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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의 향약 장려정책과 도미나가 카즈히로의 향약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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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의 향약 장려정책과 도미나가 카즈히로의 향약 연구
  • 박경하 한국자치학회 부설 향촌사회사연구소장(중앙대학교 역사학과 명예교수)
  • 승인 2022.04.18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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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하 교수의 향약 이야기

몇 주 전에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과에서 1932년에 발행한 사회교화자료 제1朝鮮鄕約(1932)을 고서점에서 구입했다. 이 자료는 1932년부터 조선총독부가 보조금을 지급하면서 향약보급운동을 벌일 당시 향약보급 자료로 총독부 관료 도미나가와 경성제대 다카하시의 향약 논문 두 편을 싣고 있다. 지난 2월 한국지방자치학회 동계학술대회에서에서 <일제시기 조선총독부의 향약 지원과 활용 고찰>이란 논문을 발표하면서 도미나가의 논문을 주 인용하였는데, 그 자료의 원본을 입수하게 된 것이다.

도미나가는 1920년대 초부터 향약에 주목하여 여러 편의 글을 발표하였다. 그는 학자가 아닌 조선총독부 관리로서 지방과 중앙에 근무하면서 지역 촌락에서 여전히 존재하고 있던 향약과 지방안녕및 농촌사회의 정치적 질서 유지를 연계하여 직접 보고 경험했다. 도미나가는 당시 3.1운동 이후 민족운동이 고양되어 혼란스러운조선을 안정시키고 일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조선인의 사상을 교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향약에서 찾았던 것이다. 특히 황해도의 관리로 근무하면서 율곡의 향약을 접하고, 이 향약에서 원활한 조선 통치를 위한 영감을 얻었다.

 

일제강점기 식민 통치에 향약 활용

도미나가 카즈히로(富永文一)1915년 동경제국대학 법과 재학 중에 문관고등시험에 합격했다. 1916년 조선총독부 시보(試補)로 조선에서 근무하기 시작했다. 1918년 조선총독부 도 사무관에 임명되어 황해도에서 근무하였으며, 같은 해 총독부 사무관이 되었다. 1919~1923년 총독부 감찰관을 겸하였으며, 1925년 전라북도 경찰부장이 되었다. 1926년 총독부 경무국 보안과장에 임명되었으며, 1929년에는 내무국 지방과장, 1931년 함경북도 지사, 1934년 경기도 지사, 1936년 학무국장을 지냈다. 은퇴 후 조선금융조합연합회장을 지낸 인물이다. 특히 도미나가는 함경북도와 경기도 지사 시 향약을 시행하여 상당한 효과를 보았다.

도미나가는 조선총독부 내무국 제1과 사무관으로 재직하고 있던 1921년 조선총독부 발행 월간잡지인 朝鮮5, 9, 10 월 세 번에 걸쳐 연재하였는데, 이 글들을 정리하여 1923년에 발행한 것이 富永文一, 往時朝鮮ける自治萌芽 鄕約一斑()(朝鮮76)이다. 이 자료는 1930년대 초반 학무국의 향약 실태 조사나 향약 장려 보조 사업 시행 때 참고 자료로 전국에 배포되는 등 총독부의 향약 사업에서 주요한 자료로 이용되었다.

도미나가는 조선의 향약에 대해서 향약 조목을 자세히 읽어보면 이조시대 사회의 풍속과 습관이 거의 비슷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고, 현재 조선인의 행동거지와 습속을 주의 깊게 관찰할 때는 향약 조목에 해당하는 바가 자못 많아 향약의 조목이 부지 간에 조선인의 정신에 깊숙하게 침투하여, 그 도덕관념의 기초를 이루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대부분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고, 일찍이 경서를 손에 넣어본 적도 없는 지방민이 전통적으로 체득하고 있는 도덕관념, 특히 그 형식적 예의 관념이 단적으로 말하여 향약의 여영(餘影)에 다름 아님을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실로 조선인을 알고 조선의 지방을 연구하고자 하는 자는 먼저 향약 연구를 맨 처음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사회교화자료제일집,  《朝鮮 の 鄕約》, 1932
사회교화자료제일집, 《朝鮮 の 鄕約》, 1932

1932년부터 조선총독부는 보조금을 지급하면서 향약보급운동을 벌이는데, 사회교화자료 제1朝鮮鄕約에 도미나가와 경성제대 교수인 다까하시의 두 논문을 소책자로 출간하여 보급하였다.

 

환난상휼의 미풍. 향약 훈련에서 비롯

향약에 대한 조사는 중추원시대(1915~1937)에 본격화되었다. 종전까지의 조사는 사법적 관습 또는 식민통치에 필요한 자료를 조사수집하는 방식이었으나 중추원에서는 풍속관습을 비롯하여 구래의 제도로까지 조사의 범위를 크게 확대하였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조선의 제도였던 향약 조사도 시행되었던 것이다. 조선총독부 중추원에서 향약을 조사한 자료는 朝鮮鄕約スル이다.

당시 조선총독부 관료인 도미나가는 조선인의 전통적 미덕 및 상호부조하는 형태 등이 주자학을 근간으로 하는 향약의 정신에서 나왔음에 주목하고 지방자치와 연결시켜 향촌민을 효율적으로 식민통치하기 위한 수단으로 고려하였다. 1930년대 조선의 농촌을 현장조사 한 농촌 사회학자인 스즈끼 에이다로(鈴木榮太郎)도 조선농촌의 생활을 볼 때 물질적 문화가 심히 낮은데도 윤리적 문화가 놀랄 만큼 정비되어 있고, 남녀유별 장유유서가 심히 엄격하고, 예의를 중시하는 일이 극히 두텁다. 부락이 일대 인보(隣保) 등 환난상휼의 미풍이 조선농촌의 특색으로 보았고, 그 이유를 향약의 훈련에서 나왔음을 역설하였다.

3·1운동 이후 일제는 조선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잠재우기 위한 방안으로 지방자치제 실시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1920년과 1930년에 지방제도 개정에서 지방자치제 실시는 허울에 불과하였다. 1930년 지방제도 개정이 조선의 자치제를 위한 것이며, 일제의 조선 지배 수단으로 이용하기 위해 개정한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부터 있었던 지방자치제 조직인 향약의 연장선상에서 잘못된 점만을 개선한 조선을 위한 개혁이었음을 선전하기 위한 의도였다.

따라서 일제는 전통적인 향약의 자치 기능을 강조하고 이를 지방자치제와 연관시켜 홍보함으로써 조선인들의 불만을 축소시키고자 하였다. 또한 언론 홍보에서는 향약의 자치적인 기능을 강조하지만 실제로 향약 시행에서는 전통적인 향약의 자치기능을 약화시키고 향약을 관제화 하였다.

 

향약정신단체를 전쟁에 본격 이용

1932년에 보고된 전국의 향약 단체 수는 2,570개이었다. 1932년 학무국 조사는 전국적으로 통일된 기준 없이 이루어진 한계가 있지만, 이 조사는 1933년 향약사업 장려 보조금 정책의 기반이 되었다. 1930년대 조선총독부는 향약이 조선의 지방 통제에 효과적이라 판단하고 향약을 각 지역에 보급하려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 각 도마다 향약 단체를 선정하고 그 단체에 보조금을 지급하여, 전국적으로 향약을 장려하고 부흥시키려 하였다.

이 당시 일례로 함경북도 향약의 경우 19331월 향약은 99개이고 향약원 수는 8,632명이었다. 1933910일 기사에는 함경북도의 향약은 함경북도의 7만 호 중에서 3만 호가 향약에 참여하였다라고 하였으며, 193310월에는 향약 수는 349개이고 약원 수는 35,000명에 달하였다. 1934년에 함경북도의 향약은 460개로 약원 수는 48,000명에 달하였다. 이같이 1930년대 초반 농촌진흥운동의 전후로 하여 조선총독부에 의해 부흥된 향약은 산업장려, 공공봉사 등의 조목이 첨부되어 지방 개량, 사회교화 등의 목적으로 운영되었다.

이 외에 향약정신관련 단체에 대한 일제의 관심은 1937년 중일 전쟁을 전후로 증대되었다. 이는 향약정신관련 단체를 전쟁에 본격적으로 이용하기 전에 일제에 유리하게 편제하기 위한 관심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일제는 농촌진흥실행조합, 근농공제조합, 청년단, 부인회 등의 향약정신관련 단체를 촌락까지 이식시키고 이 단체들에 대한 통제를 위한 정책을 시행하였다.

일제 강점기의 산물 조선총독부. 지금은 철거되었다.
일제 강점기의 산물 조선총독부. 지금은 철거되었다.

1937년에 향약정신 보급 상황 조사를 실시하면서 각 단체에서 향후 필요한 사업과 예산들도 같이 조사했으며, 이를 기반으로 촌락을 중심으로 조직된 단체의 지원을 시행하였다. 또한 부인회, 청년단 등의 사회교화 시설의 보조를 증대시켰다. 이러한 보조를 통해 일제는 조선의 단체들을 전시체제기에 적합한 방향으로 운영하려고 하였다. , 일제는 단체를 통해 국민의 의무를 강조하고 부락의 경제적, 자치적 발전 등을 부각하였다. 주지하듯이, 이는 조선인 삶의 개선을 위한 방책이 아닌 전시체제기 인적 수탈과 물적 수탈을 위한 방안이었으며, 1930년대 말 향약정신관련 단체들은 향약 정신을 표방하고는 있지만 일제의 의도대로 변질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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