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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원동향약의 상장례 부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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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원동향약의 상장례 부조
  • 박경하 한국자치학회 부설 향촌사회사연구소장(중앙대학교 역사학과 명예교수)
  • 승인 2022.05.20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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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약 이야기

조선시대 향촌사회의 자치규약’. ‘향약의 사전적 의미이다. 여기에 바로 이어지는 것은 덕업상권’‘과실상규’‘예속상교’‘환난상휼등 학창시절 역사시간에 달달 외웠던 향약의 4대 강목이다. 다분히 정형화되고 박제화 된 향약에 대한 인식을 바꿔준 것이 바로 조선시대 기층민들의 상부상조 자치조직 촌계이다. 오늘날 주민자치의 한 원형과 단초를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이에 조선시대 향촌사연구 전문가로 사단법인 한국자치학회 부설 향촌사회사연구소장인 박경하 교수의 향약이야기를 연재한다. 전통시대 향약·촌계를 재조명함으로써 오늘날 주민자치에 주는 의미와 시사점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편집자주]

 

남원 원천방의 원천동계(源泉洞契)는 태인 고현동계과 함께 400~500년 동안 장기 지속되는 동계로서 전북지역만의 특색을 보여 준다. 남원의 원천동계는 1638년부터 1900년대까지의 관련문헌들이 현재까지도 보존되어 전해진다.

원천동계는 1572(선조 5)부터 실시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인한 병폐로 중단되었다가 향촌지배질서의 재정립을 위해 1638(인조 16) 중수(重修, 낡고 헌 것을 손질하며 고침)되었다. 이 동계는 원천방의 재지사족들이 결성한 동계이며 여기에는 남원 향회(鄕會)의 향안에 명기된 사족들도 포함되어 있다. 원천방의 사족들은 서로 밀접한 혼인관계로 형성되어 초기 동계조직의 모습은 족계적인 성격에서 출발한 것으로 추정된다.

오늘날 남아있는 원천동계의 문헌은 20종으로, 원천동계 연구는 17·18세기 원천방 사족 층의 향촌지배방식과 동계 조직의 변화양상을 이해하는 데 유용하다

 

남원 원천동계, 재지사족의 향촌지배방식-동계 변화양상 살필 수 있어

원천동계 조목에서는 여러 직임 중 유사(有司)나 직월(直月), 색장(色掌)의 직무가 대부분이며 유사는 2명씩 상유사· 유사를 선출하였고 임기는 1년이다.

1662년 유사 직을 맡은 정만일(丁萬鎰, 1648~1709)은 압해 정씨 족보에서 확인되는데 사족의 신분이기에 상유사를 맡은 것으로 짐작된다. 반대로 하유사는 사족보다는 하위 신분인 서족이나 양민에서 맡았을 것이다. 실질적인 계의 전반적인 일을 처리하는 유사는 계원 간의 연락업무와 문서의 관리, 계의 기금 및 거출금의 수납·관리, 대부 곡식의 수납·관리 등의 업무를 맡는다.

색장은 농사를 권농하는 직무로 한 달 마다 교체하였고, 장의는 천거에 의해 1명씩 뽑고 2년마다 교체하였다. 장의는 그 임무가 막중하여 대행을 금하였고 나이가 50세 이상인 사람만이 선출될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원천동계의 경우도 조선후기 다른 동계들과 마찬가지로 여씨향약의 네 강목을 중심으로 정의하였다. 1638년의 원천동계에서는 덕업행권, 과실상규, 환난상구 세 강목 중심에서 1662년부터는 예속상교조가 추가로 기입되어 존자(尊者), 장자(長子), 적자(敵者), 소자(少者), 유자(幼者)는 서로 만나면 예의를 갖추고 안부를 묻는 것을 내용으로 삼았다.

무엇보다 동계·동약의 기능은 대체로 환난에 있어서의 상구와 길흉에의 상호부조를 표방하고 있다. 이러한 원칙은 동계가 향촌의 생활공동체로서의 기능을 수행하는 중심체 역할을 하는 것에 다름없다.

환난상구조에서의 수화(水火도적(盗賊질병(疾病사상(死喪고약(孤弱무왕(誣枉빈핍(貧乏) 등의 내용은 전 동민의 공동의 협력과 관심을 요구하는 것에 중요성을 두었다. 혼상부조는 원천동계도 그러하듯이 동계 운영의 중심이며 이를 통해 계원간의 상호보완적인 질서를 추구하였다.

원동향약(사진=남원시청)
원동향약(사진=남원시청)

 

동계동약, 환난상구-상호부조 등 생활공동체 기능 수행의 중심

상장례 부조 내용은 전체 계안의 조목 중에서도 상당히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원천동계의 특징인 상중하계(上中下契)의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다. 1638원천동계에서 하도유상(下徒有䘮)’으로 보아 원천동계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상하합계의 형태로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상도(上徒)가 초상을 당하면 초석 4·백지 1·상지 1·생마 2·송진 3되를 주고 상하동민에서 부역을 한다. 하도에게는 백미 2·백지 1·상지 1·들깨 3되를 주지만 부역군에 대한 규정은 없다.

1662운천동계중수안에서는 상도의 상사에 하도가 일을 도와주며 상도도 담지군(擔持軍)에게 베() 10() 1필씩 지급하도록 규정하였다. 반대로 하도의 상사에는 직월이 사람을 보내 위문을 하고 백지 1권을 부조하도록 하였다.

이렇듯 상도는 사족이라는 명분으로 하도의 노동력을 함부로 착취하지 못하며 하도에게도 같은 계원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여야 했다. 동계에서 이러한 상하간의 구분은 하층민을 지역공동체의 구성원으로 간주하고 포섭하는 동시에 신분적 지배력을 행사하기 위한 통합과 통제의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일방적 통제가 아닌 사족집단과의 동일한 조직으로서의 공동체적 유대를 표방한 효과적인 통제를 위한 방편이었다.

 

상하합계, 통합통제의 결과물일방적아닌 공동체적 유대표방 효과적 통제 이뤄져

1667년에도 상도의 상사에는 멀고 가까움을 계산하지 말고 하루 일을 하며 주가(主家)에서 특별히 술과 식사를 넉넉히 준비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18세기 후반에는 이와 반대되는 상황에 대한 조목이 등장한다.

1765년의 동액중수안에서는 상도가 상을 당하면 직월은 부고를 알려 동약원들이 모두 모여 호상하게 하고, 각각 노복 1명과 빈청을 만들 수 있는 빈석 1개를 내게 한다. 그리고 주가의 원에 따라 장례 때까지 일을 해준다. 또 주가가 가난하여 예를 갖추지 못하고 일을 해주는 것을 바라지 않으면 동약원당 백미 2되씩을 직월이 거두어 주가에 보내 서로 돌보는 도를 지킨다라고 하여 비록 상도이지만 가난하여 부역꾼에 대한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경우 도리어 동약원들이 출자하여 주가를 도왔다.

이는 환난상휼조에서 구휼해야하는 사람이 있으면 약정이나 동약자의 가까운 사람이 보고하여 알리도록 하고 도움을 주려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호의 의지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사회적 약자는 재난이나 빈궁으로 인해 소외된 사람이기 때문에 신분적 차등으로 구분된 사람이 아니다. 때문에 하도도 가난한 상도를 위해 구휼하는 것은 당연한 도리였으며 만약 이를 어길 시 중벌을 부과해 벌을 받아야 했다.

1638년부터 1885년까지 초상시의 부조액은 혼례와 비교 했을 때 더욱 세부적이며 동계의 운영 면에서도 재정적인 확보와 지출을 많이 한 부분이었다. 1638년 초상을 당하면 초석 4·백지 1·상지 1·생마 2·송진 3되를 부조하였고, 1662년에는 초상을 당하거나 장례를 치르는 사람에게는 쌀이나 콩 중 5·백지 1·빈석 2·인부 1명을 보냈다.

1667년의 신증절목에서는 초상을 당하게 되면 초석 4·생마 3·송진 3·관 도배지 1·빈청을 만들 하도를 보냈다. 시기는 같지만 동안이 다른 향약조목에서는 초상을 당하면 상포 30·초석 4·백지 2·생마 2근을 지급한다. 그리고 형과 아우가 계원이면 상포는 각 1필만을 지급할 것으로 명시하였다. 1885년에도 초상이나 장례를 치르는 사람에게는 쌀이나 콩 중 5·백지 1·빈 가마니 2·인부 1명을 보내도록 하였다.

이처럼 상장례와 관련해서는 그 부조액의 내용은 변화하지만 격차가 크지 않았다. 원천동계가 환난상휼의 향약정신을 기반으로 상장례 때에는 부조를 통해 상하 계원들간의 상부상조를 미덕으로 삼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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