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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두 번째 봄”, 주민자치에 대한 관점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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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두 번째 봄”, 주민자치에 대한 관점 전환
  • 이관춘 연세대학교 객원교수
  • 승인 2022.11.17 17: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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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춘의 마을·자치·교육

하나의 단풍잎에서 누군가는 낙엽을 보고 또 누군가는 꽃을 본다. 단풍이 그러하듯 우리가 사는 세상이나 사물, 사람을 보는 관점(觀點)도 각자 다를 수 있다. 다름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지만 때론 그 관점의 다름과 차이가 개인의 행복과 불행은 물론 사회 전체의 성공과 실패를 결정짓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주민자치를 실질적으로 뿌리내려야 하는 시급하고 엄중한 과제 역시, 결국은 주민자치에 대한 당사자 혹은 이해관계자들의 관점에 결정적으로 좌우된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본다면 주민자치교육의 목적은 본질적으로 주민자치를 향한 관점 전환의 학습이다. 늦가을 산의 어스름이 내려앉은 11, 그 화려하던 단풍은 이미 떠났지만 단풍을 바라보며 즐기던 사람들의 각기 다른 심상(心想)과 관점은 여전히 안개처럼 머물면서 물음을 던지고 있다.

 

단풍이란 무엇인가?

 

너는 가을, 가을이어라/ 나뭇잎 시들어/ 한 잎 지고/ 두 잎 지고/

소슬바람 불어와/ 이리저리 흩어져 날리네... 열정으로 시붉은 단풍잎은/

쌓여만 가는데/ 사랑으로 샛노란 은행잎은/ 쌓여만 가는데...

 

이진기 시인의 시 가을이어라가 깊어가는 11월의 가을만큼 쓸쓸한 여운을 남긴다. “사랑으로 샛노란 은행잎에서 단풍의 아름다움 보다는 그리움과 서러움이 노랗게 밀려오는 느낌이다. 얼마 전 오대산 선재 길을 걸으며 절간의 차를 음미하듯 단풍을 감상했던 그 가을이 아니다. 몇 해 만에 문을 연 설악산 흘림골을 걸어가며 감탄했던 그 단풍의 여운과도 다른 가을이다. 그저, 고독 같은 설렘마저 사라진 자리에 슬픈 허전함이 묻어오는 단풍이다.

가을 단풍을 바라보는 시인들의 시상(詩想)은 한결 같이 단풍의 아름다움 그 자체보다는, 아름다움 이면에 묻어있는 잔잔한 슬픔과 소멸, 이별에 잠겨있다. 이상국 시인의 단풍도 그렇다. “봄에 겨우 만났는데/ 가을에 헤어져야 하다니/ 슬픔으로 몸이 뜨거운 것이다/ 그래서 물감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계곡에 몸을 던지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한승수 시인은 단풍이 물드는 이유에서 붉게 타오르며/ 하루의 대미를 장식하는 노을처럼/ 진정한 아름다움은/ 소멸의 순간 빛을 발하는가라고 탄식하며 가장 아름다운 빛깔로/ 가장 아름다운 몸짓으로/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 남은 날들을 채워가야 한다고 노래한다. 곧 소멸할 수밖에 없는 단풍의 애환이다.

반면에 오정방 시인은 가을 단풍에서 단풍을 꽃이라고 규정한다. “단풍은 꽃이로세/ 꽃보다 더 곱구나/ 홍엽은 불덩일세/ 불보다 더 붉게 타/ 마음속/ 옮겨 붙은 불/ 꺼질 줄을 모르네

물론 봄의 향긋한 꽃향기가 나지 않는, 왠지 모를 애잔한 슬픔이 배어있는 꽃이기는 하다. 하지만 단풍을 바라보며 머지않아 찾아올 소멸의 낙엽을 생각하며 무기력함에 빠지는 것과, 단풍에서 꽃의 아름다움을 포착하여 감상하며 꺼질 줄을 모르는아름다움의 찬가를 부르는 것은 다르다. 이 경우 단풍은 낙엽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단풍 그 모습으로 당당하게 겨울을 맞는다. 우리는 그런 단풍을 저 멀리 프랑스의 카뮈에게서 발견하게 된다.

 

가을은 두 번째 봄이란 관점

 

가을은 모든 잎이 꽃이 되는 두 번째 봄이다.”

 

이방인의 작가로 널리 알려진 알베르 카뮈(Camus 1913-1960)가 남긴 말이다. 출처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고서라도 삶의 부조리를 파헤치는 작가로서 자칫 어두운 허무주의나 불가지론자로 치부될 수도 있는 그에게서 이런 계절의 아름다운 서정성을 발견하는 것이 신선하게 느껴진다. 길지 않았던 카뮈의 생애지만 매년 가을이 깊어가는 이맘때면 어김없이 그의 말은 가을을 봄의 풀잎처럼 생기 있게 만들고 있다.

가을은 두 번째 봄이란 표현은 기분 좋은 충격이다. 우리가 별다른 생각 없이 고수하는 일상적인 생각 습관이나 관점을 여지없이 뒤엎는다. 굳이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언어가 나와 세계를 표현하고 해석하며, 그 언어에 의해 나의 생각과 관점이 결정적인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경험한다. 가을의 언어, 계절에 대한 인식도 그렇다. 가을은 일 년 중 하나의 계절이지만 4계의 구분 속에서 가을에 대한 생각은 거의 정형화되어 있다. 앞의 시인들의 가을 시처럼, 가을하면 수확의 풍요로운 계절이지만 동시에 조락의 계절, 겨울이 다가왔다는 생각이 어느덧 자리 잡고 있다. 청명한 햇살 아래 붉은 단풍잎에 감탄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북풍 한 서리에 맥없이 나뒹구는 낙엽의 계절이 밤의 어둠처럼 서려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가을은 여름이 아닌 겨울로 가는 계절, 봄으로 되돌아 갈 수 없는, 봄과는 질적으로 다른 계절이다.

계절에 대한 인식의 준거 틀은 우리의 삶에 대한 인식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개인의 발달단계나 삶의 과정에 대한 학자들의 교과서적인 구분과 해석은 계절에 대한 인식의 데자뷰다.

·장년기가 가을이라면 노년기는 겨울이다. ·장년기의 나이 듦의 아름다운 단풍에 대한 인식보다는 노화의 부정적인 낙엽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이렇게 학습화된 준거 틀은 개인의 삶에 대한 인식과 학습에 보이지 않는 영향을 미친다.

카뮈는 이러한 계절과 삶에 대한 관점을 뒤집는다. 하지만 과연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카뮈의 관점을 제대로 포착하기 위해서는 그의 말의 문법적인 표현과 그 표현에 함축된 철학에 대한 선이해가 필수적이다.

흔히 사람들은 카뮈의 말을 가을은 모든 잎이 꽃이 되는 두 번째 봄이다로 해석한다. 무난하고 매끄러운 해석으로 들릴 수도 있다. 허나 필자가 보기에는 카뮈가 자신의 철학적 관점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언어 사용의 핵심을 놓치고 있다.

우리는 일상적인 언어에 굳이 특별한 의미를 두며 살지는 않는다. 그러나 자신의 진심어린 생각이나 신념을 글로 남길 때는 다르다. 문학과 철학에서 특히 그렇다. 이때는 하이데거의 말대로 나의 언어는 나란 존재의 집이 된다.

가을은 두 번째 봄이라는 카뮈의 말은 단지 가을의 단풍을 서정적으로만 묘사한 것이 아니란 점을 생각해야 한다. 카뮈의 삶과 문학적 배경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그의 말은 자신의 삶 철학의 정수를 단풍 잎 위에 꾹꾹 눌러 쓴, 실존철학에 관한 하나의 테제(these)라 할 수 있다.

문제가 되는 중요한 부분은 바로 모든 잎이 꽃이 되는이란 해석이다. 이 문장은 카뮈가 말한 불어로 “chaque feuille est une fleur”이다. 영어로는 ‘every leaf is a flower’이다.

주목해야할 점은 카뮈는 모든 잎꽃이 되는이란 말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신 카뮈는 모든(tout 혹은 all)’이란 단어가 아니라 각각의(chaque 혹은 every)’란 표현을 썼다. 따라서 카뮈의 말은 문장 그대로 가을은 각각의 (나뭇)잎이 꽃인 두 번째 봄이다로 해석이 되어야 한다.

카뮈는 류적 존재로서의 나무[tout]를 포함한 모든 식물의 잎이 아니라 개별적 존재로서의 각각의 나뭇잎[chaque]을 강조하는 것이다. 각각의 나뭇잎처럼 각각의 주민이 그 자체로 꽃이라는 점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주민을 이해하는 두 가지 관점

 

서양전통철학에서 사물과 인간 혹은 주민을 인식하는 관점은 본질주의다. 본질주의의 관심은 류적(類的) 존재로서의 동식물이나 인간이다. 인간의 자연적이며 사회적, 혹은 자치를 희구하는 존재로서의 주민의 총체적인 존재방식에만 신경 쓴다. 자연히 인간이란 무엇인가?’ ‘주민자치란 무엇인가?’ 등과 같이 본질에 대한 물음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류적 존재의 본질(essentia)이 무엇이냐에 관심을 둘 뿐 개별적 존재로서의 각각의 나뭇잎이나 주민 개개인의 각기 다른 성질과 존재방식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다.

주민을 포함한 모든 존재자의 본질이란, 가시적이며 생성 소멸하는 현상을 넘어 변하지 않고 머물러 있는 필연적인 속성, 혹은 그 사물을 다른 사물과 구분시켜 주는 보편적인 특징을 의미한다. 본질철학의 선두 주자인 플라톤은 모든 사물의 본질은 이데아라고 규정하였다. 이른바 목수 혹은 장인의 이데아이다.

목수는 무작정 책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책상의 이데아를 기초로 자신이 구상하는 다양한 모양의 책상을 만드는 것이다. 로뎅은 생각하는 사람의 이데아를 바탕으로 작품을 완성한다. 애완견에는 포메라니안도 있고 요크셔테리어, 말티즈도 있지만, 모두가 ()’란 이데아를 본질로 하며, 개라는 이데아의 모사(模寫)가 바로 다양한 애완견들이라는 것이다. 이데아는 우리 생각 밖에 있는 독자적인 존재로서, 책상이나 애완견은 사라지지만 이데아는 생성소멸이 없는 것이다.

플라톤 이후 중세를 거쳐 근대의 데카르트, 헤겔에 이르기까지 존재의 본질에 대한 추구와 짝사랑은 변함없이 서양인들의 사유방식을 지배해 왔다. 다분히 현실과는 동떨어진 구닥다리 관념론이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허나 사물에는 본질이 있다는 사유방식은 우리의 일상에서도 깊이 스며들어 있다.

예를 들어 정치, 학문 혹은 예술의 본질이 무엇인가?’하는 생각, ‘합리적 사고를 해야 한다’, ‘저 사람은 보기와는 다르다’, ‘정작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등의 생각은 현상 너머 실재하는 어떤 보편적인 본질이 있다는 믿음을 전제로 하는 사유방식이다.

학교교육을 포함한 평생교육에서의 전통적인 교수-학습이론 역시 본질주의와 무관하지 않다. 흔히 말하는 교육의 목표로서의 자아실현은 그 자체로 인간의 본질로서의 자아가 존재함을 전제로 한다. 물론 자아의 실체에 대한 경험론의 흄(Hume)이나 구조주의 라캉(Lacan)을 비롯한 철학에서의 반론도 만만치 않다. 교육의 내용으로서의 지식 관에도 본질에 대한 믿음이 바탕이 되고 있다. 이른바 교수-학습에서의 지식에 대한 객관주의(objectivism) 관점으로서 인간이 추구하는 지식은 객관적이며 보편적인 본질 및 그 원리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런 본질주의의 문제를 비판하며 등장한 철학이 바로 카뮈의 부조리문학의 바탕이 되는 실존주의(existentialism)인 것이다. 19세기 키르케고르와 니체, 20세기 독일의 하이데거와 야스퍼스, 프랑스의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카뮈, 시몬 드 보부아르 등을 중심으로, 바로 앞선 헤겔 철학을 비판하며 등장한 인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다. 실존주의에서는 총체적 인간이 아니라 개별적 사람에 관심을 둔다. 인간이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나란 누구인가?’에 초점을 맞춘다.

그 결과 실존주의 사유방식에서는 인간이란 일반명사에 가려져 있던 고유명사로서의 각자 각자의 사람이 눈에 띄게 된다. 유적(類的) 존재인 인간이 아니라 무엇으로도 분리되거나 나눌 수 없는개인(in-divid-ual)이 대상이 된다. 그 개인으로서의 우리 모두는 지극히 자유로운 상태에서 각자의 책임 하에 자신의 본질을 평생 동안 만들어가야 하는 자유와 책임을 갖고 있는 것이다.

카뮈가 유적 존재로서의 전체(all)’ 단풍잎이 아니라, 크기와 생김새 모양이 전혀 다른 개별적 존재로서의 각각의(every) 이란 표현을 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주민자치는 관점의 전환학습에서

 

카뮈의 단풍잎 철학은 주민자치의 주체이자 대상인 주민 및 주민자치를 이해하는 소중한 상념의 계기를 제공한다. 다시 말해 주민 및 주민자치에 대한 관점과, 그 관점을 전환시키는 학습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다.

카뮈는 가을의 단풍처럼, 우리 모두의 인생의 가을은 그 자체로 꽃이며, 그래서 우리는 늘 인생의 두 번째 봄을 맞고 있는 것이라고 알려준다. 더 나아가 가을에 대한 인식의 전환처럼 인생에 대한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삶의 차이는 관점의 차이라 할 만큼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보는 방식[관점]은 우리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가정과 직장에서, 정치나 종교는 물론 인간관계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주민자치에 대해서, 관련자들의 생각 습관이나 관점의 차이는 서로를 숨 막히게도 하며, 반대로 관점의 전환은 그 모든 갈등을 일시에 해소시키기도 한다. 인생의 중장년이나 노년기에 다다른 인간 개개인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든 그 자체로 꽃이란 관점은 삶을 생동감 넘치게 만들지 않는가.

그런 의미에서 주민자치의 핵심이자 중차대한 과제는 결국, 관점을 전환시키는 교육이다. 주민을 하나의 일반명사로서 생각하며 전체적이고 총체적인 유적 존재로서만 바라보는 관점에서, 주민 각자가 각기 다른 실존을 지닌 하나의 고유명사로서 인식하는 관점으로의 전환이다. 또한 주민자치의 성패가 주민자치교육에 있다면, 주민자치교육의 목적은 주민자치의 당위성에 대한 관련자 모두의 관점을 전환시키는 교육이라 할 수 있다.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알게 모르게 형성된 주민과 주민자치에 대한 관점을 비판적으로 성찰하여 전환하는 과정이 주민자치의 관점전환 교육인 것이다.

관점이란 마치 렌즈와 같아서 우리가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하는 반면 우리의 시야를 제한하기도 한다. 그래서 임마누엘 칸트(Kant)우리가 지닌 인식의 안경이 파랗다면 비록 대상이 수많은 색을 지니고 있어도 우리에게는 파란 색을 지닌 대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나의 안경 너머의 대상이 아니라 나의 안경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의 전환을 통해 나온 것이 바로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다.

우리는 시력이 약화되거나 안경에 문제가 생기면 내 눈과 안경을 수정한다. 내가 보는 세상의 사물을 바꾸려 하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가진 관점의 안경을 바꾸려는 학습과 노력에는 관심을 두지 않기 십상이다. 파란 색이나 빨간색의 관점만 갖고 평생을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주민자치를 바라보는 각자의 안경도 마찬가지다. 주민자치에 있어서도 그 안경의 전환학습이 일어날 때 풀뿌리주민자치는 실현될 수 있다. 관점의 전환이 쉽지는 않지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성인교육학자 메지로우(Mezirow)의 말대로, 내가 가진 신념이나 태도 중 하나라도 전환이 일어난다면 전환학습이 된 것이다.

주민자치에서의 관점의 전환학습은 무엇보다 주민자치에 관한 각자의 기존의 경험과 생각에 대한 비판적 성찰에서 시작해야 한다. 또한 비판적 성찰을 통해 알게 된 주민자치의 본질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듣고 토론하는 대화 혹은 담론(discourse)’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주민자치를 위한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 행동은 주민자치에 관한 당위 혹은 신념을 강화시킨다. 행동은 주민자치에 관한 구체적인 의사결정에서부터 주민자치 실현을 위한 정치적 행동에 참가하는 것까지 다양할 것이다.

깊어가는 가을에, “가을은 (각각의) 잎이 꽃인 두 번째 봄이라는 카뮈의 말을 곰곰이 새기면서 주민과 주민자치에 대한 관점의 전환이 참으로 절실하다는 점을 확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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