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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인간일 뿐, 어디에 속해 있든지 ‘늑대와 춤을’ ‘위트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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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인간일 뿐, 어디에 속해 있든지 ‘늑대와 춤을’ ‘위트니스’
  • 윤성은 영화평론가
  • 승인 2022.11.15 10: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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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사람들 그리고 영화
Town in Movie

많은 영화의 배경이 마을이다. 영화 주인공들의 삶의 터전 역시 그들이 사는 마을이고 동네이기 때문이다. 스크린 속 인물들은 배경이 되는 마을, 그리고 이웃들과 때로 갈등하고 협력하며 여러 이야기들을 만들어나간다. 그 이야기의 결말은 해피엔딩이 되기도 하고 비극으로 치닫기도 한다. 앞으로 마을, 사람들 그리고 영화에서는 마을과 사람들의 케미스트리, 그들 사이의 교감과 성장, 변화를 다룬 작품들을 소개한다. 그 속에서 주민자치의 바람직한 방향, 때로 반면교사의 깨달음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편집자 주]

 

* 영화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특정 영화에 대한 상반된 시각은 비평의 시작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관객 개인의 취향에 따라 쉽게 내뱉어지는 말들-재미가 있다, 없다 정도의 평가-이 바로 비평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누군가의 인생 영화가 종종 다른 누군가에게 비판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은 그 간극을 탐구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례로 그린북’(피터 패럴리, 2018)2019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각본상, 남우조연상을 거머쥐었을 때 많은 비평가들은 역사상 최악의 작품상이라며 아카데미의 선택을 강도 높게 비판한 바 있다. ‘그린북1960년대 초 뉴욕에서 험한 인생을 살고 있는 이탈리아계 이민자 토니’(비고 모텐슨)가 교양 넘치는 피아니스트 ’(마허샬라 알리) 박사의 보디가드 겸 운전기사로 고용되면서 겪게 되는 이야기를 그린 로드무비다.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인종도 계급도 성격도 다른 두 사람이 점차 서로를 이해하고 가까워지다가 친구가 되는 스토리여서 표면적으로는 그저 훈훈한 휴먼드라마로 보인다. 그러나 이 작품은 인종 화합이라는 이슈를 지극히 백인의 시각에서 접근한데다 각본에 참여한 토니의 아들이 아버지와 두 사람의 관계를 상당부분 미화시켰다는 이유로 개봉 당시부터 평자들의 신랄한 비판이 뒤따랐다. 대중들의 호응이나 백인이 큰 비율을 차지하는 아카데미 회원들과는 정반대의 반응이었다.

영화의 대한 상반된 시각, 비평의 시작점그린북그리고 늑대와 춤을

이처럼 한 영화에 대해 극단적으로 다른 평가가 내려질 때 그 기준을 따라가 보면 이데올로기에 대한 해석이 다른 경우가 많은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오리엔탈리즘이다.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논의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만 그동안 비평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학자는 에드워드 사이드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하는 오리엔탈리즘이란 서양이 주체가 되어 동양을 바라보는 왜곡된 시각으로, 서양을 긍정적이고 미래적인 공간으로 상정하는 반면 동양을 부정적이고 미개한 공간으로 바라보는 태도를 말한다. 이것은 비단 동서양을 이야기할 때만 적용되지 않는다. 서부개척시대를 배경으로 백인과 인디언이 함께 등장하는 영화들 또한 오리엔탈리즘 비평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수정주의 서부극들이 대표적인데, 63회 아카데미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비롯해 7개 주요 부문을 휩쓸었던 늑대와 춤을’(Dances With Wolves, 케빈 코스트너. 1990)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그린북에서 1960년대 미국 남부 지역이 고수했던 흑인차별정책과 그에 저항하는 정의로운 백인을 다루는 방식이 도마에 올랐던 것과 유사하게 늑대와 춤을에서는 인디언 공동체에 편입된 군인 존 던바’(케빈 코스트너)의 캐릭터와 결말에 대한 해석이 분분했다.

1863, 남북전쟁에서 치열한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영웅이 된 던바 중위는 서부 국경지대에 자원해 홀로 세즈윅 요새를 지킨다. 던바의 곁에는 포상으로 받은 명마 시스코와 웬일인지 새끼 때부터 그를 따르는 늑대 하얀 발밖에 없지만 던바는 모처럼 포탄소리와 시체로 어지러운 전쟁터를 떠나 평화로운 한 때를 갖는다.

군복을 벗고 가벼운 복장으로 생존해나가는 던바의 모습은 서부의 평원과도 잘 어우러진다. 그러나 근거리에 살고 있는 인디언 수우족이 던바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 시스코를 훔치려 하는 등 한 두 번의 마찰을 빚게 되고 그들은 서로를 경계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던바는 수우족 여성인 주먹 쥐고 일어서가 자살을 시도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성조기를 찢어서 상처 입은 그녀의 손목에 묶어준 후 기절한 그녀를 수우족에게 데려간다. 이 때 처음으로 수우족 전체와 던바가 서로를 마주보는 장면에서는 꽤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전혀 다른 피부색과 언어, 문화를 가진 그들은 서로를 미지의 존재로 인식하고 있으며 호기심 보다 경계심을 앞세우고 있다.

그러나 오래 지나지 않아 수우족 족장이 던바를 찾아와 고마움을 표하고 그들은 자주 교류하며 점점 가까워진다. 던바가 더 이상 수우족 공동체에 낯설지 않은 존재로 발전했을 때쯤 던바는 수우족이 기다리던 버팔로 떼가 어디 있는지 알려주면서 수우족의 영웅이 된다.

던바가 수우족의 일원이 되는데 선행되어야 했던 것이 그들의 언어를 배우는 일이었다는 점은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총과 화살이 아니라 말로 소통하면서 오해를 없앤 그들은 평화롭게 공존하며 친구가 된다.

언어의 장벽이 무너진 후 던바가 완전히 이 공동체의 일원이 된 것은 수우족으로부터 새로운 이름을 얻었을 때다. 영화의 제목이자 던바의 수우족 이름인 늑대와 춤을은 던바가 오랜만에 만난 하얀 발과 뛰노는 장면에서 따온 것으로 영화의 백미 중 하나이기도 하다. 던바는 수우족과 함께 잔인한 포니족을 물리칠 뿐 아니라 세즈윅 요새에 당도한 군인들에게도 자신의 이름이 늑대와 춤을이라고 말하며 수우족으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한다.

늑대와 춤을 바라보는 비판적 시각 vs 고려해야 할 점

늑대와 춤을을 비판하는 목소리들은 이 영화가 표면적으로 폭력적인 백인들과 유순한 수우족을 대비시키고, 마지막에도 던바가 수우족 공동체를 선택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백인중심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 던바는 수우족의 식량난을 해결해주는 등 수우족을 구원하는 영웅으로서 우월한 존재로 묘사되고 있으며 그와 결혼하는 주먹 쥐고 일어서도 본래 수우족이 아니라 백인 여성이라는 설정에서 혼종에 대한 거부감도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어떤 이유에서건 이 백인 부부가 수우족을 떠나 새로운 땅을 개척하는 결말은 결국 미국의 역사가 백인들의 손으로 이루어져 왔음을 암시한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런 단편적 요소들을 잠시 유보하고 전체적으로 조망했을 때 이 영화가 인디언에 대해 시종일관 조심스러운 시각을 견지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인디언을 대하는 던바의 태도와도 같다.

그는 인디언을 가르치기보다 그들에게서 먼저 배우고 자신을 낮추면서까지 가까워지려 애쓴다. 이는 던바가 수우족에게 버팔로를 설명하기 위해 우스꽝스럽게 버팔로 흉내를 내는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애국심을 뼛속에 새긴 군인임에도 국기를 찢어 수우족의 상처를 싸맬 때 그는 백인이나 개척자이기에 앞서 한 인간으로서 도리를 다하고자 하는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주먹 쥐고 일어서는 어릴 때부터 수우족과 살아왔던 여성으로, 하얀 피부를 가진 원주민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그녀의 혈통을 강조하는 비평이야말로 오히려 지나친 오리엔탈리즘에 사로잡힌 것이 아닌지 의심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는 인디언과 백인을 선과 악으로 단순하게 분리시키지 않는다. 던바와 같은 미군이 있는가 하면 인디언 중에도 포니족처럼 폭력적인 부족이 등장한다. 던바도 수우족을 도왔지만 수우족도 던바를 군인들에게서 구출해낸다. 이들은 공조하며 상생하는 동등한 관계로 묘사되어 있는 것이다.

위트니스, 개인 아닌 공동체가 갖는 힘과 의미

유사한 서사를 갖고 있으면서도 오리엔탈리즘의 가시를 피해간 영화도 있다. ‘늑대와 춤을보다 불과 몇 년 앞서 만들어진 위트니스’(Witness, 피터 위어. 1985)는 거대한 영토 안에 다양한 문화권과 자치적 공동체가 존재하는 미국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여기서 베테랑 경찰 ’(해리슨 포드)은 경찰 내부의 범행현장을 목격한 소년 사무엘과 그의 엄마 레이첼을 보호하다가 부상을 입고 그들이 살고 있는 아미시 공동체에 숨어 있게 된다. 아미시인들은 스위스에서 시작된 침례교의 한 종파로, 교회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를 형성해 살아가고 있는데 전화나 자동차 등 문명의 이기를 멀리하는 것이 특징이다.

'위트니스에서는 철없는 십대들이 아미시인들을 조롱하고 함부로 대하는 장면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그러나 폭력을 죄악시하는 아미시인들은 종교심으로 묵묵히 그 박해를 견뎌낸다. 존은 인디언들과 가까워졌던 던바와 마찬가지로 아미시인들과 친밀해지며 이러한 그들의 삶의 방식을 배워나간다.

이 영화는 나약하고 어리숙해 보이는 아미시 공동체가 밖으로부터 도움을 받기보다 오히려 외부 사회에 미치는 선한 영향력에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점에서 늑대와 춤을과 대비된다. 총을 맞아 죽을 뻔했던 존을 간호하고 숨겨주었던 아미시인들은 마지막까지 존을 부패한 경찰들에게서 보호하는데 비폭력으로 또 다른 죽음과 범죄를 막는 마지막 장면은 아미시인들의 신념이 올바른 것이었으며 개인이 아닌 공동체가 갖는 힘을 확실히 보여준다. ‘늑대와 춤을과 더불어 동시대 자치단체의 의미와 기능에 대해 고민하는 이들에게 추천하고픈 영화다.

 

사진=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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