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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중반 퇴계의 예안 온계동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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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중반 퇴계의 예안 온계동계
  • 박경하 한국주민자치학회 부설 향약연구원장(중앙대학교 역사학과 명예교수)
  • 승인 2023.01.27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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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하 교수의 향약이야기

조선시대 향촌사회의 자치규약’. ‘향약의 사전적 의미이다. 여기에 바로 이어지는 것은 덕업상권’‘과실상규’‘예속상교’‘환난상휼등 학창시절 역사시간에 달달 외웠던 향약의 4대 강목이다. 다분히 정형화되고 박제화 된 향약에 대한 인식을 바꿔준 것이 바로 조선시대 기층민들의 상부상조 자치조직 촌계이다. 오늘날 주민자치의 한 원형과 단초를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이에 조선시대 향약 연구 전문가로 사단법인 한국자치학회 부설 향약연구원장인 박경하 교수의 향약이야기를 연재한다. 전통시대 향약·촌계를 재조명함으로써 오늘날 주민자치에 주는 의미와 시사점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편집자주]

 

퇴계 이황의 <예안향립약조>는 일찍부터 조선적 향약의 시초로 <퇴계향약> 또는 <예안향약>으로 불리어졌다. <예안향립약조>는 퇴계가 그의 향리인 예안에 퇴거하여 1556(명종 11)에 작성하였지만 그것은 일찍부터 이에 관심을 가졌던 이현보(李賢輔)의 교시와 그의 일문의 적극적인 협조, 그리고 일향 사족의 공론에 의해 작성되고 있었다. 즉 퇴계가 <향립약조서(鄕立約條序)>에서 밝힌 바와 같이 향립약조는 농암 이현보 이래 예안 재지사족의 절실한 필요에서 공론으로 작성되었던 것이다.

선생(이현보)이 일찍이 약조를 세워 풍속을 정중히 하고자 했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지금 선생의 여러 아들이 거상(居喪)으로 경내에 있고, () 또한 병으로 전간(田間)에 있으니 모든 향장로가 우리 몇몇 사람에게 농암 선생의 뜻을 이를 책임을 지우니이에 서로 상의해서 그 대강을 세우고 다시 향인에게 두루 보여 가부를 살핀 연 후에 정하였다."

향립약조는 극벌 7개조, 중벌 16개조, 하벌 5개조 등 총 28개조의 벌조와 향리 등에 대한 규제가 부서되어 있다. 향립약조의 내용은 주자증손여씨향약의 4강목 중에서 과실상규만을 제정해 놓은 것이다. 그리고 이 과실상규도 상하인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주로 상인 즉 사족에게만 적용되는 상인약조(上人約條)였다.

그러나 이러한 퇴계의 <향립약조>는 일부 사족의 반발 등으로 향론이 일치하지 못하여 시행되지 못하였다. 퇴계의 <향립약조>가 비록 시행되지는 못하였지만 향약의 한 전범(典範)으로서 이후 영남지방의 향약 시행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즉 이후 영남지방에서 실시되던 대부분의 향약은 그 근거를 퇴계의 향약에서 찾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퇴계의 향약, 영남지방 향약의 근거

이후 퇴계는 4년인 1560년 기존의 족계를 발전시켜 온계동계(溫溪洞契)를 작성하였다. 동계 또는 동약은 사족의 거주촌락 단위에서의 규약이었다. 16세기 이래 재지사족은 향촌사회에서 개인적인 차원이나 족적(族的)인 차원, 또는 나아가 사족집단적인 차원에서 각종 규약을 마련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규약은 기본적으로는 사족 상호간의 상부상조를 통한 그들의 결속력과 공동체적 유대를 공고히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재지사족은 이를 바탕으로 일향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에 결국 족계·동약(동계) 등은 향촌지배를 목적으로 한 규약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때 족계는 재지사족의 성장과정에서 혹은 그 결과로서 등장하고 있었다. 예컨대 퇴계가문이 재지사족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온계동계>를 마련하고 있었던 것이나 토착사족이 아니었던 김일손(金馹孫) 가문이 짧은 기간에 청도의 대표적 사족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의 조부 김극일(金克一)이 결성한 목족계(睦族契)가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였던 사실이 이를 반영한다. 처음 동족간의 화목과 상부상조를 위해 구성된 족계는 차츰 일동(一洞)의 구성원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동계(동약)로 발전되어 간 것으로 보인다.

 

동족간 화목상부상조 위한 족계에서 마을 구성원 전체 대상의 동계로 발전

이러한 전형적인 예를 <온계동계>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1548(명종 3) 경부터 실시되었던 <온계동계>는 진성이씨 가문을 중심으로 내외의 친척을 포함하여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조직된 족계였다. 그 후 1554년에는 퇴계에 의해 <온계동중친계입의서(溫溪洞中親契立議序)>와 길흉사의 부조내용 및 강신에 관한 조목이 만들어져서 동족간의 상호결속을 도모하고 있었다. <온계동계>에서의 길흉사 부조내용은 다음과 같다.

 

길사: 백미 5, 닭이나 꿩 중 1마리 수합흥사: 쌀이나 콩 각 5, 상지(常紙) 1권 수합, 각출 장정 22일 부역, 돗자리 3, 고색 40, 개초 20 파씩 수합

 

즉 부조의 내용은 상구(喪具)와 곡물 그리고 노동력의 제공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상부상조는 사족 상호간의 상부상조였는데 사족은 이러한 상부상조를 통해 그들의 결속을 더욱 강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1560(명종15)에 제정된 <동령(洞令)>에서는 그 제정 이유를 가문노비의 무통난치(無統難治)’하는 현상을 통제하기 위해서임을 밝히고 있다. 아래에서 동 규약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본 주인이나 타 주인에게 무례불손한자 태 50

.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자 태 50

. 형제간에 싸우는 자 태 503대를 가함.

. 간음자와 도적자 태 상동

. 서로 싸워 상해를 입히는 자 태 502대를 가함

. 친척간에 화목하지 않는 자와 이웃간에 불화하는 자. 태 상동

. 남의 묘산에 불을 지르는 자, 밭을 일구는 자 태 상동

. 원래 거주자를 유인하는 자. 태 상동

. 남의 논을 빼앗아 농사 짓는 자, 남의 벼를 몰래 뻬어가는 자. 태 상동

. 남의 묘산을 벌목하는 자, 뿌리업는 사람과 가가이 하는 자 태 50에 가 한 대

. 무리지어 음주하여 행패를 부리는 자, 川防천방에 벌목하는자, 상류이 모래에 밭을 일구는 자. 50

. 소난 말을 방목하는 자 태 30

 

위 규정은 이제 단순한 친목과 길흉상조 하는 것보다 상하간의 엄격한 신분적 지배와 하층민의 통제가 필요하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제 본래 족계의 형태에서 출발한 <온계동계><동령>의 제정에 이르러 동계의 성격을 보다 분명하게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온계동계>는 이후 영남지방에 실시된 족계 동계의 전형으로서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사진=박경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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