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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자치와 주민자치교육, 그리고 니버의 정치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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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자치와 주민자치교육, 그리고 니버의 정치력
  • 이관춘 연세대학교 객원교수
  • 승인 2022.04.29 09: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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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춘의 마을 자치 교육

모든 민주주의 국가에서 사람들은 그들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는다.”

시민교육의 중요성을 말할 때마다 자주 인용되는 말이다. 이 말은 흔히 민주주의에 관한 고전으로 일컫는 미국의 민주주의를 저술한 프랑스의 법학자이자 사상가인 알렉시스 드 토크빌의 말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토크빌의 말이라는 근거는 없다. 학계에서는 이 말의 출처를 19세기 사보이아 공국의 철학자였던 조제프 드 메스트로Maistre(1753~1821)가 러시아의 새로운 헌법에 대해 쓴 편지에 등장하는 문장으로 보고 있다. 주목할 점은 조제프 드 메스트로는 민주주의 신봉자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는 본래 프랑스혁명을 반대하고 절대 군주정치와 교황의 절대권을 옹호하면서 공화제보다 군주제가 공정하다고 주장한 반동주의자였다. 따라서 그는 민주란 말은 없이 모든 국가(nation)’라고 표현했는데, 이 말이 모든 민주주의(democracy)’로 바뀌고 토크빌의 것으로 와전되어 격언처럼 통용되고 있는 것이다. 군주제가 공화제보다 더 공정하다고 주장한 수구이념 옹호자의 말이 민주주의 사회의 격언처럼 통용되는 상황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주민자치, 교육이 충분조건인가

허나 누구의 말이건 간에, 그리고 이 말의 본래 의도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생각해봐야 할 점은 명확하다. 그것은 바로 예나 지금이나 민주적인 사회발전은 시민의 수준과 비례한다는 것이며, 이를 위한 시민교육이 중차대하다는 것이다. 한국이 유엔에서 공인된 선진국이 되었지만 진정한 선진국이 되기 위한 우선적인 조건은 정치인과 사회지도층은 물론 일반 국민의 선진화이며 이를 위한 시민교육이 필요하다는 데 대부분 동의한다. 같은 맥락에서 한국사회에 진정한 풀뿌리 주민자치의 실현은 주민들의 자치에 대한 인식과 태도 및 자치역량과 관계된다. 시민들의 역량 정도에 따라 참여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적절한 권한의 종류와 정도가 결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민자치 활성화의 실현을 위해서는 주민자치교육이 필수적이다. 시민교육 없는 민주주의가 없다면 지속적인 주민자치교육이 없는 진정한 주민자치 또한 실현되기 어렵다.

허나 시민 혹은 주민들의 수준만을 탓하는 듯 보이는 이러한 논리는 본래 의도와는 상관없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다분하다. 나아가 솔직히 불편하게도 들린다. 메스트로 말의 행간을 보면 오로지 시민의 무지와 무식을 탓하는 용도로 동원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동서양의 역사를 돌아보면 유능하고 탁월한 지도자나 정부가 국민의 품격과 수준을 향상시키는 사례를 적지 않게 목격하게 된다. 또한 진정한 주민자치의 실현이 더딘 현실적인 이유를 주민들의 수준이나 주민자치 지도자들의 역량이나 열정의 부족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따라서 조제프 드 메스트로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실질적 주민자치 실현에, 주민자치교육은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중요한 주민자치교육

가정이나 사회, 국가의 수준은 구성원의 수준과 비례한다는 말은 반론의 여지가 없다. 그 때문에 교육이 중요하다는 점에서 메스트로의 말은 틀림이 없다. 인류의 문명은 철학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러나 철학의 목적은 교육이며 교육은 철학의 소이연(所以然)이라는 점에서 인류역사는 곧 교육의 역사라 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철학이 동 틀 무렵,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에 다름 아니다. 계몽주의 시대의 임마누엘 칸트는 인간은 교육으로 만들어진다고 단언하였다. 칸트는 저서 교육학 강의첫 장의 시작을 다음과 같이 교육의 당위성에 대한 강조로 시작한다.

인간은 교육을 필요로 하는 유일한 존재이다.”

인간은 교육을 필요로 하는 존재, 즉 교육적 인간(Homo Educandus)이라는 말이다. 장 자크 루소 역시 같은 말을 한다. 그는 저서 에밀에서 우리들은 연약하게 태어난다. 우리들에게는 힘이 필요하다. 우리들은 커 가면서 필요한 모든 것을 교육을 통해 얻는다.”

같은 맥락에서 미국의 정치철학자인 벤저민 바버는 민주시민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고 강조한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나지만 시민으로 태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선거일 투표소에 들어갔다고 시민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육에 의해, 그리고 사회전반의 네트워크 속에서 시민은 만들어진다고 강조한다. 일찍이 미국의 진보주의 교육학자인 존 듀이 역시 교육의 궁극적 목표는 좋은 민주시민을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주민자치가 풀뿌리 민주주의의 시작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민주시민교육과 마찬가지로 주민자치의 성패에 주민자치교육이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주민자치 역량과 민주시민성을 고취시키는 것이 교육이라는 믿음은 전통적인 교육의 가소성(可塑性) 개념에서 비롯된다. 독일 교육철학자 헤르바르트는 저서 일반교육학에서 학습자의 가소성과 교육가능성은 교육의 근본 가정이란 점을 역설한다. 다시 말해 교육에 의해 사람을 본질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가소성 혹은 교육가능성에 대한 신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교육을 해야 민주시민성이나 주민자치 역량을 키울 수 있는 것인가? 시민교육이나 주민자치교육에서 무엇을 교육하고 학습할 것인가의 문제는 본 글의 범위를 벗어나기에 차치하기로 한다. 지금까지 시민교육 혹은 주민자치의 목적이 무엇이며 내용 및 교수-학습법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하게 논의되고 있다. 그러나 두말할 나위 없이 민주시민교육에 있어서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민주시민으로서의 의식과 태도, 행동양식을 학습하는 것이다. 19세기 초 나폴레옹의 위세에 짓눌려 있던 독일(프로이센) 국민들의 절망감, 패배감을 일깨운 철학자가 피히테이다. 그는 무엇보다 민족혼을 고취시키는 시민[국민]교육이 시급하다는 점을 피를 토하듯 역설하였다. 피히테가 강조한 시민교육이란 거창한 것이 아니라 당장 실천할 수 있는 소박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비가 오지 않아서 접은 우산을 옆구리에 끼지 않고 세워서 들고 걸어가는 행동에서부터 시작하였다. 옆구리에 끼면 다른 사람에게 부딪힐 수도 있으니 남을 배려하는 의식과 행동이 시민교육의 출발이었던 것이다. 요즘 우리식으로 말하면, 지하철에서 가방을 뒤로 메면 남에게 피해를 줄 수 있으니 앞으로 메자는 교육이다.

주민자치교육은 주민자치매니페스토에서 명시하고 있듯이, 주민들이 자신의 마을을 자발적으로 경영하고, 강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주적으로 의사결정을 하며, 주민들 스스로가 규칙을 세우고 복종하는 자율성을 실천하는 교육이다. 자발성, 자주성, 자율성이란 주민자치의 특성은 주민자치교육의 필요조건이면서도 한계가 무엇인지를 함의하고 있다. 민주사회라면 시민교육은 시민들의 일상적이며 사회적인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되어 있다. 지하철에서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가방을 앞으로 메는 행동은 행동을 통한 교육과 학습이 가능하다. 반면에 실질적인 주민자치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주민자치교육은 행동을 통한 학습에 제한이 따를 수밖에 없다. 물론 주민자치의 목적과 중요성, 실현방식에 대한 교육은 가능하다. 허나 읍동의 장을 내 손으로 직접 선출하는 제도가 허용되지 않는 상황에서 주민들의 자주성이나 자율성에 대한 학습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 결과 교육은 있지만 학습은 부진한 주민자치교육이 될 수 있다. 주민자치교육이 주민자치를 견인하지만, 역으로 주민자치제가 실질적인 주민자치교육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정치력’, 실질적 주민자치를 위한 조건

정치적 중립이라는 허울(주민자치 2022.3)이란 제목에서 전상직 한국자치학회장은 주민자치회 하나도 주민들이 경영하지 못하도록 권력자들이 남부군처럼 막고 있다.”고 주민자치의 현실을 질타하고 있다. 그는 20여 년간 주민자치는 수평적으로 주민들 간에 소통과 화합을 이루고 수직적으로 존중과 배려가 있으면 되는 소박한 과제라 생각하여 관심을 가져왔다.”고 말한다. 나아가 정치적 중립을 표방했지만, 중립은 스스로 중립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때만이 가능하다고 말하며 중립 이전에 먼저 정치력을 길러야 한다고 강조한다. 주민자치에 대한 올바른 철학과 당위에 대한 신념과 열정만으로 풀뿌리 주민자치가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는 현실 인식 하에 정치력을 길러야할 필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 정치력을 집단 및 국가적 차원에서 역설한 철학자이자 실천신학자가 바로 독일의 라인홀드 니버(Niebuhr)이다. 니버가 말하는 정치력이란, 어떠한 형태의 계급 지배 형태건 간에 집단적 힘이 정치적 약자를 억누를 때, 순수하게 집단적 힘의 이성이나 양심에 호소하는 것을 넘어 보다 적극적으로 그것에 대항해 형성해야 할 정치적인 을 의미한다. 인간사회의 정의를 획득하기 위한 필수조건이 정치력이란 사실을 간과하지 말라는 것이다.

니버에 따르면 개개의 인간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이해관계도 고려하며 행위의 문제를 결정함에 있어 이성적이며 다른 사람들의 상황이나 이익을 더욱 존중할 수 있을 정도로 도덕적이다. 주민자치를 말하는 개개의 정치인들 역시 마찬가지다. 월간 주민자치에서 주민자치에 대해 인터뷰한 정치인들 중 실질적인 주민자치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말하지 않는 사람들은 없다. 이번 대선에서도 당선인을 포함한 모든 후보들은 주민자치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듯 보인다. “주민자치가 시대적 흐름이기에 단순히 말로만 하는 주민자치가 아니라 실제적이고 실현적인 주민자치정책이 이뤄지도록 힘쓸 것이라고 약속하기도 한다. 이들 정치인 개개인의 이성과 합리성은 주민자치의 실질화가 인간 본성상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공감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주민이 주인이 되는 진짜 주민자치는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다. 이유가 무엇일까?

니버에 따르면 그 이유는 개개인의 이성과 집단의 이성 사이에는 명백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정치인 개개인의 합리적 이성은 주민자치의 시급함을 인식하지만 , 그가 속한 정당이나 집단은 나름의 이해관계나 집단이기주의로 인해 주민들의 실질적인 자치 욕구를 수용하는 이성적 능력이 개인에 비해 훨씬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집단을 구성하는 개인들이 개인적 관계에서 보여주는 것에 비해 훨씬 심한 비이성적이며 약탈적이기주의가 모든 집단에서 나타나게 된다. 왜냐하면 개인들의 이기적 충동은 개별적으로 나타날 때보다는 집단 속에서 하나의 공통된 충동으로 결합되어 나타날 때 더욱 생생하게, 그리고 더욱 누적되어 표출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니버는 모든 시대의 합리주의자들이 그러했듯이, 삶이나 정책결정에 있어서 정치인 개개인의 이성의 기능을 지나치게 신뢰하는 우를 범하지 말 것을 촉구한다. 개개인의 이성과 도덕은 집단의 이성과 도덕과 명백한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주민의, 주민에 의한, 주민을 위한주민자치는 인간본성에 비추어 볼 때 너무도 자명하게 당위적인 실존적 요청이자 소박한 과제이다. 이 실존적 과제를 해결하는 길은 주민자치교육을 통해, 그리고 정치인이나 행정가들에 대한 교육을 통한 인식의 전환 및 합리성의 성장과 발전을 통해 가능하리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전망일 수 있다. 허나 니버에 따르면, 이것은 마치 개인의 이기심이 합리성의 발전이나 종교적 선의지의 성장에 의해 점진적으로 견제되고 있으며, 또한 이러한 과정이 계속 진행되어야만 모든 인간사회와 집단은 사회적 조화를 이룰 것으로 믿는 교육자, 종교가, 사회과학자들의 순전한분석과 믿음에 그칠 수 있다. 전상직 회장의 말대로, 지난 20년간 주민자치를 단체장이나 시민단체 등이 지배하면서 얄팍한 정치인들과 운동가들이 숟가락, 젓가락을 올리고 있는현실을 보면 새삼스레 니버의 예리한 통찰력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아울러 니버가 한 집단에 속하는 개인들 간의 관계는 이성적이며 도덕적인 조정과 설득에 의해 확립하는 일은 가능할지라도 집단과 집단 사이에서는 이런 일이 결코이루어질 수 없다고 단언하는 이유를 알게 된다. 이성적이기보다 지극히 정치적인 집단들 간의 관계는 정치력이 필수적이라고 역설하는 라인홀드 니버를 떠올리게 되는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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