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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와 마사다 그리고 주민이라는 연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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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와 마사다 그리고 주민이라는 연계성
  • 이관춘 연세대 객원교수
  • 승인 2021.09.17 17: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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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춘의 마을·자치·교육]
1921년 소련 크렘린궁 앞에 선 홍범도 장군의 모습(왼쪽). 사진=홍범도장군 기념사업회, 독립기념관

어쩌다 어른이라지만 인간 각자의 실존이 반드시 어쩌다인 것만은 아닐 것이다. 단순한 우연성으로서의 지금 여기의 나는 필연적으로 역사라는 시간의 선로위에 서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역사의 필연성 속에 주민으로서, 시민으로서 현재의 가 존재하는 것이다.

틱낫한의 말대로 인간의 본성은 연결되어 있음(inter-being)’이다. 이 세계의 모든 존재들은 독자적 혹은 독립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들과의 상호의존적 연계성 안에 함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나에 대한 이해는 국가 사회라는 공동체 속의 주민이며, 공동체는 필연적으로 역사를 딛고 있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이러한 역사적 연계성에 대한 인식은 각자의 정치적 이념이나 호불호의 문제가 아닌 당위이자 숙명이며 의무라 할 수 있다. 또한 주민자치를 위한 교육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장군의 귀환과 현재의 나

독립운동가 여천(汝千)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순국 78년 만에 고국 땅으로 돌아왔다. 광복절인 지난달 15일 언론은 일제히 장군의 귀환을 보도했다. 우리나라 최신예 전투기 6대의 정중한 엄호 비행을 받으며 고인의 유해는 그동안 잠들어 있던 카자흐스탄을 떠나 장군이 그토록 갈망하던 고국의 땅을 밟은 것이다.

위대한 독립운동가 중 한 분인 장군의 귀환은 언론의 입장에서는 하나의 뉴스였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시민들에게는 단순한 뉴스를 넘어 그 자체로 성찰의 교육이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시민들이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를, 민족을 위해 죽음을 불사하며 처절하게 맞서 싸운 홍범도 장군의 고독한 업적을, 그리고 이름 석 자 남기지 않고 전투에서 스러져간 수많은 선조들을 기억하고 관심을 가졌는가를 반성하는 교육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독립운동을 지금의 나와의 연계성에서가 아닌, 그저 불행한 역사의 한 페이지로만 생각해 왔는지를 돌아보는 소중한 자기성찰의 시간이다.

온라인 추모공간에 올라온 어느 시민은 그 소중한 자기성찰을 다음과 같은 추모의 글로 대신하고 있다. “여섯 살 우리 아이에게 장군 같은 분이 계셨기에 우리가 지금 이 나라에서 먹을 걱정, 오늘 내일 걱정, 내 가족을 잃을 걱정을 하지 않고 살고 있다고 설명해 주었다.” 그는 이어 나라가 홍범도 장군과 같은 분들을 잊지 않아야 앞으로 후손들도 나라를 위한 행동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며 장군님의 귀환은 먼 훗날 이 나라를 이끌어갈 우리 아이들에게 좋은 귀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누리꾼은 어제 홍범도 장군님의 유해 봉환식을 TV를 통해 지켜봤다해방이 된 후 온 국민의 환호를 받으며 귀환했어야 할 분이 70년이나 지나 유해로 고국 땅을 밟으시게 됐다는 사실에 울컥했다고 적었다. 어떤 시민은 장군님의 귀환을 보니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눈물이 터져 나온다. 그토록 고대하셨던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융성을 봐 달라고 말하며 장군님의 조국에 대한 충정에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고 추모했다.

평양에서 태어난 홍 장군은 일제 치하에서 의병투쟁에 몸을 던진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1920년 홍범도, 최진동이 이끈 봉오동 전투는 일본군 157명을 사살하고 300여 명에게 상처를 입힌 독립전쟁사의 기념비적 전투로 꼽힌다. 홍 장군은 같은 해 10월 청산리 전투에도 참전해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는 일본군에게 하늘을 나는 장군이라고 불릴 정도로 두려움의 존재였고, 민중에게는 백두산 호랑이’ ‘축지법을 구사하는 홍범도 장군이라는 전설이 나돌 만큼 영웅으로 추앙받았다고 알려져 있다(동아일보, 2021.8.15.).

그런 독립 영웅이 1937년 스탈린의 한인 강제이주정책에 따라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해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현지에서 생을 마감했다. 홍 장군은 여타 독립 운동가들처럼 쓸쓸한 말년을 보냈다. 어느 시민의 추모의 글대로 해방 후 온 국민의 환호를 받으며 귀환했어야 할 분이 고려극장의 야간 수위 생활을 했으며, 눈을 감기 직전엔 정미공장 근로자로 일했다.

온라인 추모공간에 실린 시민들의 글은 너무도 단순하면서도 당연한, 그러나 우리가 잊기 쉬운,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그 역사 속의 선조들을 돌아보게 한다. 지금의 우리는 험난한 역사를 견뎌 온, 하이데거가 규정한 공동현존재(Mitdasein)’이자 그 산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를 돌아보는 일은 곧 자신을 돌아보는 일이며 성숙을 향해 나아가는 자기교육이다. 사람의 됨됨이는 어려울 때 드러난다고 하지만, 정작 그 됨됨이는 어려움을 극복한 후에 더욱 드러난다. 어려웠던 시절을 쉽게 잊는 것이 인간의 나약함이기 때문이다.

국가와 민족이 부정당하고 국민의 인권이 짓밟히며 절망의 수렁 속에 빠져 있던 시절, 분연히 일어나 목숨 걸고 투쟁한 민족의 영웅이 서거한지 무려 78년이 지나서야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과거의 정권이 유해송환을 위해 노력했다고 하지만, 문제는 실천이다. 우리 민족의 현재’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영웅들과 그 역사에 대한 존경과 관심은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과 정권, 일반 시민의 최소한의 의무이자 사람 됨됨이를 평가하는 중요한 잣대이다.

 

마사다항전과 현재의 유대인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말한다. 미래가 없는 민족에게 개인의 미래는 더더욱 있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사례는 두고두고 되새겨 볼, 공동존재로서의 인간실존에 대한 하나의 교과서이다. 바로 마사다(Masada)’란 세 글자의 교과서다.

오래 전 대학 연수의 일환으로 이스라엘 예루살렘을 거쳐 방문한 마사다의 기억은 우리나라의 현충일이나 광복절이 돌아 올 때마다 새록새록 살아난다.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100km, ‘죽음의 바다사해의 남서해안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사막 한 가운데에 퍼석퍼석한 바위산이 하나 있다. 히브리어로 요새란 의미의 마사다이다. 중동의 여타 사막 지형과 다를 바 없어 보이는 이 바위산에는 그러나 죽음마저 앗아갈 수 없는 것이 인간에게 있음을 처절하게 보여준 역사가 살아있다.

사방이 절벽인 높이 434m의 이 천혜의 요새는 스네이크 패스(Snake Path)란 이름처럼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가쁜 숨을 몰아쉬어야 올라갈 수 있다(당시에는 케이블카의 기억이 없다). 마사다 정상부는 평평한 마름모꼴이다. 남북 600m, 동서 300m에 달하며 주변에 4m 높이의 성벽이 둘러 있다. 정상에 올라가니 때마침 사해 너머 요르단 모압 산맥 위쪽으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찬란한 태양이 아니다. 2000년 전 죽음을 앞에 두고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결사항전 했던 유대인들이 바라보았을 그 처연한태양이다.

기원후 72년 경 로마의 루시우스 플라비우스 실바 장군이 이끄는 9000명의 로마 군대가 이 험준한 바위산을 포위했다. 로마 황제 티투스가 서기 70년 예루살렘을 함락시키자 마사다 꼭대기로 피신해 끝까지 저항하고 있던 960명의 유대인 열심당원(Zealots)들을 섬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천하의 로마군도 난공불락의 요새인 마사다를 점령하지 못해 2년 이상 공방전을 펼쳤다.

로마군은 지형이 비교적 높은 곳에 200m 높이의 진지를 구축한 후 마사다 정상을 향해 돌과 흙을 메워가며 공격 루트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 공사에는 예루살렘 전투에서 포로로 잡혀온 6000명의 유대인들이 동원되었다. 정상에서 저항하던 유대인들은 공사에 동원된 동족들을 향해 차마 돌을 던질 수 없었다. 달이 거듭되면서 언덕은 거의 완성되고 마사다의 운명은 풍전등화에 처하게 되었다.

734월 중순(유대력), 마침내 로마군들은 공성기를 이용해 성벽 일부를 깨뜨리고 정상에 있는 마사다 요새로 돌격해 들어왔다. 그러나 승전의 축배를 기대하며 기세등등하던 로마군들은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을 기다린 건 자결해서 널려 있는 960명의 주검뿐이었다. 산 자는 여자 두 명과 5명의 어린아이들뿐이었다. 식량창고를 제외한 모든 유대인들의 건물이 방화로 불에 타 있었다. 저항하는 자는 철저하게 짓누른다는 것을 만천하에 과시하려던 로마군은 오히려 경악과 패배감에 휩싸이게 되었다.

로마군의 진격 전날 밤인 415(유대력), 3년여의 저항이 패배로 돌아가자 유대인 지도자인 엘리에제르 벤 야이르(Eleazar ben Jair)는 전사들을 불러 모아 비장한 결심을 발표하였다. ‘우리가 로마에 잡혀 치욕스럽게 노예로 사느니 차라리 자유인으로 죽자는 것이었다. 그는 노예가 되기보다는 자유라는 이름의 수의(壽衣)를 입자고 역설했다. 또한 로마군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말고 없애지만 식량 창고 한 두 곳만은 남기자고 말했다. 먹을 것이 떨어져 죽음을 택했다고 믿게 해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유대 전사들은 각자 집으로 돌아가 그들만의 방식으로 가족들을 로마의 노예로부터 구했다. 그 방식이란 남편이 아내와 자식들을 포옹한 후 죽이는 것이었다. 남자들은 서로를 죽였다. 유대 율법은 자살을 금하기 때문에 그들은 제비를 뽑아 서로를 죽였으며 최후의 한 명은 자살하였다. 이렇게 960명의 유대인 전사들은 죽음으로써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쟁취하였다. 유대인들은 죽음마저 앗아갈 수 없는 것이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마사다의 최후를 끝으로 제1차 유대독립전쟁이 끝나고 2000여년이 지난 지금, 마사다는 이스라엘인들의 삶 교육의 장으로 변모하였다. ‘현재의 나의 자유는 선조들의 목숨을 담보로 한 결사항전의 희생과 공동체의 산물임을 몸으로 체험하는 생생한 교육의 장이다. 군인들에게는 더 말할 나위없는 정신 재무장의 훈련장이다. 필자가 방문했을 때도 현장학습을 온 것 같은 학생들의 진지한 모습과, 비장함이 감도는 앳돼 보이는 신참 군인들이 적지 않았다. 곳곳에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애국심을 북돋는 이스라엘 국민가요 예루살렘 오브 골드(Jerusalem of Gold)’였다. 군인들은 물론 이스라엘 젊은이들은 요새의 정상에서 자신들의 뿌리를 확인한다. 그리고 전의를 다진다. “마사다는 결코 다시는 함락되지 않으리라!”

유대 민족의 짓밟힘과 처절한 항전의 역사는 한국역사에서도 그대로 재현되었다. 그러나 나를 있게 한그 역사에 대한 학습과 진지한 성찰이 이스라엘처럼 재현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툭하면 언론에 보도되는 일부 정치인이나 사이비 종교인, 이름 모를 단체, 일부 언론의 친일행태를 보면 더더욱 그렇다. 부끄럽고 참담할 뿐이다. 민족의 역사는 정치적 이념이나 개인의 감각적 선호의 영역이 아닌 당위의 문제이다. 개인적 자유의 문제가 아니라 그 자유를 있게 한 선조들에 대한 최소한의 의무이며, 자유의 주체인 인간 실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니체가 역설한대로, 지금의 자유는 하늘에서 거저 떨어지는 선물이 아니다.”

 

관계적 실존으로의 주민이해

 

나는 그 누구도 내게 묻지 않을 때에는 그것에 대해서 잘 알고 있지만, 누군가 그것이 무엇인지를 물어 대답하고자 할 때에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겠다.”

중세철학을 대표하는 교부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에서 시간에 대해 한 말이다. 하지만 시간만이 아니라 인간 개개인의 실존 또한 그렇다. 주민으로서의 나, 시민이나 국민으로서의 나가 그렇다. 내가 가장 잘 안다고 믿는 그 가 무엇인지를 누군가가 묻는다면 선뜻 대답하기가 어렵다. “걱정 마, 나는 내가 가장 잘 알아.” 사람들은 별 생각 없이 이런 말을 하지만, 정작 그 가 보이지 않는 역사 속의 수많은 씨줄과 날줄로 서로 엇갈리면서 짜여 진 존재임을 생각하지 않는다. 좋건 싫건 내가 속한 민족의 역사가 베틀의 씨줄이 되었고 나는 그 위를 날줄이 되어 이리 왔다 저리 갔다하면서 지금의 나란 인생의 옷감을 짜고 있는 것이다. 나란 실존은 씨줄과 날줄로 이미 만들어져 내가 입고 있는 옷감처럼 다시 만들 수도 고칠 수도 없는 연계성이다. 이 연계성은 개인의 자유에 선행하는 것이다.

역사라는 수직적 연계성과 같은 맥락에서 다른 사람들과의 수평적 관계성 또한 실존의 특징이다. 인간은 다른 존재자와 어떻게든 관계를 맺고 있고 또 그 관계성을 자각하고 있으며 관계 속에 있는 존재자의 존재를 어떠한 방식이로든지 이해하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하이데거는 이를 실존이라 칭하며 현존재의 독특한 존재양식으로 본다. 따라서 실존적이란 표현은 현존재만의 독특한 있음의 차원[존재의 차원]을 두드러지게 드러내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다. 현존재는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로서 존재한다. 하이데거는 현존재인 인간의 고유한 특성으로서의 관계성, 연결성을 강조하면서 인간을 세계--존재혹은 세계-안에-있음의 존재로 지칭한다.

관계 속에 있는 존재로서의 연결성과 관계성은 근본적이며 운명적인 인간 실존임을 강조한다. 특히 프리드리히 니체부터 20세기 초의 하이데거, 부버, 마르셀, 사르트르 등에 이르기까지 실존철학은 공통적으로 인간이 무엇인가란 물음에 대해 진실해지기 위한 전제 조건이 연결성에 대한 자각임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나 홀로가 아니라 세상에서 다른 사람(현존재)들과 함께 상호작용을 통해 존재하는 것이며 존재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해 스스로 자기를 설계한다.

우리는 타인과-더불어-있음의 존재, 공동존재인 것이다. 내가 홀로 있음을 인식하는 것도 존재론적 혹은 실존론적으로 보자면 내가 이미 공동존재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만약 내가 공동존재가 아니라면 타인이 없음을 자각할 리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홀로 있다는 것은 공동존재의 결여적 양상으로서 오히려 내가 공동존재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공동존재로서의 주민자치 교육

인간의 이 홀로 있음은 나의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고 해서 제거되지는 않는다. 모처럼 기차 여행을 한다고 생각해 보자. 내 주변에 많은 사람이 있겠지만 내가 그들을 무관심과 낯설음의 양상으로만 대하는 한 홀로 있음은 제거되지 않는다. 만약 다수의 사람들로 인해 홀로 있음이 제거된다면 공동존재는 한낱 집합적 의미만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사람들 안에서도 내가 홀로 있음을 느낀다는 것은 내가 공동존재임을 반증하는 것이다. 무인도에 표류했던 로빈슨 크루소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로빈슨 크루소의 단독적 삶은 단순히 그가 종교, 수학 혹은 도구의 사용을 알았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 것이 아니었다. 이런 요인은 단지 현상적 요인에 불과했다. 오히려 그의 단독적 삶은 그가 이미 공동존재였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살던 공동세계를 무인도에 옮겨 놓았던 것이다.

공동존재는 단순히 사람들의 집합적 의미가 아니다. 성냥갑 속에 성냥개비들처럼 어떤 물리적 근접성이나 공간적 의미만을 뜻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주민들이 모인 집합체나 주민들이 함께 모여 사는 공간만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현상학적으로 볼 때 주민들이 공동존재라는 것은 읍··동이라는 지역 안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의 존재와 결속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현상학적 개념으로 말하면 주민과 주민이 서로 곁에 있음(Sein-bei)’이다. 인간 외의 다른 사물들은 곁에 있음이 될 수 없다. 사랑하는 연인 곁에 있음을 상상해보자. 반면에 가구점에서 한 책상이 다른 책상 곁에 있음을 생각해보자. 뭔가 차이가 느껴진다. 그런데 그 책상이 내 서재에 들어와 나의 곁에 있다고 상상해보자. 가구점의 책상과는 또 다른 느낌이 들 것이다. 사랑하는 연인 곁에 있음은 연인이란 존재자의 존재와 결속이 되는 것이다.

연인만이 아니다. 특정 지역사회 내의 주민들은 서로가 서로의 곁에 있음의 공동존재이다. 구체적인 일상에서 이웃인 타자와 친밀하게 교섭하고 왕래하며 타인과 동근원적(同根源的) 존재로서 서로의 존재를 염려하며 살아가는 인간적인 주민이다. 주민이라는 본질은 다른 주민 옆에 머물러 있는 방식으로 실존하는 것이다. 주민 개개인의 각자성(各自性)’과 아울러 공동체성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상호간의 긴밀한 의존성과 연결성을 갖는다.

존 듀이에 따르면 공동존재로서의 주민의 존재방식은 동전이 상자 속에 있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식물이 태양과 토양 에 있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존재한다. 이렇게 본다면 주민자치의 이념과 당위에는 이미 공동존재라는 실존적 개념이 전제되어 있다. 우리 모두는 주민으로서 나 홀로가 아닌 다른 사람들과 함께 뒤섞여 살아가야 할(Being-with) 운명적 존재라는 철학이 바탕이 되어 있는 것이다. 주목할 점은 인간이 더불어 삶으로써 비로소 공동존재가 된 것이 아니라 이미 공동존재이기에 더불어 삶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역사 속의 나, 공동존재로서의 나의 이해는 주민자치교육의 출발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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