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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한 해를 보내며 다시 묻는 두 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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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한 해를 보내며 다시 묻는 두 글자
  • 이관춘 연세대학교 객원교수
  • 승인 2021.12.23 09: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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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_ 이관춘의 마을·자치·교육

계절은 각기 고유한 색깔과 소리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중 겨울의 색깔과 소리는 어디론가 바삐 향하던 일상의 총총걸음을 멈추게 한다. 12월이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비발디의 바이올린 협주곡 <사계> 겨울’, 겨울의 차가운 색깔과 칼바람 소리는 지나간 봄의 꿈과 여름의 욕망 그리고 가을의 허허로운 풍성함을 일거에 무화시킨다. 모든 것이 멈춘 겨울 들판은 돌아봄이란 마음의 여백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특히 한 해의 마지막 해가 서산을 넘어가는 세모(歲暮)는 흘러간 시간을 반추하는 잔잔한 공간을 선사한다. 오늘 하루를 성찰하듯 올 한 해를 돌아보게 된다.

고통의 무게는 다를지언정 많은 사람들에게 2021년은 인생의 달력에서 지워버리고 싶다는 말이 나올 만큼 힘들었다. 누구보다 사회경제적으로 열악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올 한해의 삶을 견디어 내는 일이 눈물겹도록 힘들었을 것이다. 역사를 돌아보면 자연재해는 늘 무차별적으로 인간을 습격했지만 가난하고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가혹했기 때문이다.

지난 2년간의 힘겨운 시간들이 완전히 끝나도 시원치 않을 터인데 별로 달갑지 않은 위드(with) 코로나라는 말이 여전히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있다. 지워버리고 싶은 현상이지만 어찌 보면 이렇게 부조리한 삶이 인간 실존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삶의 출발이 나의 선택이 아니었지만 대신 인간은 자유롭도록 선고받은존재다. 우리는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통제해야 하는 존재이다. 하지만 나의 삶에서조차 코로나 팬데믹 같은 나 아닌 다른 것들이 중심부를 차지하며 자유를 구속하고 있는 현실이 바로 부조리한 것이다. 합리적 이성을 가졌다는 인간의 세계인식과, 그 이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코로나19라는 실존상황, 이 두 대립항이 공존한다는 게 부조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부조리함 자체를 긍정하고 끌어안을 수밖에 없는 것이 또한 인간 실존의 모습일지 모른다. 정말, 지난해에 이어 올 한해는 우리 삶에서 빼버리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삶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우리를 달랜다. “존재하는 것에서 빼 버릴 것은 하나도 없으며, 없어도 되는 것은 없다.” 그게 인생이다.

 

삶은 톨스토이의 물레방아

모든 것을 긍정하고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지나온 시간 속에서 무엇을 돌아봐야 할 것인가? 이 물음에 결코 잊혀지지 않을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 톨스토이다. 어린 시절 한 번은 읽었을법한 내용이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새로움을 더해 주는 것이 그의 인생론이다. 톨스토이는 책의 시작을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한다. “물레방아를 유일한 생계수단으로 삼고 있는 한 사나이를 상상해 본다.” 우리 모두는 나름의 생계수단을 가지고 있으니 톨스토이는 우리의 삶을 상상해보라는 말일게다. 톨스토이가 상상해 보라는 이야기의 줄거리는 대충 다음과 같다.

물레방아로 밀을 빻는 남자가 있었다. 그는 부모에게 배운 대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일을 했다. 그런데 우연히 물레방아의 구조에 대해 흥미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관찰을 해 보니 물레방아가 결국 둑과 강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발견에 감격하여 모든 일을 그만두고 강에 대한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의 물레방아는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사람들은 그를 보고 당신은 잘못을 범하고 있는 거라 귀띔해 주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강에 관해서만 계속 생각했다. 그리고 마침내 강이 곧 물레방아 자체라고 굳게 믿게 되었다.”

여기서 톨스토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물레방앗간 남자의 목적은 밀을 잘 빻아 좋은 가루를 생산해 내는 데 있다. 이 목적을 잃는다면 그 주인의 생각이 아무리 훌륭하고 아름다우며 탐구력과 창의력이 있다하더라도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고골리의 작품 죽은 혼속에 등장하는 키파 모키예비치가 만일 코끼리가 새처럼 알에서 부화되는 것이라면 코끼리 알의 껍질 두께는 얼마나 될까하는 어처구니없는 것을 계산하는 행동과 다름없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의 인생은 이 남자가 깊이 연구하려고 하는 그 물레방아이다. 인생으로서의 물레방아의 목적은 밀을 잘 빻아 좋은 가루를 생산하는 데 있으며 그것을 가치 있게 만드는 데 있다. 물레방앗간 주인처럼 밀 빻는 일을 제쳐놓고 다른 일을 파고들며 인생을 보낼 수도 있다. 이런 사람은 결코 게으르거나 나태한 사람이 아니다. 현실적으로 부지런하고 성실하며 열심히 사는 사람으로 평가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뭔가 중요한 것을 빠뜨리고 있다.

인적자원개발의 관점에서 볼 때 일을 잘하고 성공적으로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있다. 즉 효과성과 효율성이다. 효과적이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며 효율적이란 일을 경제적으로 하는 것이다. 일은 열심히 하는 데 정작 해야 할 일은 하지 않는 사람은 주위를 속 터지게 한다. 반면 할 일은 하지만 세월아 네월아 하는 사람 역시 복장 터지게 하기는 매일반이다.

하루를 보내고 잠자리에 들기 전 생각해 본다. 오늘 하루 정말 열심히 살았는데 정작 해야 할 일을 빼먹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당혹스러운 일이다. 한 달을, 일 년을 보내고 똑같은 상황을 깨닫게 되면 더욱 당혹스러울 것이다. 하물며 일생을 다 보낸 후 돌아보니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산 덕분에 남부럽지 않은 부와 명성을 얻었는데 정작 밀 빻는일을 빼먹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어떻겠는가?

한 해의 마지막 12월에 톨스토이가 전해준 물레방앗간 주인을 상상해 본다. 삶을 처절하리만치 사랑했던 세속주의자 톨스토이, 그러면서도 청교도적인 금욕주의자의 모습을 보였던 두 얼굴의 톨스토이, 그러기에 누구보다 인간적이었던 톨스토이는 한 해를 돌아보는 우리에게 스스로 물어보라고 말한다. “올 한해 나의 밀 빻는일은 무엇이었나? 나는 나의 밀 빻는일에 성실했는가?”

 

행복의 두 가지 블랙박스

누구에게나 밀 빻는일이 있을 것이다. 삶이 다양한 것만큼 그 일 또한 각양각색일 것이다. 그러나 밀 빻는 일이 다양하지만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목표가 있다. 그것은 곧 좋은 삶’, 행복이다. 그렇다면 사람마다 서로 다른 밀 빻는 일에서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 것인가?

현대 실천윤리학계의 거장인 피터 싱어는 두 가지 행복의 조건을 제시한다. 행복한 삶을 위한 두 가지 블랙박스이다. 그는 시지포스 신화에 대한 미국 철학자 리처드 테일러의 분석을 예로 들어 그 블랙박스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시지포스 신화의 내용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시지포스는 신의 비밀을 인간에게 누설했다는 이유로 저주를 받아 커다란 바위를 언덕 위까지 밀어 올려야 하는 벌을 받게 되었다. 온 힘을 다해 밀어 올린 바위는 언덕 꼭대기에 도달할 무렵이면 시지포스의 기운이 떨어지는 바람에 밑바닥으로 굴러 떨어지게 된다. 그러면 시지포스는 다시 내려가서 그 바위를 끌어올리는 똑같은 노동을 영원히, 영원히 반복해야만 한다. 이 신화는 인간의 삶과 그 삶을 영위하기 위한 일의 무의미성을, 그리고 인간 존재의 무의미성을 처절하게 은유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이런 반복적 일상에서 시지포스가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은 있을까?

철학자 테일러는 시지포스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식으로 운명이 바뀌어야 한다는 독창적 해법을 제시한다. 하나는 아무런 소득 없이 똑같은 바위를 계속해서 끌어올리게끔 하지 말고 시지포스로 하여금 다른 바위를 언덕 위로 올리도록 해서 그 바위들을 이용해 멋진 사원을 짓도록 만드는 것이다. 시지포스는 똑같은 노동의 어려움을 겪지만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와 목적을 갖게 되기에 행복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다른 하나는 신들의 마음이 갑자기 자비로워져서 똑같은 바위를 밀어 올리는 노동은 계속 반복하더라도 시지포스가 그 반복적 행위를 열렬히 좋아하게끔 마음을 뒤집어 놓는 것이다. 갑자기 노동을 좋아하게 된 시지포스가 행복해지는 건 당연지사다.

시지포스의 처지에서 현대인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시지포스와 별반 다를 바 없는 현대인들이 행복할 수 있는 비결이 바로 이 두 가지라는 것이다. 하나는 객관적으로 가치 있는 목적을 위해 일을 함으로써 삶을 의미 있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수동적으로 끌려가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삶을 의식적으로 선택하라는 것이다. 실제로 자신의 일에 의미를 부여하느냐의 여부에 따라 업무의 결과는 물론 만족과 보람을 느끼는 정도는 현격하게 차이가 난다.

다른 하나의 비결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때는 그 일이 일로 생각되지 않는다는 것은 경험으로도 입증된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 성과도 좋고 경제적 부도 따라온다.

미국 스롤리 블로토닉 연구소가 부를 축적하는 법을 연구하기 위해 1500명을 두 집단으로 나누어 조사하였다. 이 조사에서 돈, 즉 경제적인 것에 우선순위를 두고 직업을 선택한 사람을 A집단으로 분류하였는데 전체의 83%를 차지하였다. 나머지 17%는 돈보다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었던 사람으로서 B집단으로 분류하였다. 20년 후 이들 1500명 중에서 정확히 101명의 억만장자가 나왔다고 한다. 과연 A집단의 사람들 중에서 몇 명이나 억만장자가 되었을까? 놀랍게도 단 1명에 불과하였다. 나머지 100명 모두가 B집단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자기계발에 관련된 책들이나 강사들은 자신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일을 해야 성공한다고 목청을 높인다. 그걸 누가 모르겠는가? 그러나 현실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만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리 녹녹하지가 않다. 조사에 따르면 절대다수의 직장인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직무를 택하기 보다는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하는 게 현실이다.

그럼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모두 불행한 것일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다. 가정을 꾸리고 자녀교육을 위해 무슨 일이든 마다하지 않는 많은 부모들도 마찬가지로 행복과 보람을 느낄 수 있다. 자신이 하는 일의 목적과 의미를 알고 보람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일의 의미와 즐거움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좋아하는 일은 아니더라도 그 일의 의미와 목적이 있을 때 그 일은 즐거울 수 있으며, 반대로 즐겁게 일하면 그 일이 어느새 좋아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성공한 많은 기업경영자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 헤매기보다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을 먼저 좋아하라.” 결국 직장에서나 일상에서나 행복의 비결은 즐거움과 의미를 느끼는 데 있다는 말이다.

행복의 블랙박스란 말에 기대했던 사람들 중에는 겨우 그거냐?’고 실망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겨우 그거다. 실제로 인간의 삶에서 이 두 가지 외에 딱히 무엇이 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많은 심리학자들이 행복의 비결로서 공통적으로 제시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버드대 탈 벤 샤하르 교수 역시 행복은 즐거움과 의미가 어우러질 때 찾아온다고 말한다. 영국의 역사철학자인 토마스 칼라일도 행복한 사람은 긍정적 감정과 삶의 의미를 함께 느낀다는 점을 강조한다.

 

소확행이 빠뜨리고 있는 것

 

어린 시절, 읍내 강가에 자리한 성당은 나에겐 고향이었다. 아마도 가난하고 유난히도 추웠던 소년소녀시절을 보냈던 많은 사람들에게 성당이나 교회, 그리고 절은 영혼의 고향이었을 것이다. 특히 그 시절 12월은 나이를 확실히한 살 더 먹는다는 뿌듯함에다 산타의 성탄 선물에 온통 신경이 쓰이면서 마냥 설레던 크고 확실한 행복, 대확행(大確幸)’의 시간들이었다. 이제는 동심의 그 설렘을 불러내기는 어렵지만 대신 행복이 무엇인지를 반추하는 시간의 여유를 갖게 된다. 어린 시절마냥 크고 확실한 행복을 기대할 순 없지만 요즘 화두가 되고 있는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소확행(小確幸)’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소확행은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소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A Small, Good Thing)>에서 따와 만든 신조어라고 한다. 다른 블로그에서는 하루키의 소확행은 팬티를 백화점에서 대여섯 장씩 구매해서 착착 개어두는 것같은 일이라고 소개한다. 그야말로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이다. 글재간이 뛰어난 작가답게 하루키는 남의 소설 제목을 보고 소확행이란 단어를 탄생시켰다. 그런데 소확행의 아이디어가 나온 카버의 소설 원제(原題)<A Small, Good Thing>이란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7세기 영국의 철학자 제레미 밴덤은 해피니스(happiness)를 최초로 사용하면서 즐겁고(pleasure), 좋은 것(good)으로 정의했다. 이를 과거 일본학자들이 행복이라고 정의했는데 아마도 하루키는 이를 본 딴 것인지도 모르겠다.

주목할 점은 밴덤이 말한 행복은 즐거운 것과 좋은 것이며, 카버의 소설 제목이 말하는 행복 역시 소소하지만 좋은 일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좋은 일의 행위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요즘 유행하는 소확행의 의미를 사람들은 소소하지만 즐거운 일로만 생각하고 있다. 시중에 떠도는 소확행의 사례들이 그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대부분이 팬티를 넉넉히 사서 옷장에 개어두는 것이라는 작가 하루키의 정의를 따라하고 있다. ‘일과를 마치고 깨끗한 침대 시트 위에 몸을 뉘는 것’ ‘출장 가는 길, 열차 안에서 스마트 폰으로 영화 보는 것’ ‘좋은 책과 음악 감상하기’ ‘오랜 만에 친구를 만나 가벼운 술 한 잔 하며 이야기 나누기등이다. 소확행이란 단어가 다분히 개인적이며 자기 위주의 소소한 편안함과 즐거운일에 초점을 맞춘 쾌락주의(hedonism)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면에 좋은 일’(good thing)의 의미는 상대적으로 무시되고 있는 것이다. 나에게 좋다는 것은 나에게 의미 있다는 것을 뜻한다. 결국 우리가 말하는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에는 소소하지만 좋은 일, 의미 있는 일을 하는 행복이 빠져 있는 것이다. 내 배 부르고 내 몸 편안한 것은 즐거운 일이다. 허나 사람은 그런 즐거움만으로 행복을 기대할 수는 없다. 남의 배고픈 배를 채워주고 불편한 몸을 가진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 역시 즐거움을 가져다준다. 이런 사람을 우리는 좋은(good)’ 사람이라고 말한다.

 

메리 크리스마스! ‘좋은 일의 행복

한 해가 저무는 세모의 허전함은 비록 의례적일지라도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말이 있어 훈훈하다. 굳이 종교나 신앙을 떠나 성탄절의 축복을 주고받는 인사다. ‘메리(즐거운)’를 강조하는 걸 보면 크리스마스가 전하는 일종의 소확행인 셈이다. 그러나 크리스마스가 전하는 소확행은 세간에 떠도는 그런 행복이 아님은 물론이다. 그런 소확행이라면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을 가진 예수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올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또한 크리스마스의 정신을 기릴 이유도 없을 것이다. 나아가 전 세계 기독교인들이 목숨을 걸고 사수하는 십자가의 구원사적 의미도 실종될 것이다.

크리스마스의 정신은 세상사람 모두가 행복해지는 데 있다. 문제는 그 행복해지는 방법이 자신의 편안과 안락만을 위한 즐거움이 아니라 나보다 못한 어려운 이웃의 편안과 안락을 돌보는 좋은 일이라는 것이다. 세간의 소확행과 크리스마스가 전하는 행복의 메시지가 다른 결정적 차이가 여기에 있다. ‘팬티를 백화점에서 대여섯 장씩 구매해서 착착 개어두는소확행이 아니라 헐벗고 굶주린 사람에게 따스한 속 옷 하나를 구매해 주는행복이 크리스마스의 정신이다. ‘퇴근 후 현관문을 열었을 때 환한 미소로 아빠~”하며 반겨주는 딸아이를 보는소확행에 그치지 않고 병들어 누워있는 가난한 아빠를 곁에 두고 울고 있는 남의 집 딸아이를 도와주는행복이 크리스마스가 전하는 행복의 메시지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한 해를 보내면서 참된 행복의 의미를 성찰하는 것 또한 행복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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