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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침묵의 언어와 부버 그리고 주민자치의 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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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침묵의 언어와 부버 그리고 주민자치의 말들
  • 이관춘 연세대학교 객원교수
  • 승인 2022.10.05 09: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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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춘의 마을·자치·교육

요 며칠 어디선가 산들바람이 불어오는가 싶더니 어느덧 계절은 가을 깊숙이 들어선 느낌이다. 여름 내내 검푸른 바다 같은 싱싱한 녹색 빛을 자랑하던 나뭇잎들의 기세가 맥없이 꺾였다. 이 곳 산골짜기 발코니에서 손을 뻗으면 닿을 만큼 지척에 있는 울창한 숲이, 벌써 드문드문 누런 옷으로 갈아입고 있다. 음악에 문외한이라도 계절이 바뀔 때면 으레 18세기 이탈리아 작곡가 안토니오 비발디의 불후의 명곡인 바이올린 협주곡 <사계(四季)>가 어김없이 찾아온다.

비발디의 가을속의 말들

사계의 네 개 협주곡은 우리나라의 각 계절의 정취를 너무도 감상하기 쉽게, 그러면서 계절마다 지닌 특색을 극명하게 그려주고 있다. 사계 중 특히 가을은 우리네 삶의 희로애락을 품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들어 유독 애착이 간다. 예술은 언제나 해석학적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필자에게, 비발디의 올해 가을은 주민자치에 관한 사람들의 말과 침묵의 언어를 상상하게 한다.

농부들이 풍성한 수확의 기쁨을 나누며 술과 춤 잔치를 벌이는 1악장엔 흥에 겨운 왁자지껄한 언어들이 난무한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농부들은 점점 술에 취해 가고 모두들 잠에 곯아떨어진다. 거침없이 나뒹굴던 말들이 사라지고 침묵이 주위를 뒤덮는다. 애잔한 솔로 바이올린이 절묘하게 침묵의 언어를 자아낸다. 비발디의 가을은 한 세기가 지난 후 자연주의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와 후기 인상파 화가인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 속에서 새로운 얼굴로 부활한다.

만종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장 프랑수아 밀레는 사계 중 가을을 고단한 농사일을 하는 순수한 농부들의 모습에서 포착하여 시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특히 밀을 타작하는 사람들은 본래 사계 중 여름을 그린 것이지만 오히려 우리나라의 가을 들판을 연상케 한다. 마치 밀을 수확하는 기쁨에 겨운 사내들이 힘차게 타작하면서 사계 제1악장의 시끌벅적한 말들을 거침없이 쏟아지는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허나 대조적으로 밀레의 그림 낮잠은 기분 내키는 대로 허공을 채우던 언어들이 몰락해 버린 침묵의 들판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더 리얼하게 느껴지는 건 반 고흐가 밀레의 그림을 모방해 그린 정오의 휴식이다. 고흐는 앞서 간 밀레를 존경한 나머지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에 밀레는 단순한 화가가 아니라 가장 위대한 화가라고 평했다고 한다. 하긴 얼마나 밀레를 존경했으면 그림에 있어서는 고집불통의 신념을 가졌던 천재 화가 고흐가 자존심을 내려놓고 밀레의 그림을 모방했을까.

밀레나 고흐나 그림 속의 농부 부부는 고된 수확의 노동을 달콤한 낮잠으로 달래고 있다. 황금빛 밀밭의 풍요로운 따스함에 감싸여 잠든 모습이 너무도 평화로워 보는 이의 마음마저 편안하게 해 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언어의 풍요로움이 맥없이 소멸한 들판의 풍경과 잠든 농부의 모습은 수확의 기쁨 뒤에 기다리는 조락의 겨울, 침묵의 계절이 저만치 서려있다. 잠든 부부의 앞에 놓인 낫과 수북이 쌓여 있는 건초더미마저 농촌에서 봄, 여름 내내 농사를 지으면서 했던 말들, 아니 도시의 삶에서 일상적으로 내뱉은 말, 언어들의 건초더미 같다는 상상마저 든다.

 

주민자치에 관한 정치적 언어들

가을의 문턱을 넘어서기까지 올해도 연례행사처럼 주민자치에 관한 정치인들의 말들, 언어가 넘쳐났다. ‘자치란 말은 곰곰이 씹을수록 너무도 당위적이며 소중한 인간실존의 조건이니 말이 많은 걸 탓할 순 없다. 오히려 많아야 한다. 그런 말은 정치와 정치인들의 선택이 아닌 의무이자 책임이며 철학자 칸트가 강조하는 정언명령(定言命令)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실행의 의지와 노력 없이 유권자들의 표만 계산하면서 말만 난무할 경우다. 책꽂이에 꽂힌 월간 <주민자치>들을 꺼내 들춰보면, 예나 지금이나 얼마나 많은 국회의원, 크고 작은 지자체장들이 하나같이 주민자치의 중요성과 시급함을 역설하고 있는지를 확인하게 된다. 그들의 말만 들으면 당장 내일이라도 주민이 주인이 되는명실상부한 주민자치가 실현될 것 같다. 제대로 된 나라라면 그러해야 한다. 그러나 실질적인 진짜주민자치는 요원할 뿐 늘 그렇듯 자치에 관한 남의 말을 흉내 낸 정치인들의 짝퉁언어들만이 난무한 것이 현실이다.

이들 정치인들의 말을 분석하다보니, 이들이 즐겨 사용하는 주민자치에 대한 자신의 무지와 정치적 무능을 한방에 날려버리는 정치공학적 언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어느 여당 지자체장의 말대로, “이런 문제들은 단기간에 해결되는 사안이 아니다”, “중장기적인 복안을 갖고 점차적으로 풀어나가야 할 과제라는 화법이다. 차근차근 구조적인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는 그럴싸한 말이다.

문제는 그런 문제해결에 과연 관심이 있는지, 정치적 노력과 힘을 쏟고 있는지는 성찰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올해 들어 정권이 바뀌면 습관적으로 갖게 되는 일말의 기대도 있었다. 허나 필자의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그 기대에 대한 희망은 어디서도 보이지 않는다. “차근차근 구조적인 문제부터 해결한다는 정부 여당은 온 데 간 데 없고 대신 주민자치위원에 대한 과도한 정치적 중립 규제라는 구조적인 문제를 차근차근 해결하려는 한국주민자치중앙회와 한국주민자치학회의 외로운, 그러나 강렬한 외침이 계속되고 있다.

언어와 세계는 동전의 양면처럼 분리할 수가 없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통찰을 빌리면, 언어를 통해 표현되는 것이 바로 세계이며 사회다. 언어는 개인과 사회의 실재세계에 대한 그림이라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과 동시대 철학자인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단정한다. 나의 세계는 나의 언어로 표현되는 것이듯 주민자치는 주민들의 언어를 통해 표현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현실은 주민들의 언어는 사라지고 알맹이 없는 정치인의 정치적 언어만이 판을 치고 있다. 세계는 언어로 표현된다지만 종교적 신처럼 언어로 표상되지 못하지만 중요한 것들이 있다. 어디 신만이 그런가. 연인간의 사랑도 그렇고 친구간의 우정도, 부모에 대한 효도도, 나아가 주민자치의 정신과 철학도 그렇다. 언어로 표상할 수 없는 것들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의 그 유명한 명제는 주민자치에 대해 말만하는 사람들에게도 적용된다.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차라리 침묵하라!”

솔개의 언어와 침묵의 언어

주민자치는 말이 아닌 행동의 언어이다. 정치인과 행정가는 물론 주민들이 발 벗고 나서야 하는 실천의 언어이다. 주민자치에 관한 정치인들의 말, 언어를 생각하다 머리를 식힐 겸 거리로 나섰다. 마침 어느 상점에선가 귀에 익숙한 노래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말 안하고 살 수가 없나/날으는 솔개처럼/소리 없이 날아가는 하늘 속에/ 마음은 가득차고/푸른 하늘높이 구름 속에 살아와/수많은 질문과 대답 속에/지쳐버린 나의 부리여/“

 

참으로 믿을 수 없는 게 사람의 감정인가 보다. 마음이 콩밭에 가 있으면 콩만 생각난다고, 과거 한 때 무심코 들었던 솔개란 노래의 가사가 실존철학처럼 가슴에 와 닿는다. 하긴 강원도 깊은 산자락에 살다보니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과 구름, 숲을 뒤흔드는 빗소리에도 마음은 맥없이 흔들린다. 단절되다시피 한 사람과의 대화 대신 들어선 책들의 언어 또한 새롭게 다가온다. 그러니 모처럼 큰 길 가에 나섰다가 들려온, 흘러간 노래 한 곡에 애잔한 감상에 젖는 것도 무리는 아닐 테다.

노래는 묻는다. “우리는 말 안하고 살 수가 없나?” 낭만에 초쳐먹는 대답이겠지만 우린 말 안하고 살 수가 없다.’ 겨우 1년을 갓 넘은 칩거에서 얻은 새삼스런 결론이다. 그럼에도 노래는 탄식한다. 우리는 수많은 질문과 대답 속에 지쳐버렸다고 말이다. 그런데 솔개는 침묵을 하지만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마음은 가득 차다고 말한다. 이 가사에 마음이 또 다시 무너진다.

학문의 언어, 책의 언어가 과학적 언어라면 솔개의 언어는 시적 언어이다. 학문하는 사람의 언어는 존재자’(사물, 인간)를 대상으로 한다면 솔개의 언어는 존재자의 존재를 대상으로 한다. 따라서 학문을 한다는 사람의 언어는 분주하고 시끄럽지만 솔개의 언어는 침묵이다. 사이먼 앤 가펑클이 노래한 침묵의 소리(sound of silence)’이다.

존재자의 존재는 침묵 속에서 비로소 드러난다. 산속에 있으면 도회지에서 보이지 않던 존재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비바람에 몸서리치는 검푸른 숲의 소리, 가끔씩 멀리서 들리는 소의 울음소리, 맑은 밤이면 어김없이 얼굴을 내미는 북극성의 영롱함, 그리고 성급히 가을을 알리는 길가 코스모스의 본래 모습이 보인다. 노래가 말하듯 수많은 농담과 진실 속에 멀어져간 나의 솔개가 보이는 것이다.

솔개에 빠져 칠흑 같은 어둠을 걷다가 방으로 돌아와 녹화해 두었던 TV 프로그램을 틀었다. ‘다큐 인사이트카르투시오 봉쇄수도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기 위해 한 평생 세상과 단절된 채 혹독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가 침묵 속에 펼쳐지고 있다. 세상과 동떨어진 은신처 내 독방에서 생활하며 대화가 금지되고 식사도 하루 한 끼로 제한된다. 고독과 침묵을 기도로 이겨내며 죽어서도 가족에게 돌아가지 않겠다는 서약을 해야 한다.

봉쇄란 말만 들어도 가슴이 답답하다. ‘솔개는 말은 안 하지만 저 하늘은 활개 치며 마음껏 날지 않는가. 주목할 점은, 가톨릭에서 의미하는 봉쇄는 외부에서 가해지는 차단(blockade)이 아니라 각자의 내부에서 외부를 막는 차단(cloister)이다. 일반적인 봉쇄가 외부에서 내부를 죽이는 것이라면 종교적인 봉쇄는 외부의 위해(危害) 요소를 막아내어 내부를 살리려는 것이다. 남에 의한 강제적 구속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자기구속이다.

원치 않는 사랑은 자유를 억압하는 구속이지만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 간의 사랑은 자유를 위한 자기구속이다. 마찬가지로 봉쇄 수도원 수도사들의 봉쇄는 자유를 찾기 위한 봉쇄이다. 봉쇄함으로써 더 자유로워지는 이 역설은 종교와 신앙의 영역에서만 가능한 특권이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에서도 그 특권의 일단을 경험하고 소유할 수 있다.

솔개는 노래한다. “스치고 지나가던 사람들이/ 어느덧 내게 다가와/헤아릴 수 없는 얘기 속에/나도 우리가 됐소.” 비즈니스를 하건 학문을 하건 그리고 주민자치에 관한 정치적 토론을 하건 우리는 헤아릴 수 없는 마음에 없는말들을 쏟아내며 살아간다.

어떤 지인의 한탄을 들은 적 있다. ‘과거에 친구 하나가 우리는 피를 섞은 형제라며 의형제를 맺자고, 그래서 적포도주로 호기 있게 러브 샷을 했었는데 최근 그 친구가 뒤에서 배신을 때렸다는 것이다. 하긴 피를 섞어 맹세해도 모자랄 판에 포도주를 섞은 의형제가 오죽했겠는가.

카르투시오 수도승들의 침묵은 수많은 (거짓된) 관계와 관계 속에 잃어버린 나의 얼굴을 들여다보게 하는 거울이다. 공허한 말들의 성찬 속에서 우리가 잊고 있는 참된 언어의 의미를, 삶의 의미를 반추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위장된 독백아닌 순수한 대화

우리는 늘 말을 하며 살고 있다. 말하는 것은 타인과 관계를 맺는 행위이다. 정치인의 말은 주인인 국민과 관계를 맺는 행위이다. 따라서 공허한 말은 필연적으로 공허한 관계 맺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는 공허한 말들의 성찬 속에 살아간다. 겉으로는 정의와 공정을 내세우면서 뒤로는 자신과 가족의 이권을 위해 그 정의를 뻔뻔하게 무참히도 짓밟는 정치인들의 공허한 말을 귓전에 흘리며 살아간다. 하도 듣다보니 학습화된 무기력증이 도져서인지 이젠 따지지도 분노하지도 않는 국민이 된 것 같다.

주민자치라고 다를 바 없다. 공허한 말들의 세월이 지방자치 30, 주민자치 20년이다. 공허한 말들이란 마틴 부버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규정한 위장된 독백(disguised monologue)’이다.

철학자 마틴 부버는 대화를 세 가지 종류로 나눈다. 첫째 순수한 대화이다. 순수한 대화란 말로 하든지 침묵으로 하든지 대화의 참여자가 상대방을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인간 그 자체, 즉 현존재(Dasein)로서 수용하면서 상대에게 귀를 기울이는 대화를 말한다. 둘째는 기술적(記述的) 대화이다. 사실적인 내용을 전달하고 이해하며 따지기 위한 필요성에서 나누는 대화이다.

셋째는 대화로 위장된 독백이다. 여러 사람이 모인 커피숍에서 모두가 모두에게 되는대로 떠들며 말을 하고 있는 상황을 상상해 보자. (talking)은 하고는 있지만 가슴에서 나오는 말(speaking)은 하지 않는다. 상대방 역시 그저 듣고는(hearing)있지만 경청(listening)하지 않는다. 상대방을 결코 하나의 현전하고 있는 인격체로서 보지 않는 상태가 된다. 이런 말은 상대방과 진정한 관계를 맺으려고 하지 않는다. 단지 상대가 가져주기를 원하는 인상을 만들어내기 위해 자신의 모습과 말씨를 만드는데 만 애쓴다. 그러니 독백은 겉치레와 위선일 수밖에 없다.

부버는 위장된 독백을 벗어 던지고 순수한 대화로 돌아갈 것을 촉구한다. 순수한 대화는 말로써도 이루어질 수 있지만, 특히 무언의 대화인 침묵으로써도 가능하다. 침묵으로 상대방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보려고 한다. 독백을 하는 인간들은 서로 지나쳐 간다. 서로의 관계에 관심이 아니라 자신에게만 관심을 집중시킨다. 반면 순수한 대화는 서로의 존재를 열어 보이기에 인간과 인간과의 참된 만남을 이루게 된다.

부버의 순수한 대화를 위해서는 먼저 침묵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 카르투시오 수도승들은 말한다. “우리들의 가장 중요한 지향과 소명은 침묵과 고독안에 머무는 것이다.” 카르투시오 수도승들에게 고독과 침묵은 신에게 이르는 지름길이다. 수도원 담장 너머 사람들에게도 침묵은 존재자(사람, 사물)가 아닌 존재자의 존재에 다가가는 지름길이다. 타인과의 순수한 대화를 위한 출발이기도 하다.

나의 침묵은 헤아릴 수 없는이기적인 얘기 속에 파묻힌 타인의 영혼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시간이다. 그 소소하지만 위대한 침묵속에 잠겨볼 때 비로소 나 자신의 내면의 소리도 듣게 된다. 그래서 침묵은 나와 타자를 향한 가장 아름다운 언어가 된다. 따라서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형제라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진정으로 주민들의 자치를 원한다면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이면 된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고 단언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번 가을에는 우리의 일상에 주민자치란 언어가 주는 의미를 되새기며 아련한 솔개의 노래를 들어보자. 솔개처럼 말 안하고 살 순 없지만 헤아릴 수 없는, 영혼 없는 얘기 속에서 자치를 상실한 채 우리가 된 를 찾아보자. 끝을 향하는 노래가 성급히 찾아온 가을 허공에서 맴돈다. “머리 들어 하늘을 보면/아련한 솔개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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