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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 전남 장흥군 주현향약의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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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 전남 장흥군 주현향약의 성격
  • 박경하 한국주민자치학회 부설 향약연구원장(중앙대학교 역사학과 명예교수)
  • 승인 2022.09.28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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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하 교수의 향약 이야기

조선시대 향촌사회의 자치규약’. ‘향약의 사전적 의미이다. 여기에 바로 이어지는 것은 덕업상권’‘과실상규’‘예속상교’‘환난상휼등 학창시절 역사시간에 달달 외웠던 향약의 4대 강목이다. 다분히 정형화되고 박제화 된 향약에 대한 인식을 바꿔준 것이 바로 조선시대 기층민들의 상부상조 자치조직 촌계이다. 오늘날 주민자치의 한 원형과 단초를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이에 조선시대 향약 연구 전문가로 사단법인 한국자치학회 부설 향약연구원장인 박경하 교수의 향약이야기를 연재한다. 전통시대 향약·촌계를 재조명함으로써 오늘날 주민자치에 주는 의미와 시사점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편집자주]

 

향약은 조선시대 향촌사회의 자치규약으로, 향촌민들을 교화시키고 공동체 내로 결속시킴으로써 사회의 안정을 도모하는 역할을 했다. 시행주체, 시행시기, 시행단위 등에 따라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는 향약자료를 통해 조선후기 제반 사회경제적 변화 속에서 중앙정부의 향촌 통치관 및 지배구조의 일면을 파악할 수 있다. 18세기에는 수령, 관찰사 등의 주도하에 실시된 주현향약(州縣鄕約)이 주로 나타났으며 19세기 중후반에는 서학, 동학 등의 새로운 사상이 등장함에 따라 이의 근절을 위하여 충군효친을 이념으로 하는 향약이 재차 강조되었다.

주현향약은 수령이 지방통치를 위해 앞장서 실시하여 지역사회 상하민을 의무적으로 참여시킨 동계의 확대판으로 18세기에 활발하게 운영되었다. 19세기 후반에도 향촌사회의 질서를 정비하고 사학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시행되었음을 찾아볼 수 있는데 경상도관찰사 이헌영(李攇永)1891-1893년에 경상도에서 실시한 향약, 그리고 전라감사 김문현(金文鉉)과 순창군수 이성렬(李聖㤠)이 전라도에서 1893년에 시행한 사례가 있다. , 장흥군에서 1893년 장흥부사 이용태(李容泰)가 시행한 향약, 1899년 장흥군수 김택규(金宅圭)가 시행한 향약, 그리고 1902년 전라남도 관찰사 이근호(李根澔)가 시행한 보민향약(保民鄕約) 자료가 있다.

장흥군의 각 면에서 군수, 부사, 관찰사에 의해 시행된 향약은 증주향약금증보유부(增註鄕約今增補遺附), 고하면향약부칙(古上面鄕約附則)13개의 자료가 확인된다. 이 향약 자료를 통해 관찰사와 군수가 각 면에 하달한 향약과 면에서 실정에 맞게 시행한 향약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19세기의 향약은 동학농민운동과 갑오개혁, 광무개혁 등 중앙과 지방에서의 개혁을 전후로 한 격변기에 시행되었다.

장흥군 장흥읍의 모습. 사진=장흥군
장흥군 장흥읍의 모습. 사진=장흥군

 

조선후기 주현향약, 강회 역할 확대...풍속 교화 성격 강화 향촌민 통제, 농민군 토벌목적도

19세기 후반에 시행된 장흥군 주현향약은 구성과 운영 면에서 이전과 차이를 보인다. 1893, 1899, 1902년의 시기로 넘어갈수록 강회의 역할이 점차 확대된다. 강회를 열어 강생들의 우열을 평가하고 강회가 열리지 않는 여름에는 개인별로 강독과 함께 글을 짓게 하는 등의 활동에서 확인된다. 또한 강회에서는 선과적(善過積)으로 상벌을 내리는 동시에 규약과 글을 읽고 시험을 실시하며 향촌민들을 바로잡았다. 19세기 후반 장흥군 주현향약의 임원구성과 조목에서도 강회가 중시되는데 이를 통해 주현향약을 통한 향촌 풍속 교화의 성격이 강화되었음을 살펴볼 수 있다.

같은 시기에 호남에서 시행된 주현향약을 함께 검토해보면 1893년에는 순창군, 그리고 1894년에는 나주부에서 주현향약이 시행된 사례가 있다. 순창군은 기강확립과 질서유지를 통한 향촌자치 실현을 위해, 나주부에서는 농민전쟁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향약을 실시한다.

또한 189412월에는 전라도 관찰사 이도재가 양반중심의 신분질서 회복, 농민군 잔당의 토벌, 농민전쟁의 재발 방지 등을 목표로 향약을 시행한다. 1899, 1902년의 장흥군 주현향약과 같이 강회를 통한 교화책이 강조되기보다는, 직접적인 향촌민 통제와 농민군 토벌을 목표로 하였다.

또한 선과적 운영 방식에서 순창군과 장흥군은 차이가 확인된다. 장흥군은 선과적을 교화책으로 사용하여 과실이 있어도 3번까지 교화의 기회를 주는 반면, 순창군에서는 직접적으로 도덕률을 강제하여 벌을 내리고 재범한 경우 바로 약적에서 제거하고 지역사회에서 고립시키는 최고형인 불통수화(不通水火, 물과 불이 서로 통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교제를 끊는 절교를 의미)를 적용하고 있다.

그리고 향약에서 제시하는 윤리적 실천이 장흥군은 매달 강회와 강독, 시험 등을 통해 행해진 반면, 순창군에서는 주로 처벌을 통해 강제되었다. 장흥군에서도 이전에는 주현향약의 향촌 통제적 역할이 강조되었으나 점차 교화적 역할이 확대되고 있는 것은 짧은 시기에 거듭되어 시행된 주현향약을 통해 향촌민들을 점진적으로 교육시켜 지역 내외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 속에서 향촌의 풍속을 바로잡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주현향약 통해 향촌민 교육감화시켜 무너진 향촌사회 바로 세우고자 노력

장흥군과 같이 강회를 통한 교화가 강조되어 시행된 주현향약은 경상도관찰사 이헌영이 시행한 주현향약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891년 이헌영의 지시에 따라 향약을 조직 및 시행한 것으로 확인되는 곳은 대구부, 칠곡부, 흥해부 등이 있으며 향약 임원에 훈장을 두거나 사강의 역할을 하는 약정을 둬 강회를 시행했다. 특히 감영이 위치했던 대구부에서는 이헌영의 영향이 직접적으로 미쳐 강회뿐 아니라 향사례, 백일장 등의 향촌 교화 정책도 시행되었다. 그리고 이헌영의 향약 정책의 영향의 일환으로 시행된 함양 백토리향약에서도 직월과 훈도를 중심으로 강회가 시행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이헌영이 경상도에서 시행한 향약에서는 향촌교화정책이 보다 강화되었다.

두 관찰사에 의해 시행된 향약이 지역적으로, 시기적으로 차이는 있지만 관권을 대표하는 지방관들이 공통적으로 향촌교화를 강조한 점은 향촌사회의 문제점을 같은 시각에서 바라본 것으로 사료된다. 일시적으로 동학과 민란을 막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꾸준한 강회와 약회를 통해 향촌민들을 감화시켜 19세기 중반 이래로 무너진 향촌사회를 바로 세우고자 하였고 그러한 지속적인 시도가 장흥군에서의 1893, 1899, 1902년의 주현향약을 통해 확인된다.

1893, 1899, 1902년의 장흥군 주현향약은 임원구성과 운영 등에서 차이가 있었다. 1893년 주현향약에서는 과실상규의 조목이 강조되었으며 임원은 주현향약에서 보편적으로 확인되는 도약정-부약정-직월의 구성을 그대로 답습하였다. 1899년 주현향약에서는 1893년 임원구성에서 훈장과 사강을 추가로 둬 이들을 중심으로 강회를 적극적으로 시행했다. 그리고 1902년 보민향약은 향교조직을 활용하여 임원을 구성하였고 강회와 선과적 시행을 강조했다. 보민향약은 전라남도의 전체 지역에서 시행된 주현향약으로, 각 군--리를 체제적으로 연결시키고 있는데 1893, 1899년에 비해 조직적으로 구성되어 실시되었다.

경상도관찰사 이헌영 청덕비.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경상도관찰사 이헌영 청덕비.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향촌 통제에서 교화로 관의 적극적 개입체제 변화의 방파제로는 역부족

19세기 후반 장흥군 주현향약에서 나타나는 성격변화는 첫 번째로 향촌교화적 기능의 강화이다. 18세기 장흥군에서 시행된 주현향약이 시벌과 향촌통제에 방점을 찍은 것과 달리 19세기 후반 장흥군 주현향약은 강회와 선과적을 바탕으로 향촌교화에 힘썼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1893년에 비해 1899, 1902년에 시행된 주현향약에서는 강회 운영을 자세히 서술하며 규약 강독과 시험을 함께 시행하고 있다는 점을 통해 향촌교화에 적극적으로 힘썼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비슷한 시기 경상도 관찰사가 시행한 주현향약에서도 확인되는 점으로, 향촌사회의 질서를 위해 꾸준한 교화를 중시한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로는 조직적 결속이 강화되었다는 점이 확인된다. 1902년 보민향약에서는 오가작통제가 함께 시행되었는데 오가작통제의 인보조직적 기능을 강화하여 면리의 아래 단위인 정, 통까지 묶어 향촌민들의 이탈을 방지하고 사교와 이교로의 입교를 방지했다. 군에서부터 하나의 가호까지 유기적으로 연결시켜 향약을 시행했고 관의 적극적인 개입이 동반되었다. 또한 신분제가 폐지되었음에도 1899년과 1902년 장흥군에서는 비교적 짧은 시기를 두고 지방관들은 주현향약을 통해 교화책을 강조하여 사회를 바로잡고자 했다.

그러나 조선사회를 유지한 근간이었던 신분제가 폐지된 상황에서 향촌사회를 안정시킬 수단으로 수령들이 향약을 내세워 변화의 방파제를 삼으려고 했으나 봉건체제의 붕괴를 막기에는 한계를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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