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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대 '향례합편'의 편찬 배경, 그리고 향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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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대 '향례합편'의 편찬 배경, 그리고 향약
  • 박경하 한국주민자치학회 부설 향약연구원장(중앙대학교 역사학과 명예교수)
  • 승인 2022.07.04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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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하 교수의 향약 이야기

조선시대 향촌사회의 자치규약’. ‘향약의 사전적 의미이다. 여기에 바로 이어지는 것은 덕업상권’‘과실상규’‘예속상교’‘환난상휼등 학창시절 역사시간에 달달 외웠던 향약의 4대 강목이다. 다분히 정형화되고 박제화 된 향약에 대한 인식을 바꿔준 것이 바로 조선시대 기층민들의 상부상조 자치조직 촌계이다. 오늘날 주민자치의 한 원형과 단초를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이에 조선시대 향촌사연구 전문가로 사단법인 한국자치학회 부설 향촌사회사연구소장인 박경하 교수의 향약이야기를 연재한다. 전통시대 향약·촌계를 재조명함으로써 오늘날 주민자치에 주는 의미와 시사점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편집자주]

 

향교에서의 전통 시연 모습. 사진=광주향교 홈페이지
향교에서의 전통 시연 모습. 사진=광주향교 홈페이지

조선후기는 중세적 사회질서가 해체되어 가는 시기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영농기술의 발달로 생산성이 제고되어 농업경영의 변동과 토지의 상품화를 초래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토지경영의 분화 및 농민층의 분화 촉진 등 광범한 농촌사회의 변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상공업에 있어서도 공인(貢人)의 자본이 상공업의 발달을 가져와 상품화폐경제가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관의 통제를 벗어난 자유로운 상품생산을 위한 민간 수공업이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변동을 바탕으로 경제적인 부를 축적한 중서하층민들들은 국가의 신분적 지배질서의 이완 속에서 납뢰(納賂, 뇌물상납군공(軍功, 전투에서 공을 세우는 것매향(賣鄕, 향직을 파는 것족보모입(族譜冒入, 족보에 속여 기입하는 것) 등을 통하여 신분 상승을 꾀하여 나가게 되었다. 이 같은 계층 간의 신분이동이 나타나게 되자 신분적 특권 및 경제적 기반을 토대로 하층민을 지배해 가던 양반 중심의 향초지배질서가 새로운 계층의 등장과 함께 변질되어 갈 수밖에 없었다.

 

향례합편 표지
향례합편 표지

 

조선후기, 중세적 사회질서의 해체...향례합편간행의 의미

이러한 변화의 물결에서 기존의 양반지배층은 내부의 신분계급적인 모순을 사회윤리의 차원으로 인식하여 소학(小學)·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등의 교화서 간행으로 민을 교화하려고 하였다. 이와 함께 주자학의 명분론에 입각한 실천운동의 하나가 향음사례(鄕飮射禮)·향약(鄕約)의 보급이었으며 이 두 책을 편집한 것이 향례합편이다. 중앙정부에서 많은 비용을 들여 활자로 간행한다는 것은 대민정책의 큰 의미를 가진다 할 것이다. 이번 연재에서는 향례합편(鄕禮合編)이 간행되게 되는 정치 사회적 배경과 그 속에 담겨 있는 향약의 성격을 살펴보고자 한다.

조선은 기본적으로 안향이 여말에 주자성리학을 소개한 이후 성장한 주자학도들이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성리학을 국시로 하여 세운 왕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은 이에 유교라는 새로운 통치이념을 뒷받침하기 위한 방도로서 주자성리학에 입각한 성리대전(性理大典)의 수입, 유교적인 의식 확립책으로서 주자가례와 가묘제의 시행, 유교적 사회윤리서인 삼강행실도·소학·오륜행실도등의 간행·보급, 향촌사회에서의 실천 생활규범으로서의 향약·향사례·향음주례등의 시행이 강조되었다.

정조대 향례합편이 간행되는 배경에는 정조 자신의 숭유중도(崇儒重道, 선비를 높이고 도를 존중한다) 및 계지술사(繼志述事, 선인의 뜻을 잘 계승하고 선대의 사업을 잘 발전시켜 나가는 것) 사상에서도 찾을 수 있다.

정조는 공자와 주자의 도의 관계를 공자의 도는 주자에 이르러 더욱 밝혀지고, 주자서는 주자대전(朱子大全)에 완비되어 있었으므로 공자의 도를 알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주자대전을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학자들이 정학정도(正學正道)를 얻으려면 반드시 주자를 표준으로 삼아야 함을 강조하였다.

1785(정조 9)의 사교금령(邪敎禁令, 천주교를 사교로 규정해 금지령을 내린 것), 1791(정조 15)의 진산(珍山)사건(천주교 신자였던 윤지충 등이 제사를 거부하고 조상의 신주를 불태운 사건)에서 보여주듯이 주자성리학적 질서와 인륜·가부장적 가족주의·신분관계 등을 부정하는 천주교에 대해서도 정조는 사학(邪學)이 유행하는 이유는 정학(正學) 즉 주자학이 불명한데서 오는 것으로 인식하고 정학을 밝히는 길은 주자학을 존숭하는데 있다고 보았다.

향촌지배 대책으로 기존 지배층인 사족들의 계속된 향약 시행에 대한 진언과 함께 정조의 숭유중도적인 성향에서 1797(정조 21) 정월 정조는 권농과 아울러 향촌민들을 교화하기 위하여 어제 양무농반행소학오륜행실향음의식향적조례윤음(御制 養務農頒行小學五倫行實鄕飮儀式鄕的條例綸音)을 내렸다. 이어서 이해 6향음사례향약을 합책한 향례합편을 간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향사례향음주례, 귀천장유 밝히고 덕업상권과실상규 시행...향약과 취지 같아

향음주례 시연 모습. 사진=원주향교 블로그
향음주례 시연 모습. 사진=원주향교 블로그

향례합편은 권1 향음주례, 2 향사례와 향약, 3월 부() 사관(士冠혼례(昏禮)로 구성되어 있다. ‘향음사례는 중국의 고제로 예기(禮記)에 그 내용이 실려 있다. ‘향음주례는 단순히 음주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효제목린(孝悌睦隣)’ 등의 예절을 가르치는 훈련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음주의 순위를 치위(齒位, 나이 순으로 앉는 것덕행(德行)으로 정하여 귀천을 밝히고 군신지의(君臣之義)’, ‘장유지서(長幼之序)’를 강조하는 수분(守分, 분수를 지키는 것)’의 교육이었다.

향사례에서는 과녁에 맞추는 기예를 중요시하는 것이 아니고 사()정지(正志)’를 뜻하고, 연고덕행자(年高德行者)를 숭상하여 백성들의 선악을 권면·징계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향사례와 향음주례는 그 취지는 귀천(貴賤장유(長幼)를 밝히고 덕업상권·과실상규 한다는 면에서 같다 하겠다. 따라서 조선시대에서는 대개 향약을 시행할 때에도 먼저 향약문을 읽어 권선하고 독약(讀約)이 끝난 후 향음주례와 향사례를 병행하였던 것이다.

정조는 학교교육을 통한 교화 없이 향약만을 실시한다면 본래의 목적과는 달리 향당(鄕黨)간의 쟁투에 이용될 수 있는 것을 염려하여 향약의 본뜻을 잘 이행하는 곳은 이를 장려하되 그렇지 못한 곳은 이를 강권할 필요가 없다고 하여 향약실시에는 소극적이나 소학·오륜행실도·향음주례·향약을 널리 반행(頒行)하여 백성들의 풍속을 유교적 의례로 바로 잡고자 하였던 것이다.

 

사진=본지 발행인 소장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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