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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의민주주의와 고대 아테네의 중우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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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의민주주의와 고대 아테네의 중우정치
  • 이관춘 연세대학교 객원교수
  • 승인 2022.03.21 10: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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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춘의 마을·자치·교육

걱정 마, 나는 나를 잘 알아!’ 죽마고우는 아니지만 누구보다 마음이 통하는 친구가 전화를 끊기 전에 걱정하는 나에게 던진 말이다. 요즘 잘 나가던 사업이 갑자기 어려움에 봉착한데다 집안에 큰 우환마저 겹쳐 얼굴에 늘 수심이 가득한 상태였기에 어떤 위로의 말도 건네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는 오히려 내게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한다. 애써 밝은 음성으로 대화는 끝냈지만 그에 대한 안타까움과 걱정만은 여전히 겨울 안개처럼 내 주위에 머물고 있다. 매사에 신중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니 자신을 잘 안다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하지만 요즘 같은 선거철에 난무하는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보면서 사람들은 과연 자신을 잘 아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새삼 고개를 들게 된다. 똑같은 인물, 동일한 현상에 대한 유권자들의 해석과 평가가 극과 극을 달리는 것을 보면서, 이성을 갖춘 인간의 합리적 사유와 자기평가 능력에 대한 근대철학의 장밋빛 전망이 너무도 허접함을 깨닫게 된다. 게다가 때마침 러시아에 침공을 당한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서글픈 눈빛을 TV화면을 통해 접하면서, 인간의 이성적인 자기인식은커녕 아도르노가 비판한 계몽의 지칠 줄 모르는 자기파괴란 우매함에 분노하게 된다.

 

모르는 것이 힘이 된다면

많은 사람들은 자기를 안다고 생각한다. 그것도 아주 잘 안다고 믿는다. 소비자의 트렌드를 분석하는 전문가들은 이 시대 소비자의 특징은 나를 잘 안다고 생각한다는 것”(2019 트렌드 노트)이라고 말한다. 나 역시 그랬었다. 그런데 삶의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물론이고 무엇을 안다고 말하기가 영 조심스러워 진다. 특히 요즘처럼 대통령 선거라는 국가 중대사를 놓고는 더욱 그렇다. 후보자들에 대한 정치권의 아전인수식 평가나 비판이야 그렇다 쳐도 유권자인 시민들이 동일한 인물, 동일한 사건에 대해 의견이 극명하게 대립되는, 어찌 보면 당연한 현상을 목격하면서, 결국 인간 됨됨이를 치열하게 분석한 철학자들의 결론에 동의하게 된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도덕의 계보첫 문장을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여기에는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우리는 한 번도 자신을 탐구해 본 적이 없다.” 정말 그렇다. 사람들은 막연히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할 뿐 자신을 탐구하지는 않는다. 니체는 단언한다. “인간이 배워야 할 학문의 전부는 너 자신을 아는 것이다”(아침놀). 인간에 대한 니체의 시각은 소크라테스나 플라톤과 달랐지만, 너 자신을 아는 것이 삶과 배움의 전부라는 점에서는 서로가 일치했던 것이다.

중세를 지나 르네상스를 거쳐 근대에 들어서면서 철학의 관심은 너 자신을 아는 것에서 아는 것자체로 무게가 이동하였다. 널리 알려진 영국의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의 아는 것이 힘이란 명제가 이를 보여준다. 지식 그 자체가 힘이며 인간의 지식과 힘은 일치한다는 강력한 메시지다. 17세기 과학혁명이 불어 닥치면서 실험적 방법과 귀납적 사유방식이 요구되는 시대였음을 감안하면 지식 자체가 힘이라는 주장은 너무도 당연한 말이었다. 주목할 점은 베이컨이 말한 지식이란 라틴어의 쉬엔시아(scientia)’로서 실험적이며 귀납적 방법에 의해 입증된 과학적 지식이란 점이다. 영어로 과학을 뜻하는 사이언스(science)’의 어원이 쉬엔시아란 점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베이컨이 말한 과학적 사유방식의 확대는 경험론을 낳고 현재까지의 과학의 발전을 가져왔다. 따라서 과학적 지식의 관점에서는 아는 것이 힘이다.

하지만 민주사회에서는 무지가 힘이 되는 아이러니가 심심치 않게 발생한다. 물론 그 힘의 결과는 다르다. 디스토피아 소설인 1984에서 조지 오웰은 무지(ignorance)가 힘이란 명제를 내 놓는다. 소설의 내용과는 관계없이, 실제로 인류역사는 대중의 무지가 힘을 발휘하는 경우가 적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 결과 과학적 지식은 과학의 발전을 가져왔지만 대중의 무지는 언제나 인간다운 사회발전과 진보를 가로막는 어리석은 장애물이 되어왔다. 대표적인 사례가 중우(衆愚)정치다.

플라톤이 한탄한 중우정치

화가인 자크 루이 다비드의 1787년 작품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보면 인상적인 장면이 눈에 띈다. 이 작품은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드는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신을 부인하고 아테네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는 이유로 고소를 당해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작품 속 인물 묘사가 무척이나 흥미롭다. 70세가 넘은 소크라테스는 침대에 걸터앉아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다른 손으로 독배를 막 잡으려 하고 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위풍당당하고 힘이 넘친다. 요즘말로 젊은이의 몸짱과 다를 바 없다. 반면에 독배를 건네주는 사람은 차마 얼굴을 마주할 수 없어서인지 고개를 돌리고 있고, 마지막까지 망명을 권유하던 친구인 크리톤은 애걸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 더 인상적인 것은 플라톤의 모습이다. 그는 스승을 차마 볼 수 없었던지 침대 끝에 돌아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스승을 죽음에 이르게 한 어리석은 아테네 시민들(衆愚)에 대한 분노와 절망감 때문일까? 독배를 받아드는 스승보다 오히려 더 폭삭 늙은 노인의 모습이다.

흔히 고대 그리스 아테네가 민주주의의 꽃을 피웠다고 하지만, 그 민주주의 이면에는 늘 중우정치의 어두움이 도사리고 있었다. 어찌 보면 민주주의는 태생적으로 중우정치를 잉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중우정치란 말 그대로 다수의 어리석은 민중이 이끄는 정치다. 어리석은 민중의 특징이 바로 나는 나를 잘 안다는 확신이다. 자신은 칸트가 말한 계몽된 인간으로서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하며 행동한다고 믿는다. 자신의 생각이 실은 남의 생각임을 인식하지 못한다. 편향된 언론의 프리즘에 갇혀 있으면서 자신은 객관적으로 세상을 내다본다고 착각한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시민들에게 너 자신을 알라!’고 절규한 것은 바로 인간의 이러한 어리석음을 성찰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성찰이 쉽지 않은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지, 결국 소크라테스의 성찰은 광야의 외침으로 끝났다. 따라서 플라톤은 아테네 몰락의 원인이 중우정치의 병폐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역설한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기원전 485년 경 아테네의 탁월한 장군이자 정치가인 아리스티데스는 공정한 사람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탁월한 능력과 더불어 공정과 정의를 중시하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정치적인 이유로 도편 추방을 당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추방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이름을 각자 도편에 쓰고 있었다. 그들 중 글을 쓸 줄 모르는 농부가 자신의 옆으로 지나가는 사람에게 도와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내 도자기에다 아리스티데스라는 이름을 써 주시오. 나는 그 자가 추방되길 바라오.” 도움을 요청 받은 사람이 물었다. “아리스티데스가 당신에게 무슨 피해라도 입혔소?” 그 농부가 대답했다. “그런 일은 없소. 나는 개인적으로 그를 알지도 못하오. 하지만 사람들이 그를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불러대는 소리를 들으면 괜히 짜증이 난단 말이오.” 그는 더 묻지 않고 농부가 원하는 대로 도자기 조각에 아리스티데스라고 쓰고는 사라졌다. 그가 떠난 뒤 농부는 다른 농부와 대화하게 되었다. “방금 당신을 도와준 사람이 누구인지 아시오?” “내가 알게 뭐요.” “저런, 그가 바로 아리스티데스라오.” 이들에 의해 추방당했던 아리스티데스는 페르시아의 침공이 시작되자 다시 아테네로 돌아올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장군으로 선출되어 테미스토클레스를 도와 살라미스 해전을 승리로 이끄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진정으로 정의롭고 공정하며 위기에 국가를 이끌어갈 능력이 출중한 정치인이 중우정치에 희생양이 되었던 것이다.

 

대통령 선거가 의미하는 상식

25백 여 년 전 아테네 민주주의 속에 잉태된 중우정치는 21세기 대의민주주의에서도 여전히 진행형이다. 어쩌면 민주주의 역사가 지속되는 한 근절되지 않을 민주주의 태생적 한계일지도 모른다. 많은 학자들은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들이 민주주의 운영방식과 관련하여 정치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데 동의한다. 대의 민주주의는 여러 가지 장점에도 불구하고 시민 참여의 제한, 정치적 소외감과 무관심은 물론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포함한 올바른 대표 선출의 실패로 야기되는 다양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강조한다. 대한민국 헌법에서 명시한대로 모든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민주주의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다. 하지만 말이 그렇지 실제로 주인으로서 권리를 행사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현실적으로 선거밖에 없다. 자신을 대신할 대리자를 선출해 나라의 일을 담당할 사람을 뽑는 것이다. 당연히 선거과정에서 선거의 공정성과 선거의 자유가 온전히 보장되는 것이 중요하지만, 보다 궁극적으로 중요한 전제는 대리자를 제대로 뽑는 일이다.

자신과 가족, 자식의 미래를 위해 누가 적임자인지를 판단해야 한다. 풀뿌리 민주주의, 주민자치의 철학을 갖고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결정해야 한다. 말이 협력이지 실제로는 경제적, 군사적 힘을 중심으로 재편되는 냉혹한 국제질서에서 국가를 이끌어 갈 능력 있는 지도자를 선출해야 하는 엄중한 사건이다. 무엇보다 부패하지 않고 정의와 공정을 실현시킬 수 있는 지도자가 필요함은 물론이다. 독일철학자 피히테는 19세기 초 프랑스의 위협 속에 절대 절명의 위기에 빠진 독일 국민들에게 피를 토하듯 호소했다. 정치인만이라도 정의롭고 부패하지 않는다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똑같은 호소가 21세기 정치철학자 마이클 샌델에 의해 반복되고 있다. “윤리적 기반을 잃은 정치, 정치가야말로 국가와 국민의 공공선에 해악을 끼치는 가장 무서운 적이다.” 입으로는 국민과 정의를 내세우지만 자신과 가족의 사리사욕을 위해 정의의 잣대를 제멋대로 바꾸는 정치인, 대통령 후보가 가장 무서운 적이라는 것이다. 그런 후보를 유권자가 가려내지 못할 때 아테네 중우정치의 망령은 우리사회에 되살아나게 된다. 한국사회의 소크라테스는 죽고, 나라를 위기에서 구할 수 있는 아리스티데스는 정치에서 추방된다.

돌아봐야 할 감각적 지각의 기만성

소크라테스가 독배와 맞바꿔가면서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신념이 바로 자신을 잘 안다는 착각에 대한 성찰을 하라는 것이었다.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어떤 종류의 의사결정을 하든 간에 어떠한 성찰이 선행되어야 하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무엇보다 우리의 생각과 판단을 가로막는 실체, 특히 감각적 지각의 기만성에 대한 성찰이다. 우리는 특정 정치인에 대해 알고 있다고 자부한다. 그 자부심 때문에 특정 후보에 대한 선입견은 여간해선 바꾸려 들지 않는다. 침묵하고 있는 자신의 편견에 굴복하고 있는 것이다. 대신 자신의 판단은 합리적이고 객관적이며 이성적이라고 믿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다. 스승의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목도한 플라톤은 그러한 어리석음을 동굴 속의 죄수신세로 묘사하며 신랄하게 질타했다.

인간을 동굴 속 어리석은 죄수로 만드는 것은 편견 혹은 선입견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의 대부분은 감각경험, 즉 인상과 관념으로 구성되는 지각perception에서 온다. ‘첫 인상이란 말대로, 특정인에 대해 직접 보거나 남에게서 듣고 느끼는 등의 경험이 인상impression이다. 인상이 사라진 뒤에도 기억에 의해 그 사람은 이런 사람이라고 남아 있는 표상이 관념이다. 특정인에 대한 나의 관념은 소위 팩트 체크에 의한 것일 수도 있고, 이래저래 남으로부터 들은 인상에서 유래하는 것일 수도 있다. 당연히 사실에 입각한 것이 아닐 경우 그런 관념은 편견과 선입견으로 굳어진다. 개인마다 지각 경험이 다르다보니 편견 또한 다르게 된다.

문제는 단순 인상을 통해 형성된 관념들이 자신의 입맛대로 복합관념을 형성하는 데 있다. 언론의 편향성이 개입하는 것이 이때다. 정보를 취할 길이 언론밖에 없는 현실에서 유튜브나 포털 등은 알고리즘이란 메커니즘을 통해 유권자의 단순인상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선스타인 교수가 지적한대로, 우리는 판단을 내릴 때 타인의 생각과 행동에 의존하려는 폭포화(cascades)’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그 폭포화의 쏠림 현상이다. 대통령 후보자에 대해 같은 인상[편견]을 가진 사람들끼리 인터넷 공간에서 만나는 집단 극화polarization’현상은 팩트 체크를 더욱 어렵게 만든다.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 토론을 하니 결과는 뻔하다. 거짓 루머나 잘못된 편견이 더욱 강화(동조의 폭포화)되고 극단화(집단 극화)될 수밖에 없다. 쌍방향의 소통이 사라진 공간에서 서로 다른 생각이나 의견을 교환하여 진실을 밝혀내는 일은 불가능하게 된다. 영화 대사처럼 도대체 무엇이 중한디?’를 모르고 자신의 편견을 확대재생산하는 데만 골몰하게 된다.

선거철이 되면 으레 플라톤의 국가를 뒤적이게 된다. 플라톤은 당시의 민주주의가 우매한 군중이 준동하는 중우정치로 타락할 수밖에 없는 정치체라고 경멸했다. 학창시절에는 별로 공감하지 못했던 플라톤을 국내외적으로 선거철이 거듭 반복되면서부터 그 의미를 가슴으로 깨닫게 된다. 동굴 밖에서 동굴 속 죄수를 바라보는 플라톤의 답답한 심정이 어떠했을 지를 생각하게 된다. 동굴 속 죄수의 어리석음은 안타깝지만 플라톤이 정작 분노한 것은 죄수를 어리석게 만드는 동굴이 아니었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동굴의 경험에 갇혀 있는 죄수는 성찰은커녕 동굴 밖 태양에 저항한다. 심지어 동굴 밖으로 인도하는 철학자를 죽이려든다. 그래서인지 피히테는 과거의 부패와 불공정이란 동굴 경험에 갇혀 사회개선에 저항하는 당시의 노인들에게 도와주진 않더라도 방해는 하지 말라고 질타했다. 물론 자신만의 말 없는 경험의 동굴에 갇혀 있는 노인들에 대한 질타다.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는 소크라테스의 말이 귓전을 때리는 선거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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