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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거리의 파토스, 그리고 주민자치의 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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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거리의 파토스, 그리고 주민자치의 의지
  • 이관춘 연세대학교 객원교수
  • 승인 2022.09.01 17: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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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춘의 마을·자치·교육

두 번은 없다...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 그러므로 너는 아름답다.”

 

2015년 겨울,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 글 판에 새겨진 글귀가 총총히 발걸음을 재촉하던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199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폴란드의 여성 시인 비슬라바 쉼보르스카의 시선집 <끝과 시작>에 실린 시구다. 자칫 진부하게 보일 법도 한 세 마디의 말이, 마치 니체의 영원회귀처럼 최대의 무게로 어깨에 내려앉는 감동을 받게 된다. 그녀의 시에 대해 "모차르트의 음악같이 잘 다듬어진 구조에, 베토벤의 음악처럼 냉철한 사유 속에서 뜨겁게 폭발하는 그 무엇을 겸비했다"고 평한 스웨덴 한림원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발표 연설문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무게, 한번 뿐이기에 더욱 소중한 삶의 의미가 가슴을 파고드는 시다. 시인은 말한다. “두 번의 똑같은 밤도 없고/ 두 번의 한결같은 입맞춤도 없고/ 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 정말 그렇다. 하긴 고대 그리스에서 철학이 동트기 훨씬 전에도 헤라클레이토스는 말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 그렇다면 흘러가는 시간을 우리는 어떻게 붙잡으며, 또 어떻게 너는 아름답다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인가?

니체
니체

 

니체의 마지막 수업

지난 7니체의 마지막 수업, 어떻게 살 것인가?’를 주제로 강연을 하게 되었다. 경기도 양평문화원과 양평역사문화연구회가 주최한 인문학 강좌였다. 3년 전에 계획했던 강좌였으나 코로나 사태로 갑자기 취소되었다가 재개된 것이다.

장마가 잠시 주춤한 사이를 기다렸다는 듯 뙤약볕이 내리쬐는 날씨였지만 문화원 강당은 초만원이었다. 주식이나 부동산처럼 돈 되는 것도 아닌 강의에, 오전 열 시에 과연 몇 사람이나 관심을 보일까 했던 걱정은 기우였다. 어느 중년 여성은 3년을 기다렸다는 덕담까지 건네며 들어섰다.

쉼 없이 계속된 두 시간 동안 참가자들의 몰입과 집중력, 메모하는 모습은 대학 강의실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도대체 사람들의 이러한 열정과 의지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강의시작 전부터 필자의 머리는 새삼스런 이 궁금증으로 가득 찼다. 알고자 하는 의지(will), 배움에 대한 열정(pathos)의 근원에 대해서다.

니체의 마지막 수업이란 주제에서 마지막에 초점을 맞추어 강의의 문을 열었다. 철학자 중에 드물게 천재란 수식어가 따라 다니는 철학자. 그의 철학은 몰라도 니체란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정도로 어느덧 우리에게 친숙해진 철학자. 철학은 물론 심리학, 문학에서도, 아니 포스트모던이 당연시 되는 현재의 정신세계에서 그에게 빚을 안 진 분야가 없을 정도로 인류 역사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철학자. 괴테의 <파우스트> 만큼이나 많이 읽힌다는 니체의 책들. 그런 그가 188913일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주 토리노의 알베르토 광장에서 마부에게 채찍을 맞는 말의 목을 끌어안고 한 마디 말을 반복적으로 되뇌며 쓰러진다. 사실상 철학자로서의 니체의 마지막 말이자 마지막 수업인 셈이다. 그는 무슨 말을 했을까?

몇 해 전 논문 발표 차 우연히 들른 하버드대 서점에서 구입한 책 한권이 그 답을 알려주었다. 니체가 쓰러지기 전 비통한 표정으로 중얼 거린 한 마디는 “I understand..!”였다. 무엇을 이해하고 알겠다는 것인가? 해석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니체철학의 다양한 텍스트 속에 감추어진 의미를 끄집어내어 읽어 본다면 이해가 가능하리라 본다. 해석하는 것은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니체는 채찍질 당하는 말의 모습에서조차 집단과 제도가 요구하는 지식과 규범, 가치에 얽매어 자유정신그 자체인 자기 자신을 상실하고 복종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의 단말마적 비명은 단지 한 개인의 관점에 토대를 둔 전통적인 지식과 진리에 맹목적으로 순종하며 박약해진 의지로 개성을 상실한, 그래서 임의로 조종될 수 있는 군집존재로 전락한, ‘낙타의 신세가 된 오늘날의 우리를 향한 외침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인간의 자유정신을 억누르는 주범은 무엇일까? 니체는 근대까지 이어져 온 서양문명의 정신적 토대인 전통철학과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그 원인을 밝혀낸다. 핵심은 철학적 이원론과 종교적 이원론이다. 세계를 현실세계와 초월세계, 종교적으로는 현세와 내세로 구분하고, 초월세계 혹은 내세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는 철학적종교적인 이원적 세계관이다. 니체는 인간이 자유정신을 상실하고 무리동물처럼 휩쓸려 살아가며 허무주의(Nihilism)에 빠져 데카당(퇴락)으로 얼룩진 삶을 살게 만드는 주범이 이원론임을 밝혀낸다.

 

자유정신, 어떻게 살 것인가?

잘 사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원론에서 탈피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철학자 백승영은 니체가 말하는 잘 산다는 것은 건강하게사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정신적 귀족은 건강한사람이다. ‘건강은 곧 자유정신을 의미한다. 자유정신을 상실할 때 인간은 정신의 병을 앓게 된다. 육체의 병 못지않게 인간을 고통스럽게 하고 육체의 병이 없어도 삶을 포기하게 만들기도 하는 것이 정신의 병이라는 것이다.

니체가 말한 정신의 병이 철학적종교적 이원론만은 아닐 것이다. 옳음 혹은 진리에 대한 나의 생각, 지식, 신념, 가치관 등도 마찬가지다. 일상에서 우리를 숨 막히게 하는 해로운 믿음, 정치적 의견차이, 근거 없는 감각적 거부감이 우울증이나 사회불안장애를 일으킨다. 행복과 불행을 좌우하는 것이 우리의 생각, 지식, 믿음인 셈이다. 철학의 본래 소명이 그러하듯, 니체 역시 인간을 잘 살게(건강하게)하는 데서 자신의 철학적 소명을 찾았다.

니체가 표방한 관점주의는 바로 건강한 삶, 자유정신을 위한 하나의 준거를 제시한다. 니체는 관점주의의 기본 모토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사실 자체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사실이 존재할 수 있으려면 늘 어떤 의미가 먼저 집어넣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무엇인가는... 의미정립이다.”

우리가 자신의 모든 판단과 사유를 관점적인 의미평가 및 가치평가인 해석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자신만의 마음의 감옥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정신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정신의 본질은 자유이기에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유정신을 위한 열정과 의지를 갖고 있다. 그 열정과 의지는 이 강의를 위해 3년을 기다렸다는 중년 여성에게서, 팔순 노인의 문해 학습의 열정에서, 아무리 먹고사는 일이 급해도 비열한 짓을 하지 않으려는 소시민의 의지에서, 그리고 사람들 각자 나름대로 그 무언가를 추구하고 성취하려는 다양한 열정과 의지에서 드러난다. 필자가 주민자치를 위한 의지와 관련해 주목하는 것이 니체가 말한 이 유전적인 열정과 의지이다.

 

거리의 파토스와 힘에의 의지

필자는 저서 거리의 파토스의 첫 페이지를 다음과 같이 시작하였다. “나는 윤동주 시인에게 궁금한 게 하나 있다. 시인은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기도했다. 언제 들어도 잔잔한 여운을 남기는 아름다운 서정시다. 그런데 의문이 가시질 않는다. 나라를 빼앗겨 민족이 신음하던 그 시대, 열혈 청년 시인은 왜 독립과 투쟁을 외치지 않고 부끄러움을 토했을까?”

필자는 시인의 부끄러움을 니체의 거리의 파토스와 연계시켜 해석하였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한 점 부끄럼 없이살려는 파토스(열정)를 누구나 갖고 있다. 거리(distance)AB사이의 간격, 차이, 격차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사이의 지적인, 신체적인, 정의적인 간격이나 발전, 넘어섬이다. 거리의 파토스는 그런 간격을 벌리려는 인간의 본질적인 열정을 의미한다. 이러한 열정은 의식을 하건 안 하건 간에 유전적으로 추구하려는 인간의 본질이다.

니체가 말한 잘 사는 것, 건강하게 사는 것은 바로 내 안의 거리의 파토스에 불을 지피는 삶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사회에나 계층 간의 거리가 있다. 서양에서는 귀족과 노예의 거리가, 조선시대에는 양반과 상놈의 거리가 있었다. 과거의 이러한 거리는 신분상의 차이였다. 그러나 니체에 의하면 21세기의 귀족과 노예는 거리의 파토스를 통한 자유정신을 가지고 사느냐 아니냐로 구분된다. 내가 지금까지 갖고 있었던 인간과 세상에 대한 기존의 이해, 지식, 신념, 믿음과 거리를 두고 이를 넘어서려는 파토스를 발휘하느냐의 여부다.

기존의 나의 해석과 그 해석의 담지자인 자신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거리를 두는 것, 이때까지는 개별적이고 일면적이며 오류일 수밖에 없는 해석을 객관적 인식인양 생각했다면 그런 생각과 이별하는 것이다. 니체가 말한 집착증적 태도와의 절연을 할 때 인간은 비로소 자유정신을 갖게 되는 것이다. 주목할 점은 인간에게 거리의 파토스가 있기 때문에 힘에의 의지를 갖게 된다는 점이다.

니체는 선악의 저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거리의 파토스가 없다면, 저 다른 더욱 신비한 파토스, 즉 영혼 자체의 내부에서 점점 더 새로운 거리를 확대하고자 하는 요구는 전혀 생겨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지속적인 인간의 자기극복에의 의지임을 강조한다. 거리의 파토스가 있기에 인간은 더욱 신비한 파토스, 즉 자신을 지속적으로 극복하려는 힘에의 의지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힘에의 의지는 인간 존재의 가장 일반적이고도 가장 심층적인 본능이다.

죽음을 무릅쓰고 산을 오르는 것은 산이 그곳에 있어서가 아니라 오르지 않고는 못 배길, 산의 정상에 기어코 발을 딛으려는 어떤 근원적인 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시를 쓰지 않고는 못 배길 시인의 의지나, 글을 깨치지 않고는 못 배기는 노인의 의지도 마찬가지다.

힘에의 의지는 인간 삶의 모든 면에서 다양한 양상으로 드러난다. 어쩌면 삶의 행복과 불행을 좌우하는 것이 힘에의 의지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니체는 힘에의 의지가 전부라고 단언한다. “이 세계는 힘에의 의지이다. 그리고 그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게다가 또한 여러분 자신이 이 힘에의 의지이며, 그리고 그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니체가 보는 주민자치 의지

니체의 마지막 수업강의를 하면서 자치를 위한 주민의 의지를 떠올리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주민자치는 인간의 유전적인 거리의 파토스이자 본질적인 힘에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니체에게 있어 잘 사는 것은 건강하게 사는 것이며 건강한 삶이란 자유정신을 구비한 삶이다. 그렇다면 주민자치가 곧 건강한 삶은 아닐지언정 주민자치 없는 건강한 삶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주민자치는 건강한 삶의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이다.

니체에 의하면 정신의 본질은 자유이다. 건강한 삶의 조건인 정신이 자유롭기 위해서는 실존적인 삶의 조건이 자유로워야 한다. 따라서 지역 공동체의 주민들이 자신의 일을 자기 스스로 다스리고 통제하는 자치는 자유정신의 기본조건이자 건강한 삶, 행복한 삶을 위한 필수 조건인 것이다. 이 자치에의 의지는 니체가 말한 인간의 힘에의 의지의 발현이기에 자치를 할 수밖에 없고 또 반드시 해야만 하는 당위의 과제가 된다.

문제는 자치와 관련된 당사자들의 정신의 변화가 어느 단계에 와 있느냐에 있다. 130여 년 전 마부에게 채찍을 맞는 말에게서 니체가 느꼈던 그 말의 정신단계를, 혹시라도 주민자치정책과 관련된 정치인, 행정가는 물론 자치의 주체인 주민들마저도 공유하고 있다면 문제다. 전영평 교수의 지적(월간 주민자치 20227) 대로 윤석열 정부의 지방균형발전 전략은 지방경제살리기에 치중할 뿐 주민자치와의 연계성이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있다는 것은 현 정부의 주민자치철학의 부재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주민자치에 관한 과거의 특수한 상황 및 왜곡된 학습으로 무기력해진 정신은, 니체가 안타까운 울음을 터트렸던 그 의 정신이자 낙타의 정신 단계이다. 정신은 특정한 상태로 정형화되거나 고정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인간 정신의 본질은 자유다. 따라서 인간은 스스로 토리노 광장의 이나 낙타의 정신 단계를 선택할 수도 있으며 이를 극복하여 사자의 정신 상태나 아이의 정신 단계를 선택할 수 있다.

여기서 선택이란 곧 의지의 선택이다. 의지의 선택이기에 공동선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정치인의 선택은 중요하며 그에 따른 책임이 무겁다. 주민자치 정책도 마찬가지다. 명색이 선진국이라 자처하면서도 주민자치 정책 결정권자들의 의지의 선택이 주민들의 자유정신을 통한 건강한 삶을 주도하지는 못할망정 스스로 이나 낙타의 정신 단계에 안주하며 과거로부터 학습된 타율적 제도와 관행에 정신의 힘을 복종하는 데 사용한다면 사회적 불행이다.

니체는 이런 정신을 노예적 상태로 규정한다. 정신의 노예는 자기 스스로를 끊임없이 넘어서고 극복하려는 인간의 본질인 거리의 파토스에 불이 꺼져 있거나 힘에의 의지가 시들어 있는 상태이다. 반대로 주민자치를 향한 사람들의 의지와 노력에서 우리는 인간의 참된 행복인 자유정신을 쟁취하기 위한 니체의 거리의 파토스와 힘에의 의지가 불타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니체가 역설한대로 사람에게 위대한 것이 있다면”, “사람에게 사랑받을 만한 것이 있다면바로 자유정신을 향한 이런 모습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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