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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편화된 도시에서의 주민자치, 어렵다고만 말고 ‘필요’를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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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편화된 도시에서의 주민자치, 어렵다고만 말고 ‘필요’를 만들어야 한다
  • 김윤미 기자
  • 승인 2022.04.20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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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회 주민자치 연구세미나...박경하 교수 ‘갑오・을미개혁기 향회와 주민자치’ 발제

상부상조가 아니라 도리어 참견 받지 않고 익명으로 살고 싶어하는 도시민들에게 주민자치는 어떤 의미일까? 어떻게 해야 전 주민이 참여하는 주민자치가 실현될 수 있을 것인가?

향약, 촌계의 오랜 전통이 특히 농촌지역에서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사례가 속속 발견되는 가운데 이동이 잦고 파편화된 도시에서의 주민자치가 어떻게 하면 활성화될 수 있을까에 대한 논의가 심도 깊게 논의됐다. 한국자치학회는 19일 서울 인사동 태화빌딩 그레이트하모니홀에서 갑오을미개혁기 향회와 주민자치를 주제로 제15회 주민자치 연구세미나를 개최했다.

발제를 맡은 박경하 중앙대 명예교수는 급진개화파에 의한 갑신정변은 신분계급제 타파, 입헌군주제 수준의 정치개혁 등을 주장했지만 실패했다. 갑신정변에 대해서는 위로부터의 개혁, 일본을 등에 업은 개혁의 한계등이 지적되면서 크게 평가받지 못하고 있지만, 권력이나 벼슬 욕심 때문이라기보다 조선의 적패를 타파하고 조선을 바꿔보겠다는 마음으로 실행한 목숨을 건 개혁이었다. 특히 온건개화파라고 할 수 있는 유길준은 지방자치, 주민자치를 상당히 구체적으로 주장했다. 개혁은 실패했으나 그 의미를 재평가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당시 개화파의 자치의식이 어느 정도였는지 살펴볼 수 있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서두를 꺼냈다.

을미개혁 추진 개화파의 자치의식은?

 

발제에 따르면, 16세기 이후 재지사족은 자신들 중심의 향촌지배 운영원리로서의 향규를 제정하여 향촌지배질서를 유지하고자 했다. 향규는 향안(鄕案)에 오른 향원들 간의 약속으로 유향소의 조직 즉 좌수의 선임과 그 소관업무, 향안입록절차, 향선생(鄕憲) 및 그 서무인 향유사의 업무, 호장이방 등의 선임에 관한 것을 주 내용으로 한다. 향회는 향원들의 모임을 말한다. 향촌에서는 향규향안을 통해 토성이 아닌 새로 이주한 사족과 향리들의 향권 참여를 배제하는 동시에 재지사족들의 하층민에 대한 무단행위를 견제하는 등 자율적 규제 속에서 향촌사회를 안정시키고 치향지인(治鄕之人)’으로서의 위치를 지켜나가고자 했다. 임란을 겪으면서 재지사족의 경제적 기반이 붕괴되고 그들의 기반이던 유향소와 향안이 소실된 상황이었지만 향사당향안의 중수, 향약동계의 실시 등으로 사족 중심의 향촌지배질서와 기득권을 꾸준히 유지하고자 했다.

박경하 교수는 향안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가문을 올리는 것으로 그 의미가 크고 민감한 부분이라 분쟁도 엄청 일어났다. 아버지, 할아버지, 장인 등이 향안에 올라있으면 3양이라 하여 기존 회원들의 투표 없이 자동적으로 이름을 올릴 수 있었으나 그렇지 않을 경우 투표를 통해 올려야 했다. 몇 명의 반대가 있었는지 하는 기록까지 사료에 다 나타나있다고 설명했다.

고종 대 향약의 특징을 살펴보면 1890년대 사족 수령 향약에서 관찰사 중심의 주현향약 등장 189012월부터 18933월까지 경상도관찰사 이헌영(李憲永) 도 단위 향약 시행 1893년 전라감사 김문현(金文鉉) 향약 시행 1894년 갑오개혁 지방제도 개편, 8도 체제 폐지 23부제 실시 대도호부도호부현 체제를 군()으로 획일화-군 하부 자치조직을 관치 보조기구로 활용 1895113일 내부(현재의 행정안전부) 청원으로 <향약판무규정(鄕約辦務規程)><향회조규(鄕會條規)> 반포 등이다. 박 교수는 수령이 아닌 도 관찰사가 향약을 시행한 것은 그만큼 지방조직이 근대화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향약판무규정향회조규는 당시 내부(=이조) 대신 유길준이 중심이 되어 만든 것이라고 덧붙였다.

1895년 향회조규, 향약판무규정에 따르면 각 지방관으로 하여금 향회를 설치케 하여 각 면에서 1명씩을 뽑아 향회원으로 하고 그들이 고을의 공회당에 모여 법령의 시행과 폐단의 시정 등 고을에서 시행하는 일이 가부를 의논하고 공동 결정 한 뒤 시행하라” “군과 면과 리에 대 / / 소 향회를 두어 지방에 관련된 각종 사무를 회의하여 결정하고, 리의 존위를 리민이 직접 선출케 한다. 면의 집강을 각 리의 존위 및 선거인으로 하여금 선출케 한다고 되어있다. 같은 해 훈령은 지방 개혁사업을 향회에 맡길 것을 지시하고 있다. 박 교수는 유길준이 이조 대신이 되어 상당히 선진적인 내용을 담은 향약을 시행했는데, 이 당시엔 단발령시행에 대해 유림들의 반발이 워낙 커서 을미개혁은 실패로 돌아가고 일본세력의 힘이 커져 아관파천이 일어났다. 유길준은 일본으로 망명을 가게 되고 10년 후에 다시 귀국해 향회 운동을 다시 펼쳤으나 실패했다. 그는 미국과 일본유학을 동시에 다녀온 당시로선 드문 지식인으로 지방 개혁까지 향회에 맡기라고 할 만큼 완전한 자치론자였다고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발제자가 정리한 향회조규의 특징으로는 주민의 선거로 향회 구성하고 사무담당자 선출 향회 회의사항, 규정, 교육, 호적, 위생, 사창, 구휼, 도로, 식산, 산림 및 제언, 세목 및 납세, 공공 복역 등을 향회서 결정 자치사무 담당자 중 유급직원 급료를 지자체에서 부담-리 및 면의 하유사 면주인 급료 및 지필비 등은 리와 면에서 부담 선거시 자격 제한 및 자격 서열 규정-반상 불문 부의 정도에 따라 서열, 조세체납자 제외. 세금 많이 내는 사람을 회의주재자 차석에 배치 등이다.

한편 당시 조선사회는 중앙집권적 체제 유지를 위해 부세운영을 통한 재정확충에 중점을 두고 지방통치를 전개했다. 각각의 호() 단위로 부과되던 조세제도가 면리(面里)제를 시행하고 나서 각 면과 리를 하나의 단위로 일괄하여 공동으로 부과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부세가 토지로 일원화되고, 총액제로 공동납제가 채택됐다. 총액제는 국가 재정수입의 안정을 꾀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지만 수령의 부세징수에 대한 책임이 지방행정의 중심 업무였고 부세부담을 하는 지역민들의 부담이 과중됐다. 군역이나 환곡의 부족분도 토지에 부과하여 한꺼번에 걷는 방식, 즉 도결(都結)로 바뀌면서 상대적으로 먹고 살만한 부유층인 요호부민(饒戶富民)들이 조세를 더 많이 부담하게 되어 이들의 불만이 표출되기도 했다.

 

혁신적 내용 담은 향회조규실행은 되지 못했지만기층민의 촌계는 면면히 이어져

박경하 교수는 갑오개혁 때 새로운 조세 제도를 담당할 지방기구로서 향회의 제도화를 시도, 세금 징수를 둘러싼 폐단을 줄이고 국가 재정의 확충을 꾀했으나 이는 을미개혁 단계에 이르러 시행되지 못했다라며 유길준은 갑오개혁 이전 시기부터 지방제도 운영상의 문제를 지방관청 내 세무실무자인 이서층(향리층)의 세금 과다징수와 중간착취에 있다고 인식했다. 갑오개혁기 조세화폐납 법제화와 지방관청으로부터의 징세사무분리가 이루어졌지만 조세부과, 세원조사관리 사무는 여전히 지방관청 소관이었다. 향리층을 배제하고 향회법을 제정하여 향회로 하여금 세원을 조사관리하도록 할 것을 주장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갑오을미개혁기 유길준의 향회개설론은 향회에서 세원조사관 리 기능을 수행하고 납세자 중심으로 제반 행정사항을 의결하도록 설정하여 인민으로 하여금 재산권을 스스로 지키게 함으로써 과세기반을 안정시키고자 했다라며 참정권의 확대와 신분제 철폐를 기반으로 평민에게도 정책건의권을 인정한 향회는 민회의 성격을 지니며 근대적 의미에서 지방(주민)자치 의식으로 볼 수 있다고 밝혔다. 그는 유길준에 대해 친일도 반일도 아니고 일본을 이용하자는 지일-용일파, 정치인이라기보다 행정가 겸 교육가로 묘한 입장에 서 있는 분인 것 같다고 평했다.

향회조규의 내용 중 중요한 것으로는 존위()의 거부권 인정. 군수가 반대하면 2, 3번 회의에 올리고 이후 관찰사에 올림 매년 최소 2회 정기총회 개최 향회에 존위, 서기, 두민(촌계책임자, 이장급) 1인을 둠 존위를 수령이 임명하는 예를 없앰 존위, 집강이 두민에게 자문. 지방관도 두민에게 자문 조세채납자는 임원을 할 수 없음 등이다.

박경하 교수는 이 향회조규가 반포되고 실제 시행이 됐는지 안됐는지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 1896년 나주 욱곡면의 향약 자료가 발견되었는데 여기에 향회조규 내용과 유사한 규정들이 기록돼 있고 시행령까지 자세히 적혀 있다. 그런데 1년에 2회 정기총회도 혁파되었다고 약간 앞뒤가 안 맞는 내용도 함께 있어서, 이해 을미개혁이 백지화되었기에 집행이 안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향회 조문 과 남고, 조직과 모임은 없어진 것 아닌가 하는. 그런데 각 리의 두민 20여명의 명단은 다 기록돼 있다. 이게 촌계 조직인데 촌계는 소속은 변화될지언정 조직은 없어지지않고 그대로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계속해서 박 교수는 갑오개혁과 을미년의 <향회조규><향약판무규정>은 개화파 유길준 등이 입안했으나 우연히 등장한 것이 아니다. 민생 폐단 타파에 대한 연구 끝에 입안이 된 것이다. 조선시대 향촌자치의 유제인 향회 유향소 향약의 전개과정을 통해 지방자치, 민권 향상을 향한 끈질긴 노력과 희생으로 정립된 것을 반영해 제도화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면면히 이어 온 향회의 역사성과 기층민의 주민자치 정신을 반영한 것이라며 근대적 측면에서는 한계를 가지지만 일정 부분의 자치권 부여, 주민 참여, 국왕의 법률적 승인 등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역사적 의의를 짚었다.

발제에 따르면, 향회조규의 향회는 19069월 지방제도 개편 때 설치가 다시 논의되었으나 19075월 통감부(統監府)에서는 향회를 폐지하고 지방위원회를 재무서의 자문기구로 설치했다. 19071909년 당시에 향회(지방)나 민회(서울)1907년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했고, 세금인하 투쟁을 벌였으며 그 요구가 거절당하자 세금불납 운동을 전개하는 등 일제의 식민정책에 반발하기도 했다. 일제는 서둘러 민회단속법령을 제정하고 반일운동을 주도한 민회의 간부를 구속하거나 회비징수를 금지시켜 민회를 강제 또는 자진 해산케 했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민회나 민의소는 일제의 탄압을 받아 거의 대부분 해체당하거나 친일적 성격의 한성부민회와 같은 어용단체가 되었다.

이어 박 교수는 남원 입암촌향약, 현재까지 200여년간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촌계의 사례를 사료와 함께 보여줬다. 입암촌향약의 경우 1795년에 시작되어 해방 후 리동협동조합으로 유지하다 1971년부터 새마을회로 명칭을 변경해 현재에 이른다. 공유지 임대로 연 1500만원의 수입을 올려 회원 150가구에 배당을 주고 장학금도 지급하는 등 현재에도 활발히 운영되고 있다. 장수 계남면향약의 경우도 1702년 처음 시행된 이래 1915년 양풍회로, 1933년 계남향약으로 개칭 후 현재에 이른다. 4개 성씨 11개 가문이 홍학당을 세워 자녀들을 교육하고 향약을 시행한 게 시초다.

이에 대해 박 교수는 이런 경우가 진짜 주민자치이다. 전체구성원이 회장을 뽑고 그 회에 들어가지 않으면 손해라고 여기는, 그래서 모든 주민이 회원이 되는 구조. 주민자치법이 만들어지면 이렇게 만들어져야 한다. 지금은 자치가 아닌 걸 자치라 하니 힘들 수밖에 없다. 가짜 자치로 자치가 되나?”라고 개탄하기도 했다.

 

자치가 아닌 걸 자치라 하니 힘들 수밖에평등공평분배상부상조의 촌계정신 살려야

 

그는 또 조선후기의 촌계는 사족의 동계와 지방관에 의한 주현향약 등의 하부조직으로 흡수 편입되기도 했으나 끊임없이 기층민의 입장을 반영하면서 그 독자성을 유지하여 왔다. 또한 19세기 중후반 촌계에서의 두레조직이 지배층의 수탈에 저항한 농민항쟁의 일부세력으로서 참여하기도 했다. 이는 민의 사회의식의 성장과 아울러 끊임없는 저항을 통해 자치성을 확보해 나가는 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라며 기층민의 조직인 촌계는 지배층의 지배이념사상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사족의 동계와 주현향약 등에 흡수되는 등 외형적 형태는 변화되고 있었지만 그 모습이 용해되거나 분해됨이 없이 생활공동체로서의 자생적인 필요를 바탕으로 오랜 전통을 유지하여 왔다고 발제를 마무리했다.

끝으로 박 교수는 촌계가 바로 오늘날의 주민자치회이고 향회는 주민(자치회)총회이다. ‘()의 한자를 풀면 ++가 되는데 이는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제사를 지내고 음식을 나눈다는 뜻이다. 제사떡을 자리는 것은 큰아들이, 배분은 막내아들이 했기에 그야말로 공평하게 분배됐다. 평등, 공평분배, 상부상조가 바로 전통 계에서의 정신이다. 1/N이 바로 우리의 전통정신이라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다음으로 사회를 맡은 채진원 부회장은 향약이 옛날얘기인줄로만 알았는데 현재까지 계승되고 있다는 것, 지금까지 면면히 내려오고 있다는 것이 주민자치회의 싹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놀라운 발견이다. 많이 공부가 된 것 같다라며 말하며 토론을 주재했다.

먼저 김정환 경기도 주민자치원로회의 대표회장은 장수, 남원지역 뿐 아닌 타 지역에서도 향약 사료들이 발굴된 것인지, 향약이 전국적으로 시행된 것인지여부에 대해 질문했다.

이에 박경하 교수는 상당수 문헌이 다 사라졌지만 일제시대 일본이 조사한 자료만 봐도 전국적으로 굉장히 많은 향약이 있었다. 촌계에서 정월대보름에 마을굿을 지냈는데 마울굿은 마을의 가장 큰 행사였고 우리의 삶 그 자체였다. 전통문화가 무너지면서 많이 사라지고 찾기 어려워졌지만 지금도 남아있는 곳이 많고 전국 어디에도 있다고 답했다.

송화섭 전 중앙대 교수도 마을굿, 고사 등을 40년 가까이 연구했고, 전라북도에서 안다닌 마을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향약 전공 아니다보니 마을공동체신앙에 관련된 연구만 해 왔는데, 마을굿, 고사가 다 촌계에 기초하고 있는데 이쪽을 섭렵하지 못했다. 지금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주민들이 마을총회를 하면서도 향약 생각을 잘 못할텐데, 추적해보면 향약의 유산이다. 진정한 주민자치가 바로 촌계 조직이라는 생각이 든다. 동제 전공자로서 이것을 좀 더 깊이 들여다봐야 하는데 미처 하지 못한 게 한탄스럽고 반성을 많이 했다. 지금이라도 조사하고 자료를 수집, 정리해 진정한 주민자치, 풀뿌리민주주의가 다시 부활됐으면 좋겠다. 공동체놀이를 다시 살리는 것을 넘어서서 주민자치 전통을 부활시켜 주민들이 주도적으로 해나갈 수 있도록 기반을 만들어주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반성하고 앞으로 해야 될 일이 있구나 하는 생각에 책임감을 더 강하게 느낀다. 앞으로 향약 자료 등을 빨리 조사해 계승하는데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이섬숙 서울시 주민자치여성회의 상임회장은 서울에서는 민회, 지방에서는 향회라고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명칭만 다른 건지 아니면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하다. , 촌계=주민자치회, 향회=주민총회라고 하셨는데 주민자치회보다 총회 쪽 얘기를 더 많이 해주셨는데 향회가 모든 걸 다 포괄하는 것인지, 지방에서만 잘 이뤄지고 있었던 건지 아니면 서울에서도 이뤄지고 있었는지 궁금하다고 질의했다.

주민자치, 농촌의 리 단위에선 실행 가능...도시는? 단위 더 쪼개고 모일 필요제공해야

 

이와 관련해 박경하 교수는 주민자치회도 도농 간에 차이가 있다. 농촌은 쉽게 구성된다. 제가 거주하는 횡성의 리는 80가구로 구성되어있어 주민 모두 참여할 수 있고 전체 대상으로 모인다. 지방은 이 정도가 적정규모인 것 같다. 하지만 단위 기준은 동네사정마다 다 달라야 한다. 법으로 자르는 건 안 된다. 도시와 농촌은 구별할 필요가 있다. 도시에 있기에 어렵다 얘기할 수 있다. 그래서 중앙회에서 통리 주민자치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시골 리 단위 구성은 어느 정도 가능한데 도시는 더 쪼개야 한다. 또 시골은 공통적인 일이 많다. 상수도 문제 등 모여서 얘기할 수밖에 없는 사안이 많다. 근데 도시는 아쉬운 게 없다. 도리어 익명으로 살고 싶어 한다. 도시는 더 작게 쪼개야 한다라고 도시 주민자치의 방향을 설명했다.

그는 또 향회와 민회에 대해서는 서울은 엄밀히 말하면 경회라고 써야 하는데 민회라 했다. 근데 이건 요즘말로 하면 NGO운동에 가깝다. 한성부민회는 지역마다 있지도 않았다. 좀 별도의 개념이고 그 사례도 많지 않다. 좀 더 구분해봐야 할 것 같다. 제주도 사례를 보면 농업공동체 사회여서 향회가 간단히 구분된다. 디딜방아 하나에 25가구, 서로 곡식을 갈아주고 농사일도 같이 하면서 자연스럽게 공동체가 형성된다. 그런데 도시는 필요성이 없어졌다. 고민해야할 사안이다. 하지만 층간소음문제 등 혼자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기에 여기에 관여할 수 있는 지혜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본다고 답했다.

전상직 중앙회 대표회장은 촌계와 같이 생활과 밀접한 단위는 늘 본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양반이 어떻게 하든 진짜 자치조직으로. 단지 국가와 촌계를 연결하는 중간지점에서는 정책적 조작이 있을 수 있었지만 그래도 촌계는 변함이 없었다는 걸 발제를 통해 깨우쳐주셔서 감사하다. 민속적 측면의 접근이 중요한 것 같다. 제의의식이 전통의 주민자치에서 가장 중요했다. 이런 걸 넓혀가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걱정은 새 정부에서 주민자치 정책 펼쳐야 하는데 중앙회에서 2년간 성공할 수 있는 시범실시를 하자고 제안했다. 전통에 뿌리를 두고 현대화 시킬 수 있는 주민자치 모델을 만들고 실제 뿌리 있는 곳은 주민자치회로 만드는 작업이 꼭 필요하다. 녹록치 않겠지만 숙제를 하나 가지게 됐다. 주민들이 어떤 것에 동의하고 성공할 수 있었는지 요인을 분석하는 2단계 어프로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새로운 지평 하나 열어 또 다른 새 지평으로 나아가는 숙제로 이어가야 할 것 같다고 밝혔다.

박경하 교수도 지방자치-주민자치가 다른데, 지방자치는 시군의 분권적 측면, 행정자치, 정치자치이다. 행정학자들은 여기에만 쏠려있다. 주민자치는 생활자치이고 지금 사업들을 유형화시킬 필요가 있다. 현 주민자치회에서 하고 있는 사업들이 뭔지 세세하게 전수조사도 필요하다. 도농 지역, 산간/해안지방 등의 삶의 양식이 다 다르다. 주민자치회 사업명만 죽 뽑아도 하는 일, 역할, 사업이 잡힐 것 같다. 그중에서 생활적인 면들을 정리하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박 교수는 주민전체가 참여하지 않는 주민자치회는 주민자치가 아니다. 대의자치는 지방의원에게, 주민자치는 통리단위로, 읍면으로 한 번 더 묶어서 대의원, 구의원에게 묶어주는 샘플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된다. 지금은 행정, 지방의회와 충돌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애초 추진할 때 이상적인 안으로 가야지 개량적으로 시범사업? 이건 아니다. 행정과 맞춰서 통폐합하고, 주민들 의사를 반영한 지각변동이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 조직으로 시범사업을 하면 맨날 똑같다. 우리가 원하는 이상적 모델로 시범사업을 해야 한다. 현재까지의 주민자치회에서 한 일이 뭔지를 조사해서 보편적 사업, 특수적 사업을 생산형태, 교육형태에 따라 구분하는 등의 작업이 필요하다. 자치가 아닌 것, 주민자문위원회를 가지고 시범사업을 하면 아무의미가 없다고 거듭 강조했다.

 

주민자치회 사업들 전수조사분류해 지금 당장주민들이 원하는 사업 찾아내야

 

전상직 회장은 지금은 위원으로 구성되는 주민자치위원회다. 주민이 구성원이 아니다. 주민이 회원이 되는 주민자치회로 바꾸라고 했는데도 다시 위원회로 회귀했다. 당국에서 전주민이 모인 회를 일단 상정하지 않는 것 같다. 전주민이 모이려면 통 정도로 500~700명 모일 수 있는 단위로 낮춰야 하는데 여기에도 문제가 있긴 하다. 아파트 단위는 어떻게? 1개동, 2개동을 합쳐서? 이것도 그닥 연관성이 없고, 만약 엘리베이터를 공유하는 라인으로 한다면 그건 좀 연관성이 있을 수 있다. 각자도생하는 게 편할 수 있는 상황에서 주민자치의 함의는? 주민자치회의 기본설계 자체가 완전히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권영옥 서울시 주민자치여성회의 공동회장은 사실 서울은 지방하고도 또 다른 조건이다. 지방은 동네니까 전체가 모이는 게 수월한데, 서울은 쪼개놓는다고 했을 때 다 모일까? 쉽지 않을 것 같다. 30개 통에 30개 주민자치회를 만들어놓으면 거기서 어떻게 돌아가지? 하는 우려도 든다. 어떤 방법으로 잘 할 수 있을까?”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이날 농촌과 다르게 파편화되고 이동이 잦은 도시에서 주민자치가 어떻게 활성화될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이 가장 핵심적으로 이뤄졌다.

박경하 교수는 “(도시에서의 주민자치 활성화 관련) 대안이 별로 없다. 코로나 상황과 맞물려 온-오프라인 방식을 같이 활용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시골은 구성이 그리 어렵지 않은데 도시가 문제다. 중요한 건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모이게 하는 낚시밥이 있어야 한다. 조선시대처럼 노동을 같이 한다든가 하는 필요가 있어야 사람들이 모인다. 필요하면 모이지 말라 해도 모이게끔 되어 있다. 지금 도시사람들은 아쉬운 게 없다라며 사업 전수조사를 하자는 것은 아쉬운 걸 찾아내자는 뜻이다.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 공통분모가 되는 것들을 많이 찾아서 우선 나열해봐야 한다. 조기축구 등 동호회 관련 사항도 있을 것이고, 생활에서 필요한 여러 가지 일들을 예시해 찾아올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필요성이 사라진 게 문제이고, 이런 걸 어떻게 조화롭게 가져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다. 서울시 사례만 가지고 되니, 안되니 하기보다 전국 대상 우수사례 발표회가 자주 있어야 한다. 보는 사람들이 부럽게 여기도록. 자체 발표와 토론을 시키면 해답이 다 나온다. 방향만 제시하고 조를 짜서 경쟁을 시키면, 구체적 솔루션은 현장에서 주민자치 하시는 분들이 다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아울러 도시에선 (주민자치가) 힘들다, 어렵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해야 한다. 단위 때문에 어렵다면 쪼개서라도 해야 한다. 지금은 이기적인 사회이다. 하지만 육아처럼 공통의 어려움은 있다. 이는 공동체에서 해소시킬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런 일을 찾아야 한다. 주민자치회 사업을 분류시켜보고 거기에 창의력을 넣어보자. 협력정신에 창의력을 더하는 게 중요하다. 주민교육이 우선은 아니다. 스스로 협력정신을 통해 창의력을 키우면 우리 삶이 행복해진다. 시원한 대안은 없지만 꼭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시군구선 무엇을 하느냐가 서울선 어떻게 소통할까가 중요...이기적 사회에 주민자치 꼭 필요

 

전상직 회장은 지금까지의 주민자치회는 과업조직으로 보는 경향이 강했다. 동네를 위해 일하는 일꾼조직, 여기 빠져있는 게 주민들간의 소통이다. 위원들만 가지고 과업 수행을 하고, 정작 주민이 빠져 있다. 일본 주민자치회는 규모가 작아 회원이 150~200명이다. 굳이 나누자면, 시군 주민자치회는 무슨 일을 할까가, 서울은 어떻게 소통할까가 문제다. 2개가 다르다. 안타까운 건 행안부는 이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고 시민단체도 못한다. 우리가 이런 걸 해야 한다. 읍면동 단위 주민자치센터 운영권을 동장에게 받아서 센터는 동 전체의 사업, 일들을 하도록 하고, 통 단위에서는 이웃과 친목이 제일 중요하다. 통회에서 하는 일의 반 정도는 주민들 친목이 먼저다. 나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런 걸 교육해야 한다고 힘주어 언급했다.

허강무 흑석동 주민자치회 홍보기획행사분과위원장은 향약-촌계 전통의 현대의 계승과 관련한 질문을 던졌고 박경하 교수는 예컨대 새마을회를 주민자치회란 이름으로 바꾸면 자동으로 알아서 작동할 것 같은 입암촌 사례도 있긴 하지만, 전통문화를 바로 연결하는 건 쉽지 않다. 정신적 계승, 즉 공정분배, 상부상조 등 정신들을 어떤 구조 속에서 이어갈 것인가 하는 게 문제다. 조선시대에는 혼상시 부조가 중요했고 촌계는 생활의 필요성에서 나온 것이고 향약은 군현을 통제하기 위해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기층민단위에서는 촌계에 소속되지 않으면 손해였다. 그런데 지금 주민자치회는 목적, 지역이 다 다르기에 도농, 산업형태, 환경에 따라 여러 샘플을 만들어야할 것 같다고 제시했다.

 

사진=이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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