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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자치에서마저 능력주의인가? [여는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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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자치에서마저 능력주의인가? [여는글]
  • 장은주 영산대 교수
  • 승인 2021.09.29 15: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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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우리 사회에서는 곳곳에서 능력주의(meritocracy)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다. 평창올림픽 아이스하기 팀 단일화 시도에 대한 청년 세대의 반발, 비트코인 규제 방침이나 부동산 대출 규제에 대한 청년 세대의 비판, 학교 내 비정규직 철폐 시도에 대한 교총과 전교조의 일치된 거부, 학생부종합전형 방식에 대한 비판적 정서, 사시 부활에 대한 지속된 요구, 이른바 인국공 사태’, ‘전교1의사들의 반-공동체적 파업, 정글 식 경쟁을 공정하다고 외친 이준석 국민의 힘 대표 당선 등 무수히 많은 사건에서 특히 우리 청년 세대의 능력주의적 문제 인식이 드러나면서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이에 대한 비판적 논의도 많지만 뭐가 문제냐는 투의 반응도 적지 않다.

쉽게 말해 능력주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사회에서 더 많은 부와 권력과 명예 등을 차지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신념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 생각은 가령 좋은 직장엔 좋은 학벌을 가졌거나 시험 같은 데서 높은 성적을 보인 사람이 들어가야 마땅하고 특정한 자격증을 가진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비해 월등히 높은 수입을 얻는 게 옳다는 믿음으로 나타난다. 물론 학벌이 별로거나 시험을 치르지 않거나 자격증 같은 게 없는 사람이 좋은 일자리를 차지하는 건 불공정하다고 여긴다. 우리 사회에서는 단지 청년 세대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구성원들이 이런 능력주의적 신념을 내면화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배경이 지적되지만, 능력주의적인 과거제를 운용했던 조선 시대 이래 우리 사회의 오래된 문화적 습속과 관련이 있을 거라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과거제도와 정치적 능력주의’...“불평등 정당화 이데올로기

 

중국, 한국, 베트남에서 실시되었던 이 과거제도는 정치적 능력주의와 관련이 있다. 앞서 말했던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논란 같은 데서 문제되는 능력주의가 경제적 차원의 분배 원칙과 관련이 있다면, 이 정치적 능력주의는 현명하고 능력이 있는사람이 나라의 일을 관장하는 게 옳다는 유교의 가르침에 따라 고전 경전에 대한 지식과 문장 능력 등을 평가, 뛰어난 성취를 보이는 사람을 선발하여 관료가 되도록 하는 제도로 표현되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에서는 각종 고시를 통하여 그런 과거제도를 대체했으며 이것은 우리나라에도 전해졌다. 서양의 많은 나라들은 19세기 후반 이후에야 중국의 과거제를 참조하여 공무원 선발제도를 도입했다.

이런 배경에서 볼 때 우리 사회에서는 왜 신자유주의 시대 미국을 비롯한 많은 선진 자본주의 사회들에서도 나타나는 분배정의 원리로서의 능력주의뿐 아니라 정치적 차원에서마저 능력주의가 지배하고 있는지를 잘 이해할 수 있다. 고시를 합격한 법조인들은 조선 시대 과거 시험에 급제해서 출세했던 고급 관료와 같은 차원의 인물들로 이해되고, 심지어 국회의원을 비롯하여 많은 선출직 공무원들도 변호사든 뭐든 이런저런 어려운 시험에 합격하거나 다른 사회 영역에서라도 뛰어난 역량을 입증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처럼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정치란 너무도 중요하고 전문적인 일이어서 보통의 시민들은 관련된 일에 종사하거나 어떤 판단을 내리기에 적합하지 않기에 언제나 좋은 학벌이나 무슨 전문성을 가진 이들에게 맡겨둬야 한다는 신념이 사회에 만연하다.

우리 사회의 많은 시민들, 특히 청년들은 능력주의가 공정성을 가장 잘 담보한다고 여긴다. 그래서 국민의 힘 이준석 대표는 모두에게 기회가 주어지는 정글 식 경쟁이야말로 가장 공정하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곤 해서 젊은 세대의 환호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 능력주의는 그 핵심에서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다. 불평등한 분배라 해도, 만약 그것이 치열한 경쟁에서 이긴 사람이 많은 것을 가지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적게 가지게 된 탓이라면, 그건 아주 공정한 일이니 문제 삼아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이런 신념은 자주 경쟁의 패자들이나 사회적 약자들을 무시하고 배제하는 갑질같은 형태로 표출되곤 한다.

정치적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라의 중요한 일과 권력을 독차지하고 있는 소수의 엘리트들은 수많은 보통의 시민들을 배제하면서 자신들의 관점과 이해관계를 공동선으로 포장하여 정치를 한다. 마이클 샌델은 이런 상황을 능력(자들)의 횡포/전횡(the tyranny of the merit)’이라고 했는데 참으로 적절하다.

불평등을 정당화화는 능력주의, 특히 정치적 능력주의는 오늘날 민주주의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한 때 능력주의는 서구에서나 우리나라에서나 기회의 평등에 대한 신념을 고취시키면서 혈통에 따른 계급지배를 거부하는 등 민주주의의 중요한 초석으로 역할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능력주의는 사회구성원들 사이에 경제적 불평등을 심화, 고착시킬 뿐 아니라 정치적 평등마저 위협하거나 부정하면서 민주주의를 소수 고학력 전문가 엘리트들에 의한 과두정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서구의 많은 선진국들에서 나타나는 극우 포퓰리즘은 바로 그런 능력주의적 질서에 대한 대중들의 반발과 거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많은 이들은 이준석 신드롬이 한국 사회에 나타난 트럼프주의의 다른 표현이 아닐지 촉각을 세운다.

 

풀뿌리민주주의 차원에서도 능력주의 작동 심각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샌델이 말하는 능력자들의 전횡이 중앙 정치차원에서만이 아니라 풀뿌리 민주주의의 차원에서도 나타나고 있어서 걱정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마을과 동네의 일상적 삶의 수준에서 주민들의 직접적인 참여를 통해 이루어져야 할 주민자치마저 중앙정부와 광역 및 기초 지자체의 관리 대상으로 취급되고 있으니 말이다. 놀라운 것은 여기서도 모종의 능력주의가 관철되고 있는데, 공무원들의 개입을 넘어 전문성을 내세우는 시민운동가들이 주민자치 영역을 장악하여 보통의 시민들을 배제한 채 그들이 주민자치의 주체임을 표방하는 일이 표준이 되어 가고 있단다. 더구나 이런 일은 진보를 자처하는 중앙과 지방의 정부 주도로 이루어지고 있다. 전국 어디든 가는 곳마다 주민자치센터가 늘려 있는데 안타깝게도 거기에는 주민이 없고 따라서 자치는 이미 논리적으로 있을 수 없는 장면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런 일은 서구의 극우 포퓰리즘보다 더 심각한 문제다. 이 포퓰리즘은 너무 단순하게 편가르기를 하면서 이민자 등에 대한 적대를 표출해서 걱정이지만 그래도 시민 대중이 우리가 주권자다라며 민주적 주체성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발흥했다고 이해할 여지가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주민 없는 주민자치는 아예 민주주의의 흔적 자체를 찾을 수 없다. 이건 어쩌면 멀리 조선의 향약에까지 이어지는 전통에 맞닿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조선 시대의 향약은 사실, 도덕적 마을공동체의 건설이라는 표방된 명분과는 달리, 과거제를 통해 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한 양반 계층이 백성들을 일상적 마을 살이 수준에서부터 지배하는 도구로 역할을 했다. 지금 우리의 주민자치가 이 수준에서 얼마나 벗어났는지 모르겠다.

다시 샌델을 인용하자면 민주주의는 자치와 분권의 함수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선거로 뽑는 게 민주주의의 전부는 아니다. 더구나 그 중앙 차원의 정치가 소수의 엘리트들에 의해 장악되어 있는 게 우리 현실인데, 이렇게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은 지금 그 외견상의 민주주의도 상당한 정도로 일그러져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분권은 소수의 엘리트들이 나라의 모든 권력 자원을 독점하는 걸 막아주는 가장 중요한 제도적 장치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시민들의 가장 기본적인 삶의 단위인 마을 수준까지 일정한 방식으로 분권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당연히 나누어진 권력은 시민들이 스스로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기초적인 삶의 터전에서부터 시민들이 스스로 자치 조직을 만들고 규약을 제정하며 소규모라도 예산을 집행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분권과 자치를 토대로 정치적 수준의 민주주의가 작동될 때 비로소 우리는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향약 전통만 있는 게 아니다. 그 향약은 나중에 보통의 백성들이 주도하는 촌계로 발전하기도 했지만, 동학농민전쟁 때는 집강소를 통해 민관의 민주적 협치와 주민자치의 역사적 모범을 만들어냈던 전통도 있다. 광주 5.18 때도 시민들은 그야말로 모든 국가적 권력이 공백이 된 상태에서도 스스로 주권성을 발휘하여 질서와 치안을 유지한 건 물론이고 연대에 기초한 빛나는 공동체적 삶을 실천하기도 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주민자치가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한 것은 주민들의 자치 전통과 역량이 없어서가 아니라 주민자치마저 흔드는 엉뚱한 능력주의 때문이다. 이제라도 올바른 주민자치를 뿌리내리게 해서 우리의 소중한 민주주의를 지켜내야 한다.

 

장은주

영산대학교 성심교양대학 교수. 독일 요한볼프강괴테대학교 철학박사. 저서 <인권의 철학> <정치의 이동> <유교적 근대성의 미래> <시민교육이 희망이다> . 논문 메리토크라시와 존엄의 정치’ ‘민주주의라는 삶의 양식과 그 인간적 이상’ ‘confucian Characteristics of Korean Democracy: An Approach from a Republican Perspec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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