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6 16:55 (금)
18세기 중반 김홍득의 충북 '보은향약절목'
상태바
18세기 중반 김홍득의 충북 '보은향약절목'
  • 박경하 중앙대 명예교수
  • 승인 2021.11.26 15: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경하 교수의 향약이야기④

‘조선시대 향촌사회의 자치규약’. ‘향약’의 사전적 의미이다. 여기에 바로 이어지는 것은 ‘덕업상권’‘과실상규’‘예속상교’‘환난상휼’ 등 학창시절 역사시간에 달달 외웠던 ‘향약의 4대 강목’이다. 다분히 정형화되고 박제화 된 향약에 대한 인식을 바꿔준 것이 바로 조선시대 기층민들의 상부상조 자치조직 ‘촌계’이다. 오늘날 주민자치의 한 원형과 단초를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이에 조선시대 향촌사연구 전문가로 사단법인 한국자치학회 부설 향촌사회사연구소장인 박경하 교수의 향약이야기를 연재한다. 전통시대 향약·촌계를 재조명함으로써 오늘날 주민자치에 주는 의미와 시사점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편집자주]
김홍득의 향약조목. 사진=한국학디지털아카이브

지난 호에 게재된 향약이야기에서 소개한 16세기 중반 퇴계의 <예안향립약조>가 재지사족들의 군현의 유지로서의 권위를 인정하면서도 기층민에 대한 수탈 토색을 규제한 양반들을 대상으로 한 향규라면, 임란 직후 예천에서 정탁이 시행한 <고평동계>는 동단위에서 양반들의 솔선수범하며 상천민들과 합력을 하여 향촌사회의 복구를 힘쓰기 위한 동계 조직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중세적 지배질서가 제반 변화로 동요되어 가는 형세에서 사족을 통하여 향촌사회를, 양반들을 통하여 백성을 통제하는 이사약민(以士約民)’이라는 간접지배 방식을 바꿔 군현체제의 정비과정에서 수령이 직접 향촌사회를 장악해 나가고자 하였다. 바로 수령의 직접 지배방식의 하나가 수령이 앞장서 실시한 주현향약(州縣鄕約)이다. 즉 일향의 교화를 사족에게 자치적으로 맡길 수 없는 상황에서 수령이 직접 앞장서 관의 적극적 주도에 의한 주현향약이 출현하게 되었다.

 

수령이 직접 향촌사회를 장악하고자 하는 주현향약출현

 

주현향약의 선구로는 율곡을 들 수 있다. 향약이 지금까지 유명무실했던 이유는 시행했다 말았다하며 시행에 일관성이 없었던 점과 마을마다 촌계가 있으나 관권의 뒷받침이 없어 범법자가 있더라도 징계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향약의 효과적인 시행으로 주현은 면을, 면은 리를 감독하여야 함을 제시하였고, 이를 청주목사 재임 시 <서원향약>에 반영하고 있다. 이 향약은 호서호남 지방의 주현향약의 전형을 이루었다.

율곡 선생이 제정한 서원향약을 기념하는 비. 청주중앙공원에 세워져 있다. 사진=청주시

영남지방은 1602(선조 35) 안동에서 김기(金圻)가 찬한 <향약>이 그 전형이 되었다. 두 향약 다 당시에는 빛을 보지 못하였으나 17세기 후반 수령권의 강화와 사족의 향촌자치력이 약화되는 과정에서 원용되었다.

주현향약의 내용은 상품화폐경제의 농촌의 침윤 및 토호의 침탈 등으로 인한 농민들의 유망(流亡,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일, 또는 그러한 사람, 출처=네이버 한자사전) 현상을 심각하게 받아들여 이들에게 권농(勸農)을 강조하여 상부상조하는 농업공동체적인 향약을 권장하였다. 이와 함께 부세의 과도한 부담을 줄이고, 토호향족향리층에 의한 무궤도한 침탈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즉 사회경제적 변동 속에서 향약을 통하여 농민의 토지이탈을 막고 농민들을 향촌사회에 긴박시키며 그들을 공동체적으로 결속시킴으로써 농업경제에 바탕한 체제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이 주현향약의 전형적인 모습을 18세기 중반 보은군수로서 향약을 시행한 김홍득(金弘得)<보은향약절목>에서 확인할 수 있다.

주현향약은 상하민 전원이 그 구성원이 되어 의무적으로 참여하여야만 했다. 17세기에는 유향소를 중심으로 하여 향약의 도약정(都約正)은 수령이 택하고 각 면에는 풍헌(風憲) 유사를 두어 면을 기간단위로 하였다. 면 이하는 기존 사족이 운영하는 동계를 하부조직으로 흡수하되 동은 비교적 사족의 자율적 운영에 맡겼다.

그러나 18세기에 오면 향약의 도약정을 수령이 직접 맡았고, 향교조직을 이용하였다. 이는 18세기 유향소가 수령의 하부기관화 하여 교화를 향족에게 맡기기 어려운 사정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동계를 부세의 수취단위로 파악하여 통제하고자 하였다.

운영에 있어 교화행정을 이원화하여 사족에게는 교화를 전담하게 하고, 부세 등의 행정업무는 향족들을 임명하여 향약조직에 사족을 끌어 들여 이들의 뒷받침을 받고자 하였다. 이는 실상 17세기 사족의 향촌지배가 가능할 당시 향약의 약임과 향임을 분리시켜 향약을 사족이 독점하여 명분상 교화가 통치의 대본이고 향임의 소관은 그 하위에 위치하는 실무사무이기 때문에 지배의 대본을 독점함으로써 사족우위를 확보하겠다는 사족의 주장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서 사족세력이 향권의 핵심인 부세조정에 간여를 하지 못하고, 향임을 천역시하는 상황에서 사족의 적극적 참여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김홍득의 <보은향약절목>, 주현향약의 전형적 모습 보여

 

주현향약은 통상 면단위를 기간으로 하고 그 밑의 동리의 동계는 사족의 자율적 운영에 맡겨 두었다. 그러나 18세기에 오면 향약의 도약정을 수령이 직접 맡았고, 향교조직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향촌사회에서 사족의 영향력이 감소하고 중앙정부의 향촌통치책의 강화과정에서 사족의 동계조직을 주현향약의 하부조직으로 편입시켜 부세의 공동납 단위로 만들어 나가고자 했다.

보은향약에서는 계장에게 상당한 권한을 부여하여 40’ 이하는 계장 독단으로 시벌할 수 있었으며 40’으로 때로 사망자가 나면 계장의 불운으로 돌려 군수 이하는 극력 무사하게끔 도와주도록 규정하고 있다. 향약의 임원은 향리 관속배의 비행도 감시 고발하고, 무고하게 중형을 받게 된 사람이 있으면 연명으로 관에 진정하여 시정되도록 하였다. 이는 임란 전 율곡이 작성한 <해주일향약속>에서는 사족들 스스로의 노력에 의한 향권보호였으나, 보은에서는 수령권 아래 수령의 권위로 민에 대한 사족우위를 보장받고 있는 것이다.

이와 함께 향약 임원들의 비리에 대해서도 제재를 가하였다. 계장이 공적인 일임을 빙자하여 사사로운 이익을 도모하는 즉 빙공영사(憑公營私)’하는 비행이 있으면 질책하고 그래도 고치지 않으면 고관하여 체임시켰다. 또한 계장이 향소와 통할 때는 이문(移文), 도계장과 통할 때는 첩정(牒呈)을 쓰고, 도계장은 향소와 통할 때는 문자로 통하지 않도록 하는 등 상하수직적인 행정체제를 갖도록 하였다. 이는 향약조직이 사족의 자치조직이 아니라 반관화(半官化)’되었다는 반증이다.

<보은향약>에서는 농가의 경제생활을 권농(勸農유민방지(流民防止)축특(畜特)취부(娶婦)무휼(撫恤)상검(常儉)절용(節用종수(種樹) 8개조로 나누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김홍득의 향약 절목을 통해 수령이 목민관으로서 변화하는 향촌사회와 향촌민들을 어떻게 인식하고 대처하고자 하는가를 파악할 수 있다.

 

당시 수령의 향촌사회민 관리 보여주는 <보은향약> 8개조

 

첫째로 권농을 강조하여 농사를 짓지 않고 말리(末利), 즉 장사에 종사하는 자가 있으면 리중부로들이 각별히 깨우쳐 주어 농사에 힘쓰는 무본(務本)하도록 하고, 듣지 않는 자는 태벌을 주고 모임에 참석시키지 않는 등 마을 공동체원으로서의 자격을 정지토록 하였다. 김홍득은 전통적인 상업관 위에 서서 무본억말(務本抑末)’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권농은 선초 이래 늘상 강조되어 온 것이나 이 보은향약에서 권농을 중시하는 것은 당시 상품화폐경제의 침윤으로 농민의 토지이탈이라는 심각한 농촌현실에서 나온 것이었다.

둘째로 김홍득은 농민들이 유리유망하는 것은 군역환곡사채 등의 과도한 부담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이들을 안집(安集, 편안하고 화목하게 함)시키기 위한 방도로 관에서 종자를 나누어 주는 등 관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셋째로 농가를 부유하게 하는 데는 집집마다 암소 한 마리,, 돼지, 닭을 기르도록 하였다. 농사에는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으며 축력의 이용이 절대 불가결하였다. 그러므로 농우축양(農牛畜養) 역시 권농정책의 하나로 중요시되어 농정정책에서는 농우를 확보하는 것 또한 과제가 되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도우(屠牛)하는 폐단을 엄격히 다스렸으며 소가 없는 자는 서로 빌려 주어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하였다.

넷째로 근래 풍습이 일손을 얻으려고 10여세 어린 아이에게 20여세 되는 며느리를 짝지어 부부생활도 할 수 없고 그 중 음녀들이 추행을 저지르는 일이 많으니 혼사에는 반드시 나이가 맞도록 하라고 당부하여 다른 향약에서는 볼 수 없는 그 당시의 폐습을 상세하게 지적하고 있다.

다섯째로 환과고독자(鰥寡孤獨者, 늙어서 아내가 없는 자, 늙어서 남편이 없는 자, 어려서 부모가 없는 자, 늙어서 자식이 없는 자)폐질자(廢疾者)들은 관에서 구휼케 하고, 나이 30이 넘도록 혼인을 못한 남녀는 마을에서 서로 권면하여 성혼토록 하고, 그 중 가난하여 결혼을 못한 자는 관에서 도와 혼수를 장만할 것 등을 일일이 권장하였다. 환과고독자를 무휼하는 일은 향약 이외에도 목민관의 기본임무로 이들에게 대동전세(大同田稅)를 감해주는 등 각별히 보호하였다. 온 집안이 전염병에 걸려 농사를 못 지으면 마을에서 일꾼을 내어 농사를 대신 지어 주도록 하여 상부상조를 강조하였다. 또한 이 같은 상부상조하는 관습은 향약 이전의 전통사회 생활공동체로서의 촌계에서 나온 것이다.

여섯째로 혼상시 상하 모두 검소에 힘쓰고 사치의 폐풍을 없애도록 하여 당시 사치 풍조를 경계토록 하였다.

일곱째로 살림에는 절용이 제일인데 우민이 수입을 소비를 조절할 줄 모르고 목전의 포식을 일삼아 내일의 굶주림을 모르니 마을에서는 서로 경계하여 절용에 힘쓸 것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것 역시 농민생활의 생생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여덟째로 나무심기를 권장하여 상하를 막론하고 봄, 가을에 걸쳐 대추옻나무 등을 30주씩 집 앞이나 밭 또는 부모 묘 앞 좌우에 심도록 하고, 이를 어기거나 남의 나무를 베는 자는 동리에서 처벌하였다.

 

주현향약의 시행성패 여부 전적으로 수령에 달려 향약의 피해는 도적보다 심하다

 

조선시대에는 국가재정과 농민의 생활은 농업생산에 의존하였다. 지배계층은 낮은 생산성에 맞게 농민들로 하여금 노동력의 재생산이 가능한 범위에서 자족케 하려고 하여, 농민들에게는 항상 검소와 절약이 생활의 미덕으로 권장 강조되었다. 그러나 상품유통경제가 자급자족적인 농촌사회에 침투하여 농민들에게 소비와 사치사행심을 조장하여 폐농하고 장사로 나가는 인구가 늘어나고 고리대 자본마저 침투하여 농민살림을 파탄으로 몰아넣는 상황에서 정부 당국자가 취할 수 있는 방도는 중농정책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과도한 부담의 부세로 농민들의 유망현상에서 목민관으로서는 농민들을 농촌에 안집시켜 최소한의 농촌경제를 유지하기 위한 방도로 권농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주현향약의 시행 여부는 전적으로 수령에게 달려 있었다. 수령이 바뀌면 신관의 협조와 적극적 지지가 있어야 계속 실시할 수 있으므로 신관사또가 부임하면 예장 이하는 신관에게 취지를 설명하고 신관이 거부하면 약문은 무용지물이 된다고 하여 주현향약의 계속 여부는 수령에 의하여 좌우되고 있었다. 실상 주현향약의 성패는 수령의 현부(賢否)에 달려 있으므로 중앙정부에서는 향약의 본뜻을 잘 실행하는 곳은 이를 장려하되 그렇지 못한 곳은 강권할 필요가 없다고 하여 향약시행에 신중한 면을 보이고 있었다.

정약용의 목민심서에서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다산은 수령 중에 뜻만 높고 재주는 부족한 자들이 향약을 행하니, 향약의 피해는 도적보다 심하다. 토호와 향족을 집강으로 임명하고 임명을 받은 자들은 자칭 약장이나 헌장이라 하면서 그 밑에 공원직월 등을 두어 향권을 멋대로 하고 백성들을 위협하여 술을 빼앗아 먹기도 하며 곡식을 거두어들이기도 한다라고 하면서 토호와 간민(奸民)들이 함부로 향약의 권리를 잡도록 버려두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주현향약은 중앙 위정자들의 상소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귀천 노주(奴主)의 명분이 흔들리고 상한이 양반을 능욕하고 간도들이 지주를 쫓아낼 묘방을 도모하는 등의 상황, 즉 사회신분제와 지주전호제에서 나타나는 봉건사회 내부의 신분계급적인 모순을 강상인륜의 차원에서 인식하고 이에 대한 해결을 향약시행을 통한 상천에 대한 교화에서 찾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18세기 중후반 농업생산에서 광작으로 요호부민(饒戶富民, 부농)들이 출현하고 신분제가 흔들리며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하여 증세적 질서의 한계가 노정되는 상황에서 주현향약을 변화에 대한 방파제로서 기대하여 향촌민을 통제할 구체적인 향촌통제책으로 내세울 밖에 없었으나 그 효과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
  • ‘공공성(公共性)’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연구세미나95]
  • 문산면 주민자치회, 주민 지혜와 협의로 마을 발전 이끈다
  • 제주 금악마을 향약 개정을 통해 보는 주민자치와 성평등의 가치
  • 격동기 지식인은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연구세미나94]
  • 사동 주민자치회, '행복한 끼'로 복지사각지대 해소 나서
  • 남해군 주민자치협의회, 여수 세계 섬 박람회 홍보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