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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직후 정탁의 예천 고평동 동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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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직후 정탁의 예천 고평동 동계
  • 박경하 중앙대 명예교수
  • 승인 2021.10.14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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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하 교수의 향약이야기③

‘조선시대 향촌사회의 자치규약’. ‘향약’의 사전적 의미이다. 여기에 바로 이어지는 것은 ‘덕업상권’‘과실상규’‘예속상교’‘환난상휼’ 등 학창시절 역사시간에 달달 외웠던 ‘향약의 4대 강목’이다. 다분히 정형화되고 박제화 된 향약에 대한 인식을 바꿔준 것이 바로 조선시대 기층민들의 상부상조 자치조직 ‘촌계’이다. 오늘날 주민자치의 한 원형과 단초를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이에 조선시대 향촌사연구 전문가로 사단법인 한국자치학회 부설 향촌사회사연구소장인 박경하 교수의 향약이야기를 연재한다. 전통시대 향약·촌계를 재조명함으로써 오늘날 주민자치에 주는 의미와 시사점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편집자주]

조선전기 향약의 실시는 전국적인 경향은 아니었으며 양반들은 자신들의 권익보호의 형태를 띤 향규나 족계 등을 통하여 생활하였다. 아울러 민간에서의 상천민들은 고래로부터의 향도(香徒)() 등으로 불리는 인보조직(隣保組織) 등을 통하여 상호부조·상호규검 하는 생활을 영위하여 왔다.

그러나 이러한 생활이 임진왜란을 분수령으로 하여 변화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즉 임란 후의 향약에서는 양반들의 상계(上契)’와 상천민들로 구성되는 하계(下契)’가 나타나며, 향촌에 세거하고 있던 사족들에 의해 주도하는 상하합계(上下合契)’ 형태의 동계들이 출현하였다. 이와 같이 양반·상천이 함께 참여하는 상하합계 형태의 향약이 임란 직후 도처에서 나타난 사실은 향촌사회질서의 변화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임란 후 향촌사회질서도 변화...상계+하계 상하합계형태의 동계 출현

 

임란을 통하여 조선왕조는 정치사회경제 각 방면에 걸쳐 많은 변화를 겪게 되었다. 특히 전화로 말미암아 향촌이 황폐화되자 향촌민들은 그들의 생활기반 마저 무너지게 되어 삶을 영위하기조차 어려운 상황이었다. 임란이 발발한 이듬해에 삼도도체찰사로 군무를 총괄하였던 류성룡의 <징비록>은 당시 상황을 아래와 같이 전한다.

중앙·지방할 것 없이 굶주림이 심하고, 또 군량을 운반하는데 피곤하여 늙은이와 어린이들은 도랑과 골짜기에 쓰러져 죽고 장정들은 도적이 되었으며 게다가 거듭되는 전염병으로 인하여 거의 다 죽어 없어졌다. 심지어는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부인이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며 죽은 사람의 뼈가 잡초처럼 드러나 있었다.” 부자·부부 간에 상식(相食)’하는 처참한 상황에 이르렀고 격전지였던 곳은 2, 3리나 10리에 한 집이 있을까 말까 하는 폐허 지경이었다.

이러한 상황이 되자 황폐화된 촌락을 재건하기 위해 상하귀천(上下貴賤)을 막론하고 합력해야만 했다. 서사원(徐思遠, 1550~1625)<하동리사계서(東里社契序)>에 따르면 공사(公私)에 천()과 함께 하는 것이 명분이 비록 다르나 부모의 같은 품 안에서 함께 나왔으니 세상의 모든 사람이 모두 형제인데 하물며 같은 동, 같은 면에서 함께 사는데 있어서리요. 귀천을 원수 보듯이 하면서 어찌 우락(憂樂)을 함께 나누리오. 이에 감히 불계귀천(不計貴賤)’하여 합작일계(合作一契)’하고 사생길흉(死生吉凶)’에 또한 즐거움과 슬픔을 함께하니 이것이 회집의 날에 특별히 모이는 까닭이다라고 하였다.

위의 기사는 공동체적 유대가 허물어지고 예의를 다스릴 여가조차 없는 상황에서 상천을 회유하여 향촌복구에 함께 참여시킬 필요성에서 나왔던 것이다. 따라서 동포병생임을 명분으로 불계귀천하고 양반들의 상계와 상천들 간의 하계를 합작일계하여 생사길흉에 함께 상조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정탁 선생의 '임진기록' 표지. 사진_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정탁 선생의 '임진기록' 표지. 사진_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상하합계, 상천민 회유 향촌복구 참여시킬 필요에 의해 등장

 

임란이 끝나고 10년 뒤 전국의 전결수를 조사한 바에 따르면, 대략 난전이 1/3로 줄어들어 임란 전 전라도 한 도의 전결수를 겨우 웃도는 정도였다. 향촌의 피폐는 임란중 적의 분탕에서 뿐 아니라 계속되는 흉년으로 인한 기근과 이와 함께 나타나는 전염병의 유행 등으로 많은 사상자를 낳게 되었다. 따라서 경작지는 노동력의 부족으로 더욱 황폐화될 수밖에 없었다. 임란 직후 상하합계의 경향은 봉화예천안동자인합천달성영해 등지로 피해를 많이 입었던 영남의 경우 대부분이 이에 해당되었다.

임란 직후 출현하는 동계의 성격에 대해서는 하계가 처음 보이는 1601(선조 34) 예천의 고평동 동계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좌의정을 역임하고 관직에서 물러나 고평동에 우거하고 있던 정탁(鄭琢)1601년 동인들의 권유로 동계를 입약하였다. 정탁(15261605)의 호는 약포(藥圃)이고, 이황의 문인으로 임진왜란 시 좌찬성으로 선조를 의주로 호종하였고 예천에 내려와 있었다. 임란 시 이순신·김덕령이 탄핵을 받을 때 가장 앞장서서 변호하였고 임진란의 사정을 적은 <용사(龍蛇)일기>를 남겼다.

고평동계는 권면(勸勉) 11조와 금제(禁制) 18조로 구성되어 있다. 전문은 아래와 같다.

 

<권면조(勸勉條)>

1) 진충사군(盡忠事君) 2) 지성사친(至誠事親) 3) 망신순국(亡身殉國) 4) 차의복연(倡義復讌) 5) 귀귀존존(貴貴尊尊) 6) 노노장장(老老長長) 7) 인족화목(隣和族) 8) 선공후사(先公後私)

9) 신납부세(愼納賦稅) 10) 용어위의(勇於爲義) 11) 비발음사(秘發陰私)

 

위 약조 중 권면조의 진충사군’‘망신순국’‘창의복연’‘선공후사’‘용어위의등은 임란 중의 혼란과 민심의 이산 속에서 근왕차의를 부르짖으며 일어났던 의병정신을 이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약조들은 이후 다른 동계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당시의 시국을 반영한 특수한 내용으로, 중앙정부 관원으로 임란 시 의주까지 선조를 호종하면서 전란으로 인한 실상을 몸소 체험한 대국적 견지에서 나왔으리라고 생각된다.

약포 정탁 선생 고평동계 약조문. 사진=약포정탁선생기념사업회
약포 정탁 선생 고평동계 약조문. 사진=약포정탁선생기념사업회

정탁의 고평동 동계로 본 임란 직후 동계의 특성

 

또한 난중에 관군보다는 향토방위를 목적으로 조직된 의병으로 많은 백성들이 몰린 점, 주로 농민들로 구성된 의병과 정유재란에 대비하여 사민 중 부모처자가 왜적에게 해를 입은 자들로 군대를 편성케 하려는 일종의 관제의병이었던 구의복수군과의 관계 등으로 인한 의병과 관군과의 괴리, 관에 대한 민중의 뿌리 깊은 불신 등이 반영되어 있다.

즉 선조가 한양을 포기하고 떠났을 때 노비들이 장예원과 도시 곳곳에서 방화와 노략질을 하고, 향촌에서는 유적들이 관사나 읍내대가들을 급습하며, 이러한 유적들이 대규모였을 경우 서얼출신인 이몽학 등을 중심으로 민란들이 일어났던 점 등을 비교적 직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정탁으로서는, 동계에 바로 이같은 근왕애국지심을 고취할 수 있는 조목들을 강조함으로써 관에 대한 민중들의 불신을 다소 불식시키고, 공동의 목표아래 엄격한 상하신분의 구별을 완화하여 서로 피폐된 향촌사회의 복구에 합력케 하기 위하여 나온 것이라 생각된다.

 

<금제조(禁制條)>

1) 망의조정시비(妄議朝廷是非) 2) 경론주현득실(輕論州縣得失) 3) 이소능장(以小凌長) 4) 이강능약(以彊凌弱) 5) 친척불목(親戚不睦) 6) 인리불화(隣里不和) 7) 범위관령(違犯官令) 8) 모만장상(侮慢長上) 9) 불구급난(不救急難) 10) 천벌금림(擅伐禁林) 11) 천초구묘(擅樵丘墓) 12) 침범전강(侵占田彊)

13) 방목화가(放牧禾稼) 14) 양탈인재(攘奪人財) 15) 종주휜경(縱酒喧競) 16) 구투매리(歐鬪罵詈)

17) 기회만도(期會晩到) 18) 무연불참(無緣不參)

 

망의조정시비’‘경론주현득실’‘위범관령등은 난전의 향규에서도 강조되었던 것으로 양반과 상천을 가릴 것 없이 모두 관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한 보신의 방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권면조의 신납부세, 급제조의 천벌금림’‘침전전강’‘양탈인재등은 임란 후 문란한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며, 특히 천벌금림은 나무를 연료로 사용하는 당시에는 상당히 중요한 것으로서 황폐화된 산림을 보호하기 위한 필요성에서 나온 것이었다.

고평동계에서는 난리 중에 나타난 관에 대한 민중의 불신을 완화하고, 피폐된 향촌사회를 재건하기 위하여 공동의 목표 아래 양반 상민, 상하가 협력하여 나가기 위한 필요성에서 애국심을 고취할 수 있는 내용들을 강조하였다. 또한 농본위주의 공동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는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하였던 것이다.

정탁 선생 초상화. 사진 예천군
정탁 선생 초상화. 사진 예천군

피폐된 향촌사회 재건공동 목표 아래 양반-상천민 협력...‘속례도 반영

 

고평동 동계의 또 다른 특징으로는 여씨향약과는 다른 고래부터의 속례(俗例)’를 반영하고 있는 점을 들 수 있다. 풍속이 옛날과 같지 않고 더구나 전란을 당하여 인심과 풍속이 허물어지는 상황에서 이상적이고 상고적인 고식,여씨향약만 따를 것을 주장하면 백성들에게 도리어 고통만 더하는 결과가 되므로 고래로부터 유전되어 내려 온 속례들을 반영하여 따르기 쉽게 하고자 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는 전란으로 인한 향촌사회의 피폐 속에서 여씨향약과 같이 이상적이고 상하예속을 강조하고 있는 번잡한 내용의 향약이 통할 리 없는 여건이었기 때문이었다.

고평동계는 여씨향약과는 관계없이 속례들을 반영하고 있으며 양반, 상민 모두 의무적으로 참여하는 상하합계 형태의 동계를 만들어 하계들의 상계에 대한 순종을 강조하여 신분제적 질서를 확립하고 관과의 협력체계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정탁 선생의 정신이 깃든 도정서원의 모습. 사진 정탁선생기념사업회
정탁 선생의 정신이 깃든 도정서원의 모습. 사진 정탁선생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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