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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만이 마을을 가득 채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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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만이 마을을 가득 채울 수 있다
  • 박소원 칼럼니스트
  • 승인 2021.08.12 13: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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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이 있는 풍경]

‘마을이 있는 풍경’은 ‘마을’의 속살을 가만가만 들여다보고 소곤소곤 소통하는 코너입니다. 더 없이 가깝고 밀착돼 있지만 적지 않은 이들에겐 대체로 멀기만 한 마을의 이야기를 때론 지직거리고 둔탁한 확성기로 때론 고성능 마이크의 ASMR로 들려드립니다.[편집자주]

오늘은 잊고 지내던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네 내일이면 멀리 떠나간다고

어릴 적 함께 뛰놀던 골목길에서 만나자 하네 내일이면 아주 멀리 간다고

덜컹거리는 전철을 타고 찾아가는 그길 우린 얼마나 많은 것을 잊고 살아가는지

어릴 적 넓게만 보이던 좁은 골목길에 다정한 옛 친구 나를 반겨 달려오는데

어릴 적 함께 꿈꾸던 부푼 세상을 만나자 하네 내일이면 멀리 떠나간다고……

동물원의 혜화동이라는 노래다. 너무 길게 인용해서 지면의 많은 부분을 가사로 채워버렸다. 그런데 한 구절만 딱 잘라 인용하기 어려울 만큼 이 노래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가사를 정말 좋아한다. 김창기의 어눌한 목소리가 소환하는 어린 시절의 혜화동은 김창기의 톤이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러프한 모양새를 띄고 있다.

나도 그 일대에서 어린 시절을 지냈다. 혜화동, 성북동, 돈암동……

유난히 집집마다 대문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많고 담벼락은 높았다. 말하자면 언덕이 많은 동네였던 것인데 지금도 그 모습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성북동과 돈암동은 지나치게 여전히 언덕이 굽이굽이 그대로다. 아파트가 제법 들어선 혜화동도 높이가 만만찮다. 언덕을 따라 구성된 마을의 담벼락은 담쟁이, 라일락, 장미 넝쿨들로 둘러쳐져 있었고 봄부터 가을까지 골목은 다채로운 색깔로 어린 날의 배경이 되었다.

 

굽이굽이 다채로운 색깔로 어린 날의 배경이 되어준 성북동·돈암동·혜화동 골목

그 골목을 헤집으며 뛰어다녔던 듬성듬성한 기억을 따라 가끔 혜화동, 성북동, 돈암동을 걸어본다. 한 마을도 다 돌기 어렵다, 당연. 숨을 헐떡인다. 높은 계단 위에 하늘을 향해 우뚝 서 있던 우리 옛집을 찾아가본 적이 있다. 계단 위의 집은 새롭게 건축되었지만 계단은 여전히 대문에 이르는 길로 남아있었는데 내 기억에 한참 못 미치게 초라한 높이였다. 남의 집이긴 하지만 십여 개의 계단을 올라 대문 앞에 서보았는데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이 젊은이들이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은 가볍지 않은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요즘 누구도 계단을 오르지 않는다. 한 층도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지 않는가. 계단을 오를 힘이 없다. 요즘의 우리는.

기억 속의 우리 집은 그야말로 하늘로 치솟아 있었다. 나는 계단을 순식간에 뛰어오르며 한 발짝만 더 뛰면 하늘에 도달할 듯 가볍게 내달았다. 학교에서 돌아와 가방을 팽개치고 골목으로 놀러 나갈 땐 또 얼마나 날쌘돌이였는지. 놀다가 집에 여러 차례 들락거렸겠지만 대문 계단을 올라가는 게 숨찼었다는 기억은 어디에도 없다. 얼마나 가볍게 바람처럼 날아다녔던지! 우리는 그 속도로 놀았다.

다방구라는 술래잡기를 하고, 고무줄놀이를 하고, 삼팔선놀이를 하고, 오징어놀이도 했다(이런 놀이들을 다 아는 분이라면 연식이 좀 있으신 거죠?). 땀 흘리고 숨찬 놀이 사이사이에 좀 쉬어가는 놀이가 하늘땅놀이, 공기놀이였던 것 같다. 물론 공기놀이를 주종목으로 놀기 좋아하는 아이들도 꽤 있었지만 공기놀이나 하늘땅놀이만으로 직성이 풀리지 않을 만큼 샘솟는 폭발적인 괴력의 에너지는 마을을 가득 채웠다.

앉아서 서서 폴짝 뛰고 달리는 다채로운 놀이 속에서 폭발적 에너지 발산하던 그 시절

이전 직장에서 나는 놀이터 만드는 일을 했다. 특별히 전공한 바도 아니고 지난 커리어에 어린이나 놀이와 관련된 어떤 것도 없었던 내가 갑자기 불려간 회사가 놀이터 회사였다. 마케팅을 하는 사람이 품목을 가리지는 않으니까 스스럼없이 나는 놀이터쟁이가 되었고 세상의 거의 모든 놀이터를 다 돌아다니며 세계의 놀이터들로부터 배우고 경쟁하고 앞서갔다.

기존의 놀이터를 업그레이드해서 기업의 가치를 상승시켜야 하는 것이 미션이었으니 놀이, 어린이, 엄마 마음이 연구 대상이었고 뜻하지 않게 머나먼 과거로 여행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나는, 우리는, 어떻게 놀았던 것일까? 그렇게 기억을 되돌려보니 우리의 놀이 본능은 어마어마했다. 당시로는 넓게만보이던 골목길이 뜨거운 놀이본능으로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정말 골목이 꽉 차도록 놀았다. 집 안에서 부모들이 내 아이가 아직 저 골목에서 놀고 있구나 안심할 수 있을 만큼 소리 지르며 놀았다. 그렇게 하루해가 가도록 놀아도 모자랐다. 부르고 불러도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시간을 연장해서 어둑해서야 어쩔 수 없다는 듯 어슬렁거리며 집으로 들어가곤 했다..

놀이와 놀이터를 연구하느라 세계 각국을 돌았다. 웬만한 놀이터는 다 찾아 다녔다. 특히 미국과 캐나다의 놀이터는 탄성을 자아냈는데 우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난이도를 가진 놀이터였기 때문이다. 자기 키의 세 배, 네 배가 넘는 기울어진 벽을 거꾸로 뛰어 올라가 끝에 매달린다. 팔 힘에 의지해 몸을 끌어올려 절벽 위에 올라선다. 줄줄이 늘어서있는 그네와 그네를 건너간다. 보기엔 그다지 어려울 것 같지 않지만 그네는 흔들린다. 이쪽 그네에서 저쪽 그네로 건널 때 다리가 사정없이 벌어진다. 평균대를 건너는 일도 만만찮다. 키 높이의 평균대를 균형 잡으며 거뜬히 지나간다. 다들 기계체조 선수들 같다.

그래도 거뜬히 그런 놀이를 한다. 내 눈엔 해낸다싶었지만 그들은 즐기며 그렇게들 논다.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의 어린이들이 즐기는 놀이터가 그 정도다. 우리나라의 실내놀이터나 아파트 단지의 어린이놀이터와 비교했을 때 엄청난 차이가 있다. 운동력과 근력이 평균적으로 매우 높다. 놀이터의 기구들도 어린이용, 어른용이 따로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키가 닿지 않으면 도움닫기를 이용한다. 키다리 아빠와 초등학생 딸이 같이 놀러 와서 같은 장애물 놀이기구에 도전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내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외국의 놀이터들
외국의 놀이터들

때로 위험천만해 보이는 외국의 놀이터들을 보고 놀란 이유

그런데 예전에 골목을 가득 채웠던 그 에너지와 근력이라면 우리도 얼마든지 가능한 놀이라는 생각이 든다. 머리 위로 들어 올린 고무줄도 한쪽 다리로 끌어내려 가뿐히 한 곡의 플레이를 해내지 않았었나. 나는 꽤나 모험심이 강한 편이라 절벽과 같은 뒷산에 숨은 아지트를 마련해서 놀이보물들을 숨겨놓고 오르내리곤 했다. 몸이 가볍기도 했지만 놀이근력이 대단했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지금의 우리는 이렇게 얌전하고 조용하고 나약해졌을까? 우리는 더 이상 노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노는 것을 잉여로 생각한다. 엄마들은 숙제 해놓고 놀아!” “공부는 해놓고 노는 거니?”…… 게다가 논다라는 단어는 매우 부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쟤 쫌 노는 애지?’ ‘제가 좀 놀았죠’ ‘놀고 있네…… 노는 건 비생산적이고 때론 부도덕하고 인생을 낭비하는 일쯤으로 여기고 있다. 아이들에게도 노는 일은 쓸모없는 것이다. 위험한 것이다. 아이들을 뒤쳐지게 하는 것이다. 공부라는 가치 있는 일을 하는 사이사이 보상으로 허용된 일이 돼 버렸다. 모두 각자의 집에서 옆집 친구에게 뒤쳐지지 않도록 열심히 공부를 하도록 종용 받는 세상이 됐다.

그런데 놀이는 무엇인가? 마을을 가득 채우던, 골목을 왁자하게 하던 그 활력은 무엇인가? 놀이는 사실 우리가 누려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다. 특히, 아이들은 놀이가 삶의 모든 것이다. 놀이를 통해 성장하도록 태어난 존재가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경쟁하며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놀면서 성장하도록 만들어진 존재가 인간이다. 놀이를 통해 인내심을 배웠다, 협력하는 법을 배웠다, 패배와 승리 사이의 지혜를 배웠다. 놀이를 통해 왕성한 창의력을 키웠다, 근력을 키웠고, 생각을 키웠다. 원 없이 양껏 놀다 온 아이는 음식 투정할 이유가 없다, 잠투정할 이유가 없다. 잘 먹고 잘 잤다.

사람을 키우는 것은 놀이다. 골목은 놀이를 품고 있다. 마을은 골목으로 만들어져 있다.

동물원의 혜화동은 어릴 적 골목에서 누렸던 놀이의 아찔한 흥분을 기억나게 했다. ‘함께 뛰놀던’ ‘넓게만 보이던골목길을 기억나게 했다. 그리고 다시 좀 놀아봐야겠다는 생각까지 스멀스멀 올라오게 했다.

우린 얼마나 많은 것을 잊고 살아가는지……

박소원 씨앤씨티에너지 마케팅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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