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6 16:55 (금)
주민자치 교육, ‘옳음’인가 ‘좋음’인가?
상태바
주민자치 교육, ‘옳음’인가 ‘좋음’인가?
  • 이관춘 연세대학교 객원교수
  • 승인 2022.06.17 10: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관춘의 마을·자치·교육

손흥민이 세계 최고 레벨의 축구 무대인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에서 득점왕에 오르면서 국내외적으로 찬사를 받고 있다. 축구의 종가라는 영국에서, 전 세계인들이 보는 가운데 아시아 선수 최초로 이룬 쾌거이니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느낀다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필자가 눈여겨보는 것은 해외 언론의 반응이다.

사진=손흥민 인스타그램
사진=손흥민 인스타그램

 

득점왕 손흥민과 교육철학

한 예로 영국의 한 스포츠 방송 앵커는 지난 25년간 축구방송을 해 왔지만 동료 선수들이 한 선수의 득점왕을 만들어주기 위해 헌신하는 모습은 처음 봤다고 감탄했다. 한 골이라도 자기가 더 넣으려는 프로 세계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팀 내에서 손흥민의 위치와 평가가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손흥민은 현재의 자신은 오로지 아버지의 교육의 결과라고 말한다. 그의 아버지인 손웅정 손축구아카데미 감독은 최근 펴낸 에세이 집(수오서재)에서 아들을 길러낸 그 교육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모든 것은 기본에서 시작한다.” 아버지는 축구의 기본은 물론이고 인성의 기본인 겸손을 교육시키는 데도 철저했다. 그래서인지 영국 방송이 감탄한 득점왕을 만들어주기 위해 노력한 동료 선수들의 헌신은 늘 겸손하라!”를 강조했던 아버지 교육철학의 결실이라는 생각이 든다.

교육이 어디 축구뿐인가. 모든 교육은 철학을 바탕으로 한다. 교육철학을 내세우는 초중등학교나 대학에서의 교육만이 아니다. 가정에서의 일상적인 부모의 잔소리에서부터 사회 각 기관 및 단체의 다양한 교육에 이르기까지, 교육을 통해 강조하는 지식이나 가치 규범의 기준은 철학을 바탕으로 하며 그 철학을 실현시키는 것이 교육이다. 따라서 철학과 교육은 분리될 수가 없는 것이며 철학이 없는 교육은 존재할 수 없다. 교육은 철학의 목적이며 소이연(所以然, 그렇게 된 까닭)인 것이다. 철학은 인식론이나 존재론, 형이상학을 운운하는 소수의 관념적인 유희 혹은 철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의 현학적인 담론이 아니다. 더 나아가 개개인에 대한 교육은 물론 한 사회의 관행과 제도 역시 철학적 이론의 구현이라 할 수 있다.

철학자 마이클 샌델(Sandel)의 지적한 대로, 정치에 관여하는 것 자체가 혹은 사회제도나 규범을 따르는 것 자체가 이미 철학과 연관되는 것이다. 국가 운영도 마찬가지다. 고대 그리스 플라톤의 국가나 중국의 공자의 모든 철학은 결국 이상국가 건설을 위한 교육론이며, 조선은 국왕부터 사대부까지 모두가 유학과 성리학, 주자학에 기초한 철학자이자 종교가와 다름없었다. 15세기 이후 세계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500년을 지속한 조선의 생명력은 바로 철학에 있었던 것이다.

이 점은 공식적으로 선진국에 진입했다는 지금의 한국사회에 시사 하는 바가 크다. 대학에서는 인문학이 취업에 별 도움이 안 되는 전공으로 인식되고, 학교 밖에서는 철학적 논의가 먹고 사는 문제와 관련 없는한담(閑談)으로 치부되는 경우, 경제에 기반한 선진국은 결국 요란한 빈 수레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철학, 교육의 블랙박스

모든 교육은 철학을 바탕으로 하지만, 그 철학의 옳고 그름은 다른 문제이다. 또한 교육을 한다고 해서 반드시 철학이 실현되는 것도 아니다. 교육의 성공에는 교수자의 철학만이 아닌 다른 여러 요인들이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부모의 훌륭한 철학이 있다 해도 자녀교육이 결실을 맺지 못하는 사례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사진=수오서재
사진=수오서재

다행히도 손흥민의 경우는 아버지의 교육이 성공한 사례라 할 수 있다. 교육의 성공은 일방향(one-way)이 아니라 쌍방향(two-way)을 요구한다. 축구 코치로서의 아버지는 확고한 축구 철학을 가지고 있었고, 아들은 아버지 축구철학의 의미와 중요성을 체화(體化)시켜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이다. 교수자와 학습자 모두가 교육철학을 공유할 때만이 교육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음은 물론 교육의 과정에서 직면하는 난제를 극복할 수 있는 이 생긴다.

같은 맥락에서 대학 강의실이나 혹은 일반 성인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를 하다보면 학습자들은 대체로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학습의 주체가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객체가 되는 사람이 있다. 몇 해 전 서울 코엑스의 가장 크다는 회의실에서 강의를 하게 되었을 때의 경험이다. 회의실 끝이 가물거릴 정도로 큰 대형 회의실에 들어오는 참가자들의 모습을 무심코 지켜보다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천 여 명은 족히 넘는 사람들 모두가 한결같이 맨 앞좌석부터 자리를 메우는 것이었다. 강의가 시작되자 한 마디라도 놓칠 새라 메모하기에 바쁜 모습이다. 강사에 대한 반응과 표정도 적극적이다. 대학에서 교양강의나 채플 수업을 듣기 위해 대형 강의실에 들어와 자리 잡는 모습이나 강의를 듣는 학생들의 일반적인 태도와는 비교되는 광경이었다.

유머를 전공하는 어느 교수는 이런 두 가지 부류를 깔때기빨대로 비유하기도 한다. 깔때기는 주로 강의실 앞쪽에 앉는 것은 물론 교수와의 아이 컨택에도 적극적이다. 반면 빨대들은 뒷자리나 창가, 아니면 머리 큰 친구 뒤에 앉아서 가급적 교수와 눈을 맞추지 않으려 한다. 강의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와 웃음, 필기하는 열정, 질문에 대한 반응 등에서도 이 구분은 효과적이다.

물론 유머 수준의 해석이지만 이런 구분은 철학적 관점으로도 확대될 수 있다. 에리히 프롬에 의하면 이런 두 부류의 사람들은 소유양식의 학습자와 존재양식의 학습자로 구분된다. 즉 지식을 단지 소유하는 데 목적이 있는 사람과 지식을 통해 변화가 되는 학습자의 차이이다.

영국 교육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피터스는 교육받은 사람훈련받은 사람으로 구분한다. 예를 들어 훈련받은병사는 총을 쏘는 방법에 관한 앎을 가지고 있지만, ‘교육받은지휘관은 전쟁에 대한 사실에 관한 앎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부류의 학습자를 구분하는 핵심적인 기준은 결국 철학의 내면화에 있다. 학습자가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와 중요성을 비판적 이성을 사용하여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주민자치, 그리고 옳음과 좋음

주민자치를 위한 교육에서도 마찬가지다. 주민자치교육 없는 주민자치는 기대하기 어렵다. 또한 주민자치교육은 주민자치에 대한 철학적 바탕이 없이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왜 주민자치가 필요하고 중요한지에 대한 주민 각자 각자의 이해와 공유된 철학이 내면화될 때 교육을 통한 주민자치는 실질적인 결실을 맺게 된다.

축구선수가 되기 위한 길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자신의 존재가치를 축구에서 찾겠다는 철학과 열망이 있다면 어떠한 힘든 훈련도 견뎌낼 수 있음을 손흥민은 보여주었다. 주민자치를 어렵게 만드는 현실적인 요인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또한 먹고 살기도 바쁜 일상에서 주민들의 자치참여 활동이 주민 각자에게 즉각적이며 가시적인 이득을 가져다주지 못할 때 주민자치 활동에 참여하려는 욕구나 동기가 약화될 수도 있다.

허나 심리학에서는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단지 현실적인 보상만이 아니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오히려 내면의 정신적인 동인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주민자치가 주민 개개인의 존재이유이며 실존적 당위라는 철학적 이해와 신념이 바탕이 된다면 실질적 주민자치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들을 극복할 수 있는 정신적 힘(Macht)’을 창출하게 된다. ‘득점왕이 되려는 축구선수의 동기가 단지 금전적인 이득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면 주민자치에 대한 정신적 동인(動因)이 되는 철학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접근방식에 따라 다양할 수 있다. 그러나 자기의 일을 자기 스스로 다스리는 것이란 자치(自治)의 자의(字意)적 의미에서 보듯, 자치는 인간 실존의 핵심적이며 당위적인 전제임을 되새겨 본다면, 자치교육의 철학은 자치의 당위성(must)’에서 출발해야 함을 알 수 있다.

이 당위성은 필연적으로 윤리학이나 정치철학의 핵심 주제인 옳음(the right)이냐 좋음(the good)이냐의 논의로 연계된다. 이 두 개념의 구분은 서양의 자유주의 전통과 공동체주의 입장이 맞서면서 1980년대 이후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사진=한국경제신문사
사진=한국경제신문사

먼저 주목할 점은, 샌델이 왜 도덕인가?(Why morality)에서 지적하듯이 정치철학의 궁극적인 문제들, 즉 정의와 가치, 좋은 삶의 본질과 관련한 문제들에는 불확실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 모두는 언제나 모종의 답에 의지해 살아간다는 점이다.

우리 사회의 실질적 주민자치의 본질에 관한 문제와 전망 역시 불확실하다. 하지만 의식을 하든 안 하든 주민자치에 영향력을 미치는 정치인, 공무원은 물론 주민들까지도 주민자치의 본질에 대한 모종의 답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 답이란 바로 주민자치를 옳음으로 보느냐, 좋음으로 인식하느냐의 선택이다.

지면 제약 상 옳음과 좋음의 철학사적 개념 정의나 관계, 그에 대한 논쟁은 차치하기로 하자. 단순화의 위험성을 무릅쓰고 정의한다면 옳음은 개인의 권리’(정의와 자유, 자기결정 등)로서 보편적이며 절대적인 가치를 의미한다. 반면에 좋음은 개인이나 사회가 가치있고 ()’하다고 여기는 것으로서 상대적이고 주관적 성격이 강하다. 우리 모두는 의사결정을 할 때, 옳음과 좋음을 놓고 우선시되어야 할 가치를 무엇으로 보느냐를 결정한다.

한 예로, 가습기 살균제 사망이나 세월호 침몰 같은 다양한 사회적 사건들에 대한 평가도 옳음과 좋음의 관점에서 차이가 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의 차이가 바로 윤리학이나 정치철학의 판단기준인 자유주의와 공리주의이다. 즉 공리주의는 정의로운 사회가 되기 위해 우선시되어야 할 가치를 최대 다수의 행복(공리)’으로 보는 반면, 칸트와 롤스로 이어지는 자유주의는 옳음을 우선시한다.

 

주민자치는 좋음에 우선한다

주민자치는 옳음(권리)의 문제인가 아니면 좋음(가치)의 문제인가? 다양한 논의가 가능할 것이다. 또한 옳음과 좋음이 늘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 일 수도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주민자치는 좋음에 우선한다. 자유주의 전통에서 강조하듯 주민자치는 주민 스스로 결정하고 실천하는시민주권이자 권리의 문제라는 것이다. 개인의 자기선택, 자기결정의 권리 혹은 정의로서의 주민자치는 실질적으로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의 칸트에 의해 철학적 토대가 마련되었으며 20세기 존 롤스(Rawls)에 의해 가장 완벽하게 다듬어졌다고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칸트의 자유주의나 롤스의 정치적 자유주의는,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것은 괴테의 표현대로 하늘이 준 빛인 이성을 사용하여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여 제 발로 설 수 있을 때임을 강조한다. 이것이 칸트가 말하는 계몽이며, 이런 의미에서 주민자치는 현대적 계몽의 실현인 것이다.

주민자치가 좋음에 우선한다는 주장에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다. 철학에서도 옳음이 좋음에 우선한다는 자유주의 비전에 대해 매킨타이어, 샌델 등의 공동체주의자들의 반론이 만만치 않다, 그들은 옳음(권리)의 근거는 무엇이며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 또한 자유주의가 말하는 권리의 주체는 순수실천이성을 실천할 수 있는 주체인데 그런 주체는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은 전적으로 경험적인 존재라는 점에서 공동체의 선과 분리해 생각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매킨타이어는 현대사회의 무너진 도덕적 기초를 세우려면 옳음보다 좋음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주민자치에 대해서도 같은 맥락에서의 반대가 있을 수 있다. 무엇보다 전영평교수의 분석대로(본지 20225월호) 주민들이 주민자치 활동에 참여해 크게 얻을 이익이 없거나 혹은 참여하지 않는다고 해도 큰 손해를 입을 일이 없다고 느끼기에 주민자치가 안 된다는 주장도 나올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풀뿌리주민자치가 시기상조가 아니냐는 패배주의적 논리를 펼칠 수도 있다.

실제로 일상생활에서와 마찬가지로 주민자치 문제에서도 현실을 이유로 들어 좋음이 옳음에 우선한다는 시각이 우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이 주민자치의 권리(옳음)와 당위를 부정하는 논리적 근거가 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현실적 상황이 본질을 가리거나 호도하는 수단이 되어서도 안 된다. 민주주의가 개인의 자유와 평등, 존엄성을 상황적 논리로 억압하는 힘을 극복하고 태동한 것과 마찬가지로, 실질적 주민자치는 옳음이 좋음에 우선한다는 원칙을 내면화하고 이를 흔들려는 온갖 상황적인 유혹을 극복할 수 있을 때만이 실현될 수 있다. 주민자치교육의 중요성이 필연적으로 강조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좋음에 대한 옳음의 우선성”(the priority of the right over the good)은 실질적 주민자치를 위한 철학적 명제이다. 이 명제의 숭고한 실존적 의미를 가슴으로 이해하고 내면화하는 교육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
  • ‘공공성(公共性)’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연구세미나95]
  • 문산면 주민자치회, 주민 지혜와 협의로 마을 발전 이끈다
  • 제주 금악마을 향약 개정을 통해 보는 주민자치와 성평등의 가치
  • 격동기 지식인은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연구세미나94]
  • 사동 주민자치회, '행복한 끼'로 복지사각지대 해소 나서
  • 남해군 주민자치협의회, 여수 세계 섬 박람회 홍보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