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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자치교육과 고갱의 세 가지 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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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자치교육과 고갱의 세 가지 물음
  • 이관춘 연세대학교 객원교수
  • 승인 2022.05.26 14: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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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춘의 마을·자치·교육

대학 강의실이든 주민자치에 관한 교육에서든 강의내용 못지않게 중요한 건 강의에 집중시키는 교수법이다. 학습자의 마음이 딴 데 가있는데 교육의 성과인 학습이 될 리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상과 장소, 교육목적에 따라 천차만별인데다 변덕마저 심한 학습자들의 흥미와 관심을 유발시키는 일은 강의실에 들어설 때마다 늘 골칫거리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여름날, 모처럼 널리 알려진 그림 하나를 강의실로 가져왔다. 그 날 강의가 인간으로서의 를 성찰하는 내용이었던지라 나름 고심해서 선택한 것이었다. 그림에 웬만한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알 만한 19세기 말 인상주의(혹은 탈인상주의) 화가인 폴 고갱(Paul Gauguin)의 작품이다. 작품의 제목은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Where Do We Come From?), 무엇이고(What Are We?), 어디로 가는가?(Where Are We Going?)’이다. 좀체 보기 힘든 제목인데다 철학적 사유가 물씬 풍기는 그림이다. 누가 봐도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있는 것임을 감 잡을 수 있다.

그림에 집중하는 학생들의 호기심어린 시선을 등 뒤로 느끼면서 내심 흡족해하고 있던 순간, 몇 몇 학생이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린다. “! 난 누구, 여긴 어디...” 그림을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이 반가워 그림에 대한 설명을 부탁했다. 그림은 잘 모르지만 유행하는 요즘 사자성어가 있는데 그게 난 누구, 여긴 어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유행어라면 그저 젊은 층에서 떠도는 해학성이나 풍자성을 띤 경박한 조어(造語) 정도로 치부하던 내겐 예상 밖의 충격이었다. 시대를 반영하는 현상이 유행어일 텐데 참 우리사회가 어느덧 정신적으로 이렇게 성숙해졌는가 하는 감탄과 기대가 앞질렀다.

과거 먹고 살기에 급급했던 때는 미처 생각할 수도 없었던 생각, 자신과 삶을 성찰하는 인간 실존에 대한 질문이 아닌가? 유행이라고 하니 인터넷을 통해 확인해 보았다. 유행하는 말인지는 모르지만 요즘은 아니었다. 1990년대 초중반 어느 가수의 우리는이라는 노래가사에 포함된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에서 따온 말이라고 한다. 물론 가사 내용이 나의 기대와 일치하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일상에서 놓치고 있는 근원적 물음을 제기하는 것은 분명했다.

 

주민자치교육을 여는 실존적 물음

폴 고갱
폴 고갱

 

미술사에서 가장 철학적인 제목의 작품일지도 모를 이 고갱의 작품은 그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뜨기 몇 해 전(1897)에 탄생하였다. 가로 4m, 세로 1m가 넘는 대작이다. 고갱 자신의 파란만장한 삶을 아우르는 역작이자 그 처절하리만치 힘들었던 삶의 경험에서 솟구쳐 나온 인간 실존에 대한 물음이었을 것이다.

물론 인간 스스로에 대한 실존적 물음이 고갱의 작품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동서양 철학의 출발이 바로 이런 물음에서 시작되었다. 물론 현학적인 철학의 주제만은 아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고단한 삶의 주인공인 사람들 모두에게 어느 순간 불연 듯 찾아드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고갱보다는 늦었지만 우리사회는 일찌감치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라는 실존적 물음을 노래로 유행시켰다.

고갱의 제목이나 우리 유행가를 좀 더 줄이면 요즘 유행어라는 난 누구, 여긴 어디?”가 된다. 늦가을바람이 옷 속을 파고드는 스산한 느낌을 주지만 곰곰 생각할수록 이 물음만큼 인간의 삶과 교육에서 우선적으로 제기되어야 할 물음은 없는 듯싶다.

주민들의 자치를 위한 교육에서도 마찬가지다. 주민자치의 당위와 중요성, 그리고 실질적인 실천방안에 대한 논의와 교육은 당연히 시급하고 중요하다. 그러나 인간만의 숭고한 권리이자 자유인 자치의 근본적 의미를 이해하기 위한 전제 조건은 바로 나는 누구인가?’의 실존적 물음이다. 자치의 주체인 를 모르면서 자치의 의미와 당위성을 알 수는 없지 않은가.

물론 주민자치교육을 통해 주민자치에 관한 지식과 정보, 방법과 전략 등등을 획득하고 함양할 수는 있다. 문제는 과연 학습자로서의 주민들은 물론 주민자치정책과 관련된 사람들의 실존적 변화가 일어나느냐에 있다. 실존의 관점에서 인간은 가능성으로 존재한다. 아무리 교육을 받더라도 학습자가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향해 몸을 던지고, 즉 기투(企投)하고 실행하지 않으면 학습은 실질적으로 일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주민자치교육은 물론 학교교육을 포함한 모든 성인교육에서 교육과 학습의 괴리가 발생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교육은 있지만 학습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주민자치교육은 단지 특정한 지식이나 기술, 기능을 전수하는 교육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주민자치교육은 본질적인 현존(Dasein)과 관련된 교육으로서 실존의 변화를 목표로 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현존이란 다른 동물과 구분되는 독특한 존재방식을 가진 인간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 독특한 존재방식이 바로 실존을 의미한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존재인가?‘를 물을 수 있고 또 묻는 인간만의 특이한 존재방식이 실존인 것이다. 이런 현존재인 인간의 실존적 변화는 교육을 통한 학습자의 내면화와 자신의 몸을 던지는 실행력을 갖게 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주민자치교육이나 가치의 변화를 지향하는 도덕·윤리교육, 시민교육, 믿음의 변화를 목표로 하는 종교교육 등은 내면화를 통한 마음의 변화와 실천이 일어날 때만 교육의 목적이 달성되는 것이다. 이런 변화와 실천이 없을 때 교육은 실패한다. 교육이 아니라 교화(敎化)이며 사육(飼育)이 될 수 있다. 그 결과 교육은 있지만 학습은 없고, 종교교육은 있지만 신앙인이 없으며, 도덕교육은 있지만 도덕적 인간이 없는 사회가 되고 만다. 겉으로는 정의와 공정을 외치지만 속으로는 자신의 이익과 권력을 위해 정의와 공정을 짓밟는 괴물정치인, 법률 기술자들이 버젓이 활보하는 사회가 되는 것이다.

 

나는 누구이고 자치는 무엇인가

나는 어디서 온 누구인가의 실존적 물음은 피천득 시인의 시, ‘에 간명하게 함축되어 있다.

 

눈보라 헤치며 날아와

눈 쌓이는 가지에 나래를 털고

그저 얼마동안 앉아 있다가

깃털 하나 아니 떨구고

아득한 눈 속으로

사라져 가는 너

 

인간의 실존은 그저 어디선가 날아와/ 얼마동안 있다가/ 어디론가 사라져 가는시인의 이다. 에 대한 물음은 나 자신과 내가 사는 세상에 대한 근원적이며 실존적인 물음이다. 실존적 물음은 실존적 공허감이나 실존적 좌절을 느낄 때 내면에서 우러나오게 된다.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에 의하면 실존적 공허감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잘 모를 때 따라다니는 내적인 공허이자 허무감을 의미한다. 실존적 좌절은 개개인이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이 좌절당하는 것이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실존적 공허 혹은 좌절을 겪는 존재이지만 반면에 그 실존이 인간을 더욱 고귀하고 찬란한 존재로 만든다. 실존적 물음에 대한 보편적이며 일치된 답은 없다. 프란시스 쉐퍼의 말대로, 고갱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있다면 온 것도 없고, 아무 것도 아니며, 갈 곳도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실존적 물음 자체가 답이며 답을 함축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인간은 피천득 시인이 말한 그 얼마동안 앉아 있다 떠나는존재이기 때문에 더욱 찬란하고 소중하다는 것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폴란드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는 시한부 인생을 사는 인간을 그녀의 시 두 번은 없다에서 다음과 같이 잔잔하게 표현하고 있다.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

우리가, 세상이란 이름의 학교에서/ 가장 바보 같은 학생일지라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낙제란 없는 법/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 두 번의 똑같은 밤도 없고/

두 번의 한결같은 입맞춤도 없고/ 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

너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너는 사라진다 그러므로 아름답다/

 

두 번의 똑같은 밤도/ 두 번의 한결같은 입맞춤도/ 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없는 유한성이 실존이기에 인간의 삶은 소중하고 찬란하다. 인간이 자신의 삶을, 자신이 주인이 되어 주체적으로 살아야 하는 당위도 여기에서 출발한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신만의 삶이기에 자신의 삶을 스스로 통제하고 결정한다는 주민자치는 인간의 권리이자 실존적 당위이다. 이러한 자치의 실존적 의미가 주민 개개인의 의식에 내면화될 때 비로소 주민이 삶의 입법자가 되는 것이다.

 

고갱과 고흐, 그리고 자치의 부조리

빈센트 반 고흐
빈센트 반 고흐

폴 고갱 하면 빼놓을 수 없는 또 다른 화가가 빈센트 반 고흐다. 같은 시대 같은 지역에서 그림을 그렸으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는 점도 공통이다. 두 화가 모두 생전에는 작품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당시 파리를 포함한 유럽 도시인들의 삶이 그러했듯이 고갱은 아내와 다섯 자식을 부양하느라 억척같이 일을 했다. 그러면서도 돈이 안 되는 화가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 생활비도 제대로 못 대는 남편에게 아내의 잔소리는 끊이질 않았다. 허나 고갱은 그림을 그리는 것은 물론 당시의 인상파 화가들과 그림에 대한 연구를 놓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파리화단에 알려지면서 고흐와도 친분을 쌓게 되었다. 고흐처럼 자신의 귀를 자른 기행만 빼고 고갱은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의 작품세계를 치열하게 탐구하면서 구축해 나갔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세인의 관심은 받았지만 경제적으로 보탬이 되지 않기는 고흐와 상황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삶의 힘겨움과 그림에 대한 절박함을 세상은 알아주지 않았다. 결국 극심한 우울증은 술과 방탕한 생활, 성병으로 이어졌고 급기야 자살까지 시도하기에 이르렀다.

고흐는 파란만장하기로는 고갱 못지않았다. 고흐는 생전에는 제대로 된 평가 한번 받지 못하고 작품도 팔지 못했다. 천재적인 화가에게 닥친 실존적 부조리에 대한 질문이 정신질환으로 연결된 것은 어찌 보면 이해할 수 있는 결말이다. 고흐는 죽기 한 해 전에 자신의 귀를 자른 자화상을 그렸다.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이다. 고흐의 귀 잘린 자화상은 고갱과의 불화와 관련이 있으며 그 불화의 이유에는 그림에 대한 서로의 생각의 차이가 한 몫 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그림은 사물을 직접 보고 그대로 그리는 것이라 믿었던 고흐에게, 화가의 상상을 통한 새로운 풍경의 발명을 주장했던 고갱의 상징주의가 영 마뜩치 않았을 것이다. 화가에게나 학자에게나 자신의 세계관에 대한 부정은 곧 자기존재의 의미상실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자화상 속의 고흐는 너무도 슬프고 절망적인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고갱이나 고흐의 힘겨운 예술적인 삶은 한 마디로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처절한 인식과 투쟁이었다. 합리적 이성을 가진 고갱이나 고흐의 세계인식 및 예술적 진리이해와, 그 이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두 천재 화가의 힘겨운 실존상황이란 두 대립항이 공존한다는 게 부조리였다. 두 화가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그들의 작품을 알아주지 못하는 세상에 내던져진 것도 부조리이다. 헌데 그들의 삶에서조차 그들 아닌 다른 사람들, 경제문제와 같은 다른 것들이 그들의 삶에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었으니 더더욱 부조리한 상황이었다. 한 마디로 자신들이 지극히 자유롭게 주체가 되어 자치적으로 예술가적 삶을 살아야 한다는 실존의식이, 비실존적인 다른 사회경제적 이유로 인해 좌절되는 부조리한 상황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그 실존적 부조리에서 출발한 실존적 좌절을 고갱은 세 가지 물음으로 표현하였고, 빈센트 반 고흐는 때로는 귀를 자르는 기행으로 때로는 자신의 자화상을 통해 온 몸으로 표현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고갱과 고흐는 예술가로서의 그들의 삶의 주인이 될 때 만족하고 자기 효능감을 느끼게 된다. 마찬가지로 공동체의 주민으로서의 우리 각자는 스스로가 자신의 삶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삶을 살 수 있을 때 내면의 충족과 행복을 얻게 된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주민자치의 현실은 부조리 그 자체이다. 이성을 가진 인간의 주민자치라는 실존적 당위성과, 그 이성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비실존적인 상황이란 두 대립항이 여전히 공존하고 있다. 지방자치 시대라고 말은 하지만 주민자치는 의사결정권자들의 무관심 속에 실질적인 정착을 하지 못하고 있다. 주민이 중심이 되어야 할 주민자치에서조차 주민이 아닌 다른 것들이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으니 부조리인 것이다.

부조리의 극복은 부조리의 인식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부조리는 주민으로서의 우리 각자 각자에 대한 실존적 인식을 전제로 한다. 실존적 인식이란 나 자신과 내가 사는 세상에 대한 근원적 물음이다. 따라서 난 누구? 여긴 어디?’라는 고갱의 물음은 젊은이들의 유행어가 아니라 주민자치교육의 핵심이자 지속적인 주제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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