시야를 안으로 돌리면, 우리의 일상에서도 이런 어리석은 결함들이 늘 함께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성에 대한 낙관적 전망에 학습화되어 보지 못하고 있었을 뿐 인간 이성은 그 자체로 결핍과 결함임을 우리는 확인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는 인간 이성의 능력에 대한 신뢰 이전에 그 허접함에 대한 교육이 오히려 필요한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주민자치의 주체인 주민들이나 실질적 주민자치제에 대한 의사결정권자들이나 자신의 생각이나 신념에 대한 확신에 앞서 이 어리석은 결함들을 먼저 돌아보는 성숙한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그 성숙한 지혜의 일환으로, 막스 베버는 의사결정에 앞서 하나의 과정이 반드시 추가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즉 감각적 거부감에 기초한 판단 이전에 이성에 의한 사유의 과정을 추가하라는 것이다. 그는 이런 사유의 과정을 이성의 합리적 직접적 이해라고 말한다. 감각과 감정에 파묻힌 이성의 빛을 외면하지 않을 때 가짜학문’ ‘가짜인생이 아닌 참된 사고’ ‘참된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는 바로 확증편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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