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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자치․풀뿌리민주주의 가능케 한 습속․세계관은 따로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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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자치․풀뿌리민주주의 가능케 한 습속․세계관은 따로 있을까?
  • 김윤미 기자
  • 승인 2022.04.29 20: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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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회 주민자치 연구세미나...윤원근 교수 ‘미국의 타운 주민자치 제도와 청교도 세계관’ 발제

왜 어느 나라는 민주주의가 잘 정착되고 어느 나라는 그렇지 못할까? 이 해묵은 오랜 질문은 아래로부터의 풀뿌리민주주의인 주민자치에도 그대로 대입할 수 있고 또 밀접히 연결될 수 있는 주제다. 이 어려운 질문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세계에서 최초로 거대한 민주공화국 아메리카합중국을 건설한 청교도들의 세계관과 습속에서 찾는 흥미로운 발표와 토론이 진행됐다.

한국자치학회는 28일 서울 인사동 태화빌딩 그레이트하모니홀에서 제18회 주민자치 연구세미나를 개최, 윤원근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가 아메리카합중국의 타운 주민자치 제도와 청교도 세계관을 주제로 발제를 진행했다.

 

풀뿌리민주주의 왜 어디는 잘 되고 어디는 안 될까? 그 차이는?

 

채진원 한국자치학회 학술부회장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세미나에서 윤원근 교수는 토크빌의 그 유명한 저서 미국의 민주주의내용 일부를 소개하며 서두를 꺼냈다. 그는 토크빌은 민주주의에 영향을 끼친 세 가지 요소로 자연환경 법률 국민의 생활태도와 관습을 언급하며 자연환경보다는 법률, 법률보다는 관습이라고 말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발표는 아메리카 민주주의의 풀뿌리인 타운 주민 자치제도와 청교도 세계관의 상관관계를 보여주려고 한다고 소개했다.

먼저 아메리카합중국의 타운 제도가 소개됐다. 발제에 따르면 타운 제도는 미국 민주주의의 출발점으로 토크빌의 표현처럼 아메리카인의 자유의 생명이자 그 원천이다. 대다수 유럽 국가들의 정치적 생존이 사회의 상층계급에서 시작되어 완만하고 불완전하게 사회 각 계층으로 전달된 톱다운 방식이었다면, 아메리카에서는 타운제도가 카운티보다 먼저, 카운티가 주보다 먼저, 주가 합중국보다 먼저 조직되는 보톰업의 형태를 띠었다.

윤원근 교수는 토크빌을 인용해 발제를 이어갔다. 그는 미국의 타운제도는 자연발생적이며 국민의 권력의 원천이다. 국민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가장 직접적으로 행사할 수 있다. 주인 노릇을 한다. 타운에는 여러 관직이 있어서 모든 주민이 여러 직책을 수행해야 하며 그렇지 못할 때는 벌금을 물고 직책에 대해 보수를 지급한다. 반명 프랑스의 코뮌에는 정식으로 오직 한 사람의 관리만이 있다. 타운들은 그 권력을 중앙권위로부터 받은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자기네들의 자주성의 일부를 주에게 양보했다라며 권력과 자주성을 갖지 못한 타운은 착한 시민은 가지게 될지 모르지만 적극적인 시민은 가질 수 없다. , 공익에 가능한 한 많은 수의 사람들이 관심을 이끌기 위해서 놀랄 만큼 정교하게 권력이 배분되어 있다. 여러 분야에서 강력한 지역사회를 대표하는 수많은 관리들 사이에 권력이 분산되어 있다. 따라서 지방행정은 수많은 개인들에게 그칠 새 없는 이익과 관심의 원천을 제공한다. 이는 나도 책임 있는 자리에 갈 수 있다는 동기를 부여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중앙집권 정부중앙집권 행정의 차이도 구분했다. 윤 교수는 중앙집권 정부는 일반법의 제정이나 외교 관계의 유지와 같은 특정한 이해관계를 관장하는 권력이 하나의 장소나 혹은 동일한 사람들에게 집중되어 있을 경우이고, ‘중앙집권 행정은 나라의 특정 지역에만 해당하는 국지적인 이해관계의 관장을 하나의 장소에 집중시키는 경우이다. 토크빌은 중앙집권 정부가 중앙집권 행정과 결합될 경우 엄청난 힘을 얻는다는 것은 명백하다. 이 두 가지가 결합될 경우, 사람들로 하여금 습관적으로 완전하게 자신들의 의지를 없애 버리고 단지 한 순간이나 한 지점에서 뿐 아니라 영원히 어떤 측면에서나 복종하도록 길들인다라고 하며 특히 중앙집권 행정을 경계했다고 말했다.

 

미국의 타운 제도와 청교도 관습의 관계는? “메이플라워 서약, 시민참여정치의 원형

그는 특히 토크빌이 아메리카에 대해 찬탄한 것은 지방분권의 행정적성과가 아니라 정치적성과다. 토크빌은 미국인들이 국가 이익을 마치 자신의 이익인 양 열렬한 관심을 가지고, 스스로 나라의 융성에 기여했다고 생각하며 자랑스럽게 여기고 전체에 돌아올 혜택과 번영을 기뻐한다고 했다. 이들이 국가에 가지는 감정은 가족을 결속하는 감정과 비슷하고 이는 일종의 이기심이라고 표현했다. 즉 개인의 이기심을 국가의 복리와 연결하고 국가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도 큰 것이다라며 공직자에 대한 인식도 유럽인과 미국인들은 차이가 있다. 유럽인들에게 공직자는 우세한 힘, 권력을 나타내는 것이지만, 미국인들에겐 자기들의 권리는 나타내는 것이다. 그렇기에 아메리카에서는 인간에 대한 복종이 아닌 정의의 법률에 대한 복종을 강조한다고 설명했다.

다음으로 윤원근 교수는 타운 제도와 청교도 관습에 대해 연결해 소개했다. 그는 종교박해를 피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영국을 떠나 아메리카대륙으로 온 청교도가족 102, 특히 이들이 1620년 뉴잉글랜드 플리머스에 상륙하기 전 시민정부를 위해 남성 41명 서약한 메이플라워 서약에 대해 강조했다. 이에 대해 그는 최초의 자치 헌법으로 아메리카에서 시민참여정치의 원형이 된다. 어마어마하게 중요한 사건이라고 평했다. 이후 1637년 뉴 헤이븐, 1638년 로드 아일랜드, 1639년 코네티컷, 1640년 프로비던스 정착자들도 거의 비슷한 방식으로 계약을 맺어 시민공동체를 만들게 된다.

토크빌은 저서에서 아메리카만큼 결사의 원칙이 수많은 목적에 성공적으로 이용되었거나 응용된 나라도 없다. 타운, 시티, 카운티 등의 이름으로 법률에 의해서 수립되는 항구적인 결사 말고도 수없이 많은 결사들이 사사로운 개인들을 매개로 해서 형성되고 유지된다. 이런 습관은 학생들의

학창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데 학교에서 어린이들이 놀이할 때 그들은 자기들이 세워놓은 규칙들에 복종해야 하고 그들이 정해 놓은 위반사항을 처벌해야 한다. 그와 같은 정신이 사회생활의 모든 행위에 스며들어 있다라고 쓰고 있다. 윤원근 교수는 이런 습관과 정신의 모형이 바로 메이플라워 서약이다. 이는 에덴동산의 선악과와도 같은데 곧 자치헌법이다. 미국에선 선악과를 따먹을 수 없는 정치시스템을 만드느냐가 과제가 됐다. 금단의 열매에 손댈 수 없게 하는 시스템 구축이라는 이 정치사회적 의미를 종교인들은 잘 이해 못하는 것 같다. 성경의 잠재력을 잘 활용하지 못하는 점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윤원근 교수는 아메리카의 타운 상태를 대변한 존 로크의 자연상태이론도 소개했다. 그는 존 로크는 아메리카의 상태를 자연상태로 묘사했다. 자연상태는 모든 사람이 불완전한 존재로 자유롭고 평등하게 자기보존의 권리(자연권)를 누리는 상태로, 방종의 상태가 아니라 이성 속에 있는 자연법의 지배를 받는 조화로운 상태라 할 수 있다. 이는 자연상태를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 상태로 본 홉스와 다르다. 자연법이란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타인을 사랑하는 것이 의무인 상태로 나의 자유, 재산, 소유물이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의 그것들도 존중해 주는 상태다.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권리) 다른 사람을 대접하는(의무) 황금율의 상태다. 로크는 자연상태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반면 홉스의 자연상태는 유럽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전쟁상태와 같다고 설명했다.

계속해서 윤 교수는 스포츠에서 공정한 게임은 선수와 심판과 규칙의 분화가 필요하다. 공정한 규칙이 정해지고 심판은 이 규칙을 적용해서 경기를 운영하고 선수는 이 규칙을 준수하면서 경기에서 능력을 증명하면 관중들이 아주 좋아하는 멋진 경기를 만들 수 있다. 인간 사회도 공정한 게임과 같이 운영되면 좋은 사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자연상태에서는 인간의 마음속에 자연법이 있지만 그 자연법을 현실적으로 적용하기 어렵다. 따라서 가장 힘센 선수가 마음대로 자신에게 유리한 규칙을 만들고 심판을 겸하면서 게임을 운영할 수 있다. 이것이 자연상태의 불안정 요인이며, 성경적으로 선악과를 따먹을 수 있는 불안요소이다. 공통의 척도로서 작용하는 안정된 법률(공정한 규칙) 권위를 가진 공정한 재판관(심판) 판결을 집행할 기관이 없다는 결함 때문에 불안정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바로 이러한 결함을 보완하기 위해 계약을 통해 정치 사회(시민 정부)를 구성할 필요가 생기고, 이는 규칙과 심판과 선수를 제도적으로 분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정치 사회의 시민 정부는 일종의 심판진 역할을 한다라며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 등 심판진의 삼권 분립을 통해 서로 견제하면서 균형을 유지하는데 이게 바로 선악과를 못 따먹게 만드는 사회제도적 시스템이다라고 설명했다.

 

미국 자치시스템 구축 가능케 한 청교도들의 사상적 배경은 칼뱅주의

그렇다면 메이플라워호의 청교도들은 아메리카합중국에서 어떻게 이 같은 시스템 구축에 성공했을까? 이 질문에 대해 먼저 윤 교수는 청교도들의 사상적 배경인 칼뱅의 종교개혁사상을 제시했다. 그는 칼뱅주의 사상의 7가지 혁명적 특징으로 과학 혁명 개인 혁명 조직 혁명 민주 혁명 직업 혁명 또는 직업 소명론 규율 혁명 돈 혁명 또는 자본주의 정신을 꼽았다.

먼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서 시작된 과학혁명은 칼뱅의 신학 사상과 무관하게 일어났지만 이는 과학 혁명이 대대적으로 추진될 수 있는 신앙적 동기를 부여했다. 칼뱅의 신학 사항은 신의 피조세계인 자연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것을 적극 장려했으며 근대 경험론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는 결과적으로 성경 문자에 얽매이지 않게 하는 토대, 과학에 길 열어준 셈이 됐다.

두 번째 개인 혁명과 관련해 칼뱅의 예정 교리는 결과적으로 개인들이 자신의 삶을 독립적으로 꾸려가도록 자극했다. 예정은 태초에 신에 의해 구원과 저주가 이미 정해져 있다는 의미로 누구도 신의 결정을 알 수 없으며 한번 내려진 결정은 결코 번복될 수 없다. 그렇기에 사람은 역설적으로 홀로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책임져야 하며, 바로 이 점이 전통적인 집단주의에서 개인을 분리하게 됐다. 이러한 신앙 태도에서 개인의 독립성을 강조하는 아메리카 개인주의가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칼뱅주의는 집단에서 떨어져 나온 개인들을 모래알처럼 혼자 생활하도록 그냥 놔두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전통적인 조직과 다른 새로운 형태의 조직을 만들어 냈으며 이는 역사상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매우 합리적 형태의 조직 혁명으로 이어졌다. 칼뱅주의자들은 수직적으로 각 개인이 신과 직접 관계를 맺으면서도 신의 영광을 증대하는 목적을 위해 동료 인간과 서로 수평적으로 결합하는 조직을 만들었다. 이 새로운 형태의 조직은 합리적으로 운영되는 전문화된 직업 노동 조직으로 탁월한 효율성을 발휘했고, 폭발적 과학 발전에도 기여했다.

민주 혁명과 관련해 칼뱅주의자들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존경을 표해야 했던 전통사회의 위계서열 풍습을 개혁했다. 막스 베버는 이러한 반()권위적 태도가 복종의 선서를 금욕으로 여기는 가톨릭과 달리 모든 금욕적 프로테스탄트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반권위적 태도는 금욕적 프로테스탄트의 영향을 받은 국민들, 특히 미국 국민들의 민주주의적 특질을 이루고 있다고 발제자는 설명했다.

그런가하면 예정 교리는 직업을 소명으로 여기고, 정직하고 근면한 직업 생활을 하도록 격려했다. 정직하고 근면한 직업 활동에서의 성공은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증거로서, 예정론은 운명에 굴복하는 숙명론으로 이어질 수 있는 반면, 이 증명 사상은 적극적인 행동주의를 배양, 직업 혁명/직업 소명론으로 이어졌다.

, 예정 교리가 삶 전체를 금욕적으로 통제하는 방식으로 철저한 자기 관리를 하도록 자극했다는 점에서 규율 혁명을 낳았다.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마음 내킬 때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마다 선과 악의 싸움에서 악을 억제하고 선을 행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삶 전체를 계획적으로 규율해야 한다. 1, 1초라도 헛되이 낭비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과 성격을 통제할 수 있는 금욕적인 행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끝으로 돈 혁명 또는 자본주의 정신이다. 칼뱅주의는 부를 죄로 여긴 중세 가톨릭 교리와 달리 부의 축적을 긍정적으로 보도록 동기를 부여했다. 부의 축적은 신의 소명을 수행하는 미덕이며, 직업 생활의 성공을 통해 얻어진 물질과 돈은 구원에 대한 확신을 증명하는 표시로 여겨졌다. 위험시되었던 것은 재산을 가지고 놀면서 흥청망청 쓰는 것이고 그 결과 게으름과 성적 욕망에 빠져 종교 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다. 죽으면 영원히 휴식할 수 있으므로 살아 있을 동안에는 자신의 구원을 증명하기 위해 신의 일을 쉼 없이 행해야 한다. 이는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으로 연결된다. 이에 대해 윤원근 교수는 일하는 것을 가치 있게 평가하는 것은 어마어마한 혁신이다. 그 이전에는 노동, 특히 육체노동은 천시되었다고 덧붙였다.

윤 교수는 메이플라워 서약을 중심으로 타운을 최초로 건설한 아메리카의 청교도 조상들은 이런 7가지 특징을 내면화하고 있었다. 청교도 문명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나라를, 시대를 선도하는 민주 공화국적 패권국으로 만들어줬다라며 네덜란드, 대영제국 그리고 아메리카합중국을 예로 들었다.

 

타운 제도와 청교도 관습에 바탕이 되는 유한 세계관...현대문명의 경험론평등자치로 발전

 

다음으로 타운 제도와 청교도 관습의 바탕이 되는 유한 세계관에 대한 발제가 이어졌다. 윤원근 교수는 세계관의 유형을 유한 세계관’(지동설적 세계관)무한 세계관’(천동설적 세계관)으로 분류했는데, 이의 핵심은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자신의 능력과 의지로 무한한 궁극 실재에 도달하거나 성취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유한 세계관은 무한의 절대 진리를 추구하기보다는 유한한 경험 세계를 인식하고 분석하는 객관적인 활동을 중요시한다. ‘무한 세계관은 유한 세계관과 무한 세계를 연결하는 길을 발견할 수 있다고 보면서 무한의 절대 진리를 획득하는데 더 관심이 많으며, 궁극적으로는 무한과의 합일을 지향한다. 무한 세계관은 사실 세계를, ‘유한 세계관은 인간의 관심을 중심에 둔다.

형태와 구조가 다를 뿐 유교, 힌두교, 가톨릭, 도교, 불교, 기독교 등은 모두 무한 세계관에 해당되며 이는 전통문명들의 문법이다. 반면 칼뱅주의, 청교도는 유한 세계관에 속하며 현대문명의 문법이다. 윤원근 교수는 중세 가톨릭의 무한 세계관을 돌파하여 유한 세계관을 제시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 칼뱅이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칼뱅 신학의 영향을 크게 받은 네덜란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메리카 등이 종교를 통해 계몽되면서 현대문명을 선도했다고 설명했다.

발제에 따르면 칼뱅과 청교도들은 신을 자신의 피조물을 절대적으로 초월해 있어 어떤 방법으로든 알 수 없는 존재로 보았다. 신은 가톨릭처럼 인간의 이성으로 인식할 수도 없고(이성주의 부정), 루터처럼 실존적으로 체험할 수도 없다(실존주의 부정). 인간과 자연은 더 이상 신비스럽거나 성스러운 그 무엇이 아니라 단순한 피조물로서의 존재일 뿐이어서 경험을 통해 연구할 수 있는 대상이 되었다. 이 같은 유한 세계관은 근대 경험론으로 연결되며, 경험론은 현대문명에서만 나타나는 독특한 인식 방식이다. 윤 교수는 칼뱅 사상은 이런 유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나이, 신분 등에 따라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존경하게 되어있는 전통적인 권위주의적 풍습을 피조물 신격화로 여겨 배척했다. 이것은 타운의 주민자치에서 시작되는 아메리카 민주주의의 문화적 기초가 됐다고 밝히며 발제를 마무리했다.

토론에 앞서 채진원 부회장은 그동안 주민자치와 종교와의 관계를 다뤄왔고 오늘은 그 연결선상에서 청교도를 주제로 했다. 보통 민주주의, 주민자치에 대해 추상적 개념은 잘 알고 있으나 현실에선 이를 안다고 잘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개념보다 습속 차원에서 고민하지 않으면 왜 주민자치 제도가 우리에게는 적용이 안 되는가에 대한 해답을 찾기 어렵다. 해외에서는 왜 잘 됐는지 원형 그대로 살펴볼 필요가 있어서 종교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라며 흔히 자유와 평등, 참여, 풀뿌리민주주의를 얘기하면서 우리나라는 유교 때문에 잘 안 된다고 전통 얘기를 많이 한다. 일반적으로 유교의 습속과, 민주주의의 씨앗을 뿌린 서구 청교도의 차이를 잘 모르기에 이 차이를 안다면 개선의 여지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청교도가 기존 가톨릭이나 독일 루터교와는 어떻게 다른지, 외국 사례를 도입할 때 우리식의 자의적 수용이 아니라 일단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 차이를 알 수 있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 차이를 좁혀나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고 말하며 이해를 도왔다.

 

추상적 개념보다 각 나라의 습속이 자치민주주의에 어떤 차이 낳았는지 분석해볼 때

권행완 건국대 겸임교수는 동양은 주로 인간에 대한 복종, 서양은 법률에 의한 지배와 복종에 치중된 것 같다. 동양에서는 인간중심으로 많이 설명해 리더십이 거론되는 반면, 서양은 제도중심, 시스템중심인데 왜 이런 차이가 생겼는지 궁금하다는 질문을 던졌다. 이에 윤원근 교수는 인치와 법치. 성경의 에덴동산은 모든 실과는 자유롭게 먹게 하면서 선악과는 먹지 말라고 되어 있는데 이게 곧 헌법, 자치규약과 같은 것이다. 성경은 법, 규약을 굉장히 강조한다. 십계명도 그렇고 기독교정신 전체에 법 준수가 강력한 에토스로 작용한다. 칼뱅도 신이 준 규약 준수를 강조했고, 법이 가장 중심에 있다는 사상이 내면화되어 있다. 인간은 모이면 인간이 아닌 법에 지배받아야 한다, 어딜 가든지 규칙을 만들어서 이걸 어기면 처벌을 받는다. 한 사회에서 중요한 건 리더십이 아니고 법이라는 걸 계속 강조한다. 동서양의 문화적 차이인 것 같다. 동양은 위대한 사람, 하늘의 이치 깨달은 사람이 선수로서 심판이 되도 될 것이라는 현실을 무시한 낭만적 생각을 했다. 위대한 인물에 의한 통치를 강조하다보니 권력이 부패하고 타락하고 모순이 계속되어 왔다고 답했다.

문성규 고양시 일산3동 주민자치위원은 주민자치회에 참석하면서 느낀 건 풀뿌리민주주의 간판을 그럴듯하게 걸어놨지만 전혀 민주제와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왜 우리나라는 주민자치회가 안되는가, 가장 근본적 원인은 민주교육이 안 되서 그런 것 같다. 메이플라워 서약을 한 사람들은 실제로 어떻게 주민자치를 시행했는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이에 윤원근 교수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권력자가 자치단체를 구성한 게 아니라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대표자(대리인)를 뽑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톱다운 방식이라 이걸 역으로 해야 하니 에너지소모도 심하고 뒤죽박죽 되는 것 같다. 그래도 실패하고 시행착오가 많더라도 시도하고 또 시도하고 하다보면 몸으로 습득되고 10~20년 후엔 좋은 쪽으로 가지 않을까 생각한다. 머릿속으로 아는 것과 실제 몸에 습득된 건 다르다. 이론적으로 알아도 실제로 하게 되면 힘들다. 새로운 것을 접목시키는 것 자체가 힘들다고 밝혔다.

엄관용 더가능연구소 기획실장은 칼뱅 예정설에 기초해 숙명론을 적극적 행동주의로 극복한 점이 흥미롭다. 토크빌은 유럽식 민주주의의 중앙집권적 방향에 비판적이어서 미국에서 새로운 민주주의의 가능성 발견한 것 같다라며 오늘 발제가 타운십을 칼뱅주의, 청교도주의 내면화로 해석하는 근원에 대한 탐구가 의미 있는 것 같다. 다만, 우리나라에서의 함의 차원에서 한국에 기독교가 굉장히 확산돼 있는데 물론 칼뱅주의 영향은 아니라도 한국의 기독교가 주민자치 결사체, 다원주의에 긍정적 역할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또 우리나라 주민자치의 활성화가 지방자치 발전에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는지, 한국에서의 가능성을 어떻게 찾으면 좋을지 궁금하다고 질의했다.

이제 윤 교수는 한국이 기독교를 많이 받아들였고 그 중에서도 특히 장로교, 칼뱅도 장로교에 속하는데, 근데 왜 기독교가 자치나 다원화에 기여를 못하고 있는가? 교회가 수없이 많은 자발적 결사체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자체가 민주주의에 기여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한국사회의 다원화된 중심축으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 교회의 운영이 독단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등 한국 교회의 부작용은 칼뱅주의 자체의 결함에 유교적 영향이 있는 것 같다. 칼뱅주의는 민주적 결사체를 만드는데 큰 역할을 했지만 따지고 보면 이는 엘리트 민주주의이다. 민주주의가 없던 시대에 서로 증명된 사람들의 모임이랄까. 대중민주주의와는 다른 영웅적 인간, 교민에 대한 선망이 있어 위선적인 방식으로 권력을 독점하고 실천은 따르지 못했다고 평했다.

한편, 현 주민자치회 운영과 타운과의 비교에 대한 이섬숙 서울시 주민자치여성회의 상임회장의 질문에 대해 윤 교수는 주민자치회가 필요한가? 차라리 읍면동장을 투표로 뽑는 게 낫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지금 상황에서 주민자치회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혹시 사족 같은 단체는 아닌지? 명실공히 국민을 대표하는 대표자를 공식적으로 선출하는 식으로 바꾸는 게 타운십에 적합한 제도라는 생각이 든다고 답했다.

 

형식적인 주민자치회 보다 읍면동장 직선제가 더 현실적?...시간 걸려도 계속 시도해야

전상직 한국자치학회장은 수평적인 관계가 축적되면 나중에 아름답게 변화하는 특성이 있는데 이걸 수직적 관계로 끌어올리면? 정치-행정-사회적 수직관계로 다 찌그러져 있다. 수평적 관계가 찌그러지지 않고 탄력성을 가지는 게 자치력이다. 중앙수직적 관계의 간섭을 받더라도 곧바로 복원되어야 이게 자치력인데 과연 우리나라에 자치력이 있었느냐? 촌계에는 이 자치력이 있었다. 위에서 어떻게 하든 간에 촌계는 탄력성을 가지고 나름대로 독자적인 걸 해나갔다. 그렇다면 미국에서는 이 탄력성이 어떻게 형성됐나? 칼뱅주의에 상당히 주목할 만한 요소들이 많았다. 그 중 미국이라는 나라에 청교도들이 처음 도착 했을 때 아무 것도 없었지만 기회는 무궁무진하게 열려 있었다. 이웃과 경쟁할 필요 없이 개척만 하면 되니까 수평적 관계가 돈독해질 수밖에 없었고, 집단생활을 하다 보니 학교, 경찰서 등을 자치적으로 건설했고 그 위에 상층부를 쌓아가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버티고 있는 저력이 있다고 봤다. 그럼 한국은? 어릴 때 동네에서 수평적 소통이 잘 될 수밖에 없는 건 농사나 관혼상제 등을 공동으로 할 수밖에 없어 고양이손도 빌린다고 할 정도로 끈끈했다. 이게 다 사라진 지금, 어떻게 할 것인가. 서울에 인구가 확 늘어났지만 여기엔 아무런 공동체적 정책이 투입되지 않고 주거, 도로정책만 있었다. 사회가 가지고 있는 탄력성, 자치력의 복원이 고려된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주민자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윤원근 교수는 한국의 주민자치, 시간이 걸릴 거라 생각한다. 말로 떠든다고 되는 게 아니고 이런 세미나 등 여러 과정이 축적되고 읍면동장 선거를 하고... 물론 그 과정에서 말단의 부패는 더 많이 생길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주민자치회를 하지 말자? 직선 하지 말자? 하면 안 된다. 수직-수평적 평등을 얘기하기 전에 사람보다 법을 중시하는 문화를 만들고, 수직적 사고방식은 없어져야 될 것이다. 그래도 절망적인 생각보다, 그리고 칼을 만들면서 먼저 고기 구워먹을 생각부터 하지 말고 칼 만드는데 충실하다보면 언젠가 고기를 먹을 날도 올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진=이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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