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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의 시작, 삶과 시간에 대한 현상학적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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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의 시작, 삶과 시간에 대한 현상학적 단상
  • 이관춘 연세대학교 객원교수
  • 승인 2023.01.02 13: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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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자치·교육

연말연시의 겨울은 모두에게 각기 다른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하지만 마지막 한 장 남은 달력에서 텅 빈 흙 갈색 들판과 같은 공허함을 느끼는 것은 아마도 같은 심상(心想)이 아닐까 싶다.

봄에서 시작된 계절 여행의 마지막이면서 차가운 겨울의 시작이기도 한 12, 어디론가 향하는 사람들의 종종 발걸음에 시간의 흐름과 존재의 무상함이 서려있는 듯하다. 오래 전 추수가 끝난 논밭에는 충만함이 사라지고 곡식의 존재만이 서려있듯 겨울은 한 해의 삶을 견디어낸 일상의 번잡함이 뒤로 물러서고 그동안 잊고 지냈던 각자의 존재가 앞으로 밀려나오는 때이다.

주민자치도 마찬가지다. 연말연시는 한 해 동안 머리로 말하고 가슴으로 품었던 주민자치라는 존재의 의미를 새롭게 돌아보게 한다. 그 존재의 의미는 사람이나 동식물 같은 존재자를 일상적으로 인식하는 자연적 태도로는 포착될 수 없다. 존재를 이해하는 것은 일상적인 자연적 태도가 아니라 사물 자체를 있는 그대로보는 현상학적 시선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평소엔 별 관심 없이 지나쳤던 길가의 풀꽃이 어느 순간 경이롭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이때 변화된 것은 풀꽃이 아니라 그것을 보는 나의 마음일 뿐이다. 따라서 일상의 분주함에 쫓기던 나의 마음을 변화시켜 우리의 삶과 시간, 그리고 주민자치라는 존재를 새롭게 바라 볼 여유를 선사한다.

슈베르트의 세레나데와 시간성

시간의 흐름은 추운 겨울밤에 더 선명해진다. 창밖의 나뭇가지를 잡아 흔드는 겨울바람 소리를 듣다보니 문득 너무도 이른 나이에 요절한 작곡가, 슈베르트의 세레나데가 생각난다.

따뜻하고 희망어린 다른 작곡가들의 것과 달리 슈베르트의 세레나데는 그의 성격만큼이나 어둡고 비통하며 애상적(哀想的)이지만 더없이 감미롭다. 오죽했으면 슈베르트는 이 세상에 흥겨운 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란 말을 남겼을까.

겨울은 슈베르트의 세레나데를 닮았다. 슈베르트 사후에 출간된 백조의 호수중 제4곡인 세레나데의 바이올린 선율은 온 몸에 전율을 일으키는 애잔한 감미로움을 선사한다. 세레나데는 연인을 그리워하며 밤에 부르는 노래, 즉 소야곡(小夜曲)이라 하듯 겨울은 지나간 여름의 뜨거웠던 젊음의 정열과 사랑의 시간들을 반추하는 숲속의 소야곡이다. 세레나데는 함께 하고 싶은 시간을 갈망하고, 겨울은 함께 했던 지나간 시간들을 회상한다.

슈베르트의 세레나데 선율에는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작곡한 연가곡집 겨울 나그네의 그림자가 이미 서려있다. 겨울 나그네는 슈베르트가 독일 서정시인 빌헬름 뮐러의 시에 곡을 붙인 것인데 하필이면 빌헬름 뮐러는 사랑에 관한 불후의 명작으로 알려진 독일인의 사랑을 쓴 막스 뮐러의 아버지이다.

독일인의 사랑은 약속된 이별(죽음)을 앞두고 나눈 소녀 마리아와의 사랑을 통해 사랑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슈베르트의 세레나데에서 겨울 나그네와 독일인의 사랑으로 상념의 꼬리를 물다보니 결국 이들을 관통하는 본질이 시간성에 있음을 알게 된다.

12월은 계절의 시간을, 세레나데는 절절한 사랑의 시간을, 겨울 나그네는 사랑에 찢겨 상심한 나그네 같은 우리네 삶의 시간을, 그리고 독일인의 사랑은 죽음으로 끝나는 사랑일지라도, 인생은 시간에 포위된 사랑과 삶을 통해 학습하고 성장하는 시간임을 암시하는 듯 보인다.

이들의 음악과 문학, 그리고 삶이 알려주고 있듯이 인간 삶의 특성은 시간성에 있다. 삶이란 곧 시간이기 때문이다.

필자의 책 평생교육철학의 내용을 인용하면 우리가 살아가며 배운다는 것, 즉 평생학습의 근거 또한 시간성에 묶여 있다. 인간의 삶과 학습은 시간의 선로위에 놓여 있기에 시간을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인지 하이데거는 불후의 명저가 된 자신의 책 제목을 존재와 시간으로 정했다. 그는 삶의 근거가 시간에 있음을 다음과 같이 간명하게 정의한다.

 

현존재의 실존성의 근원적인 존재론적 근거는 시간성이다.”

 

인간의 삶이 근본적으로 시간 안에서 생성·소멸을 통해 변화하고 전개된다는 것은 너무도 평범한 진리이다. 인간의 삶의 과정은 태어나고, 살아가고, 결국엔 죽는 것으로 끝이 난다. 가을은 순환적이지만 인생은 단선적이다. 태어나기 전에 대해 알지 못하고 죽음 이후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분명한 것은 우리는 알 수 없는 곳으로부터 와서 알 수 없는 곳으로 떠나간다는 사실이다.

현재 지구상에는 78억이 넘는 인간들이 살아간다. 지금 이 순간에도 무수히 많은 인간들이 태어나고 그만큼의 많은 사람들이 사라진다.

그러나 상상을 해 보자. 지금부터 약 100년 후면 지금 살고 있는 78억 명이 지구상에서 한 명도 빠짐없이 사라진다. 그리고 그만큼의 전혀 다른 인간들이 이 땅을 다시 채울 것이다. 이렇게 백년마다 지구는 완전한 물갈이를 한다. 이때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렇다.

그런데 외형적으로 우리 사회 인구의 총량은 늘 변함이 없다. 류적(類的) 존재로서 인간사회는 거의 변함이 없다보니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우리 각자의 삶과 죽음에 대한 자각과 인식은 일상에 묻혀 무감각해지기 쉽다. 정작 중요한 의 존재는 주위의 인간속에 묻혀있다. 따라서 시간 안에서 살아가면서도 현대인들은 누구나 알아챌 만한 이 사실을 좀처럼 의식하지 않고 산다.

그 결과 한정된 물질을 마치 무한히 소유라도 할 것처럼 노동하고 경쟁하고 투쟁한다. 이 과정에서 크고 작은 소음들이 연일 발생한다. 이런 소음들로 우리사회는 물론, 전 세계는 늘 시끄럽다. 나아가 이들 시끄러운 소음들은 개개인의 삶의 시간성을 더더욱 의식하지 못하게 만드는 악순환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란 존재의 근간인 시간성을 잃은 개인은 를 잃고 소음 속의 우리가 되고 만다. 우리 각자 각자의 실존의 근거는 시간성이다. 시간이 각자의 실존에 단 하나의 본질적인 수수께끼이며 이 불가사의한 시간성을 다루는 것이 철학의 본질이다.

평생교육으로서의 주민자치교육의 철학적 바탕 또한 시간성에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시간은 주민 각자 각자의 자아의 문제이며 나란 무엇인가?’ ‘나를 찾고 나로써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나의 실존에 주민자치란 무엇인가?’란 문제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민 각자의 자치의 고유한 의미는 시간성에 대한 인식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평소 잊고 사는 존재

슈베르트의 세레나데에서 주민 각자의 실존의 근거인 시간성을 생각할 수 있다면, 비발디의 사계겨울은 일상에 파묻혀 보지 못하고 있는 삶의 본 모습, ‘존재를 찾게 한다.

18세기 초 이탈리아의 작곡가, 비발디에게 다가온 사계절의 색과 소리가 300년 후인 지금에도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음악에 문외한이라도 계절에 공감하는 어떤 공통된 경험과 서사가 담겨있기 때문일까?

후설이나 하이데거 같은 현상학자들이라면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겨울이란 자연현상은 다를 바 없겠지만 그 겨울을 각자의 체험적 의미를 통해 포착하는 양상들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커피의 속성(properties)은 동일하지만, 커피를 체험하는 양상(aspects)은 다른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인간과 삶의 속성, 주민자치의 속성은 동일할지라도 삶을 영위하는 양상이나 주민자치를 이해하는 각자의 양상은 다르다. 양상을 다루는 것이 바로 현상학이다.

양상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존재. ‘나무의 존재라는 말은 나무라는 존재자의 존재라는 말과 같다. 따라서 존재란 항상 존재자의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평상시에 우리의 눈은 나무라는 존재자만 볼 뿐 나무가 존재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하지만 뜨거운 햇볕이 작렬하는 사막에 고립되었다면 우리는 나무의 존재’, 즉 나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한 해 동안 살아오면서 우리의 시선은 늘 먹고 살아가는 것과 관련된 존재자[사람, 직장, , 일 등]에게만 향했다. 우리 각자 각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에는 관심을 두지 못했다. 이것이 인간의 자연적인 태도이다.

그렇다면 존재란 무엇일까? 컵을 예로 들어보자. 일상적으로 우리는 컵의 외형이나 질감, 무늬같이 컵이란 존재자에만 관심을 갖는다. 하지만 그 컵이 아무리 금은보석으로 장식되었다고 해도 만약 빈 컵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 컵을 가지고 어떤 음료수도 마실 수 없다. 컵에서 중요한 것은 외형이 아니라 무언가를 담을 수 있는 빈 공간, 이것이 바로 컵의 존재인 것이다. 컵이 그러하듯 모든 존재자들은 각각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삶에 대한 현상학적 시선으로

하이데거에 의하면 존재자들의 존재는 무엇보다 예술에서 드러난다. 이런 관점은 존재자들의 객관적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 과학이고 예술은 그저 주관적 체험의 표현일 뿐이라는 근대철학의 사유방식과 대립되는 것이다.

슈베르트의 세레나데나 비발디의 사계에서도 존재는 드러나고, 인상주의 화가의 그림에서도, 김춘수나 피천득의 시에서도 존재는 얼굴을 내민다. 그 중에서 존재자의 존재를, 인간 실존의 모습을 간명하게 드러내는 시가 피천득의 가 아닐까 한다. 굳이 12월의 시라 칭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피천득 시인 역시 를 가장 사랑했다고 하니 더욱 그렇다.

 

눈보라 헤치며/ 날아와/ 눈 쌓이는 가지에/ 나래를 털고/

그저 얼마동안/ 앉아 있다가/ 깃털 하나/ 아니 떨구고/

아득한 눈 속으로/ 사라져가는/

 

수필집 인연으로 더 알려진 시인이지만 그는 이 시를 포함해 1947서정시집을 낸 이후 꾸준히 써온 시작들을 한데 모아 시집 생명을 펴냈었다. ‘는 누구이며 무엇일까? 소녀시절부터 중년의 여인이 될 때까지 시간의 철로 위에 시인과 함께 했던 아사코란 일본 여성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소녀 아사코를 통해 시인의 의식에 내재해 있던 너와 나의 인연이라고 판단할 수도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이런 태도를 현상학에서는 자연적 태도(natural standpoint)’라고 부른다. 물론 이런 진술이 잘못이라는 말은 아니다.

문제는 이런 자연적 태도로는 이 시에 내재된 함의를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데 있다. 비발디의 사계나 슈베르트의 세레나데가 작곡될 수 없으며 홍수희의 겨울고해와 같은 서정시들이 탄생할 수도 없다. 또한 사람들 각자가 느끼는 계절의 변화나 겨울이 주는 의미도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오히려 이러한 일상의 자연적 태도를 통해 시의 본질이자 진리는 은폐되고 만다.

반대로 하이데거에 의하면, 시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일상의 자연적 태도를 벗어나 현상학적 시선을 가져야 한다. 그 시선은 사물 자체로 돌아가는 것이다. 여기서 사물이란 말은 물질로서의 사물, 즉 자연적 대상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우리의 의식현상을 말한다. 현상학에서의 현상은 물질로서의 현상이 아니라 경험으로서의 현상인 것이다. 다시 말해 현상학에서 관심을 갖는 것은 의식의 내용물이지 있는 그대로의 자연계의 사물이 아니다.

이를 위해 먼저 자연적 태도에서 기인하는 해석을 당분간 보류해 놓는 에포케(epoche), 즉 판단정지를 할 때 눈 쌓이는 가지에 감춰져 있는 인간의 존재가 모습을 드러낸다. 인간 존재가 바로 가 아닌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어디서인가로부터 세상에 내던져져 잠시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이 인간 실존의 모습이다.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어느 순간 세상이란 곳에 나타나 세상에 나래를 털고 앉았다가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져간다.

가 눈보라 헤치며 날아온 그 비밀을 나는 알 수가 없다. 허나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는 건 네가 지금 나뭇가지에 잠시 앉아 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너란 존재자가 언젠가는 아득한 눈 속으로사라져 가도 너의 존재는 깃털처럼 남는다는 것을. 이것이 우리 모두의 삶의 모습이자 존재다.

본래적 존재-본래적 삶으로

음악과 시, 예술의 진리인 존재를 포착하기 위해 그러하듯 우리 삶의 존재, 주민과 자치의 존재를 포착하기 위해서는 현상학적 시선, 혹은 현상학적 환원을 해야 한다. 환원이란 우리 경험의 어떤 측면들을 우리의 고려로부터 제거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의 삶, 일상생활에 관한 자연적 태도가 옳고 그른지를 일단 괄호 안에 넣어 유보하고 그 주장의 근거를 좀 더 캐어보는 것이다.

판단정지를 하고 난 다음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오로지 나의 구체적인 경험뿐이다. 경험은 당연히 나의 의식과 그 대상과의 관계를 가리키는 것이다. 피천득 시인의 시 가 바로 나의 존재이자 실존적 삶의 모습이란 사실을 정면으로 직시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의 질문이 따르게 된다.

하이데거는 인간다운 삶, 행복한 삶이 되기 위해서는 본래적 존재, 본래적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 해 동안의 삶이 그랬듯이 우리는 먹고 사는 일 혹은 생존과 소유에만 시선을 두는 삶을 살기 십상이다. 하이데거는 이런 삶을 비본래적 삶, 비본래적 존재라고 말한다.

당연히 눈물겹도록 소중한 일상이며 삶의 태도일 수 있다. 하지만 생존과 소유에만 시선이 머무는 삶은 얄팍하고 산만하다. 자신과 타인, 삶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고 얕은 호기심만으로 자극적인 것들만 추구하며 마음에 없는 잡담으로 시간을 때운다. 당연히 그러한 삶은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나 지루함으로 가득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더 높은 삶의 가치를 발견하고 창조하는 본래적 존재가 될 수 없으며 본래적인 삶을 살 수가 없게 된다.

인간의 존재론적 근거인 시간성을 생각해 보면 이런 비본래적 삶은 일순간에 재가 된다. 만약 한 달 뒤에 죽는다고 생각해 보자. 단지 생존과 소유만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삶을 계속할 수 있을까. 아마도 매순간을 다시 못 올 소중한 시간으로 끌어안고 혼신을 다해 인간답게 살려고 하지 않을까. 12월을 다시 마주하면서 일상적인 자연적 태도를 벗어나 현상학적 시선으로 보는 12월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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