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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약은 살아 있다" 남원 기지방 입암향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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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약은 살아 있다" 남원 기지방 입암향약
  • 박경하 한국자치학회 부설 향촌사회사연구소장(중앙대학교 역사학과 명예교수)
  • 승인 2022.03.17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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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하 교수의 향약 이야기

남원 ‘기지방 입암향약’의 문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듣고, 필자는 작년 9월과 올 1월 두 번에 걸친 사료 조사 및 답사를 통해 이 자료들이 조선후기 향촌사회사 연구를 보완해 주는 문서이자, 현 주민자치에 전통시대 선조들의 공동체적인 삶을 증언하는 귀중한 사료임을 확인하였다.

입암마을 전경
입암마을 전경

입암마을은 남원시 남서부에 위치한다. 기지면(機池面) 입암리(笠岩里) 지역으로 갓모양의 바위가 있어 갓바우 또는 입암(笠岩)이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 때 옹정리(甕井里) 일부를 병합하여 입암리(笠岩里)라 하고 금지면(金池面)에 편입되었다. 1995년 1월1일 남원시, 군이 통합되어 남원시 금지면 입암리가 되었다. 1972년 입동(笠東), 입서(笠西)로 분리되었다.

서쪽은 대강면, 남쪽은 곡성군, 북쪽은 주면과 접해 있다. 풍악산과 문덕봉, 고리봉으로 이어지는 산맥이 면의 서쪽에 남북 방향으로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요천이 면의 서편에 위치하여 남쪽으로 흘러나간다.

지리적 위치를 살펴보면 입동마을은 금지면 소재지로부터 서쪽 방향으로 500m에 있으며 동쪽으로 100m 지점에 전라선 철도가 지나는 옹정역이 있고 동남쪽으로는 창산, 서남쪽으로는 방촌, 서쪽으로는 서매, 북쪽으로는 주생면 도산마을이 각각 인접하고 있다. 입서마을은 금지면 소재지로부터 서쪽방향으로 700m에 위치한 북부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선조 25년 임진왜란 이후 문(文), 지(池), 황(黃)씨 등이 거주하였고, 그 후 박(朴), 신(申), 안(安), 김(金), 엄(嚴), 배(裵)씨 등의 여러 성씨가 정착하여 큰 마을을 형성하였다. 

 

조선후기 향촌사회사 연구 보완 사료
이 마을은 조선시대 1795년(정조 19년, 을묘)에 시행한 향약을 지금까지 시행하고 있어 그 역사적 의미가 상당하다. 필자는 1982년 대학원 석사과정 1차 학기부터 향약 자료를 강독하기 시작하였다. 향약을 덕업상권 예속상교 과실상규 환난상휼의 미풍약속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실제 시행의 목적은 수령은 지방통치책으로, 재지사족은 향촌민의 지배 목적으로 시행한 것으로 천편일률적인 내용이어서 한 10년 연구 나니 더 흥미를 갖기가 어려웠다. 필자가 관심을 갖고 있던 기층민간의 상부상조하던 기층민간의 촌계라는 조직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문헌으로 거의 남아 있지 않아 그 구체적으로 존재양태를 파악하기 어려웠다(박경하, <조선후기 촌계와 민의 존재 양태> 《정신문화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3. 참조)

문헌이 부족한 상황에서 역사민속학적 현지조사의 접근으로 촌계에서의 기능을 크게 ① 마을의 정신적 구심체로서의 정월 대보름 마을굿을 하는 사신(축제)공동체 ② 두레 공동 노동의 노동공동체 ③ 서로 일상생활에서 상부상조하는 생활공동체의 세 기능으로 파악하였다.(박경하, <조선후기 향약의 성격>, 중앙대 박사학위 논문, 1992. 참조)

 
촌계의 세 기능 다 갖춘 입암향약
입암향약이 바로 촌계의 이 세 가지 기능을 다 가지고 있으며 지금도 시행하고 있었다. 향약의 정신뿐만 아니라 경제와 생활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었다. 1795년부터 입암향약을 시행한 조선시대 문서가 1994년 목청촌계의 건물을 재건축하려다 벽에서 이 문서들이 발견되었으나 외부로 알리지 않아 모르고 있었다. 당시 기지입암향약안(機池笠巖鄕約案), 기지방입암촌향약안(機池坊笠巖村鄕約案), 기지입암리계헌(機池笠巖里稧憲), 목청조목안(木廳條目案), 입암사실(笠巖事實), 서암계안(西巖稧案) 등 6건의 향약자료가 발견되었다.

기지입암향약안(왼쪽), 기지방입암촌향약안
기지입암향약안(왼쪽), 기지방입암촌향약안

필자는 이 문서들을 작년 9월 27일 현지에서 확인하여 분석하였고, 올해 1월 18일 주민총회에 참여하여 현재까지의 마을공동체 조직으로서의 현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향약의 공동 전답이 상당하여 회원들이 소작을 하고 세를 매년 납부하였다. 납부된 세 등은 계회시에 사용하였으며, 사용하고 남은 돈은 노비의 명단과 함께 액수가 나누어 기재되었다. 노비 명단 아래에 기재된 금액에 대해서는 향후 연구가 더 필요하다. 액수까지 기재된 문서가 나와서, 촌계의 노동공동체의 경제생활을 계량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촌계 노동공동체 경제생활 파악
서암계안에는 계원인 유사 직책의 호수노명록(戶数奴名錄) 44명을 시작으로 1864년부터 1943년까지(1867년부터 1871년까지 문서는 훼손되었음) 빠짐없이 입금과 출금 내역과 액수, 명단이 기재되어 있다. 조선시대부터 일제 강점기까지의 기록이 남아 있는 이처럼 상세한 기록은 확인한 바가 없는 자료이다. 이 내용은 동계의 경제적 운영의 규모를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총독부가 토지조사 및 정리 시 가장 기층단위인 동에서의 공유토지, 공유재산을 그대로 유지토록 했는지 또는 흡수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사료이다.

1894년에 신분제가 폐지되지만, 계안에 따르면 1903년부터 비로소 노비의 이름에 성씨가 기재되기 시작한다. 생활사적 측면에서도 실제적 삶을 확인하는 사료가 된다. 일제시기에도 이 향약이 유지되다가, 해방 후 공동 전답은 토지개혁으로 소작하던 사람들에게 유상분배 되었다. 해방 후 조직의 명칭은 ‘이동(里洞)협동조합’으로 유지하다가 1971년 ‘새마을회’로 개칭하고 지금도 이 명칭을 사용한다.

 

자율적 자치 복지의 이상적 사례
현재는 150여 가구가 살고 있으며, 공동 토지를 임대하여 연 1,500만의 수입을 올려서 한 가구당 3만원의 배당을 하기로 총회에서 결정했다. 금액은 얼마 안 되나 다른 부분의 복지를 자율적, 자급자족으로 하고 있었다. 이 회의 유동자산은 결산서에 따르면 약 2억5천여만 원이 있고 부동산이 상당수 있어 사제 맥주 공장, 카페, 공동 정미소 등에 임대를 하고 있다. 전 가구가 가입되어 있고 회비도 걷지 않는다. 이 회 산하에 노인회, 청년회, 장학회, 포도작목반 등이 있다. 장학회에서는 장학금 일백만원을 지급했으며 작목반에서는 포도 등 작물을 생산한다. 외부의 도움 없이도 살아가는 자생적 조직이었다. 현 새마을회를 주민자치회로 바꾸면 자율적 자치 복지의 이상적인 주민자치회의 사례가 될 것이다.

 

사진 제공 = 박경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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