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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게임과 라캉의 ‘언어라는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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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게임과 라캉의 ‘언어라는 욕망’
  • 이관춘 연세대 객원교수
  • 승인 2021.11.29 14: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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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춘의 마을·자치·교육]
'오징어게임' 포스터. 사진=넷플릭스
'오징어게임' 포스터. 사진=넷플릭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은 누구일까? 미국 MIT 두뇌인지과학부 연구원들의 심층조사에 의하면 아마존의 주인으로 살고 있는 피다한(Pirahas) 사람들이다. 그들은 정글과 마이사 강을 누비며 자신들만의 언어로 웃고 사랑하고 자유롭고 유쾌하게 살아간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소유’ ‘걱정’ ‘미래’ ‘행복이란 단어가 없다. 다니엘 에버렛 교수의 아마존 탐험기인 잠들면 안 돼, 거기 뱀이 있어에 나오는 내용이다. 가장 행복한 사람들에게 행복이란 말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반면에 소확행, 행복, 욕망이란 말과 함께 살면서 정작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주민으로서의 의 행복, 행복한 주민자치 실현의 출발은 바로 이 물음에서 시작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우리 모두는 좋은 삶(well-being) 혹은 행복을 지향하며 살아간다. 행복해지기 위한 조건은 개인마다, 그리고 행복을 말하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그 중 공통적으로 제시되는 처방전이 있다면 욕망에 관한 것이다. 자기계발 강사들은 자신의 욕망에 집중하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하지만 욕망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다.

이성과 품격을 내세우는 사람들은 욕망이란 말 자체를 불편하게 느끼기도 한다. 실제로 동서양의 전통적 사유방식에서 욕망은 이성과 대척점에 놓여왔다. 종교적으로 욕망은 극복의 대상이자 심지어는 악의 원인으로 간주된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욕망은 자신만의 비밀스러운 어떤 내적인 충동을 연상시킨다. 성적인, 물질적인, 출세지향적인 욕망도 있지만 지금의 자신을 넘어서려는 의지, 주도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며 창조하려는 의지도 욕망이다. 내가 삶의 주인이 되는 실질적인 주민자치를 실현하려는 의지 역시 욕망이다.

플라톤의 에로스에서부터 쇼펜하우어의 의지, 니체의 권력의지, 라캉의 주체 등은 모두 욕망과 맞닿아 있다. 이렇게 볼 때 욕망은 인간의 본성이며 철저히 나만의 것이다. 따라서 욕망이 없는 삶은 없다. 욕망의 노예가 되면 삶이 구렁텅이에 빠지기도 하지만, 반면에 욕망의 주도권을 내가 가질 때 삶은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다. ‘문제는 욕망이 무엇인가?’이다. 아는 듯 모르는 욕망의 이해가 바로 나의 행복, 진정한 주민자치를 위한 출발이다.

 

오징어게임의 숫자와 욕망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이 전 세계적으로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오징어게임욕망의 일단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정신분석학자 라캉(Lacan)이 강조하는 개개인으로서의 의 실존적인 욕망의 심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극중 인물 황준호가 형을 찾으러 고시원으로 찾아가는 장면에서 자크 라캉의 '욕망이론이란 책이 책상 위에 슬쩍 비쳐지기도 한다.

먼저 결론부터 말해보자. 라캉의 욕망 해석은 일반적으로 막연히 생각하는 욕망 개념과는 다르다. 라캉의 욕망은 무의식과 언어에 대한 선 이해를 전제로 한다. 라캉의 중심논제는 무의식이 언어와 같이 구조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무의식을 구성하는 것이 언어이기에 무의식 자체가 언어라고 본다. 그런데 주체가 만들어지는 상징계에서의 언어는 본질적으로 타자의 언어이기에 무의식은 결국 타자(Other)의 담론이 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언어 속에서 태어나고 자신의 욕망을 표현하기 위해 말을 배우는데, 그 말은 나를 둘러싼 사람들의 담론이자 욕망이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내재화하고 변형시키게 된다. 따라서 라캉은 개인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라고 단언한다. 그런데 나의 욕망과 타자의 욕망 간에는 항상 분리(separation)가 일어나며 이 분리는 본질적으로 결핍, 결여(lack)와 관계된다. 따라서 욕망은 결핍된 어떤 것의 발현이며 충족될 수 없는 것이다.

오징어 게임에서 먼저 주목할 점은 456이란 숫자, 즉 기호이다. 주인공 기훈이 경마장에서 어렵게 딴 돈이 456만원이며, 딱지치기 끝에 참가하게 된 게임의 최종 상금도 456억원, 게임 참가자도 456, 그리고 기훈의 등번호도 456이다. 빚에 떠밀려 참가한 사람들이 각자의 번호로 불리면서 456억 원을 우러러보며 목숨을 담보로 한 게임에 참가하는 모습에서, 라캉이 강조하는 욕망의 원천으로서의 언어 기호의 의미를 쉽게 떠올릴 수 있다.

라캉에 따르면 언어가 욕망의 전제 조건이자 욕망을 지속시키는 근본 원인이 된다. 왜 그럴까? 상징계인 현실의 본질은 소쉬르의 철학대로 언어자체가 아닌 언어적 구조이기 때문이다. 언어적 구조의 한계로 욕망이 생기는 것이다. 소쉬르는 언어를, 대상을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기호체계로 보는 전통적 시각을 뒤집는 혁명을 일으킨다. 대신, 기표와 기의의 관계는 자의적이며 사회적 관습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한 예로 벚꽃이란 말을 하면 우리 모두 벚꽃이란 개념을 떠올리지만 그 이미지들은 실제로 물질세계의 특정 벚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벚꽃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벚꽃단어[기표, 시니피앙]가 가리키는 것은 실제 벚꽃인 사물’[기의, 시니피에]이 아니라 단지 벚꽃이란 개념일 뿐이다. 이 둘의 관계는 어떤 필연성도 없다.

따라서 라캉은 스피노자의 말을 인용해 말한다. “개는 짖어도 개라는 낱말은 짖지 않는다.” 실제의 개[기의]를 개라는 이름[기표]으로 부른 것은 순전히 우연일 뿐 얼마든지 다른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는 집에서는 엄마인데 직장인 음식점에서는 이모가 될 수 있다. 주목할 점은 이 경우 이모[기표]’[기의]’ 사이에 소외와 균열이 발생하며, 이런 균열을 가져오는 언어가 나의 무의식의 핵심을 구성하게 된다.

이모란 언어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사회[상징계]에서 각자 각자의 주체는 타자의 기표[언어]와 동일시되고 기표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은 앞서 말한 대로 균열과 소외를 가져온다. 라캉에게 소외는 운명적인 것, 극복 불가능한 것이다. 일상에서 언어가 균열과 소외를 가져오며, 그 결과 욕망이 생성되는 사례를 최근의 광고 카피를 통해 좀 더 살펴볼 수 있다.

 

잠이 와? 나 김태희인데?

어느 기업의 천연 라텍스 침대 광고 카피이다. 언제인가부터 시작된 이 짧은 광고 에피소드가 TV를 틀지 않아도 눈에 밟힌다. 광고에 어울릴법한 화사한 미모의 김태희와 속 편하게 숙면을 취하는 의 모습을 번갈아 비추며 광고는 잠이 오냐고 묻는다. 부부광고 영상답게 이번엔 역시 멋진 모습을 어필하면서, 편안하게 잠든 김태희의 모습을 보며 묻는다. “잔다고? 나 비인데?”

드라마 오징어게임에서 보듯 영화든 드라마든 의미 없이 사용되는 언어는 없다. 특히 매우 짧고 제한된 시간 안에 소정의 마케팅 목적을 달성해야 하는 광고 언어는 소비의 욕구나 소비자의 욕망을 부추기는 의미 전달을 위해 사투를 벌인다. 그런데 본 광고가 전혀 의도치 않았을 광고 언어에서 라캉이 말하는 욕망의 전제로서의 언어의 구조를 포착할 수 있다.

위 광고 언어의 핵심어가 잠이 와?’라면 광고언어의 의미는 라텍스 침대이다. 광고는 제 아무리 김태희나 비가 곁에 있어도 편안히 잠이 올 만큼 침대가 편하다는 것을 어필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하지만 라캉의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그 언어의 의미는 다르다. ‘잠이 와?’란 언어의 의미는 침대가 아니라 욕구혹은 욕구 너머의 욕망이다.

라캉의 관점에서 김태희의 잠이 와?’는 기표(시니피앙)이다. 문제는 기의(시니피에)이다. ‘잠이 와?’란 기표가 정말 졸려서 잠이 오는지, 그 생리적인 팩트[기의]를 묻는 것일까? 분위기로 봐서는 아니다. 그런데 눈치코치 없이 그런 질문을 상대가 팩트로만 받아들이면 질문 한 사람은 복장 터질 노릇이다. ‘내 말은 그게 아니란 말이야란 불만과 균열, 소외, 즉 기표와 기의 간의 균열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라캉은 기표 아래로 기의가 늘 미끄러진다고 말한다.

기의가 늘 미끄러지는이유는 언어의 구조에서도 기인한다. 통사론적으로 볼 때 각각의 단어와 기호의 의미는 문장에서 그 단어의 전후에 배치된 단어들에 의존한다. 광고 문장인 잠이 와? 잔다고? 나 김태희 인데?’를 유심히 살펴보자. 이 문장의 각 단어들은 1)같은 문맥에 사용될 수 있는 다른 가능한 단어들과의 차별을 통해서, 그리고 2)전체 문장 구조에서 그 단어가 위치된 자리에 의해 그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우선 잠이 와?’는 다른 단어로 대체될 수 있고, ‘나 김태희 인데?’나 엄마인데?’로 치환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단어들을 바꾸어도 뜻은 통하겠지만 문장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다. 졸려서 눈을 비비는 아이에게 잠이 와? 나 엄마인데?’라는 문장은 얼마나 생뚱맞은가. 또한 광고의 문장을 보면, 그 문장의 의미가 단어들을 특정 방식으로 조합함으로써 생성됨을 알 수 있다.

나 김태희 인데?’를 맨 앞으로 재배열한다면 여전히 각각의 단어들을 이해할 수는 있겠지만 메시지 전달의 의미와 효과는 크게 떨어진다. 소쉬르가 말하는 통합축(syntagmatic axis)이란 바로 이를 말한다. 즉 말의 의미를 갖도록 하려면 반드시 통사론적으로 옳은 방식으로 조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잠이 와?’ 광고언어의 의미는 그들이 사용하는 단어들과 배제하는 단어들에 의해서, 그리고 전체 구조 내에서 그 단어들의 위치에도 의존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소쉬르에 의하면, ‘잠이 와?’는 단지 잠이 오는 생리적 현상의 유무만을 묻는 게 아니다. 이 말의 본래 의미는 이라는 기호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체계 안의 기호들, 잠이 와?’ ‘잔다고?’ ‘나 김태희인데등의 기호들 사이의 관계 자체에 존재하는 것이다.

 

욕망, 언어가 잉태한 결핍

그렇다면 욕망이란 무엇인가? 라캉에 의하면 욕망은 기표와 기의 사이의 간극에서 구성된다. 다시 오징어게임으로 돌아가 보자. 드라마의 주인공 기훈은 어릴 적 친구들과 즐겨했던 오징어 게임에서 승자가 됐을 때를 회상하며 말한다. “그 때 그 순간 나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했었다.” ‘행복했었다는 과거형에 주목해보자. 지금은 아니라는 것, 여전히 욕망의 결핍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기훈은 오징어게임이란 제로섬게임에서 승자가 되어 456억 원을 쟁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욕망이 충족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오징어게임에 참가했다는 사실은, 그들 또한 기훈과 같은 욕망과 현재의 결핍을 공유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드라마 시청자들도 지금 이 순간 오징어게임을 하며 산다. 누군가는 명품 핸드백을 게걸스럽게 구입하고, 누군가는 갭 투자로 아파트를 미친 듯이 사들이며, 누군가는 가짜박사라도 얻기 위해 학문적 사기를 치고, 또 누군가는 권력을 이용해 아들 퇴직금으로 수십억 원을 챙긴다. 그렇게 하면 욕망이 채워질 것이라 기대한다. 그러나 착각이다. 욕망은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또 다른 대상을 찾아 욕망의 회로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그렇다면 왜 욕망은 채워지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나의 욕망이 바로 언어로서의 타자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욕망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나에게 영원한 타인일 수밖에 없다. ‘오징어게임에서 징검다리건너기 게임이 시작되자 한 중년의 참가자는 1번을 선택하면서 기훈에게 이런 말을 한다. “저는 평생 한 번도 내 인생을 주인공으로 살아 본 적이 없어요.” 이번만이라도 자신이 주도적이 되어 보고 싶다는 것이다.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마케팅과 광고에 휩쓸리며 타자의 욕망을 욕망할 뿐 자기주체성을 상실한 채 살아가는 의 모습을 대변하는 말이다.

오징어게임의 또 다른 주인공 일남노인의 말은 결핍으로서의 욕망을 극명하게 묘사한다. “자네, 돈이 하나도 없는 사람과 너무 많은 사람의 공통점이 뭔 줄 아나. 사는 게 재미가 없다는 거야.” 돈이란 대상을 통해 재미라는 욕망이 채워질 거라 생각했지만, 돈을 벌어도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남 노인이 또 다른 욕망의 대상으로 여러 게임들을 기획했듯이 사람들은 또 다른 연인을 찾아, 명품이나 승진, 권력 등의 대상을 찾아 끝없이 가고 또 가는 환유(metonymy)를 한다. 명품이나 고가 주택 같은 기표(記表)’에 눈독을 들이며 자신의 욕망을 채워줄 것이라 기대한다. 그럼에도 욕망은 채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노인의 말대로 재미가 없는일상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행복은 욕망의 이해에서 출발

라캉은 욕구(need)와 욕망(desire)을 엄격히 구분한다. 배고픔이나 목마름 같은 욕구는 충족될 수 있는 반면 욕망은 기본 욕구 너머의 충족될 수 없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 욕망은 우리 존재의 핵심에 있지만 그것은 본질적으로 결핍(lack)과 관계된다는 것이다. 나의 욕망이나 타자의 욕망 모두 결핍의 인식에서 형성된다. 따라서 라캉은 (사랑에 대한) 요구(demand)에서 욕구를 충족시켰음에도 남아 있는 차이[잔여분]를 욕망이라 정의한다.

앞서 말했듯이 오징어게임의 주인공 기훈은 게임의 승자가 되어 거액을 챙겼음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결핍을 느끼고 있다. 일남 노인은 늘 재미를 위한 요구를 갖고 살면서 이를 채우기 위해 돈이란 욕구를 충족시켰음에도 돌아오는 것은 재미가 없다는 결핍이다. 라캉의 말대로 욕망은 그 자체로 결여 혹은 결핍이기에, ‘없는 것을 욕망하니 채워질 리가 없는 것이다. 항아리의 본질은 가운데 빈 공간이다. 빈 공간이 없는 항아리는 항아리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본성은 욕망인데 그 욕망의 본질은 결핍이다.

'오징어게임'을 보면서 돌이켜 본 라캉의 욕망은 나의 좋은 삶(well-being)’과 진정한 자치를 위해 필수적인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또한 자신의 욕망에 집중하라는 말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돌아보게 한다. 우리는 다양한 대상을 추구하고 획득함으로서 욕망을 채우려고 한다. 이것이 인간 개개인, ‘의 벌거벗은 자화상이다. 욕망은 좋거나 혹은 나쁜 것이 아니다. 가치중립적인 나의 본성일 뿐이다. 결핍으로서의 욕망은 죽음으로 끝나지만 욕망이 없는 삶은 죽음이다. 욕망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며 욕망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동행하는 삶 자체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과 학습에서 필요한 지혜는 바로, 욕망에 대한 자각과 태도일 것이다. 무엇보다 욕망의 회로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우리의 막연한 생각과는 달리, 라캉에 의하면 욕망은 대상이 없다. 우리는 욕망의 원인과 대상을 혼동하기 쉽다. 그런데 우리의 욕망은 욕망의 원인으로부터 등 떠밀리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욕망은 그 자체가 결핍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욕망이 지닌 오인의 구조를 올바로 인식하여 끝없이 환유하는 욕망의 회로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그럴 때 우리는 지금의 욕망의 대상 그 자체를 즐기며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한밤중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살육행위가 벌어지는 와중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 버는 일에 일생을 바친 '오징어게임'의 노인 일남의 입에서 터져 나온 단발마의 비명은 욕망의 회로를 경고한다. “제발... 그만해!... 나 너무 무서워... 이러다가는... 다 죽어..!”노인의 외침 속에서, 최근 덩치 큰 플랫폼 기업들의 욕망의 회로 속에 수없이 죽어나가는 노동자들의 모습이 스쳐간다. 일남 노인은 그 욕망의 회로에서 벗어난 것일까?

극중 첫 번째 게임인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에서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달려 나가던 일남의 모습이 떠오른다. 어쩌면 그는 돈 같은 대상이 자신의 욕망을 절대 채워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터득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욕망의 회로에서 벗어나 지금의 삶의 게임, 그 과정 자체에 만족하고 더 이상의 욕망의 갈증에 시달리지 않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욕망의 회로에서 벗어나는 길은 나라는 주체가 타자의 욕망에서 분리되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타자의 욕망 안에서 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할 수 있는 지점에서 나는 타자의 욕망과 분리될 것이다. 앞서 라캉은 나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라고 정의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욕망 안에서 나라는 주체가 되찾을 수 있는 잔여분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것을 회복함으로써 우리 각자는 자신을 욕망의 존재로서 또는 욕망하는 주체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으리라 본다. 한 발 더 나아가 욕망의 회로에서 벗어나, 내가 나 자신의 욕망의 주체가 될 때 우리는 비로소 타자에 대한 시선과 의식을 갖게 된다. 상상계의 아이처럼, 욕망의 대상을 실재로 믿고 욕망의 회로 속에 갇힐 때 인간은 보여짐을 모르는 주체로 머물게 된다.

반면에 욕망의 대상이 허상임을 인식할 때 그것을 향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그 집착 속에 타인을 억압하는 욕망이 도사리고 있음을 깨닫는 타자의식을 갖게 된다. 단지 의사소통의 도구로만 생각했던 언어가 나 자신의 무의식과 욕망의 근원이란 라캉의 이론은 에 대한 교육과 학습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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