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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자치의 전신으로서의 촌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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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자치의 전신으로서의 촌계
  • 박경하 중앙대 명예교수
  • 승인 2021.12.21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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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하 교수의 향약이야기⑤

조선시대 향촌사회의 자치규약’. ‘향약의 사전적 의미이다. 여기에 바로 이어지는 것은 덕업상권’‘과실상규’‘예속상교’‘환난상휼등 학창시절 역사시간에 달달 외웠던 향약의 4대 강목이다. 다분히 정형화되고 박제화 된 향약에 대한 인식을 바꿔준 것이 바로 조선시대 기층민들의 상부상조 자치조직 촌계이다. 오늘날 주민자치의 한 원형과 단초를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이에 조선시대 향촌사연구 전문가로 사단법인 한국자치학회 부설 향촌사회사연구소장인 박경하 교수의 향약이야기를 연재한다. 전통시대 향약·촌계를 재조명함으로써 오늘날 주민자치에 주는 의미와 시사점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편집자주]

 

앞서의 연재에서는 향촌의 재지사족들이 사족들간의 자기규제인 향규와, 동단위에서 재지사족의 하층민 지배조직인 동계, 그리고 수령의 향촌통치의 보조적 수단으로 시행한 주현향약을 살폈다. 이 글에서는 민촌에서 상천민들간의 수평적 상호부조 조직인 촌계를 소개하고자 한다.

동계가 사족지배체제의 발전변화와 궤를 같이 하면서 이념을 바탕으로 정착된 조직이었다면, 기층민의 조직인 촌계는 이러한 지배이념 사상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사족의 동계 등에 흡수되는 등 외형적 형태는 변화되고 있었지만 생활공동체로서의 자생적 필요를 바탕으로 오랜 전통을 유지하여 왔다. 조선후기의 촌계의 규모는 보통 10호에서 50호가 80% 이상이었고, 민촌(民村) 대 반촌(班村)의 비율도 대략 2 : 8 정도로 추정 할 수 있다.

마을솟대
마을솟대

 

기층민들의 수평적 상호부조 조직 촌계

 

촌계의 기능은 크게 3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사신공동체(祀神共同體, 축제공동체)로서의 기능이다. 마을 수호신인 서낭신을 공동제사하는 촌제(村祭洞祭堂山祭)를 주관하고 제사 후의 축제로서의 마을굿을 즐기며 거기 따르는 풍물(農樂)놀이에 참여하며 제수(祭需)를 음복(飮福)하는 잔치를 통하여 친목을 다졌다. 현재까지도 전승되는 동제당제류는 바로 촌계에서의 유제이다.

마을제사는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불린다. 주로 호남은 촌제당제당산제, 영남영동에서는 골맥이제, 강원도에서는 서낭제, 기호지방에서는 동제, 제주도에서는 이사제(里社祭)본향당제(本鄕堂祭) 등으로 호칭되었다. 그러나 이글에서는 제의 성격상 집단제의라는 점과 제사가 마을 단위로 행하여진다는 점에서 명칭을 촌제(村祭)’로 통칭하였다.

조선총독부의 촌제(부락제部落祭) 보고서에서 촌제의 제전에 열리는 마을회의의 내용을 보면, 제관을 선정하는 일만 협의하는 것이 아니라 비용의 할당과 갹출문제를 다루기도 하고 제일의 선정, 제물의 준비 등 촌제 집행에 관한 일들을 협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촌제의 제전에 열리는 마을회의는 촌제의 전 과정을 협의하며 결정한다. 그리고 제후에 열리는 마을회의에서는 촌제의 결산 이외에 마을의 도로 교량의 보수, 농사 공동작업에 대한 협의 등 일년 간의 공동사항에 관한 것을 더 많이 다루었다.

이와 같이 지역에 따라 명칭은 다양하지만 마을 자치조직으로서 촌계가 광범위하게 존재하였고 이 조직에서 촌제를 주관하고 촌제 전후에 걸쳐 회의를 열어 촌제 뿐 아니라 마을의 공동사를 협의하여 생활해 나갔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오늘날에도 남아있는 촌제, 마을축제의 모습
오늘날에도 남아있는 촌제, 마을축제의 모습

 

둘째는 생활공동체로서의 기능이다. 촌제 전 또는 후에 촌회를 열어 마을의 임원을 뽑고 동사(마을회관) 도로교량제언 등의 수리, 도정(淘井)이며 사산(四山)의 금양(禁養)을 위한 작업을 협동하여 수행하였다.

또한 남의 논밭 경계를 침범하는 자, 남의 농업용수를 훔친 자, 남의 밭에 방우한 자 등 주민사이의 분쟁을 조정징계하고 특히 상장을 중요시하였다. 기타 가뭄 수재 질병 도적 등 환을 당한 자는 동리에서 힘을 모아 도와주고 고아나 노약자를 휼호하고 혼기를 놓친 노처녀의 혼처를 주선하는 데 이르기까지 동리는 공동체적인 우애와 협동의 질서가 뿌리 내리고 있었다.

특히 남을 도울 만 할 때 돕지 않고 방관하거나 남에게 물건 등을 꾸어줄 만한데 꾸어주지 않은 자는 벌 받는 것이 대개의 촌약에서 규정되어 있었다. 그 중에도 힘이 미치는데 남의 환난을 좌시한 자는 비교적 무거운 중벌에 처해지는 것이 예사였다. 이러한 시벌과 선행자에 대한 시상 등 상벌의 실시는 촌계의 중요한 기능이었다.

촌계에서의 공동체적 규율의 엄격성과 경제적 관계를 다음의 담양의 동계에서 잘 알 수 있다.

 

. 타관 사람이 본 마을에 이사를 오거나 그 집을 매점할 때는 그 호에 해당된 기본금 1()을 이약(里約)에 납부하여야 하고 혹 그 돈을 내지 못할 때는 매년 식리(利殖)조로 자기가 부담할 일.

. 마을에 혹 상사(喪事)가 있은 즉 이약(里約)에서 돈 다섯 돈씩 부의(賻儀)할 일.

. 마을 돈을 쓰고 혹 도망하거나 갚지 못할 때는 그 일가 친척된 사람이 그 돈을 갚아야 할 일.

. 만일 마을에서 출역(出役)이 있으되 이를 이행하지 않는 사람은 별도로 속전(贖錢)을 받아 후에 폐단을 막을 일.

 

이 같은 경제적 문제에서 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의 윤리 강상에도 엄한 제재가 따랐다. 온천지역에서는 집산하는 사람이 많아서인지 이른바 난법패상(亂法敗常)’이 많았던 모양이다. 수안보온천이 있는 <온전동동규(溫井洞洞規)>에는 남녀유별을 지키지 않고 불경타인지처(不敬他人之妻)’하는 남자는 태 30, ‘불경타인지부(不敬他女之夫)’하는 여자인 경우 가정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죄로 그 남편을 태 30에 처하고 있으니 불경이란 내외 안하고 친절하게 구는 것을 말한 것으로 온천지인 만큼 사고방지를 위해 특히 남녀유별을 강조하고 있다.

촌계의 집회소로 전라도에 있어서는 모정(茅亭)을 들 수 있다. 모정은 마을공동체적 산물로서 자치적 집회소로서의 기능을 하면서 공동체의 사회통제, 생산적 기능을 담당한다. 또 수도작 공동노동인 두레를 관장하고, 종교적 기능으로서는 정자나무로 상징되는 마을공동체의 정신적 지주로서의 역할을 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모정은 농업노동조직인 이른바 두레의 조직 및 운영과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다. 그러므로 아예 모정을 농정혹은 농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농기, 풍물 및 두레 성원의 의복을 보관하고 두레먹이는 곳으로서 하루의 피로를 푸는 장소이자 노동회의가 열리는 곳이 모정이었다. 때로는 당산굿이 열려지는 실제적인 신성공간으로도 사용되었으니, 모정은 곧 공동집회, 공동노동과 결부된 공동휴식, 오락 및 공동제전의 장소였다. 동시에 어떤 곳에서는 마을의 자치재판소로서 덕석모리뭇매마을추방훈계 등 제재를 결의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같이 촌계는 마을구성원간 상호부조상호규검하는 생활공동체로서 기능을 하였다.

어촌마을의 축제 모습
어촌마을의 축제 모습

 

축제생활노동공동체로서의 촌계의 역할

 

촌계의 세 번째 기능으로는 노동공동체로서의 두레를 들 수 있다. 촌계에서는 노동공동체로서의 두레를 조직운용하여 이앙법(移秧法)에서 요구되는 집중적인 노동력 수요에 적응하였다. 두레는 기본적으로 마을 단위의 조직이었으며 지주층의 참여와 간섭을 배제하는 노동조직이었다.

촌계에서 두레를 주관하였음은 두레의 모임일자가 정월 대보름과 7월 백중(百中)을 전후하는 시기로 촌계에서 주관한 촌제 치제 시기와 거의 일치하고 있다. 동계 농한기인 정월 전후는 장기적 농한기로서 농업노동이 실제적인 휴식을 취하는 시기이며 한해 농사를 준비해야 하는 신년이니, 이는 곧 1년 농사의 풍족한 수확을 기원하는 유감주술의 생산의례가 열리는 시기였다.

촌계의 공동노동은 농사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촌계의 공유산림(共有山林)이 있을 경우는 공동벌목을 하여 촌계 운영의 비용으로 하였다. 1819년의 담양의 사례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혹심하도다. 갑을(甲乙) 양년(兩年)의 거듭 흉년이여, 오직 우리 조그마한 마을이 능히 굶주리고 모든 일을 이겨낼 수 없으며 마을 시장(柴場) 또한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지 못하니 재정은 탕진하였으되 수렴할 수도 없고 각기 마음대로 방자하여지며 마을 모양이 형편없으니 이는 입술이 없으면 이가 차가운 것 같으므로 이에 있어 개탄한 지 오래였도다. 이제 용임(傭賃, 공동노동)하여 특별하게 돈 여덟꿰미 여덟냥을 마련하였으니 이는 집집마다 수렴한 것이 아니요 서로 동심협력한 공동물건이로다.”

 

윗글에서 보는 것처럼 촌계에서 공동노동을 하여 모은 돈을 공동기금으로 쓰고 있다. 이러한 촌계의 경우는 그 조직의 주기능을 내세워 송계(松契)’라고도 하였다. 송계의 조직과 운영도 자율적 성격을 띠며 지연적 관계를 중심으로 조직되고 있었던 만큼 상호부조를 통한 주민자치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송계는 전 주민이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하는 공동체적 성격이 강한 조직으로, 수목이 일정하게 성장한 뒤에는 공동으로 입산 벌목하여 수목을 매각하고 그 금액을 동리의 기본 재산의 식리로 동이공유의 비품을 구입하거나 동리의 제자비(동리장과 동임의 보수, 토목비용, 제사비, 집회비)에 충당하였고 동리민의 호세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조선후기 두레는 단순히 농경노동조직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마을에서의 공동노동조직으로 촌계와 일체화된 조직으로 유추할 수 있다. 한편 조선후기 기층민조직으로서의 촌계는 지배층의 향촌통치조직인 주현향약이나 사족의 하층민 지배조직인 동계와 많은 갈등을 가졌다.

사족의 동계에서 뿐 아니라 지방관이 앞장서 시행하는 주현향약에서도 기존의 면을 기간조직으로 운영하는 데서 더 나아가 직접 동계를 하부조직으로 편입시켜 향촌통치를 강화해 나가고자 하였다. 강릉부사 유후조가 시행한 향약의 서문에서 보면 향약계절목은 면마다 있으나 면약보다 촌약을 마련하면 감시를 엄밀히 할 수 있고 효과도 철저할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후기의 촌계는 사족의 동계와 지방관에 의한 주현향약 등의 하부조직으로 흡수 편입되기도 하였으나 끊임없이 기층민의 입장을 반영하면서 그 독자성을 유지하여 왔다. 또한 19세기 중후반 촌계에서의 두레조직이 지배층의 수탈에 저항한 농민항쟁의 일부세력으로서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는 민의 사회의식의 성장과 아울러 끊임없는 저항을 통해 자치성을 확보해 나가는 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마을축제에서 빠지지않은 깃발
마을축제에서 빠지지 않은 깃발

 

기층민 입장 반영하며 독자성 유지해온 촌계, 현대 주민자치의 정신적 가치로 계승해야

 

특히 마을공동체에서의 공유 재산을 통한 자립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촌계에서의 공유지인 공동어장의 공동생산, 공동관리, 공동분배하는 사례가 있다. 오늘의 주민자치회도 공유지(커먼스)를 통한 공동기금 확보와 아울러 각 호의 기본소득의 실현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농촌에서도 촌계의 성격인 송계, 금송계 등에서 마을 뒷산의 공유지를 공동관리하고 수목을 땔감으로 사용하는 경제적 이득을 유지하였다.

자치성, 자율성, 예의, 배려, 소통, 경제적 자립, 복지 등의 협동정신과 규정을 바탕으로 한 전통시대의 상부상조하던 마을공동체의 운영원리는 오늘날 마을과 도시공동체에서의 주민자치적 측면에서 조명해 공동체사업과 마을만들기, 도시재생에 있어서의 정신적지역복지적 차원에서 정책적 시사점으로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의 연구 관점이 주로 향규와 동계를 통한 사족의 향촌지배, 주현향약을 통한 중앙의 향촌통치에 대한 관심과 연구였다면, 이제는 주민자치의 촌계연구에 중심을 두고 조선 후기 기층민의 생활사를 복원 재조명해야 할 것이다. 이를 통해 서로 돕고 상부상조하는 전통시대의 촌계를 현대 주민자치에 정신적 가치로 계승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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