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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묘년, 새해 해맞이는 정동진 아닌 눈빛 속 대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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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묘년, 새해 해맞이는 정동진 아닌 눈빛 속 대화에서
  • 이관춘 연세대학교 객원교수
  • 승인 2023.02.02 09: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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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춘의 마을·자치·교육

새해가 밝았다. 한 해를 시작하는 첫 날 아침에 뜨는 해가 새해라면, 그 새해로 시작되는 한 해를 또한 새해(New Year)라 부른다. 365일 뜨는 해(태양)의 입장에서 보면 좀 어리둥절할 수도 있는 이 명칭을 사람들은 너무도 당연하게, 그리고 엄숙할 정도로 진지하게 사용한다.

사람들의 마음속 새해는 지구가 23시간 56분을 주기로 자전하는 현상이 아니다. 지구가 태양으로부터 평균 15천만km 떨어져서 1년을 주기로 공전하는 과학적이며 천체물리학적 현상도 아니다. 그저 사람들에게 새해는 어제와 같은 해가 아니라 뭔가 특별하다고 느껴지는 새롭게 주어진 시간이다.

그래서인지 새해를 맞이할 때마다 사람들의 마음은 흔들리고 왠지 모를 새로운 기대와 희망을 품게 된다. 지난해를 되짚어보고 반성을 하면서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다짐한다. 이마저도 성에 차지 않는 사람들은 새해 기운을 받아보자며 해돋이를 보려 정동진으로, 낙산사로 향한다. 해돋이를 보며 오로지 자신과 가족의 부와 건강을 기원하기도 한다.

 

새해는 정동진에서 오지 않는다

새해를 맞이하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소박한 의식은 현상학에서 규정하는 자연적 태도(natural attitude)’를 떠올리게 한다. 자연적 태도란 우리의 일상에서 별다른 비판의식 없이 당연하게 습관적으로 취하는 태도를 말한다.

그렇다고 새해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거나 해돋이를 보며 기복의 염원을 갖고 덕담을 나누는 것을 문제 삼자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해맞이 의식이 일제의 잔재라고 트집 잡을 일도 아니다.

생각해 보자는 것은, 새해의 의미가 그게 다는 아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현상학에서는 자연적 태도의 가장 큰 문제가 기본적으로 눈앞의 실용적인 관심에 의해 지배되기 때문에 전체로서의 세계를 보지 못하는데 있음을 지적한다.

마찬가지로 새해의 의미를 단순히 자신의 실용적 목적과 물질적 욕구에만 제한적으로 부여할 경우, 우리는 새해가 주는 보다 깊은 의미’, 정작 새해에 기원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놓치게 된다. 니체의 말대로 그림을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캔버스와 물감에만 온통 정신이 팔려 전체로서의 삶의 그림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의 시인, 신동엽은 새해에 진심으로 기원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슴에 새겨질 시어로 우리에게 전해준다. 그의 시, <새해 새 아침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새 해 새 아침은

신동엽(1930-1969)

 

새해

새 아침은

산 너머에서도

달력에서도 오지 않았다

금가루 흩뿌리는

새 아침은

우리들의 대화

우리의 눈빛 속에서

열렸다

. . . . .

 

시인은 새해가 정동진이나 낙산사에서 오지 않는다고 말한다. 희망찬 새해 아침은 산꼭대기나 바닷가에서 해맞이 한다고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 장 남은 달력을 떼어 낸다고 오는 것도 아니다. 의례적으로 건네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나 건강하세요’ ‘돈 많이 버세요’ ‘사업 번창하세요같은 가벼운 덕담에서 오는 것도 아니다.

물론 그런 습관적인 새해 인사와 덕담은 삶의 윤활유와 같이 필요한 의식일 수 있다. 하지만 의례적이며 습관적인 말들은 돌아서는 즉시 잊혀 진다. 심지어는 상대방의 눈을 보지도 않으며 누구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한다.

시인의 말은, 해마다 반복되는 습관적인 새해의 기원이나 인사, 덕담을 통해 우리는 과연 얼마나 진정으로 행복해 졌는가를 돌아보게 한다. 물질적인 부의 증가나 사회적 지위나 권력의 상승과는 별도로, 과연 우리는 내적으로 만족하고 충만한 삶을 살게 되었는지를 성찰하게 한다.

시인은 진정으로 행복한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생각을 바꿀 것을 제안한다. 그것은 바로, 지난 한해 먹고 사는 일에만 급급해 놓쳤던 정작 중요한 것,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나의 마음속에 엄연히 자리 잡고 삶의 의미와 행복을 좌우하고 있는 것을 들여다보라는 것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지만,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은 하나의 예를 들어 설명한다.

 

의학, 법률, 금융 등은 모두 삶을 영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 사랑, 낭만, 아름다움은 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일까? 그 건 바로 인

간이 살아가는 목적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목적이란 곧 인간의 존재의 의미라는 말일테다. 하지만 지난 한해 그 목적을 잊고 살며, 오로지 나라는 존재자의 생존과 소유에만 매몰되지 않았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새해 아침은 눈빛 속 대화에서

신동엽 시인이 강조하는 새해의 의미도 다르지 않다. 시인은 새해란 시간의 엄중함과 소중함을 금가루 흩뿌리는 새 아침으로 표현한다. “금가루같이 소중한 새해가 모두에게 진정으로 해피 뉴 이어(Happy New Year)’가 되기 위해 시인이 강조하는 것은 의외로 단순해 보이는, 그러나 결코 단순하지 않은 일, ‘대화.

새해에는 그저 의례적인 인사나 덕담이 아니라 우리의 눈빛 속에서오고가는 영혼이 깃든 대화를 나누자는 것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얼마나 많은 공허한 말들의 성찬 속에서 마음에 없는 대화를 하고 사는지를 돌아보자는 것이다.

대화는 말하고 듣는 것이다. 하지만 사이먼 앤 가펑클의 노래 <침묵의 소리> 가사처럼 사람들은 자신의 진솔한 마음을 담아 말하지(speaking) 않으며, 상대방의 말을 귀 기울여 듣지(listening)도 않는다. 시인은 시의 5연에서 다음과 같은 철학적 시어(詩語)를 통해 영혼이 깃든 대화의 모습을 수도자의 눈빛 속에서 발견한다.

 

금가루 흩뿌리는/ 새 아침은 우리들의 안창(眼窓)/ 영원으로 가는 수도자의/

눈빛 속에서 구슬 짓는다.”

 

새해는 영원으로 가는 수도자의 눈빛 속에서열린다는 시인의 마지막 시구(詩句)가 깊은 여운을 남긴다. “영원으로 가는 수도자의 눈빛과 빈말, 공허한 대화는 극명하게 대비된다. 수도자의 눈빛은 공허한 말들의 성찬 속에서 우리가 잊고 있는 참된 대화의 의미를 돌아보게 한다.

공허한 말들이란 마틴 부버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규정한 위장된 독백(disguised monologue)’이다(필자의 글, <주민자치> 20229월호 참조). 대화로 위장된 독백은 서로 말을 하고는 있지만 상대방을 결코 하나의 현전하고 있는 인격체로서 보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런 말은 상대방과 진정한 관계를 맺으려고 하지 않는다. 단지 상대가 가져주기를 원하는 인상을 만들어내기 위해 자신의 모습과 말씨를 만드는데 만 애쓴다. 그러니 독백은 겉치레와 위선일 수밖에 없다.

부버는 위장된 독백을 벗어 던지고 순수한 대화로 돌아갈 것을 촉구한다. 순수한 대화란 말로 하든지 침묵으로 하든지 대화의 참여자가 상대방을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인간 그 자체, 즉 현존재(Dasein)로서 수용하면서 상대에게 귀를 기울이는 대화를 말한다. 따라서 순수한 대화는 말로써도 이루어질 수 있지만 특히 무언의 대화인 침묵으로써도 가능하다. 침묵으로 상대방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보려고 한다. 독백을 하는 인간들은 서로 지나쳐 간다. 서로의 관계에 관심이 아니라 자신에게만 관심을 집중시킨다.

반면 순수한 대화는 서로의 존재를 열어 보이기에 인간과 인간과의 참된 만남을 이루게 된다. 순수한 대화란, 어쩌면 지나치게 이상적이며 삶의 현장과는 거리가 먼 얘기라고 치부될지도 모른다.

크고 작은 나라 일에 대한 국정 책임자와 시민들 간의 대화를 비롯해 특정한 사안에 대한 정치인들의 대화 아닌 위장된 독백, 기업경영자와 근로자들 간의 이기적인 대화에서부터 가족이나 연인들 간의 영혼 없는 대화 등에 이르기까지, 일상에서의 대화는 순수한 대화와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현실이다. 실질적 주민자치가 필요하다고 목소리만 높이는 정치인, 행정당국자, 지자체 장과의 대화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영원으로 가는 수도자의 눈빛속의 대화라는 말은 아름답고 순수한 시어일 뿐 한낱 비현실적인 이상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본다면, 주민자치교육을 포함한 모든 교육의 출발은 위장된 독백을 대화로 당연시하는 학습된 무기력의 퇴치에서 시작해야 할지 모른다. 인간 실존의 바탕이 운명적 관계성에 있으며, 그 관계성은 순수한 대화에서 꽃을 피우기 때문이다. 아무리 상황과 현실을 들어 합리화시킨다 해도 위장된 독백 같은 대화는 결코 내적인 충만감과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함을 우리의 경험은 말해주고 있다.

금가루 흩뿌리는 새해는”, 다시 돌아오지 않기에 더욱 더 금가루처럼 소중한 올 새해는, 서로의 눈빛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순수하고 당당한 대화가 넘치는 시간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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